물빛 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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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참가작

영온
그림/삽화
영온
작품등록일 :
2024.05.10 12:07
최근연재일 :
2024.09.17 21:30
연재수 :
5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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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
102
글자수 :
329,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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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4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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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51화 - 진실

DUMMY

온종일 그 어떠한 것에도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어제에 이어 오늘까지, 사랑하는 이가 온 몸으로 죽고 싶다 몸부림을 치는 걸 바라만 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이 현실보다 아픈 것은 없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출근한 직후부터 제 앞으로 닥친 일이 많아 눈코 뜰 새도 없었으나, 그러한 것들은 새 발의 피에 불과하였다.

마음이 무겁기 그지없었다. 그간 저 일들을 홀로 모두 떠안고 어찌 살았을지, 실로 버텨 주었음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어떻게든 돕고 싶었다. 조선인 농부가 생계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게 직접 말한 적은 없지만 정화가 지금껏 번 돈을 전부 영흥으로 부친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 형편에 장사를 제대로 치뤘을 리 만무하니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제대로 보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허나 그럴 수 없었다. 정화가 제 도움을 받을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원망할 수 없었다. 정화가 저를 미워하는 것은 지극히도 당연했다. 지금 이러한 상황에서는 어떠한 말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네 오라버니는 내 손으로 죽인 것이 아니라 말하여도, 아니 그보다 더욱 자명한 사실을 말한다 한들 그것조차 얼토당토않은 핑계로 들리리라. 그러한 상황이라면, 그저 자신이 악인이 되는 편이 나았다. 마음껏 증오할 누군가가 생긴다는 것만으로도 살아갈 연유는 충분하니.

머리가 복잡한 것은 비단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당장 제 눈 앞에 닥친 일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으며, 그것들을 전부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에 눈 앞이 아득해졌다. 바쁜 일에 파묻혀 마음이 복잡한 것은 애써 외면하였으나, 머리가 복잡하다 하여 쾌락을 주는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제 머리가 복잡하고 마음까지 복잡하다 한들 그것은 정화의 고통에 감히 비할 바가 아니었으며, 고통을 덜어줄 수조차 없었다. 그만큼 그에게는 정화의 안전 또한 중한 일이었다.

문득, 불안감이 엄습했다. 행여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정화가 무서운 선택을 하지는 않으려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가는 순간부터 도무지 어두운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총독부 관저로 돌아오는 내내, 그의 낯빛은 차갑게 식어만 갔다.

덜컥, 차 문을 열고 내리는 순간 뒤에서 비슷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 관저에서 다른 이가 운전하는 차를 당당히 타고 내리는 이는 자신을 제하고는 단 한 명 뿐이었다. 잠시 번뜩이는 눈을 잠재운 히로유키가 오사무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귀택하셨습,”


“내일 오전에 회의를 소집할 예정이니, 6점까지 출근해라.”


얼굴조차 마주 보지 않은 채, 오사무가 그에게 던지듯 통보하였다. 비단 키높이가 맞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언제나처럼 그의 얼굴에 담겨 있는 것은 경멸이요, 자식에게 아비가 지을 수 있는 표정이라 볼 수 없었다.


“어떠한 연유 때문입니까?”


“어젯밤에 있었던 일 말이다.”


답지 않게 유독 바쁘던 오늘 낮, 스쳐지나가듯 들었던 말 하나가 떠올랐다. 총독부에서 일명 ‘조선인 폭도’ 라 일컬어지는 이들 사이에 심어두었던 밀정 둘과 일경 하나가 암살 당하였다는 것. 그 이야기를 듣는 히로유키의 미간이 사이를 좁혔다.


“이미 총독부에 소문이 파다하다. 헌데 명색이 군인이라는 놈이, 설마 모르고 있었던 게냐?”


“······ 송구합니다.”


“멍청한 놈.”


목례를 하며 떨구는 머리에 무언가가 강하게 내리쳤다. 부러 그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리 낯설지만은 않은 광경인데다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아픔조차 느끼지 못하였으나, 오늘 같은 날은 정말 도무지 제 노기를 주체할 수 없을 성 싶었기 때문이리라. 소매 깃이 찢어져라 옷을 쥐자 투두둑, 하고 천이 손톱 밑을 파고드는 소리가 작게 울려퍼졌다. 지나가는 여급들의 다급한 발소리는 물론 부러 숨을 낮추는 숨소리까지, 듣고 싶지 않은 모든 것들이 귓속으로 지독하게도 파고들었다.


“요즘 들어 더욱 아둔해졌구나. 어찌, 네놈이랑 같은 핏줄들이 살겠다 발버둥 치는 꼴이 내심 마음 쓰이기라도 하더냐?”


“그런 뜻이 아닙,”


“밀정 둘에 경찰이 암살될 때까지 네놈은 대체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단 말이냐? 하등 쓸모없는 놈 같으니라고.”


오사무가 가소롭기 그지없다는 얼굴을 하고서는 몸을 돌려 관저 안으로 걸음하였다. 잠시 망설이던 히로유키였으나, 별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서는 그와 같은 방향으로 걷기 시작하였다.


“다음 달 약혼식이나 준비하거라. 아라사 파견 건은 쿠사카베 중령에게 언질해 두었으니 헛소리 하면 그땐 내가 네놈을 쏘아버릴 것이다.”


“아버님!”


“왜, 목숨이 아깝지 않으냐?”


차갑게 반짝이는 그 눈은, 결코 예순에 가까운 노인의 것이 아니었다. 뱀처럼 교활하고, 늑대처럼 사나웠다. 한 눈에도 알 수 있었다. 쏘아버리겠다는 그 말은, 단순히 겁을 주고자 홧김에 내뱉은 말이 아니라는 것을.


“네놈이 이리 무능하게 굴고 내 계획마저 방해한다면 너를 더 곁에 둘 연유가 없다. 그냥 조용히 죽여버리는 편이 더 낫겠지, 아마. 선친의 유언은 진즉 지켰고, 네가 아니더라도 대를 이을 이는 널리고 널렸다. 진정으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거늘, 내 네놈에게 미련이라도 둘 성 싶으냐?”


이 세상 모든 것을 제 손익으로만 판단하는 이라면 정말로 그리할 공산이 컸다. 다른 이도 아닌 후지와라 오사무라면 더더욱. 처음으로, 히로유키가 말을 잃은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부러 말을 아끼는 것이 아닌, 정말로 할 말을 잃어버린 것은 그의 양자로 입적된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허니 네가 살아남을 방법을 잘 모색하거라. 네놈이 내쳐지는 것은 한순간이요, 목숨이 끊어지는 것은 더더욱 그렇다.”


더 꼴도 보기 싫다는 투로, 오사무가 자리를 떴다. 잠시 그 자리에 서 있던 히로유키도 2층으로 걸음하였다. 어찌 된 일인지 그의 표정은 다소 다급해 보였으며, 평소보다 걸음도 빨랐다. 저녁을 가지고 올 정화의 인기척은커녕 2층에는 그 누구도 보이지 않았으나, 그러한 것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바스락, 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가 품에서 꺼낸 것은 손바닥 만 한 종이 한 장이었다. 옅은 미색의 종이는 약간 바래었고, 꼬깃꼬깃 접혀 있었다. 접혀 있어 다소 희미하게 비춰질 뿐이었으나, 분명 무언가가 적혀 있었다. 한없이도 조심스러우면서도 더없이 익숙한 손짓으로, 그가 서신을 펼쳤다.


148,738,2110,5104,938,374,8104,148,14121,815,714.

8104,242,147,1058,351,815,714,14101.

41,7710,82,211067,1452,412,7105,111.

91,195,810,61101,8732,810,718,910,8732,86,518.


도무지 알아볼 수 없는 말들이었다. 문자는 존재하지 않았고, 깨알같은 숫자만 빼곡하였다. 그저 숫자로만 가득한 작은 종이 한 장을 그는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알아볼 수 있는 규칙도 아니었다. 허나 그의 얼굴에서는 일말의 당황함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한없이 짙어진 눈동자 위로 덮이는 속눈썹이 고혹적이었고, 짙고도 맑은 눈동자에 여전히 정체를 알 수 없는 숫자들이 투명하게 비춰졌다. 이마를 간지럽히던 머리칼을 한 쪽 손으로 쓸어넘기던 그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만년필을 집어들었다. 알 수 없는 서신을 번갈아 보며, 그가 빈 종이 위에 무언가를 거침없이 적어 내려갔다.


경성내밀정둘일경하나암살.

일년후총독암살계획.

라씨야내부혼란심각.

독립자금이백원이상지원요망.


조선어였다. 또한 내용으로 짐작하건대 필경, 어젯밤 밀정 둘과 일경 한 명을 암살한 자가 작성한 것이었다. 말없이 글을 읽는 그의 표정과 눈빛, 옅은 숨소리마저 평소와 전부 달랐다. 짙어진 낯빛으로 해석을 마친 그가 잠시 눈을 감았고 깊은 고민에 잠겼다. 그러기를 1각, 이윽고 그는 서랍에서 편지지를 꺼내어 무언가를 적어내렸다.


아버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近者 (근자)에 여우 사냥을 하느라 바쁘시다 들었습니다. 저도 倦怠 (권태)로운 몸을 풀러 사냥을 나가보고자 하니, 京城 (경성) 내 여우가 자주 나오는 山을 알려주세요. 제가 직접 사냥하고 아버님께 가죽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이 季節 (계절)에는 어슬렁거리는 멧돼지가 많으니 늘상 操心 (조심)하시기를 바랍니다.

故鄕 (고향)은 어떻습니까? 여전히 닭은 알을 잘 낳습니까? 멀리 떨어져 있으니 모든 것이 궁금할 따름입니다. 小小한 것이라도 좋으니 자주 書信 (서신)을 보내주세요. 이 다음에 뵐 때는 아버님께서 좋아하시는 닭다리를 대접하겠습니다. 몸이 멀어져 서글픈 마음을 담아 書信을 짧게나마 보내노니, 부디 다음 사냥에는 함께 할 수 있기를 빕니다.

부디 먼 곳에서도 平安 (평안)하시기를 기원하겠습니다.


받는 이도, 보내는 이도 적혀져 있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서신에는 드문 드문 한자가 포함되어 있었으나, 분명 조선어로 쓰여 있었다. 거침없이 써 내려간 서신을 찬찬히 훑으며 그가 안경을 고쳐 썼다. 그리고 서신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들릴 듯 말 듯 한 작고 낮은 목소리로 내용을 다시금 읊었다.


“동지들, 그간 잘 지내고 계십니까? 근자에 밀정을 제거하느라 내부 혼란이 심했다 들었습니다. 저도 본격적으로 작전을 시작하고자 하니, 경성 내 밀정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세요. 제가 직접 제거하고 동지들께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최근 경계를 서는 왜군의 수가 많아졌으니 각별히 주의하세요. 신한촌은 어떻습니까? 총알이 떨어지지는 않았습니까? 멀리 떨어져 있으니 모든 것에 능통하지는 못합니다. 필요한 게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다음 만남에는 권총을 더 보내드리겠습니다. 멀리 있어서 함께 작전을 수행할 수는 없지만 필요한 자금을 적게나마 부치니, 부디 다음 작전 때는 함께 할 수 있기를 빕니다. 대한 독립 만세.”


앞선 서신과 전혀 일치하는 바가 없었으나, 그의 눈빛은 전에 없이 결연하였다. 비장하게 굳은 얼굴로, 그는 그것을 접어 서신과 함께 품 속 깊이 집어넣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창문을 열자 서늘한 바람이 얼굴을 한가득 감쌌다. 이미 거센 바람에 익숙해진 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저 검은 하늘을, 그 곳에 오도카니 떠 있는 샛노란 달을 바라보고 선 채로 그가 조용히 읊조렸다.


“대한 독립 만세.”


후지와라 히로유키, 조선인이길 저버리고 일본인이 되기를 택한 변절자의 속에 숨겨둔 그의 참된 이름은 신한촌민회의 일원이자 권업회의 밀정, ‘백운’이었다.




신한촌민회: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 마을인 신한촌의 자치기구.

권업회: 1911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 단체.


작가의말

드디어......! 너무도 보여드리고 싶었던 파트에 다다랐습니다.

여기까지 따라와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사실 친일 작가로 오해받을까 내심 걱정 많이 했어요...ㅠㅠ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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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56화 - 과거 (5) : 또 다른 밀정 24.09.10 5 0 12쪽
56 55화 - 과거 (4) : 고진감래 24.09.07 6 0 15쪽
55 54화 - 과거 (3) : 밀정 24.09.03 8 0 13쪽
54 53화 - 과거 (2) : 물빛 안개 24.08.31 6 0 11쪽
53 52화 - 과거 (1) : 스친 인연 24.08.27 7 0 14쪽
» 51화 - 진실 24.08.24 11 0 11쪽
51 50화 - 칼 24.08.20 9 1 12쪽
50 49화 - 상처 24.08.17 9 1 11쪽
49 48화 - 무너진 탑 24.08.13 10 1 12쪽
48 47화 - 눈물 24.08.10 16 1 13쪽
47 46화 - 일수차천 24.08.06 11 1 15쪽
46 45화 - 도시락 24.08.03 12 1 13쪽
45 44화 - 연민, 그리고 웃음 24.07.30 12 1 12쪽
44 43화 - 밤은 길고 24.07.27 13 1 13쪽
43 42화 - 약혼 24.07.23 11 1 14쪽
42 41화 - 양과자 24.07.20 13 1 12쪽
41 40화 - 백야 24.07.16 13 1 11쪽
40 39화 - 창살 없는 감옥 24.07.13 16 1 11쪽
39 38화 - 자처 24.07.09 17 2 14쪽
38 37화 - 가책 24.07.06 11 1 12쪽
37 36화 - 야 류블류 찌뱌 +1 24.07.02 17 2 12쪽
36 35화 - 진퇴양난 24.06.29 16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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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33화 - 두려워하는 것 24.06.22 18 1 12쪽
33 32화 - 속내 24.06.18 17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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