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빛 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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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참가작

영온
그림/삽화
영온
작품등록일 :
2024.05.10 12:07
최근연재일 :
2024.09.17 21:30
연재수 :
5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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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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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글자수 :
329,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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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3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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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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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글자
12쪽

9화 - 제안

DUMMY

* “히로유키 도련님······!”


아무런 말도 이어지지 않았으나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여급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천황이 나타나기라도 한 듯한 움직임, 그것은 혼란 속에 불쑥 나타난 이가 이 집안에서는 천황이나 진배없다는 뜻이기도 하였다. 덩달아 함께 고개를 숙이느라 얼굴은 볼 수 없었으나, 한 눈에도 거대한 그림자가 제 편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 “웬 소란이냐고 물었다.”


히로유키가 여급들의 사이로 한 발짝 다가가며 낮고 공허한 목소리로 질문하였다. 눈빛은 목소리처럼 무미건조했으나 찰나마다 번뜩였다.


* “그, 그것이,”


* “한밤중에 소란을 일으켜서 송구합니다, 도련님.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하나같이 말하기를 꺼려하며 떨기만 하던 여급들 사이에서 귓가를 사로잡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집안 여급들은 전부 조선인이었고 국어를 제법 잘 하는 편이었으나, 조선인인 티를 숨길 수는 없었다. 국어를 제아무리 빨리 배웠기로서니, 그 세월이 4년여밖에 되지 않았을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헌데 비록 몇 마디에 불과하였으나, 그 어떤 이가 듣더라도 일본인이 아니라 생각할 수 없는 억양이 히로유키의 이목을 잡아끌었다. 잠시 동안 일본인 여급이 있었나 고민하였으나,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한 그의 몸이 목소리를 향해 방향을 틀었다. 신이함에서 비롯된 호기심이었을까, 호기심에서 비롯된 신이함이었을까.


* “무슨 일인지 낱낱이 고하라.”


* “저 자가 제 봉급을 훔쳐갔습니다. 본가에 보내야 하는 소중한 돈인데, 금일 아침에 돈을 받고 일을 마치고 오자 이미 사라졌습니다. 그러던 중 저 자가 범인이라는 물증이 생겼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 제가 돈을 더 받았다고 속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자가 제 장롱을 뒤지던 모습을 온 여급들이 보았습니다. 제발 사정을 살피시어 사태를 바로잡아주시기를 간청드립니다.”


히로유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정화가 제 사정을 토해내었다. 그저 지푸라기나 잡는 심정으로 제 눈앞에 있는 가장 높은 이에게 도움을 청하였을 뿐이나, 그 자가 조선인을 누구보다도 증오하고 그들이 저지른 죄는 부러 가중하여 벌한다는 사실을 떠올린 것은 너무 뒤늦은 때였다. 제 입으로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인지 깨달은 정화가 잠시 멍해져 있다가 이내 뻗은 손을 급히 내렸으나, 이미 히로유키의 발걸음은 단희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 “사실이냐?”


히로유키가 단희의 코 앞으로 다가가자, 단희가 전에 없이 바들바들 떨며 뒷걸음질을 쳤다.


* “그, 그것이······!”


* “대답하라. 사실이냐 물었다.”


* “아, 아아······.”


거침없이 다가오는 히로유키를 피하며 걷던 단희가 그만 발을 헛디뎌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제법 큰 소리에 여급들이 한 차례 낮은 비명을 내지르다, 허공을 한가득 메우는 한기에 다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 “사, 사실입니다, 잘못했습니다······!”


* “허면 어찌 그리했는지부터 설명하라.”


주변은 소란스러웠고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였으나, 들리지 않을 리 없었다. 행여 제대로 듣지 못했을지라도, 들은 척을 해야만 했다. 차마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면.


* “그게, 순간 욕심이 나서 그만······”


잔뜩 겁을 먹은 단희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국어인지, 조선어인지조차 분간되지 않았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리던 단희가 히로유키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머리를 땅에 박을 듯 깊이 숙였다.


* “도, 돈은 전부 다시 돌려주겠습니다, 허니 부디 용서해주세요······.”


공포에 잔뜩 질려 울음인지 애원인지도 모를, 아니 국어인지 조선어인지도 모를 만한 말로 단희가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그리도 높던 콧대조차 목숨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울음소리와 손바닥이 맞닿아 내는 소리만이 복도를 가득 채웠고, 공기는 한없이도 차갑게 변해갔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단희를 내려다보던 히로유키가 천천히 몸을 낮추었다.


* “겁도 없이 이 집에서 도둑질을 하다니, 설마 후지와라 가문의 자산도 도둑질할 참이냐? 그러기 위해 여기서 일을 하고자 한 게냐?”


*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결코 그런 뜻은,”


* “이미 거짓말까지 한 자의 말을 내 구태여 믿어야 하느냐?”


낮디 낮은 목소리는 얼음장보다 차가웠다. 코 앞까지 얼굴이 다가왔으나, 단희는 차마 고개를 들 생각조차 하지 못하였다.


* “감히 이 관저에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을 저질렀으니 마땅히 그 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 “아, 안 됩니다, 도련님, 도련님 잘못했습니다! 제발 살려주세요······!”


* “저 자를 내 방으로 끌고 가거라.”


히로유키의 말에 어느 틈엔가 나타난 정자가 여급들을 헤치고 단희의 팔을 우악스럽게 움켜쥐었다. 이 필사적인 몸부림이 아마 멀쩡히 움직이는 마지막 모습이리라. 그걸 모르는 여급이 있을 리 없었으나, 차마 동정의 눈길조차 내비칠 용기를 내지 못하였다.


* “살려주세요 도련님, 잘못했습니다! 제발 살려주세요!”


* “도련님!”


발버둥치며 저항하는 단희의 몸부림을 멈추고,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듯한 히로유키의 고개를 돌리게 만든 것은 비명에 가까운 정화의 외침이었다. 어찌 질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마치 누가 조종하기라도 한 듯, 몸이 그렇게 움직였다.


* “······ 무어냐?”


* “······ 지은 죄에 비해 벌이 너무도 가혹합니다. 청컨대 부디 그러지 마십시오······.”


죽일만큼 증오하던 이를 왜 제 입으로 옹호하고 있느냐 묻는다면 그 연유는 아마 하나뿐일 것이다. 당장 죽일 듯이 미웠던 이 이를 제 눈 앞에 있는 이의 손에 죽게 만드는 것은 사람 된 도리로서 할 짓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 연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이곳에 홀로 다르게 서 있는 한 사람 뿐이리라. 생각을 빗나가는 정화의 반응이 재미있는 것인지, 아니면 이런 걸 원하기라도 했던 건지, 히로유키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흐릿하게 감돌았다.


* “지금 내게 명령하는 것이냐?”


* “결코 아닙니다. 다만 도련님께서 오늘 여기 있는 이들의 신임을 잃지 않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 “신임?”


히로유키가 서늘한 목소리로 말하며 정화에게로 다가섰다. 목덜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끼면서 정화가 고개를 한 켠으로 돌렸다.


* “도둑질을 한 자에게 벌을 주는 것도 신임을 잃을 만한 일이더냐? 이 집에서 신임을 잃을 것은 남의 돈에 손을 댄 이 자 뿐이다. 앞으로 무엇을 더 훔칠지 장담할 수 없거늘, 내가 무슨 연유로 그저 두어야 하느냐?”


* “허나 이 자는 지금까지 일하면서 후지와라 가문의 그 어떤 물건에도 손대지 않았잖습니까. 이는 여기 있는 다른 이들도 전부 아는 사실입니다. 또한, 절대로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 이입니다. 허니 부디 너그럽게 용서해 주소서.”


덜덜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정화가 히로유키를 천천히 올려다보았다. 요동치는 두 눈동자 너머, 흐릿하게나마 어떠한 사내가 들어왔다. 말로만 듣던 그 독사 장교를 처음으로 보는 순간. 허나 두려움에 휩싸여 이내 시선을 피하였다. 간절하다 못해 절박한 말에 돌아온 것은 침묵이었다. 당장이라도 눈 앞에 있는 이를 꿰뚫어버릴 성 싶은 히로유키의 싸늘한 시선은 곧장 자신을 죽일 수도 있을 것처럼 보였고, 그는 정말 그리해도 무방할 만 한 사람이었다.


* “후환은 잘라버리는 것이 옳다. 그러니 반드시 징벌하는 것이 옳겠지.”


* “하오나······!”


* “즉시 관저에서 내보내거라. 다시 찾아와도 결코 들이지 말라.”


* “그리하겠습니다, 도련님.”


웅성대는 하녀들 사이로 단희가 정자에게 다시 손목을 잡힌 채 끌려나갔다. 억울한 건지, 두려운 건지 비명을 지르려 몸부림을 쳤으나, 정자의 반대쪽 손에 입이 틀어막혀 아무런 것도 하지 못하였다. 원수처럼 다투던 이조차 동정을 느낄 법한 상황이었고, 고개를 숙인 채로 눈물을 떨구는 이도, 차마 들을 수 없어 두 눈을 질끈 감은 이도 있었으나, 그 어떤 이도 단희가 사라지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몸을 틀거나 안타까운 기색을 내비쳤다가는 하나뿐인 제 혀마저 뽑혀 없어질테니.


* “그리고 너, 나를 따라오너라.”


* “예······?”


당황한 정화가 제대로 되물을 새도 없이 히로유키가 몸을 돌려 걸음하였다. 지금 들은 말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어서 잠시 동안 멍해있다 이내 다른 여급들에게 등을 떠밀려, 정화가 다급히 그의 발걸음을 밟으며 달려갔다. 머릿속이 아득했다. 아무런 생각조차 들지 않는 암흑 속에서 온 몸을 휘저었고, 눈 앞에 보이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었다. 이제 죽는 것일까? 그를 따라가기는 죽기보다 싫었으나 따라가지 않는다면 필경 죽을 것이다. 명을 따르지 않아 이 자리에서 죽거나, 아니면 스스로 따라가 죽거나. 그리 오래 살지도 않았거늘, 시집 한 번 못 가보고 이리 스러지는구나. 어떻게 죽게 될까? 목이 잘릴까, 아니면 그 자가 내게 총을 쏠까? 그도 아니라면 다른 이들이 그랬다는 것처럼 혀가 뽑혀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서서히 죽어 갈까?

허나 지금은 죽는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아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다만 발이 닫는 대로 정처없이 걸어가던 와중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 눈앞에는 태산처럼 크고 묵직한 사내가 서 있었을 뿐이었다. 그의 싸늘한 눈빛이 무미건조하게 자신을 훑자, 이 모든 상황이 온 몸으로 와닿았다.


* “도, 도련님······. 소란을 일으켜서 진심으로 송구합,”


* “그 자가 훔쳐간 돈은 사다코가 대신 받아 전해 줄 것이다.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달포 안에는 받을 것이니 너무 걱정 말거라.”


당장이라도 죽을 것을 각오하였으나, 돌아온 것은 전혀 다른 말이었다. 이 말만 하려고 부른 것은 아닐테지만, 바람에 나부끼듯 후들거리던 다리를 조금은 진정시킬 수 있었다.


* “감사합니다······.”


* “일본인이더냐?”


히로유키가 느닷없이 이해할 수 없는 질문을 던졌다. 당최 이런 것을 어찌 묻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여기 와서 국어를 잘 한다, 소리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지만 그래도 제게 일본인이냐 묻는 자는 없었다. 관저에서 조선인 여급만 뽑고 있는 것을 버젓이 알면서도 이런 걸 묻는 연유는 무엇일까?


* “아닙니다, 조선인입니다.”


* “부모 중 일본인이 있더냐?”


* “아닙니다······.”


연유를 알 수 없는 질문을 여러 번 던지던 히로유키가 오묘한 눈빛으로 정화를 훑어보았다.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또한 무엇이 궁금한 걸까? 입 안이 바짝 타들어가다 못해 금방이라도 혼절한 사람마냥 손발이 차게 식기 시작했다.


* “너 이름이 무어냐?”


* “구, 국어로는······”


* “아니, 국어 말고 조선어로 된 이름 말이다.”


* “아, ‘남정화’ 입니다. 국어로는 '미나미 시즈하나' 라고 합니다.”


조선어는 쓸 일이 없거늘, 어찌 제 이름을 물어보는지 그 영문을 도통 알 수 없어 자신이 질문을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조차 헷갈릴 지경이었다. 그저 이름 석 자에 불과한 짧은 것을 조선어로 말하는 것조차 불안하고 두려워 목덜미의 솜털이 진동하는 것마저 느껴졌다.


* “관저에 들어온지는 얼마나 되었느냐?”


* “이제 갓 달포를 넘겼습니다.”


* “그렇구나.”


나직한 목소리로 뇌까리며, 히로유키가 자신의 팔을 손가락으로 고요히 두드렸다. 타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식은땀이 한 방울씩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 “그렇다면 오늘부터 내 시중을 들어라. 거처는 2층에 따로 마련되어 있으니, 내 곁에서 내가 시키는 일만 하면 된다. 본디 사다코가 도맡아 하던 일을 홀로 하느니만큼 급여는 갑절로 줄 것이다. 어떠하냐?”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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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27화 - 죄와 벌 24.06.13 22 2 12쪽
27 26화 - 대화 24.06.13 22 2 11쪽
26 25화 - 겸상 24.06.11 22 2 14쪽
25 24화 - 반성 24.06.11 22 1 11쪽
24 23화 - 재회 +2 24.06.09 26 4 12쪽
23 22화 - 복수 24.06.09 24 2 15쪽
22 21화 - 안개가 걷히다 24.06.08 26 2 12쪽
21 20화 - 용기, 그리고 기회 +1 24.06.08 22 3 12쪽
20 19화 - 잔인한 운명 +1 24.06.06 21 2 12쪽
19 18화 - 진흙 속의 꽃 24.06.06 22 2 14쪽
18 17화 - 행복과 불행 24.06.04 24 2 12쪽
17 16화 - 악연, 헝클어진 실 24.06.02 25 2 11쪽
16 15화 - 편지 (1) 24.06.01 28 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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