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빛 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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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참가작

영온
그림/삽화
영온
작품등록일 :
2024.05.10 12:07
최근연재일 :
2024.09.17 21:30
연재수 :
5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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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5
추천수 :
102
글자수 :
329,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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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8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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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20화 - 용기, 그리고 기회

DUMMY

관영을 걱정하느라 정화는 이틀이 되도록 도통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눈을 감아도 꿈 속에서 관영이 튀어나왔고, 눈을 떠도 머릿속에는 관영 생각 뿐이었다. 헌병 경찰의 고문은 범부의 상상을 초월한다 하였다. 손톱을 뽑고 매를 치는 정도가 아니라, 그 독한 독립군들조차도 차라리 죽여달라 애원할 정도의 고통이라 하였다. 기세로는 어디에서도 질 관영이 아니었으나, 그 자 또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어릴 적부터 병체레 한 번 않던 자신과 달리 관영에게 그러한 고문을 자행하고 있는 자의 집에서, 그의 돈을 받으며 일하고 있는 자가 자신이었다. 어찌 감히 인간이라 칭할 수 있으랴. 살아있음이 이리도 부끄러울 수가 없었다. 대체 무슨 염치로 바깥 공기를 안온하게 느끼며 조금이라도 행복하고자 하였을까? 민족을 버리고 왜놈의 밑으로 기어들어간 비겁한 놈, 그런 놈의 밑에서 돈을 받고 일하는 주제에 감히 얼굴에 철판을 깔았구나.

저 방 너머에 있는 이가 진심으로 원망스러웠다. 언니의 뜻을 받들어, 당장이라도 죽이고 싶었다. 허나 관영과 제게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용기’이리라. 그 용기 하나가 없어서, 부모와도 같은 언니가 죽어가는 와중에도 이리 비굴하게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이틀만이었다. 대체 이 자의 앞에서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까. 실성한 듯 웃어댈까? 아니면 눈물부터 흘릴까?

허나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또 비굴하게 고개를 숙이겠지. 비겁한 년. 그리고 언제나처럼, 눈조차 마주치지 않도록 고개를 숙인 채 정화는 밥상을 들고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고개는 숙였으나, 인사는 고하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가장 극심한 반항이었다. 정작 히로유키는 그러한 정화에게 어떠한 신경도 쓰지 않았다. 괜히 홀로 불안감에 휩싸인 채, 그가 식사를 다 하기까지 곁에서 기다릴 뿐이었다.


“다쳤느냐?”


오늘따라 묘하게 더 느껴지는 시선을 피하며 밥상을 물리던 정화에게 질문을 한 것은 히로유키였다. 달포 만에 처음 들어보는 그의 물음은 다름 아닌 저를 향해 있었다. 놀랐으나, 이내 저 자가 어떤 자인지를 깨닫고 정화가 다시금 시선을 돌렸다.


“네······. 진즉 말씀드리지 못하여 죄송해요······.”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속마음과 판이하게 달랐다. 마음 속으로 백날 왜놈을 미워하면 무엇하랴, 정작 할 수 있는 것은 없거늘. 염치도 없지, 고작 제 목숨 따위가 두려워 이 짐승같은 놈에게 반항조차 하지 못했다. 도무지 사라지지 않는 관영에 대한 걱정과 히로유키에 대한 증오, 그리고 두려움이 한데 섞여 넘쳐 흘렀다.


“괜찮으냐?”


가배 (커피) 잔을 내려놓는 손이 바들바들 떨리는 것을 본 그가 정화를 향해 물었다. 흠칫 놀랐으나, 부러 티내지 않은 채 정화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네, 아무렇지도 않은걸요.”


“헌데 얼굴이 왜 그러느냐?”


“아, 아직 다 나은 건 아니라서······.”


정화가 황급히 얼굴을 매만지며 시선을 피하였다. 한 눈에 보아도 잔뜩 부은 얼굴을 히로유키가 무심한 듯, 그러나 관철하듯 깊게 꿰뚫어 보았다.


“······ 다 드셨으면 치우겠습니다.”


식탁 위를 치우는 정화의 손길이 바삐 움직였다. 탁자 위를 왔다갔다 하는 작은 손과 가는 손목도 불그스름했다. 이틀 전 함께 다친 상처이리라. 다행히 시큰거리지는 않았으나,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궁금해하는 시선이 느껴졌는지 쟁반을 들어올리기 전, 소맷자락을 잡아당겨 손목을 덮었다. 늘 책이나 서류만 보느라 제게는 관심도 없던 이가 어째서 자꾸 이 쪽에 시선을 두는지, 또 지난 1년간 너무도 당연하게 느껴지던 짧디 짧은 시간은 어찌 오늘따라 억겁의 세월마냥 느리게 흘러가는지 괜히 민망스러워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증오해야 마땅할 자 앞에 고개를 숙이며 두려워하고 있다니, 그 지옥같은 곳에서 버티고 있는 관영과 대비되는 제 꼴이 제법 우스웠다.


“밤마다 우는 소리가 네 것이냐.”


달그락, 하는 소리가 대답을 대신하였다. 작은 그릇에 남긴 사츠마아게 (생선살을 갈아서 잘게 썬 당근·우엉 등을 섞어 기름에 튀긴 일본 음식.) 가 바닥으로 떨어질 뻔 하였으나, 그 쪽으로 고개를 돌릴 생각조차 하지 못하였다. 이어, 연유를 알 수는 없지만 무릎이 그의 앞으로 몸을 꿇었다. 제법 큰 소리를 내며 무릎을 찧었으나, 아픈 줄도 몰랐다. 땅을 짚은 손가락이 바들바들 떨리더니만, 이내 젖어들었다.


“밤마다 우느냐 물었다.”


“······ 도련님의 방 근처에 거처를 둔 이는 저 뿐이니, 아마 맞을 겁니다······.”


맞으면 맞다, 아니면 아니다. 명확한 것이 아니면 좋아하지 않는 제 주인이 딱 싫어할 법한 답이었으나 알면서도 그리 말할 수밖에 없는 제 처지가 잔인할 정도로 야속했다. 나름의 몸부림일까. 머릿속에는 이제 죽는다는 생각 외에 어떤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다시는 도련님의 잠을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부디 살려주세요!”


“허면 어찌 우느냐?”


“그, 그건 정말 별 일이 아닙니다······.”


특유의 무심하지만 어떻게든 알아내야겠다는 표정은, 굳이 보아야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여전히 땅을 파고 들어갈 듯이 고개를 숙인 채로 겁에 질린 정화를 바라보고 있는 두 눈은 늘 그렇듯 알 수 없는 기운을 담고 있었다.


“······ 응어리가 있으면 풀어야 일을 잘 한다. 네가 일만 잘 하면 나는 다른 그 어떠한 것도 더 요구하지 않는다. 이미 보아 잘 알지 않느냐?”


어느새 달포하고도 보름 정도 전이 되어버린 그날, 고문 기구 하나 없이 숨통을 죄어오던 히로유키는, 의외로 자세 하나 고쳐잡지 않고 평상시의 나긋하고 건조한 어투로 질문을 건네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고개를 살짝 든 정화의 눈에는 섬섬옥수로 가배잔을 입으로 가져가는 그의 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저 자는 제게 꽤나 높은 믿음을 보여왔고, 일과 무관한 그 어떠한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아마 일을 잘 하기 위함이라면, 더한 것도 해 주겠지. 그러다 눈이 마주치기 직전, 정화가 다시 황급히 고개를 내렸다.


“안 그러냐?”


“······ 네······.”


“허니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하라.”


“괜찮습니다······.”


“말하라.”


훨씬 낮고 분명히 단호해진 히로유키의 말을 더 거역할 용기가 정화에게는 없었다. 더 이상 대답하기를 거부했다가는 한 치 앞을 장담할 수 없었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 사이로 소리를 가히 낮춘 숨결이 쉴 새 없이 들락거렸다. 땅을 짚은 손가락이 단단한 바닥을 파고들 듯 강하게 오므라들었다.


“······ 저, 저는 함경도에 있는 영흥군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그때 사촌 언니도 함께 살았는데, 직계 가족은 아니었지만 정말 제게는 부모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지금은 떨어져 산 지 꽤 되었으나 제게 뼈에 새겨 마땅한 은혜를 베푼 은인이요, 그 누구보다 남다른 의미를 가진 소중한 가족입니다······. 헌데, 그 언니가······ 누명을 쓰고 지금······.”


두려움보다 거센 절망이 순간 불어닥치자, 가슴 속 깊이 눌러두었던 무언가가 터져나왔다. 지금 움직이는 입술이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었고, 매일 듣는 목소리조차 생경하여 뉘의 뜻으로 이리 말을 하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허나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은 대목에 다다르자, 절로 목이 메어 자의와 상관 없이 말을 삼키고 말았다.


“······ 감옥에 들어가 있다 합니다······.”


분명 짧았으나 한에 막혀 입 밖으로 꺼내기에는 꽤나 긴 시간이 걸린 말이었다. 힘겹게 꺼낸 한 마디에는 물기가 잔뜩 어려, 쉽사리 알아듣기조차 힘들었다.


“도련님, 도련님께서 저희 언니를 심문하신다 들었습니다. 제발 언니 좀 살려주세요. 언니는 죄가 없습니다. 필경 모함일 것입니다,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어릴 적부터 잔병치레를 곧잘하던 몸이었습니다. 하여 가혹한 고문을 절대 견딜 수 없는,”


“고문이라니, 내가?”


“예······?”


“내가 누구를 고문한다는 말이냐?”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이러한 반응부터 말까지 전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아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림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분명한 것은, 이 자는 진심으로 내게 궁금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고문을 하지 않았다는 말인 걸까? 아니면 고문을 하고 있는 자가 너무도 많아 누구인지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는 걸까? 앞선 상황과는 다른 의미로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하오나 그 곳에서 보초를 서던 경찰이 말하기를,”


“어디서 무슨 얘기를 듣고 온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죄수들을 고문하지 않는다. 그저 그들의 진술을 듣고 질문을 할 뿐이다.”


고문하지 않는다니, 허면 언니는 대체 누구에게 고문을 당하고 그리 비명을 질렀다는 건가? 폭탄을 들고 종로경찰서에 잠입한 이를 왜놈 경찰이 가만 두었을 리가 없다. 조사가 목적이든, 화풀이가 목적이든 그 몸에 생채기 하나를 내지 않을 놈들이 아니다. 대체 어찌 된 일인가, 내가 그날 들었던 것은 전부······.


“어, 어······. 그게······”


“비록 헌병 경찰이라지만 난 엄연한 군인이다. 감옥에 있는 죄수들을 심문하는 건 경찰의 일이며, 그것은 군인인 내가 함부로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권한이 아니다. 아마 네 사촌언니라는 자가 고문을 당했다면, 내가 아니라 수사를 함께 하는 다른 경찰일 것이다.”


스스로가 친일파, 아니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가 이런 일을 두고 제 앞에서 거짓을 이야기할 리가 없다. 게다가 달포간 보아 온 히로유키는 그 누구보다 선을 확실히 지키는 사람이었따. 제아무리 세상 물정을 모르기로서니, 주제넘게 남의 일에 함부로 발을 뻗었다가 경을 친다는 사실은 어렴풋이라도 알고 있었다. 저조차 아는 사실을 어린 나이에 벌써 중위가 된 자가 모를 리 없을 터. 고로 지금 이 자가 하는 말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으렷다.


“되었느냐?”


“허, 허면, 언니는 괜찮습니까······?”


“죄가 없다면 무사할 것이다.”


“아······”


“끝났으면 이만 물러,”


“저······! 청이 하나 더 있습니다.”


히로유키가 가만히 시선을 내려 여전히 엎드려 있는 정화를 향해 소리 없는 질문을 던졌다. 정확한 상황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 자가 관영을 고문하지 않은 것만은 확실하다. 제아무리 조선인을 싫어해도, 1년간 지켜본 그는 절대로 그들에게 연유 없는 ‘화풀이’를 하지 않았다. 그의 행동을 뒤따르는 것은 늘 ‘명분’이었다. 허나 말마따나 관영을 고문한 적이 없으니 명분 또한 없었을 터. 어디까지가 사실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으나, 적어도 제 기분 하나를 풀어주고자 거짓을 말하여 달래 줄 이는 아니었고, 그럴 만 한 관계 또한 아니었다. 방금 들은 대로라면 관영이 일본 고관들의 분노를 샀을지는 몰라도, 이 자에게는 해당 사항이 아닐 터이다. 아직 조선인으로서의 마지막 양심이 남아있다면, 지금 여기서 내 세 치 혀를 어찌 놀리는지에 따라 언니를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순간, 내게 남은 것은 하나뿐이다.


“······ 면회를, 보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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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29화 - 볼가 강 24.06.15 19 2 13쪽
29 28화 - 이야기 24.06.15 18 2 11쪽
28 27화 - 죄와 벌 24.06.13 22 2 12쪽
27 26화 - 대화 24.06.13 22 2 11쪽
26 25화 - 겸상 24.06.11 22 2 14쪽
25 24화 - 반성 24.06.11 22 1 11쪽
24 23화 - 재회 +2 24.06.09 26 4 12쪽
23 22화 - 복수 24.06.09 24 2 15쪽
22 21화 - 안개가 걷히다 24.06.08 26 2 12쪽
» 20화 - 용기, 그리고 기회 +1 24.06.08 23 3 12쪽
20 19화 - 잔인한 운명 +1 24.06.06 21 2 12쪽
19 18화 - 진흙 속의 꽃 24.06.06 22 2 14쪽
18 17화 - 행복과 불행 24.06.04 24 2 12쪽
17 16화 - 악연, 헝클어진 실 24.06.02 25 2 11쪽
16 15화 - 편지 (1) 24.06.01 28 2 11쪽
15 14화 - 불가사의 +1 24.06.01 28 2 15쪽
14 13화 - 목격 24.05.30 27 2 12쪽
13 12화 - 홀로서기 (2) +1 24.05.28 34 2 13쪽
12 11화 - 홀로서기 (1) +1 24.05.26 34 2 11쪽
11 10화 - 비밀, 그리고 갈등 24.05.25 33 2 14쪽
10 9화 - 제안 24.05.23 37 2 12쪽
9 8화 - 발각 24.05.21 32 2 10쪽
8 7화 - 기회 +2 24.05.19 34 4 12쪽
7 6화 - 수렁 속의 빛 24.05.18 35 3 13쪽
6 5화 - 안개 속 흐르는 물 24.05.16 37 3 12쪽
5 4화 - 달빛 아래 어둠 속 +1 24.05.14 39 4 12쪽
4 3화 - 후지와라 히로유키 24.05.12 44 3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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