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빛 안개

무료웹소설 > 자유연재 > 대체역사, 판타지

공모전참가작

영온
그림/삽화
영온
작품등록일 :
2024.05.10 12:07
최근연재일 :
2024.09.17 21:30
연재수 :
59 회
조회수 :
1,387
추천수 :
102
글자수 :
329,905

작성
24.06.04 13:30
조회
23
추천
2
글자
12쪽

17화 - 행복과 불행

DUMMY

1915년 3월 28일



여느 때와 같은 평범한 하루였다. 전날 출장을 가서 자리를 비운 히로유키 덕에, 정화는 모처럼 여유로운 하루를 보내었다. 평소보다 한 시진 정도 더 늦게 시작된 하루의 햇살은 따스했고,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유독 아름답게 들려왔다. 물론 평소에도 하루는 여유로울 따름이었다. 정화가 방에 들어갈 때마다 히로유키는 늘 책이나 편지를 읽고 있었으며, 언제나처럼 말수가 없었다. 통상 이런 관저에 사는 이들은 여급 한둘을 곁에 두고 이것저것 수시로 시키는 경우가 많다 하였으나, 그는 정화가 용무를 마치는 즉시 나가보라고 늘 명하였다. 이렇게까지 멀리할 연유가 있나 싶으면서도, 평소 말수 없고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그의 성격이라면 정화를 싫어하여 그리 대한다고 단정짓기도 모호하였다. 무엇보다 그는 정화의 앞에서 항상 조선어를 사용했다. 그가 조선어를 더 편히 여기며 평소 조선어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관저, 아니 조선 팔도를 통틀어 정화뿐이리라. 심지어는 그의 양부인 후지와라 오사무조차 이 일을 꿈에도 알지 못하였다. 아니, 관심이 없다고 보아야 하려나.

히로유키는 생각보다 훨씬 더 무뚝뚝하고 고독한 사람이었다. 따로 연락을 주고받는 일본인 장교도 한둘 정도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공적인 것이었다. 그나마 쿠사카베 중좌가 히로유키를 아껴 매번 데리고 다니긴 하지만, 호색한에 술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그에게조차 온전히 속내를 터놓지는 않는 듯 하였다. 매번 곁에서 부름을 받는 정화와도 사적인 대화를 일절 하지 않았다. 그럴 연유도,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었기에 도리어 정화에게는 달가운 소식이었지만. 살 것이 있어 총독부 청사 앞을 지나거나, 과거 육조거리였다던 곳을 걷다 마주치는 여타 일본 장교들은 이따금씩 제게 욕설을 하거나 조센징이라며 비웃고 은근히 하대하기도 하였다. 허나 그들에 비하지 못할 정도로 악명 높은 제 주인만큼은 결코 그리하지 않았다. 필요한 말 이외에는 입을 열지 않았고 간혹 정화가 실수하더라도 언성 한 번 높이지 않고 점잖게 주의를 줄 뿐이었다. 제아무리 노할 법한 상황에서도 욕설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사적인 일로 정화에게 화풀이를 하는 일도 일절 없었다. 결코 자신을 하대하지 않는 교양있는 모습에 정화는 매번 놀랐고, 때로는 감탄하였다. 친일파라면 학을 떼는 정화인지라 그에게 어떠한 사심도 품지 않았지만, 히로유키는 그가 익히 들어왔던 모든 소문과 전부 다른 이였다. 그러한 그에게 정화는 호감도 반감도 없었으나, 늘 알 수 없는 묘한 두려움을 품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늘 쉬이 짐작할 수 없는 묘한 기류를 내뿜고 있는 것은 물론이요, 조선인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인 ‘독사 장교’이기 때문일 것이리라.

금일은 설 또한 바쁘지 않은지라, 일찍이 히로유키의 방 청소마저 끝낸 정화에게는 할 일이 더 없었다. 오후에는 관저 근처로 산책이나 나가볼까, 하며 그의 방에서 한가롭게 노닐던 정화의 두 눈이 문득 책장으로 향하였다. 조금이라도 손을 댔다가는 살아남을 수 없다던 정자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기에, 그간 그 쪽으로는 눈길 한 번 준 적 없던 정화였다. 허나 아무도 없는 지금, 어찌 된 일인지 몸이 책장을 향해 움직였다. 그래봤자 군사 기밀이라 하였으니 읽어도 알 도리가 없으리라. 그럼에도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정화가 조심스레 그의 책상 위에 놓인 책 한 권을 들어올렸다. ‘Преступление и наказание’, 아직 전부 깨우치지 못한 한문보다 더 알쏭달쏭한 글자였다.


“이건 뭐지? 어느 나라 말이야, 대체.”


“남정화!”


“꺄악!”


느닷없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화들짝 놀란 정화가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노, 놀래라······! 너, 너 여기 이리 막 들어와도 돼?!”


잘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정화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책을 떨구기라도 했다면 뒷일을 감당하기 힘들었을 테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고, 설 또한 눈치채지 못한 듯 하였다.


“아까 도련님 나가는 걸 뻔히 봤는데 무슨 상관이야? 너 예서 뭐 하고 있었어?”


“뭘 하기는 무슨······. 너, 헌데 어쩐 일이야?”


정화가 애써 눈을 피하며 다급히 말을 돌렸다.


“너 나 한 번만 도와줄 수 있어?”


“뭔데, 급한 일이야?”


“아니 급한 것까지는 아니고 혹여 나갈 일 있다면 부탁 좀 하려 했지.”


“무슨 일인데? 안 그래도 좀이 쑤셔서 이따 잠시 나갔다 오려 했는데.”


“팔자도 좋아, 계집애. 허면 돌아오는 길에 시장 들러서 깨 세 홉만 사다줘. 너 간다고 하면 돈 줄게.”


“알았어.”


방을 나서는 설 뒤로, 정화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황급히 책을 원래 자리에 돌려놓은 뒤, 정화도 방을 나섰다. 얼마만의 자유인지 몰랐다. 여전히 콩닥이던 가슴은 진정되지 않았으나, 간만에 느끼는 거리의 향취가 정겨웠다. 흐릿한 꽃내음에 고향이 떠올랐다. 제아무리 경성이 좋다기로서니 왜인도 없고 가족들이 있는 곳만할까.


“정화야!”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거닐던 와중, 누군가가 큰 소리와 함께 제 등을 쳤다.


“꺅! 누구, 어 오라버니?!”


화들짝 놀란 것도 잠시, 친오라버니인 유석의 얼굴을 알아본 정화의 입가에 담뿍한 미소가 내걸렸다.


“그럼, 나 아니면 누가 또 왔게?”


“아니 여기까지는 어찌 온 거야, 응?”


“우리 누이가 보고 싶어서 어쩔 수가 있어야지.”


“농사일이 얼마나 바쁜데 농땡이를 이리 피워!”


자신의 어깨를 치며 잔소리를 하는 정화를 향해 유석이 멋쩍게 웃었다.


“야, 너 그리 말하면 섭섭하다······. 대체 얼마 만에 보는 건데 이리 모질게 굴어?”


“농담이고, 나도 오라버니 너무 그리웠어. 아픈데는 없지?”


정화가 유석의 품에 폭 안기며 답지 않게 애교를 부렸다.


“허리 하나 안 아프고 건강하다.”


“밥은 먹고 온 거야?”


“우리 누이 사주려 아직 안 먹었지. 밥 먹었어?”


“아니.”


“그놈들은 밥도 안 주고 일만 시킨다니?!”


“아냐, 그건 아니고 지금 심부름 나오느라 조금 있다가 밥 먹으려 했어.”


“바로 돌아가야 해? 시간 괜찮으면 국수 먹으러 가자.”


“좋아! 국수 오랜만이네. 어릴 적 엄마가 끓여주는 국수가 그렇게 맛있었는데. 하아, 그 때가 좋았지······. 지금도 가끔 그립다.”


“매우 어릴 적인데도 기억이 나느냐? 너 다섯 살 뿐이 안 됐었잖니.”


“그저 한 폭의 그림처럼 남은 기억이지, 맛과 향이 느껴지는.”


“가서 많이 먹어.”


유석이 정화의 머리를 다정스레 쓰다듬었다. 오랜만에 재회한 오누이는 그간 못 다한 이야기들을 도란도란 나누며 서촌 거리를 거닐었다. 길 한복판에 난 시장으로 걸음을 옮기자, 새로 세워진 책방과 여러 점포가 즐비하였다. 간만에 느껴보는 사람 냄새에 정화가 공기를 한껏 깊이 들이마셨다.


“오라버니는 잘 지내?”


“아무렴. 우리 누이가 못난 오라버니 뒷바라지 해주겠다고 이렇게 힘들게 일하고 있는데 당연히 잘 지내지.”


“오라버니, 나 정말 하나도 안 힘들어. 여기 일이 얼마나 편한지, 오라버니랑 함께 일하고 싶을 정도야.”


“내가 왜놈 말만 제대로 할 줄 알았으면 바로 들어가는건데, 아쉽다······”


나라의 주인이 바뀐지 어느덧 5년이 지났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석은 여즉 국어를 잘 하지 못했다. 배울만큼 배우고 말이라면 청산유수마냥 하는 이가 국어를 못한다면, 그것은 필경 나이의 탓이리라. 여고보때부터 일본의 언어로 교육을 받은 정화와는 사정이 사뭇 다른지라, 만날 때마다 늘 동생에게 이것저것 묻기 마련이었다.


“아유, 입 조심해! 이 근방에 깔린 게 순사 (일제 강점기에 둔, 경찰관의 가장 낮은 계급. 또는 그 계급의 사람. 지금의 순경.)인데······. 조선말 다른 건 못 알아들어도 '왜놈' 소리는 바로 알아듣는 놈들이야.”


“그나저나, 너 바로 곁에서 부려먹는 놈이 그렇게 악질이라며? 오라버니가 우리 누이 걱정돼서 요즘 조선글로 통번된 호외 (특별한 일이 있을 때에 임시로 발행하는 신문이나 잡지.) 구해다가 다 챙겨보고 있는데 이름을 까먹어서 말이지······”


“매번 말했잖아, 후지와라 히로유키라니까.”


“맞다, 맞아. 어휴, 아무튼 친일파 놈들은 정말 그렇게 나쁜 놈일수가 없더라. 그 놈은 너 괴롭히지는 않아?”


“소문은 무성한데, 아직 한 번도 언성 높인 적이 없어. 신기하지?”


“진짜로? 너 오라버니 걱정할까봐 부러 좋은 소리만 하는 거 아니지?”


“내 다른 여급들에게 듣기로는 눈 앞에서 조선어 한 마디라도 쓰면 혀를 뽑는다, 손가락을 자른다, 아무튼 보통 미친놈이 아니었거든? 헌데 정작 나한테는 조선말이 더 편하니까 둘만 있을 때는 조선말로 얘기하라 하고, 실수해도 화도 안 내고······. 아무튼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사람이야.”


“참말로? 이상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네.”


“그렇지? 헌데 무어가 진짜 모습인지 감도 안 잡혀서 무섭기도 하고······. 그리고 나한테 못되게 굴지는 않아도 나라 팔아먹은 놈인 건 확실하잖아. 해서 그냥 적당히 거리 두고 있어.”


“어유, 영특해라.”


때마침 나온 국수 그릇을, 유석이 정화의 앞으로 밀어주었다. 달포가 훌쩍 넘어서야 얼굴을 본 누이에게서, 그는 좀처럼 슬픈 눈을 거두지 못하였다.


“오라버니, 나 간장 좀.”


“여기. 부족하면 더 시켜, 얼마든지 사 줄께.”


“오라버니가 돈이 어딨어? 내 살께.”


“여기서마저 누이한테 신세 지라고? 오라버니가 그리는 못 산다.”


“아유, 나야 곧 있으면 녹봉이 나올 텐데 무얼 그리 걱정해.”


정화가 장난스레 속닥거림에도 유석은 기어이 정화의 손길을 마다하였다.


“우리 정화, 벌써 시집갈 나이네. 그때까지 오라버니가 열심히 농사지어서 네 신혼집 한 칸은 마련해둘께.”


“아유, 난 내가 벌어서 내가 갈테니 훗날 조카 장가 보낼 생각부터 해. 어느새 많이 크지 않았어?”


“많이 컸지. 이젠 벌써 뒤집기도 한다. 그리고······.”


“응?”


“정화야, 네가 보내준 돈, 반은 손도 안 대고 모아놨다.”


느닷없이 삼천포로 빠진 유석의 말에 놀란 정화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려다 입을 틀어막았다.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그거 오라버니 쓰라고 보내준 거잖아······.”


“그래, 네가 아니었으면 꿈도 못 꿨지. 그래서 더 아끼고 아껴서 모아두었다. 애당초 빚이 그리 많지도 않았잖느냐? 작게나마 땅이 있으니 내 식구들 먹여 살릴 수준은 된다. 네 돈은 너 시집갈 때 줄 테니 여기는 딱 1년만 더 있다가 나와. 혼처는 아주 좋은 놈으로다가 오라버니가 엄선해놓을 테니까 걱정하지를 말고. 응?”


“아이고, 요즘 세상에 좋은 혼처라 해봤자 친일파밖에 더 있나. 제아무리 그래도 나라 팔아먹은 놈들한테 시집갈 수야 없지. 그리고 앞으로 몇 년 동안 모을 돈으로도 난 충분하네요. 그 돈 일절 미련 없으니 오라버니나 호의호식하셔.”


정화가 국수를 한 젓가락 가득 뜨며 능글맞게 웃어보였다.


“친일파 얘기하니까 관영 언니 생각나네. 왜놈이라면 아주 질색을 하는데, 그치?”


정화의 말에 유석이 젓가락질을 멈추었다.


“오라버니, 그러고 보니 나 요 근래에 언니 소식을 통 못 들었다. 잘 지낸대?”


순간 공기의 흐름이 한 층 더 불안스레 바뀌었으나, 정화는 국수를 삼키느라 미처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였다. 그런 누이를 바라보는 유석은 차마 입을 열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오라버니?”


“어, 응?”


대답이 이어지지 않는 것을 이상히 여긴 정화의 채근에 유석이 놀라 고개를 치켜들었다.


“관영 언니 잘 지내냐고.”


“······ 정화야······.”


유석이 차마 정화를 바라보지 못하고 운을 뗐다. 힘겹게 떨어지는 입술이 답지 않게 떨리고 있었다.


“······ 관영이, 지금 경성에 있다.”


“경성? 경성 어디?”


“······ 서대문 감옥 (서대문 형무소.) 에.”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러시아어 번역을 달아놓지 않은 것은 실수가 아닙니다! 스포가 될 수도 있는 관계로......ㅎㅎ

더욱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남아있으니 꾸준한 관심 부탁드려요!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물빛 안개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32 31화 - 정화야 +1 24.06.16 18 2 12쪽
31 30화 - 부탕도화 +1 24.06.16 19 3 16쪽
30 29화 - 볼가 강 24.06.15 19 2 13쪽
29 28화 - 이야기 24.06.15 17 2 11쪽
28 27화 - 죄와 벌 24.06.13 22 2 12쪽
27 26화 - 대화 24.06.13 22 2 11쪽
26 25화 - 겸상 24.06.11 22 2 14쪽
25 24화 - 반성 24.06.11 22 1 11쪽
24 23화 - 재회 +2 24.06.09 26 4 12쪽
23 22화 - 복수 24.06.09 24 2 15쪽
22 21화 - 안개가 걷히다 24.06.08 26 2 12쪽
21 20화 - 용기, 그리고 기회 +1 24.06.08 22 3 12쪽
20 19화 - 잔인한 운명 +1 24.06.06 21 2 12쪽
19 18화 - 진흙 속의 꽃 24.06.06 22 2 14쪽
» 17화 - 행복과 불행 24.06.04 24 2 12쪽
17 16화 - 악연, 헝클어진 실 24.06.02 25 2 11쪽
16 15화 - 편지 (1) 24.06.01 28 2 11쪽
15 14화 - 불가사의 +1 24.06.01 28 2 15쪽
14 13화 - 목격 24.05.30 26 2 12쪽
13 12화 - 홀로서기 (2) +1 24.05.28 34 2 13쪽
12 11화 - 홀로서기 (1) +1 24.05.26 34 2 11쪽
11 10화 - 비밀, 그리고 갈등 24.05.25 32 2 14쪽
10 9화 - 제안 24.05.23 36 2 12쪽
9 8화 - 발각 24.05.21 32 2 10쪽
8 7화 - 기회 +2 24.05.19 34 4 12쪽
7 6화 - 수렁 속의 빛 24.05.18 35 3 13쪽
6 5화 - 안개 속 흐르는 물 24.05.16 37 3 12쪽
5 4화 - 달빛 아래 어둠 속 +1 24.05.14 39 4 12쪽
4 3화 - 후지와라 히로유키 24.05.12 44 3 14쪽
3 2화 - 도련님 24.05.11 47 4 1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