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빛 안개

무료웹소설 > 자유연재 > 대체역사, 판타지

공모전참가작

영온
그림/삽화
영온
작품등록일 :
2024.05.10 12:07
최근연재일 :
2024.09.17 21:30
연재수 :
59 회
조회수 :
1,390
추천수 :
102
글자수 :
329,905

작성
24.05.30 13:30
조회
26
추천
2
글자
12쪽

13화 - 목격

DUMMY

1915년 2월 18일


돈을 훔쳐간 단희를 향해 그 난리를 부리고 처소를 옮긴 지도 어느덧 사흘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특별히 요구하는 게 많지도, 까다롭지도 않은 새 주인 덕에 정화는 이전보다 훨씬 안온하게 지내고 있었다. 매사에 꼼꼼하게 임한 덕에 짧디 짧은 시간이지만 아직 히로유키의 심기를 거스른 적도, 조금이라도 실수를 저지른 적도 없었다. 워낙 말수가 적은 이인지라 자주 보기로서니 가까워지는 건 어림도 없었으나, 당초부터 그럴 생각이 없던 정화였기에 특별히 마음을 쓸 일도 없었다. 산골에서 화전민으로 살던 시절과 농사를 지을 적이 여간 고된 시절이 아니다보니, 처음 관저에 들어왔을 때는 말 그대로 좀이 쑤실 지경이었다. 허나 그 사이 일에 적응을 한 겐지, 이제는 그보다 갑절은 적은 일을 하여도 그저 편안하기 그지없었다. 거기에 며칠 전 받은 봉급은 정말 이전에 받던 것의 갑절이었다. 남의 돈 벌기가 쉽지 않다는데 내게는 이리도 간편할 수가 있을까. 돈주머니를 펼쳐보는 정화의 입가에 정말 오랜만에 새하얗고 맑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걸 집으로 보냈을 때 기뻐할 오라버니와 조카들을 떠올리니, 제 수중에 돈 한 푼 없어도 매일을 웃으며 보낼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어, 밤 늦게 돌아오는 히로유키의 짐을 받으러 나가는 길마저도 그저 행복할 따름이었다.


“설아!”


“뭐야, 너 어찌 이리 신났어? 봉급을 부치고 오는 게야?”


이전만큼 계속 보지는 못하지만 여전히 설은 가장 자주 만나는 동료였다. 유독 생글거리는 정화에게 기쁜 일이 있음을 짐작한 설이 피식 웃으며 정화의 어깨를 툭 쳤다.


“귀신도 아니고 어찌 알았어?”


“내가 너를 모르면 어찌해? 안 헷갈리고 정확히 다 부친 것 맞지?”


“그럼, 얼마나 뿌듯한지 몰라.”


“다음 봉급부터는 간수 잘 해, 엄한 년한테 빼앗기지 말고.”


“아무렴, 이 돈 있어야 우리 오라버니가 사는데 내가 어찌 같은 실수를 두 번 실수하겠······”


* “다녀오셨습니까, 도련님.”


저 멀리서 들려오는 인사말에, 정화가 설에게 눈짓으로 인사를 하고 급히 달려갔다.


* “다, 다녀오셨습니까, 도련님. 짐을 받겠습니다.”


여느 때처럼 히로유키는 끄덕, 하는 고갯짓으로 말없이 인사를 받았고, 늘 그렇듯 다른 이들 앞에서는 일본어로 인사를 한 정화가 익숙하게 그의 짐을 받아들었다. 눈짓으로 정화와 인사를 나누는 설을 뒤로 하고 둘은 계단을 향해 방향을 함께하였다. 차이가 있다면 장신인 히로유키가 한 걸음을 걸을 때 정화가 두 걸음씩 걸어야 속도가 얼추 맞는다는 것 뿐이랄까.


“다섯 점 (시(時)를 달리 이르던 말.) 즈음 방으로 전화가 왔습니다. 서대문 감옥 (서대문 형무소의 이전 명칭.) 에서 연락이 왔사온데, 귀택하시는 즉시 회신해달라 하셨습니다. 번호는 제가 따로 적어 남겨두었습니다.”


“오냐.”


“헌데 지금은 전화국 (전화 교환 중계 및 전화 영업업무를 취급하는 곳.) 이 문을 닫은지라······. 멀지 않은 곳이라면 제가 급히 편지를 전달하고 올까요?”


“전화를 건 이의 이름을 아느냐?”


“나카무라 쇼타 경부 (일본에서 경찰청 주임급에 해당하는 경찰 간부.) 입니다. 도련님께 이름을 말하면 알 것이라고······.”


별안간 걸음을 멈춘 히로유키의 등에 정화가 하마터면 이마를 부딪힐 뻔 했으나, 다행히 급히 중심을 잡아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는 않았다.


“······ 어찌 할까요? 서대문 감옥까지는 달려가면 아마 한 식경 정도······”


“지금은 시간이 늦었다. 내일 서대문 감옥에 갈 일이 있으니 그때 내 따로 찾아 뵈마.”


“알겠습니다. 필요하신 것이 있나요?”


“목욕을 하고 싶구나.”


“욕조에 물을 데워 놓았습니다. 내려가시기 전에 욕실에 차를 가져다 놓겠습니다.”


히로유키의 고갯짓을 마지막으로, 정화가 인사를 올린 뒤 방을 나섰다. 귀택하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은지라, 찻상을 차리는 것은 늘 정화의 몫이었다. 간혹 말없이 늦을 때는 밥상도 차려 올렸으나, 어느 순간부터는 늘 방에 놓인 전화로 연락을 주는 덕에 그럴 필요는 없어졌다. 단 것을 좋아하지 않는 히로유키였기에 다과 없이 차만 내오면 되는지라 힘을 들일 것조차 없었다. 익숙한 발걸음으로 정화가 찬장으로 다가갔다. 헌데 있어야 할 곳에 가장 중요한 것이 없었다.


“저, 끝순언니. 여기 찻잎이 없나요?”


정화가 옆에서 한참 설거지를 하던 여급에게 다가가 물었다.


“찻잎? 무슨 찻잎?”


“매번 여기 있던 노란 찻잎이요. 도련님께서는 그것만 드셔서요.”


“노란 차? 아, 아라사에서 왔다는 그거? 아까 전에 숙경이가 엎어서 전부 버렸는데?”


“네?!”


정화가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 노란 찻잎의 이름은 모르지만, 히로유키가 그것만 마신다는 것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다른 차가 있긴 한데, 그거라도 우선 타 가면 아니 되려나?”


“저희 도련님 성정 아시잖아요······. 어쩌죠, 그건 노국에서나 들여올 수 있는 차라면서요. 저도 뭐라고 말씀하실지 도무지 감을 못 잡겠어요.”


“하, 이것 참······. 아!”


다급한 손길로 건너편 찬장을 뒤지던 끝순이 구석 저 편에서 무언가를 손에 쥐고 나타났다.


“아까 숙경이가 땅에 안 닿은 것만 어찌어찌 담아서 모아놨다고 했던 걸 내 미처 잊고 있었네. 이 정도면 한 잔은 우리겠지?”


“세상에, 정말 고마워요 언니.”


급히 주전자에 물을 올린 정화가 찻잔을 꺼내며 탄식하듯 말했다. 팔팔 끓는 물을 찻잔에 쏟다시피 붓고 다시 욕실을 향해, 작은 발이 바쁘게 총총거렸다.

예상보다 시간이 걸린지라 마음이 다급했다. 다행이라는 것은 그나마 히로유키가 급한 성격이 아니라는 것 정도일까. 그 때문에 여즉 제게 별 탈이 없는 듯 싶었다. 다만 제 성정이 급하여 조금이라도 늦으면 불안하였기에 늘 그보다 앞서 준비를 마칠 뿐이었다.

서둘러 찻상을 욕실에 올려두고 나올 요량으로, 정화가 빠르게 문을 열어젖혔다. 헌데 문 너머에는 미처 상상도 못한 이가 서 있었다. 욕조에서 흐릿한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연기 틈으로 선연히 보이는 그는 웃옷을 벗은 채였다. 옷을 입고 목욕을 할 수는 없으니, 적어도 욕실에서만큼은 이상한 일이 아니리라. 문제는 정화가 사내의 벗은 몸을 태어나서 처음 본다는 것이었다.


“어, 어어, 엄마야! 으악!!”


기겁하여 비명을 지르던 정화가 그만 손에 힘이 풀려 찻상을 놓치고 말았다. 와장창, 하는 소리와 함께 정화의 발 바로 아래에서 찻상이 박살났다. 뜨거운 물이 치마에 방울진 줄도 모르고, 정화가 겁에 질린 채 뒤로 주저앉았다. 바들바들 떠는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실 한오라기조차 걸치지 않은 상체, 그리고 당혹감과 이루 말할 수 없는 온갖 감정이 뒤섞인 히로유키의 얼굴이었다.


“······ 너, 지금······”


“도, 도련님 잘못했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한 번만,”


새된 비명에 가까운 정화의 애원에 히로유키가 조용히 한 손을 들었다. 제 뺨이라도 칠까 두려워 눈을 감았으나, 그는 손가락을 펴 자신의 입가에 가져다 댈 뿐이었다. 이어 그가 한 차례 문을 흘겨보았다. 제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 어떠한 것인지 깨닫는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헙······!”


날카로운 시선에 겁을 먹은 정화가 그와 문을 번갈아 바라보다 이내 그 뜻을 깨닫고는 자신의 입을 거세게 틀어막았다.


“조용히 치우거라.”


정화가 여전히 입을 틀어막은 채로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도무지 히로유키의 벗은 몸을 볼 자신이 없어 눈은 차마 땅바닥에서 떼지 못한 채. 땅에 흐릿하게 비추는 그림자로, 그가 개켜두었던 샤쓰 (일제강점기 당시 ‘셔츠’를 부르던 표현.) 를 다시 걸치는 것이 보일 뿐이었다.


“도, 도련님······”


기어들어가는 듯한 정화의 목소리를 들은 히로유키가 다시 몸을 돌렸다. 상의를 걸쳤으나 여미지는 않은 채였다. 여전히 정화가 자신을 쳐다보지 않으리라고 굳게 믿고 있었으나, 바로 마주한 것은 여전히 당혹감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두 눈이었다.


“으아악! 헙······!”


다시 한 번 더 비명을 내지르며 무너지는 정화를 보는 히로유키의 얼굴 빛에는 당혹한 기색이 역력했다. 곧이어 이 말도 안 되는 사태를 온전히 숨기기는 어려우리라는 생각이 들자, 그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나마 이 시간에 이 곳을 지나는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에 감사해야 하려나. 어린 시절을 북방에서 보냈기로서니 조선인들의 틈에서 자란지라, 부끄럽기는 그 또한 매한가지였다.


“죄송해요······ 제가, 제가 살면서 사내의 맨 몸을 처음 봐서······ 도련님, 저······ 저 죽나요······?”


겁에 질린 채 울먹이면서 제 발치에 납작 엎드린 정화를 바라보는 히로유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언가 말을 하려 고개를 들라 하면 또 소리를 지를 것이 뻔했고, 그렇다고 제 몸을 굽히자니 또 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 자명하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여전히 떨고 있는 정화를 보니 다시금 한숨이 나왔다. 지금 훨씬 난감한 처지에 놓인 이가 누구이거늘.

결국 벗어둔 옷을 대충 걸친 히로유키가 작게 헛기침을 내었다. 힐끔힐끔 눈치를 살피던 정화가 가까이 다가오라는 손짓을 발견하고서야 천천히 그의 앞으로 기어가다시피 다가왔다. 여전히 고개를 바로 들지 못하자, 히로유키가 긴 다리를 굽혀서 정화에게 눈높이를 맞추었다.


“내가 조선어를 더 편히 여긴다는 걸 아는 이는 제국을 통틀어 너 하나 뿐이며, 앞으로 그 누구도 모를 일이다. 허니 절대로 들키지 않게 주의하거라. 알겠느냐?”


정화가 자신을 응시하는 히로유키의 눈을 피하며 떠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려움에 질린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히로유키가 이윽고 다시 몸을 일으켰다.


“오늘 여기서는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이다. 어떤 책임도 묻지 않을 테니 일말의 흔적도 남기지 말고 정리하거라. 누군가가 저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는 일 자체가 없어야 할 것이다.”


불호령이 떨어질 줄로만 알았으나, 돌아온 말은 의외의 것이었다. 잠시 당황스러워 말을 잇지 못하던 정화가 아직 눈물이 마르지 않은 눈을 수차례 껌벅였다.


“네, 네······. 명심하겠습니다.”


“다친 데는 없느냐?”


“없습니다······.”


“다 치웠으면 이만 나가보거라.”


히로유키가 등을 돌린 채로 가볍게 손짓을 하였다. 속내를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덩달아 기력이 쇠한 듯 했다.


“저 도련님······.”


허나 또 다시 들려오는 정화의 목소리에, 히로유키가 귀찮음이 가득한 눈빛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는 앞섶을 제대로 여민 상태였으나, 어찌 된 일인지 정화가 고개를 한 켠을 틀어 놓았다.


“혹여······ 이걸 버리러 밖에 좀 다녀와도 괜찮을까요? 잔이 다 깨져서······ 누가 물어보면 들킬까봐서요······.”


히로유키가 고개를 끄덕이며 밖을 향해 눈짓을 하였다. 그 어떠한 말도 않을테니 이제 그만 나가지 않겠느냐는 물음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얼른 나가볼께요······.”


황급히 자리를 비우는 정화의 뒷모습이 잔상처럼 남았다. 소란스러웠지만 결국 잘 마무리되어서인지, 한 해에 한 번은 볼까 싶은 그의 웃음에는 황당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진실되었고, 희미했으나, 분명 욕실 안을 한가득 메우고 있었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물빛 안개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32 31화 - 정화야 +1 24.06.16 19 2 12쪽
31 30화 - 부탕도화 +1 24.06.16 19 3 16쪽
30 29화 - 볼가 강 24.06.15 19 2 13쪽
29 28화 - 이야기 24.06.15 17 2 11쪽
28 27화 - 죄와 벌 24.06.13 22 2 12쪽
27 26화 - 대화 24.06.13 22 2 11쪽
26 25화 - 겸상 24.06.11 22 2 14쪽
25 24화 - 반성 24.06.11 22 1 11쪽
24 23화 - 재회 +2 24.06.09 26 4 12쪽
23 22화 - 복수 24.06.09 24 2 15쪽
22 21화 - 안개가 걷히다 24.06.08 26 2 12쪽
21 20화 - 용기, 그리고 기회 +1 24.06.08 22 3 12쪽
20 19화 - 잔인한 운명 +1 24.06.06 21 2 12쪽
19 18화 - 진흙 속의 꽃 24.06.06 22 2 14쪽
18 17화 - 행복과 불행 24.06.04 24 2 12쪽
17 16화 - 악연, 헝클어진 실 24.06.02 25 2 11쪽
16 15화 - 편지 (1) 24.06.01 28 2 11쪽
15 14화 - 불가사의 +1 24.06.01 28 2 15쪽
» 13화 - 목격 24.05.30 27 2 12쪽
13 12화 - 홀로서기 (2) +1 24.05.28 34 2 13쪽
12 11화 - 홀로서기 (1) +1 24.05.26 34 2 11쪽
11 10화 - 비밀, 그리고 갈등 24.05.25 32 2 14쪽
10 9화 - 제안 24.05.23 37 2 12쪽
9 8화 - 발각 24.05.21 32 2 10쪽
8 7화 - 기회 +2 24.05.19 34 4 12쪽
7 6화 - 수렁 속의 빛 24.05.18 35 3 13쪽
6 5화 - 안개 속 흐르는 물 24.05.16 37 3 12쪽
5 4화 - 달빛 아래 어둠 속 +1 24.05.14 39 4 12쪽
4 3화 - 후지와라 히로유키 24.05.12 44 3 14쪽
3 2화 - 도련님 24.05.11 47 4 1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