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가의 소드마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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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렛
작품등록일 :
2024.07.19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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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0 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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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9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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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보금자리 3

DUMMY

케이드를 향한 목검의 끝은 굳건했다.


일절 흔들리지 않았다.


리안의 자줏빛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대련을 가장한 신고식을 막 치뤘음에도 소년은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당연했다. 리안은 엘도르 기사단의 견습기사를 이긴 것에 대해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설령 그게 일대일이 아닌 삼대일이라고 해도.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였고, 예견된 미래였다. 단순히 마법사로서의 경지를 말하는게 아니다. 8살의 봄날에 마리가 죽은 이후 리안은 홀로 브라알라스 곳곳을 떠돌았다. 어린 나이에 못해본 짓이 없었다.


지독한 악의와 살의 속에서 5년 가까운 세월을 보낸 리안은 마법사로서나 검사로서나 어느 면에서도 또래에게 뒤쳐질 수준이 아니었다. 리안이 생사를 걸고 상대하던 적들은 전부 건장한 성인들이다. 그 명망높은 엘도르 기사단의 견습기사라 할지라도 예외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이건 좋은 기회였다. 아무 위험도 없이 3위계 워커의 검을 견식할 수 있는 황금같은 기회. 재능이란 이름의 등불은 확실히 리안을 다음 경지로 이끌어주었으나 그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배움이 귀한 시대였다.


소년은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했다.


그러니까, 테스트를 구실로 한 대결 제안은 리안으로서는 전혀 손해볼 것 없는 장사였다. 얼마간은 자신의 현 위치가 어느정도인지 궁금한 것도 있었다. 3위계 마법사를 상대로 자신의 검이 어디까지 통할 수 있는지.


“진검 대결?”


케이드가 리안의 목검을 쳐다보며 삐뚜름하게 웃었다.


“네가, 나하고?”


반응은 다른 곳에서 나왔다.


“미친놈.”


“확실히 검을 쓰는 건 그 나이대에 맞지 않게 수준급이긴 하지만... 3위계 워커를 진검으로 상대하겠다니, 너무 오만한 거 아닌가?”


“좀 쓸만한 놈이 들어왔나 했더니... 단단히 정신이 나갔군.”


구경하던 기사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었다. 높은 별채의 창밖으로 리안을 내려다보던 기사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리안에게 패배한 세명의 견습 기사들은 언제 몸을 갈무리한건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리안을 바라보았다. 리안을 보고 희열에 찬 미소를 지었던 검은 머리의 소년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리안은 신경쓰지 않았다. 남이 뭐라 하든 듣지도 않았다. 그저 한결같이 붉은 머리의 기사를 응시했다.


그는 웃고 있었다.


아주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보기라도 한 듯이.


“꼬맹아, 교만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


“지나친 겸손은 외려 결례가 된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한 거만이 용납되는 건 아니지.”


“거만을 떠는 게 아닙니다. 거드름을 피우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이대로는 저도 당신도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없으니까 제안을 했을 뿐입니다. 아닙니까?”


“결과를 얻을 수 없다?”


“적어도 제가 생각하기에 이건 제대로 된 입단테스트가 아닙니다. 도움도 안 되고요. 그쪽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리안이 단언했다. 케이드는 여전히 웃는 낯을 유지하고 있었다.


“제가 아는 17가문의 겨우 신고식은 이정도가 아닌데....”


“.......”


“정 싫으시다면 저는 단순한 손님 대우도 나쁘지 않습니다. 혹시 모를 텃세가 있을까, 미리 기선 제압을 하려고 했는데.”


“꼬맹아, 후회 안할 자신 있냐?”


말은 그렇게 했으나 그는 아까보다 더 진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마치 이러기를 기다렸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붉은 머리의 기사가 리안의 반대편으로 한발짝 나오자 따로 말하지 않아도 기사들이 케이드와 리안을 둥글게 감쌌다. 어느새 아까보다 더 크고 넓은 결투장이 만들어져 있었다. 리안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는 이들도 있었으나, 상당수는 어린 아이의 치기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흥미가 더 강한 듯했다.


“그냥 하면 재미가 없으니, 내기를 하자고.”


걸어나가면서 그는 입을 열었다.


“...내기?”


“그래, 내기. 예를들면 패자가 승자의 소원을 하나 들어준다던지. 아, 물론 정상적인 대결이라면 상대가 안 될테니 내쪽에서 제약을 몇개 걸 거다.”


케이드가 리안의 반대편에 섰다.


“마나는 일체 사용하지 않겠다.”


그가 옆을 보고 턱짓했다.


“검도 진검이 아니라 훈련용 가검을 사용해주마. 마음같아서는 목검을 쓰고 싶은데, 칼날이 박히면 귀찮아지니까.”


기사들 중 상대적으로 서열이 낮아보이는 젊은 청년이 빠릿한 움직임으로 자신이 사용하던 훈련용 가검을 던졌다. 케이드는 거침없이 칼을 뽑아 검집을 뒤로 휙 던져버렸다.


“꼬맹이, 네 승리 조건은 하나.”


검을 쥔 오른팔을 늘어뜨린 채로 케이드가 자신의 목 부근을 왼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단 한 번. 한 번이라도 좋으니 내게 검이 닿는 것. 옷자락에 스치는 것만으로도 좋다. 네가 마나를 쓰든, 뭘 하든 상관하지 않겠다. 이 정도면 꽤나 해볼만한 조건이지?”


리안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해볼만한 수준이 아니라 도리어 리안에게 유리했다.


그만큼 마법사와 범인의 격차는 컸다. 3위계 마법사의 위력은 마나의 운용과 활용에서 나오지, 맨몸 검술로는 한계가 있었으므로.


“너, 지금 뭔가 착각을 하는 것 같은데.”


리안의 표정을 보고 다 알겠다는 얼굴로 케이드가 말했다.


“마법사에게 있어서 마나가 절대적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못 이기는 건 아니야. 2위계라면 모르겠지만 나는 다르거든.”


“.......”


“내가 이기면 오늘부터 그 어중간한 존대부터 때려치워라. 아예 극 존칭을 쓰던가, 편하게 말을 놓던가.”


“반대로 진다면?”


“내 종자로 받아들여주마.”


“.......”


“이것 봐라. 싫어?”


“아니요, 좋습니다.”


리안은 선선히 대답했다. 사실은 아무래도 좋았다.


내기에서 이기던 지던. 단지 처음 겪어보는 감정이 신선했다. 매일이 살기 위한 발버둥이었던 소년에게 이렇게 순수한 호승심은 아주 이질적인 것이었다.


그럼에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리안은 허리춤의 검을 천천히 뽑아올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죽으려 헀는데 이런 기분이 들 줄은 몰랐다. 리안 스스로가 처음 겪어보는 감정에 내심 놀랄 정도로.


벌써 새 환경에 적응한 걸까.


아니면 살 이유를 찾아주겠다는 케이드와 백작가의 안주인인 카를린의 품안에서 한껏 울었던 것이 도움이 된 건지.


“안 오냐?”


리안이 검을 앞으로 겨누었다. 더이상의 잡념은 불필요했다.


“내가 먼저 갈까?”


케이드가 날이 없는 검끝을 까딱거렸다.


파악!


땅을 박찼다. 풍경이 밀려난다. 거친 바람이 안면을 쓸어내렸다. 케이드는 여전히 여유로운 모습으로 검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리안이 지척까지 다가왔을 때, 흔들리던 검끝이 불쑥 튀어나왔다. 마치 검을 휘두르기 직전의 움직임이 생략된 것 같았다.


그래도 막을 수 있다. 케이드의 검을 주시하던 리안은 팔을 안쪽으로 굽혀 칼날을 어깨 너머로 향하게 한 뒤 케이드의 검을 비껴쳤다. 날이 없는 칼날과 진검이 사이로 새빨간 불티가 튀어올랐다.


카앙!


그대로 올려치자 노인이 선물한 리안의 검과 케이드의 가검이 쨍한 쇳소리를 자아냈다.


물러서는 케이드의 앞에서 리안은 한발을 더 내디뎠다.


“하!”


케이드가 경탄인지 한탄인지 모를 헛숨을 흘렸다. 리안은 검의 반발력을 이용해 칼자루를 품안까지 끌어들인 뒤 다시 내질렀다. 검끝이 흐릿할 정도로 빨랐으나 예상했던 대로 케이드의 검에 막혔다.


괜찮다. 여기까지도 상정했다. 당황하지 마.


리안은 멈추지 않았다. 두 번째 일격을 휘둘렀다. 세 번째와 네 번째가 부드럽게 이어졌다. 은빛 검광이 허공에 희끄무레한 잔상을 그렸다.


다섯 번째 검격이 들이칠 때 케이드는 벌써 세 걸음을 물러 있었다. 매섭게 쇄도하는 칼날을 그의 뭉툭한 검끝이 옆으로 쳐냈다. 한바퀴 돌아 다음 공격을 이어가려던 리안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후욱!


언제 휘둘렀는지 모를 케이드의 검이 코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피하지 않았다면 검면에 머리를 얻어맞고 추하게 굴렀을 터였다.


“허....”


“봐주고 있다고는 해도 이건....”


“내가 말했잖아. 할만 하다니까?”


“나랑 내기할 사람?”


지켜보던 기사들이 한마디씩 내뱉었다. 저 멀리 창가에서 구경하던 기사들 몇몇이 연무장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탐탁치 않게 리안을 바라보던 이들도 언제 그랬냐는듯 오늘의 술값을 두고 하나 둘 돈을 걸기 시작했다.


리안에게 당한 세 소년도 마찬가지였다. 마음이 바뀌기라도 한 건지 쉬지 않고 떠들었다. 언짢은 얼굴로 리안을 노려보던 검은 머리의 소년도 힐끔힐끔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리안은 간격을 벌려 약간 들뜬 호흡을 진정시켰다.


“마나에 의존하는 머저리인줄 알았는데.”


케이드는 리안과 달리 숨한번 흐트러지지 않았다.


“검은 어디서 배웠냐?”


“...예전에 잠깐 인연이 있었습니다.”


“기사냐?”


“예.”


리안의 대답은 일말의 주저가 없었다. 소년이 아는 데릭은 리안이 기억하는 마지막 기사였다.


한낱 고아에게 자신의 밑천을 보여줄 정도로 정이 많은 기사. 그리고 이제는 행방을 알 수 없는 기사.


“역시 그런가.”


케이드가 쥔 가검을 빙글 돌렸다.


“그런데 말이야.”


그의 입가에 맺힌 웃음이 짙어졌다.


“너, 왜 아까부터 마나를 안 쓰냐?”


케이드의 몸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리안은 다급하게 검을 들어올렸다.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케이드가 검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긋고 있었다. 아까와는 속도가 차원이 달랐다.


카앙!


사선으로 검을 들어올린 리안이 검을 막아냈다. 바르르 떨리는 두 손을 꾹 다잡았다. 실로 간단한 동작이었지만 리안의 손아귀를 타고 전해지는 압력은 보통이 아니었다. 지금까지는 전부 장난이었다는 것처럼.


마나를 사용하지 않아도 이 정도의 속도라니.


리안은 검을 비틀어 케이드를 뒤로 밀어냈다. 본능적으로 마나를 끌어올렸다. 실력 차이가 극심하다는 건 애초부터 알고 있었다.


오판이다. 적당히 간을 볼 상대가 아니었는데. 리안에게 밀려난 케이드는 또다시 달려들기 위해 벌써 자세를 잡았다. 아주 느긋했다.


한번 더 온다.


전과는 전혀 다르다.


속도에서 이길 수 있나?


“기본기는 나쁘지 않아.”


검이 뻗어져나왔다. 리안에게는 환한 빛살이 시야를 가득 메우는 것처럼 보였다. 그 사이 리안의 검이 빛을 가로질렀다. 쨍한 금속성과 동시에 빛이 떨어졌다.


케이드의 검이 나선으로 휘었다. 휘어진 검이 아래서부터 위로 다시 올라왔다. 마나를 몸에 두른 시점부터 힘과 속도는 리안이 우위에 있었다. 그러나 리안은 검을 떨쳐내지 못했다.


워커용 검술과 일반 제식 검술은 다르다. 마지막 날, 여관의 뒷편에서 데릭은 리안에게 자신의 검기를 보여주며 그렇게 말했다. 지금 케이드의 검이 꼭 그랬다. 그는 마나를 사용하지 않았고, 진검이 아닌 가검을 쓰면서도 검로의 변화가 무한했다. 맨몸으로 워커의 검술을 구사하는 것만 같았다.


피하고, 막고, 흘리고.


이따금 검을 내질렀다. 그럼에도 닿지 않는다. 옷깃 하나 스칠 수 없었다. 거대한 벽이 리안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불현듯 케이드의 검이 길게 휜 것도 그때였다. 가까스로 그의 검을 좇던 리안은 아래서 위로 올라오는 검격을 최소한으로 피하려 했다. 그러나 옆으로 빠져나온 검이 어깨 위로 반원을 그리더니 가속을 더해 머리 위로 떨어졌다.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궤적.


눈을 크게 뜬 리안은 삐걱대는 팔을 억지로 틀어올렸다.


“감이 좋군.”


칭찬인지 비꼼인지 모를 음성이 검과 함께 닥쳤다.


카아앙!


이를 악문이 리안이 몸을 비틀어 검을 흘렸다.


어느덧 연무장은 검과 검이 부딪히는 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웃고 떠드는 소리는 주고받는 합이 길어질수록 자취를 감추었다. 한없이 고요한 연무장에는 햇빛을 반사해 번뜩이는 칼날만이 서로 엉켜 춤췄다.


“마법사라는 게... 진짜였어?”


누군가 작게 경탄을 흘렸다. 몇몇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엘도르 기사단장인 케이드 브레일은 브라알라스에서도 반드시 한손에 꼽는 기사이자 자신만의 심계를 완성시킨 3위계 워커였다.


마나를 쓰지 않는다 한들 격의 차이가 아득했다. 마법사가 아니고서야 저정도로 검을 받아낼 수 있을리가 없었다.


끝없는 검격이 오갔다. 백번을 넘기고부터는 셀 수 없었다. 검과 검이 교차한 그물 속에서 리안은 눈을 부릅떴다. 분명히 뚫을만 하면서도 뚫리지가 않았다. 일부러 그렇게 조절하고 있는게 아니나는 의심까지 들었다. 틈이 없었다.


아니.


없다면 만들면 된다. 이대로 가면 무조건 질 테니까.


그러니까.


콰악.


발 끝을 비틀었다. 케이드의 검이 거듭 내려왔다.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맞지 않으면 되니까. 리안은 손가락 마디 하나하나까지 마나를 밀어넣었다.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느려진 시간 속에서 케이드의 눈이 천천히 올라갔다. 실력 차이가 아득하다고는 하나 리안은 마나를 사용하고 있었다.


정석으로는 이길 수 없다. 그렇다면 자신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한다. 케이드는 3위계 워커답게 마나를 사용하지 않아도 무척이나 빨랐지만 단순한 속도와 근력 면에서는 리안이 근소 우위에 있었다. 밀리는 건 단지 압도적인 전투 경험과 검술의 차이다.


그러니 최대의 마나로, 최대한의 속도를 낸다면.


빠악!


눈앞이 번쩍거렸다. 시야가 옆으로 휙 돌아가고 나서야 리안은 자신이 검면으로 머리를 얻어맞았다는 걸 깨달았다.


어떻게?


그러한 의문이 이어지기도 전에 리안의 몸이 붕 떴다. 잠깐의 틈을 놓치지 않은 케이드가 곧장 발을 들어올려 휘청거리는 리안의 배를 걷어찬 것이다. 세상이 지진이라도 난 것마냥 이리저리 뒤집혔다. 끝내 바닥에 쓰러진 리안이 배를 움켜잡고 기침을 토했다.


“커흑! 끅, 끄윽....”


“마지막 공격은 나쁘지 않았다. 꽤나 날카로웠어.”


리안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칼자루를 세게 움켜쥐었다.


“그런데 그게 다야.”


공격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 자신이 한뼘은 더 빨랐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배를 얻어맞고 땅을 구르고 있었다.


“겨우 이까짓 실력으로 그렇게 뻗댄 거였냐?”


리안이 칼자루를 역수로 쥐었다. 검을 지지대 삼아 비틀거리며 가까스로 일어섰다. 연무장 주위가 기이할 정도로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리안을 대상으로 내기를 걸던 이들도 숨소리 하나 없이 침묵했다.


“감에 의존하는 건 기본기가 받쳐줄 때 가능한 이야기다. 어중간한 상대라면 당해줄 지 몰라도, 극한으로 단련한 정통파 검사를 만난다면 뚫지 못하고 죽을 거다. 네가 나중에 3위계 워커들을 상대로 한다면 더더욱.”


케이드가 말했다. 맞는 말이었다. 리안은 너무 본능에 의존했다. 데릭에게서 기본기를 전수받은 건 겨우 3일이다. 리안의 재능은 그가 보여준 거의 대부분의 검술을 흡수했으나, 그럼에도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었다.


뼈아픈 조언. 반대로 그만큼 리안에게 있어 성장할 양식이 되는 조언.


“꺼내.”


고개를 들어올리자 무감정한 표정의 그가 리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꺼내 보라고. 네가 가진 것, 전부.”


“.......”


“아니면, 이대로 항복이라도 할 거냐?”


케이드가 눈빛으로 말했다.


너 2위계 마법사잖아.


검기 날릴 수 있잖아?


리안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많은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만 이전까지 리안이 감내했던 시선들과는 결이 달랐다. 그건 단순한 시기와 질투가 아니었다.


숨길 수 없는 호기심과 호승심. 얼굴 위로 떠오른 선명한 경탄과 의외라는 표정들.


그 어디에도 비웃음은 없었다. 꼴사납게 얻어맞고 바닥을 몇번이나 굴렀음에도 그랬다. 낯설면서도 그리 나쁘지 않은 감각에 리안은 헛웃음을 삼켰다.


“시선을 신경쓰는 거라면 걱정하지 마라. 엘도르 기사단뿐만 아니라 브레일 백작가의 모든 기사는 규율에 묶여있다. 견습 기사도 예외는 아니야. 보여준다고 해서 멋대로 나불대지는 않는다는 소리다.”


애당초 직접 보지 않으면 믿지도 않겠지만.


케이드가 덧붙였다. 이곳의 기사들은 어중이떠중이 용병들과는 다르다. 케이드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리안이 여태껏 보고 상대해왔던 이들이 아닌 진짜 기사들이라고.


“...그래요.”


자신의 검을 내려다보던 리안이 순순히 수긍했다.


“나도 궁금하네.”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어디까지 볼 수 있는지.


리안은 떨리는 다리를 다잡고 다시금 자세를 잡았다. 흔들리던 칼끝이 차츰 안정을 되찾았다. 이미 일전의 전투로 검의 내구도는 한계에 달해 있었다. 여기서 마나를 억지로 불어넣으면 부러질지도 몰랐다.


상관없어.


제프가 선물한 검은 리안의 안전과 성장을 바라는 마음에서 나왔다. 설령 부러진다 한들 검으로서의 본질과 제 쓰임을 다했으니, 괜히 아끼겠다고 창고에 박아두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었다.


결심한 리안은 눈을 감았다.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리자, 은색의 검날을 타고 보랏빛 광채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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