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으로 모험 격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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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서로
작품등록일 :
2024.07.23 03:00
최근연재일 :
2024.09.01 02:34
연재수 :
1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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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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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8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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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글자
21쪽

석벽 미로 (4)

DUMMY

사각, 사각.


정도운은 성실하게 책상 위에 앉아 공부를 시작했다. 여느 때처럼 한쪽 벽면에는 미로의 지도와 지금까지 겪은 걸 토대로 추가된 메모지가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미로에서의 경험을 반추하고, 새로 나온 패턴을 익히며, 모여진 정보를 토대로 실수했던 점, 부족하고 반성할 만한 점을 보완한다.


휘릭!


팡!


그가 목검을 휘두르자 그대로 사람 키만 한 목제 수련대가 산산이 박살 난다.


“······이건 검을 휘둘렀다기보다 숫제 강철로 된 몽둥이를 휘두르는 것 같군.”


스스로 시현했지만 혀를 내두를 정도의 위력이다.

거기다 능력치가 오를수록 하루가 다르게 점점 강맹해지고 있었다.


【모험가 정도운의 성장치】

【육체 0.07】

【생명 0.09】

【속성 0.09】

【능력 0.09】


그동안 능력치는 다시 한 번 올라, 이제 미로에 들어오기 전과 후의 정도운은 아예 다른 사람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의 격차가 나 있었다.

그날 밤.


해가 저물 때까지 목검을 휘두르던 정도운은 불쑥 몸이 근질근질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


처음에는 목검을 쥔 손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근질근질하고, 무언가 용솟음치려는 듯한 여력(餘力)이 손목을 타고, 팔뚝, 어깻죽지, 이윽고 상반신을 통해 전신으로 퍼져나간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시원하게 움직이다 보면 지금 당장이라도 무언가가 개화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목적지가, 요원하지만 동시에 바로 그 앞에 있다.


‘이 벽을 넘으면 무엇이 나타날까.’


정도운은 어떤 중대한 실마리를 잡은 것처럼 밤이 깊도록 수련을 이어나갔다.


파앗!


그리고 어느 순간, 머릿속으로 땀을 흘리며 수련하는 자신의 육체 곳곳이 고속카메라로 찍힌 것과 같은 장면이 떠오른다.


“···!”


그것은 찰나만 재생된 필름처럼 금세 자취를 감추었지만, 정도운은 그러한 장면들의 정체를 어렵지 않게 알아보았다.


그럴 것이 이미 몇 번이고 보아온 것.


그동안 약탈자들을 죽이고, 보상을 얻으면서 보아온 환영들이다.


‘이건 설마.’


- 조만간 고유 능력을 사용하시겠어요. 아니, 이미 사용하고 있으신가?

- 단련을 위해 열심히 흘리는 땀은 언제나 보답을 받는 법이죠. 훌륭합니다.


왜 지금 이 대화가 떠오르는 걸까.


‘이 환영들이 고유 능력과 관계된 거라면, 내 능력은 방금의 장면하고 연관이 있는 건가?’


정도운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감각을 완전히 개화하는 때, 그가 이 방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거라는 것을.


그날은 그렇게 지나갔다.


그리고 다음날.


모험가 생활 33일 차.

석벽 미로 탐사는, 3일 차.


모험가 정도운의 새로운 날이 밝았다.



***



[ 석벽 미로에 입장하였습니다. ]

[ 모험을 공략하십시오. ]


빛이 번쩍한 순간, 정도운은 석벽 미로 안에 들어와 있었다.


크룩!

키룩!


들어오자마자, 아귀 한 무리와 마주한다.


‘여덟 마리.’


작지만 잘 뭉쳐 다니며, 영악하게 인간을 사냥하고 식인을 하는 미로의 괴물들.


스릉···


이제는 익숙해진 아귀들을 상대로는 문답무용이었다.


스거거걱!


아귀들이 무언가 대응할 틈도 없이 정도운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놈들이 이전보다 더욱 수월하게 짚단처럼 베여 나갔다.


[ 공적, 아귀 무리를 물리쳤다. ]

+모험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85동화를 얻었습니다.


처억.


한바탕 칼춤을 추고 난 그의 전면에, 모험가 세 명이 서 있었다.


“오~ 아직도 이 구역에 돌아다니는 놈이 있었나? 이쪽은 다 정리된 줄 알았는데.”

“옆 놈들 구역에서 흘린 놈인가 보지. 크흐흐, 차라리 잘됐어. 우리가 먹자고.”


정정.

모험가가 아니다. 약탈자들이었다. 게다가 이제 막 다른 통로에서 일을 저지르고 온 듯, 그들이 각자 꼬나 쥔 날붙이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모두 쿠크리를 닮은 생소한 도검.’


정도운은 이제 약탈자들을 피하지 않았다.

피할 이유가 없었다.


“···.”


오히려 그들을 향해 성큼성큼 나아가며 그들을 노려보았다.


‘또 너희들이냐.’


약탈자들.

이놈들은 정말 질리지도 않고 나타나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는 내 주제를 알고 오지랖은 부리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놈들 때문에 선량한 모험가들이 피해를 많이 본다.


솔직히 보다 보니, 이제는 아귀보다도 약탈자들의 행태가 눈살이 더 찌푸려졌다.


‘그러고 보니··· 그렇군.’


정도운은 문득 아귀들이 미묘하게 이쪽으로 달려오는 듯한 첫 광경을 떠올렸다.


아귀들도 약탈자 무리에게 쫓겨 도망치는 중이던 것이다.


‘······뭐가 됐든 이놈들은 이제 징글징글하다.’


그런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약탈자 삼인조가 슬금슬금 거리를 좁혀왔다.


“캬캬, 이게 웬 횡재냐!”

“순번을 지켜, 이놈은 내 거야!”

“싫은데~? 먼저 먹는 사람이 임자···!”


쩌엉!


정도운의 검이 제자리에 서서 한 박자 늦게 휘두른다. 기다렸다는 듯 양쪽에서 떨어지는 쿠크리가 동시에 틀어막혔다.


“어?”

“어?”


두 놈이 멍청한 신음을 흘렸다.

한 편의 연극 같은 교착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휘리릭!


정도운이 두 놈 사이를 비집고 정면으로 빠져나왔다.


“뭐야?”


그가 눈앞에서 사라지자 놈들은 당황하여 정도운의 자취를 쫓았다.


“크흐흐, 뭐하냐 너희? 뒤야 멍청이들아.”

“아하 뒤로···!”


푸화악―


“커, 커허억.”

“끄륵.”


앞장선 두 놈의 목에서 동시에 피 분수가 쏟아져 나온다.

마지막 한 놈은 도검의 납작한 면을 퉁퉁 치면서 여유롭게 걸어오다가 놀라서 움찔했다.


푸욱―!


동료들이 당한 모습이 비현실적이라고 느낄 즈음, 정도운의 검이 마지막 약탈자의 심장을 꿰뚫고 나왔다.


뒤늦게 정도운이 쇄도해온 바람이 불었다. 약탈자는 쿨럭, 역류하는 선지피를 토해냈다.


“너, 넌 대체···.”

“···.”


털썩.

빰빰!


[ 공적, 약탈자들을 물리쳤다. ]

+모험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1은화 99동화를 얻었습니다.


이제는 익숙해진, 세 가지의 환영이 뇌리를 스치는 것을 느끼며 정도운은 미로의 길을 나섰다.


그의 눈에는 은은한 백색 안광이 깃들어가고 있었다.



***



나흘?

아니.

닷새인가.


시간이 순식간에 흘렀다.


미로에 적응이 끝나서인지, 공략에 집중해서인지 날짜가 넘어가는 느낌은 금방 금방이었다.


“놈, 놈이다!”

“뭐라고? 정말 그놈 맞아?”

“비, 빌어먹을! 벌써 이쪽 구역까지 넘어온다고?”

“튀, 튀어···크아아악!”


정체를 알 수 없는 공포.

이제 미로의 약탈자들에게 정도운은 그렇게 불렸다.


조직적으로 정보를 공유하기에 누군가 그들을 사냥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아는데, 누구도 그를 직접 만나서 살아 돌아온 장본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벅, 저벅.


그동안 정도운이 느낀 것은, 날이 갈수록 미로의 약탈자들이 점점 극성으로 활개 친다는 것이었다.


‘이상하다. 이놈들 숫자가 이 정도였나?’


쓰려트려도 쓰려트려도 끊임없이 나타난다.


조직적인 움직임이 있다는 거야 석벽 미로의 초반부터 알았지만, 그래봐야 이 드넓은 미로에서는 일부일 거라는 믿음도 최근에 와서는 많이 무뎌진 상태였다.


‘어떻게 된 게 도리어 수가 늘고 있어.’


단순히 미로만 거닐어도 약탈자 놈들을 하루에 몇 번을 마주치는지 모른다.


게다가 그 머릿수도 머릿수지만, 기존 삼인 일조로 움직이던 놈들 외에도 개인 단위, 혹은 그 이상의 아예 파티를 이루어 약탈하고 다니는 놈들이 나타난 게 컸다.


즉 원래 없던 뉴페이스들.


이건 기존 놈들이 아니라 외부에서 새로 들어오는 놈들이라고 봐야 했다.

그러니 그 수준도 모두 달랐고, 패악질의 수위도 천차만별이었다.


‘미로가 혼란스럽다. 이곳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알렉스에게 요즘 바깥에 석벽 미로에 대한 소문이 무성하다는 언질을 듣긴 했어도,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요즘 미로를 보고 있으면 이미 기존 생태계가 무너진 게 아닌가 싶었다.


빰빰!


[ 공적, 강력한 침입자를 물리쳤다. ]

+모험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3은화 69동화를 얻었습니다.


[ 공적, 미로의 불청객을 물리쳤다. ]

+모험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4은화 5동화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과 별개로, 정도운의 주목적인 미로 탐사는 거의 막바지 단계에 이르러 있었다.


미로의 공략률은 후반부에 달했고, 이제 조금만 박차를 가하면 보스 사냥으로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는 수준이었다.


“어, 어디냐!”


푸욱.


공중에서 떨어지며 약탈자의 급소를 관통한 정도운은 유유히 검을 갈무리했다.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크흑.”

“요즘 밖에서 들어온 놈들이 기승을 부리니 조심하세요.”

“예, 예··· 정말 고맙습니다···.”


타이밍 좋게 도움을 받은 모험가들은 그에게 무언가 하나라도 더 챙겨주려고 했다.

그런 것에 익숙지 않은 정도운은 손사래를 치며 거부했다.


“괜찮습니다. 그렇게 순수한 의도로 잡은 게 아니에요. 어차피 이놈들 잡으면 보상이 떨어지거든요.”

“그, 그래도 괜찮습니다, 이거라도···!”

“···.”


그러는 동안 정도운의 성장은 눈부시게 거듭되어서, 능력치는 몇 계단이나 상승했다.


그러자 머잖아 성장세가 둔해지는 게 느껴졌다.


‘미로에서 얻을 수 있는 건 다 얻었다는 건가.’


그리고 또 하나.

몸이 근질근질했던 그 기묘한 감각 또한 날이 갈수록 선명해졌다.


‘···이건 언제까지 지속되는 거지.’


닿을락말락 계속 애가 타나, 알 수 없었다.


[ 석벽 미로를 탈출합니다. ]

[ 금일의 공략이 정산되어 지급됩니다. ]

[ 석벽 미로의 모험기(冒險記)가 모험의 서에 기록됩니다. ]

[ 수련을 증명하였습니다. ]

[ 생존을 증명하였습니다. ]

[ 집필자의 석벽 미로 공략률 85% ]

[ ······ ]

[ 정산 결과 ]

+대량의 모험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8은화 20동화를 얻었습니다.

+능력치 전반이 상승합니다.

+전리품이 배낭에 저장됩니다.


공략률 85%

조금만 더 하면 보스방을 찾아갈 수 있게 되었다.


‘슬슬이군···.’


그 이튿날.


정도운은 평소처럼 약탈자들을 처리하며 미로를 돌아다녔다.


얼마 전부터 그랬지만 이제는 무력도 완전히 진일보하여 아귀도, 함정도, 약탈자도, 석벽 미로의 각종 변수도 더는 그의 위협이 아니었다.


‘알렉스, 무루냐는 잘 지내고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다.

이 경우에는 잘 살아있을까, 가 맞겠지만.


‘잘 있었으면 좋겠네.’


그렇게 어느 외진 장소를 찾았다.


정도운은 구석에서 석벽 잔해에 은밀히 가려져 있던, 먼지가 수북한 석판 하나를 발견해 들어 올렸다.


“오··· 석판이구나. 한동안 안 보여서 모두 모은 줄 알았는데. 이 미로에 아직도 내가 놓친 부분이 있었네.”


풀풀 날리는 먼지를 털어내자 그에 가려진 문구가 드러난다.


[ 이 미로의 이야기는, 단순히 어느 모험담이 모험으로 변하였으니 그것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만이 진정한 결말에 이르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

[ ······ ]

[ 조사에 의하면, 어째선지 당시에도 바깥에 무성한 소문이 돌아 미로 내에 질 나쁜 약탈자들이 기승을 부렸다고 한다. ]

[ 그리고 우연인지, 공교롭게도 지금의 미로 상태도 그렇다. ]

[ ······ ]

[ 이 미로 이야기의 주인공은, 탐사 도중 사람들의 비탄 섞인 구원의 요청 소리가 들리면 주저하지 않고 진로를 바꾸어 악인들을 처단하는 데 수고를 아끼지 않는 호인이었다고 한다. ]


“···뭐?”


정도운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이번 석판의 내용은 무언가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외부의 소문으로 약탈자들이 기승을 부리고, 모험가가 모험 탐사 도중 틈틈이 약탈자들을 처단한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얘기가 아닌가.

들어봤다기보다, 현 미로의 상황과 그의 행적과 유사한 이야기였다.


‘우연인가?’


그는 의아함을 느끼며 계속해서 읽었다.


중간중간 지워진 부분도 있었으나 건너뛰면 그래도 간혹 온전한 문장이 보였다.


[ ······ ]

[ 내가 잘못 생각하였다··· ]

[ 왜 잊고 있었을까. 몇 번이고 미로의 결말을 보았으면서 왜 이 모든 걸 연결 지어 생각하지 못했을까. ]

[ 누굴 탓하리오. 상황이 이 지경이 된 건 전적으로 미리 대비하지 못한 나의 탓이다. ]


“······.”


[ 후배 모험가들이여, 이 석벽 미로의 진정한 이야기는 가려져 있다. ]

[ 그러나 보상 때문에 그 진정한 결말을 보기 위해 노력하지는 말라. 부족한 선배가 감히 조언하건대, 부디 모험가로서 자만하지 말고 그저 형식적인 이야기의 겉표면만 따르다 조용히 탈출하라. ]

[ ······과욕은······ ]

[ 애초에 이곳을 제대로 공략하려거든··· 남매의··· 비극을···. ]

[ ······그들의 음험함은······나의 예상을 완전히 뛰어넘었······ ]


문구라기보다, 이제는 마치 누군가가 남긴 일기와도 같은 내용이었다.

뒤의 내용은 오래된 풍화와 함께, 누군가에 의한 고의적인 배제로 알아볼 수 없게 흐려져 있었다.


‘남매라니, 무슨 소리지?’


지금까지의 석판 중 완전히 처음 언급되는 내용이다.


정도운은 이미 입수한 웬만한 석판의 내용은 분석을 마친 상태였지만, 이번만큼은 처음부터 끝까지 무슨 소린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이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짐작되는 건 있었다.


‘그러니까··· 석벽 미로에는 진짜 이야기라는 게 있는 거로군.’


그리고 진정한 결말을 보느냐, 안 보느냐에 따라 최후의 보상도 달라지는 모양이었다.


정도운은 흥미로운 사실에 턱을 문질렀다.


‘신기하네. 지금까지는 모험별로 정해진 패턴이 보이기는 하지만, 그저 탐사를 통해 공략률을 올리고 빠져나가면 그게 졸업이고 전부인 줄로만 알았는데.’


석벽 미로에는 형식적인 이야기.

그리고 진정한 결말.


두 가지 진행이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모험가는 ‘집필자’로서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그저 흘러가는 형식상 전개가 아닌 진짜 이야기를 이끌어 낼 수도 있는 듯했다.


‘······뭐 궁금하긴 하지만 먼저 이 길을 걸은 사람이 위험하다고 하니 굳이 쓸데없는 리스크를 질 필요는 없겠지.’


결정을 내렸다.


지도를 꺼낼 것도 없이, 고개만 돌려 보스방의 위치를 가늠한다.


보스인 흰 뱀을 두른 갑주 아귀는 죽어도 다음날이 되면 다시 나타나지만, 너무 늦게 가면 다른 모험가가 선수를 칠 수도 있었다.


결정을 내렸으면 바로바로 움직이는 게 이롭다.


‘어디 보자, 보스방이 이쪽에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파앗!


그는 길을 서둘렀다.

그러던 중이었다.

정도운은 갑작스럽게, 그리고 마침내 어떠한 감각이 임계점을 넘었음을 인지했다.


흔히 각성이라고 부르는 변화.


지난 며칠간 닿을 듯 말듯 진척이 없던 그것이 그야말로 불쑥 찾아온 것이다.


“···!”


아아.

마침내.


시작은 환영이 보이는 것이었다.


초고속 카메라로 촬영한 듯한, 그가 몸을 움직이는 장면이 구석구석 찰나에 수십 장이 지나간다.


그와 함께, 머릿속에서 또 다른 새로운 장면 떠올랐다.


‘이건···?’


고오오오.


어느 고풍스러운 종이의 위.


신비한 잉크로 이루어진 어느 두 글자가 지면(誌面) 아래에서 서서히 부상하는 장면이었다.


아주 천천히 글자가 올라온다.


그리고 곧 낯익은 형태를 갖추어갔다.


‘···? 이건 한글···인가?’


그렇게 읽히지만, 아닌 것 같았다.


정도운은 평소보다 훨씬 길게 지속되는 그 환영 속에서 한 가지를 깨달았다.

여태까지는 단순히 능력치를 올려서 강해졌기에 각성의 조짐을 보이는 거라고 이해했다.


조금 달랐다.


이 현상은, 그가 이제껏 수집하고, 쌓아 올린 모든 모험의 기록.

모험기(冒險記)라고 불리는 것이 쌓이고 쌓여 모험의 서 저 아래로부터 그의 고유(固有)를 수면 위로 부상시키는 과정이던 것이다.


지금까지 그가 한 행동들이, 모험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쌓여, 무엇 하나 헛되지 않다는 듯 그의 등을 떠밀어 위로 올려준다.


이윽고 부상을 마치며, 그는 어느새 완전히 떠오른 글자를 읽어냈다.


무공(武功).


나침반에 의한 번역인지 몰라도, 그의 눈에는 정확히 그렇게 불리는 두 글자였다.


콰앙―!


뒤이어 몸 안에서 무언가 터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것은 흐름이었다.


콸콸콸.


전신 곳곳의 길이 열리며, 그에게 잠들어있던 모든 생명력이 활성화된다.

무형의 힘이 폭발하듯 심장으로부터 출발하여 전신을 순환하기 시작했다.


[ 당신의 고유(固有)를 인지합니다. ]

[ 집필자의 저술이 일정 수준에 도달합니다. 3장, 고유의 증명이 열립니다. ]


전신에 흐르는 은은한 기운을 느끼며 각성을 마쳤을 때.

그는 느낄 수 있었다.

이 순간, 자신이 각성 전과는 본질적으로 한 차원 다른 존재로 거듭났음을.


정도운은 눈을 반개했다.


능력이 활성화되며 백색 안광이 서기(瑞氣)처럼 흘러나왔다.


“호오. 이건 또.”


그런 그의 앞에 두 사람이 서 있었다.


닷새간 끈질기게 그를 추격해온 남의인과, 얼마 전부터는 거의 끌려다니다시피 동행해온 약탈자 울리였다.


“히익! 나리, 저놈, 저놈이에요!”

“확실하냐?”

“예, 제가 그때 똑똑히 봤다고요. 저놈이 맞습니다!”

“알겠으니까 그리 호들갑 떨지 마라.”

“그, 그건 그렇고 나리. 저, 저는 여기까지 온 것만도 역할을 다하지 않았습니까? 진작에 두목의 귀환 명령을 무시한 지도 오래 되었다고요. 이러다 정말 맞아 죽을지도 몰라요. 그, 그러니 이만 가봐도 될까요?”


울리는 정도운을 보고 부르르 떨더니, 남의인의 대답을 제대로 듣기도 전에 바로 줄행랑쳤다.


“···이봐, 잠깐! 저런 쯧쯧··· 모험가라는 녀석이 저렇게 겁이 많아서야. 뭐 그동안 말동무로는 나쁘지 않았다만. 하하.”


남의인이 피식 웃고는 다시 정도운을 돌아본다.


“혹시나 애먼 놈을 잡아선 안 되니 한 번 더 물어보겠다만, 네놈이냐? 닷새 전에 저기 저놈의 일행을 쓰러트린 녀석이.”

“······보아하니 약탈자는 아니신 것 같은데요. 제게 무슨 용건인지요.”

“나? 나는 약탈자는 아니지. 하지만 약탈자가 뭐 따로 있겠나? 이 미로에 들어온 놈들이 워낙 심하게 굴어서 구분이 잘 가는 거지. 원래 방금 전까지 멀쩡하다가도 무언가를 뺏으면 그게 바로 약탈자인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다면 상황에 따라 사실상 구분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

“···.”


정도운은 슬며시 미간을 찌푸렸지만, 무어라 반박하지는 않았다. 이 상황에 그게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았으니까.


“뭐 좌우간, 찾는 놈이 맞으면 되었다.”


마치 흥미로운 놀잇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남의인은 눈웃음을 흘렸다.


“···.”


정도운은 그에 맞서 검을 들었다.



***



석벽 미로의 구릉지대.


콰앙!


참다못해 탁상을 부순 제이슨은 분이 안 풀리는 듯 손톱을 질겅거리며 다리를 떨었다. 그의 인내심이 진작 한계에 도달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치잇, 골치 아픈 놈 해결하라고 보냈더니, 도대체 어디서 굴러먹고 있는 것이냐! 본 파의 대업 앞에는 한 치의 오점도 용납되지 않거늘······ 내가 이래서 바깥 구역 놈과는 상종을 하지 않는 것이야. 업신여길 줄이나 알지, 자기보다 아래라고 생각하면 당최 약속을 지키는 경우가 없구나!”


제이슨이 길길이 날뛰던 그때 어디선가 교신이 날아왔다.


흠칫!


그는 언제 화냈냐는 듯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공손히 나침반으로 온 교신을 받았다.


“···! 예, 당주님. 예, 예. 예? 오오···! 드, 드디어입니까···? 알겠습니다. 물론입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하면, 예, 지금 즉시 병력을 일으켜 출진하겠습니다. 예! 존명!”


교신이 끝나고.


쾅!!


붉은 기운을 휘감은 주먹이 바닥을 내리치자 파편이 비산한다.

기백이 넘는 약탈자들의 소란이 일제히 잦아들었다.


그 압도적인 파괴 현장을 만든 존재, 제이슨에게 시선이 집중된다.


피어오르는 흙먼지 속에서 제이슨은 주먹을 위로 척 치켜올렸다. 그리고 눈앞의 약탈자들을 향해 소리쳤다.


“자, 애송이들아, 그동안 감질나게, 깨작깨작 활동하느라 고생했다! 버러지 같은 놈들치고 오래도 참았구나!”

“···!”

“기뻐해라, 우리는 이 시간부로 석벽 미로를 모조리 청소할 것이다! 지금부터 원 없이 약탈하고, 원 없이 먹어 치워라! 가서 미로의 벌레들에게 네놈들의 본성을 보여주는 거다!”

“우와아아―!!”

“캬카칵, 이거지!”

“끼요오오옷―!”


모두가 환희에 젖어 열광했다.


위이잉.


어디선가 파리가 날아와 단상 한편의 가려진 주검 위에 내려앉았다.


불과 몇십 분 전, 약탈자 몇 놈이 언제까지 참아야 하느냐고 불만을 표했다가 제이슨에 의해 곤죽이 된 사체였다.

그들은 어느새 모두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있었다.


정도운의 미로 졸업이 근접한 이때, 그렇게 미로의 판세가 격동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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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석벽 미로 (2) 24.07.24 61 3 21쪽
2 석벽 미로 (1) 24.07.23 76 4 15쪽
1 모험의 시작 24.07.23 94 3 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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