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으로 모험 격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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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서로
작품등록일 :
2024.07.23 03:00
최근연재일 :
2024.09.01 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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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4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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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영웅과 악당

DUMMY

보스방을 향한 길을 가로지르며, 알렉스는 앞서가는 정도운을 보고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한 일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모르겠지.’


입문경 둘이서 개척경의 모험가를 잡았다.


명문가의 자제로서 그동안 수많은 인재를 두 눈으로 보았지만, 정도운 같은 이는 단언컨대 알렉스가 아는 범위 내에서도 처음이었다.


누가 묻는다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밖에 나가면, 이 친구는 분명히 굉장한 모험가가 될 거야.’


언젠가 위대한 모험가로 명성을 떨칠 것이다.


“다 왔어.”


두 사람은 보스방을 앞둔 마지막 코너에 도달했다.

드디어 여정의 끝이 보이는 기분이었다.

정도운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 왜 그래?”

“아니, 누군가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아서.”

“지켜보고 있다고?”


알렉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통로의 끝까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도운의 눈에는, 저 끝에 선 누군가가 그들을 지켜보는 모습이 보였다.


그건 사람이라기보단 눈부신 실루엣 같은 것이었다.


‘아니, 한 사람이 아닌데.’


자세히 보니 두 사람이었다.

남자와 여자.


두 실루엣은 우애가 깊은 사이처럼 손을 꼭 맞잡고 있었다.

환영은 곧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


정도운은 보스방에 발을 디뎠다.



***



홍련파의 희망, 흑의(黑衣)를 입은 남자 자칸은 눈을 가늘게 뜨고 전방을 주시했다.

저 멀리 보스방이 기다리고 있는 방향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그가 뜸을 들이자 부당주가 물었다.

자칸을 보필하는 이는 이제 부당주뿐이었다. 현상금 사냥꾼은 전투부장 셋에게 맡기고 왔기 때문이었다.


“아니······.”


불길한 아우라를 풍기는 검은 인영(人影)이 통로 끝에 서 있었다.

자칸에게만 보이는 환영이었다.


“누군가 서 있어.”

“누가 말입니까?”

“네놈들 말이야. 이런 곳에서 멀뚱히 서 있으면 위험하다~?”


그때 약탈자 무리가 두 사람을 발견하고 비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자칸의 무심한 눈이 그들을 향했다.


잠시 후.


“쿨럭.”


약탈자들이 눈 깜짝할 새 도륙되어 미로에 널브러진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홍련파의 지원을 받고 모험의 서 진행 또한 입문경 후반까지 끌어올려 둔 자칸이었다.


조무래기들이 상대가 될 리 없었다.


손쉽게 약탈자 무리를 몰살시킨 자칸은 다시금 보스방 너머를 보았다.

어느샌가 검은 환영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무엇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감각이 그의 폐부를 자극했다.

아직은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으나, 그 감각은 보스방으로부터 전해져 오고 있었다.


“서두르지.”

“예.”



***



보스방에 들어서는 순간 미지근한 공기가 퍼져왔다.


타닥, 타닥.


이제는 익숙한 모닥불을 중심으로 십여 마리의 아귀, 그리고 한 마리의 거대한 갑주 아귀가 둘러앉아 있다.

주변의 아귀들이 사람 허리 정도의 키에 깡마른 배불뚝이 체구라면, 갑주 아귀는 머리도 하나는 더 크고 덩치가 남달랐다.


시싯.


요대에 묶여있는 흰 뱀이 붉은 눈빛을 반짝인다.


항시 전투 모드인 듯한 그 살벌한 시선이 목표물을 발견했다. 정도운과 알렉스였다.


‘무언가 비정상적인 흉성(凶性)이 느껴진다. 조종이라도 당하고 있는 건가?’


위화감이 느껴지지만, 저놈까지도 보스의 한 부분임은 분명했다.


【 Lv.5 아귀 장군과 흰 뱀 】


아귀 장군 또한 동일한 눈빛을 띠고, 명칭도 같은 개체 취급이었으니까.


키룩?


아귀들이 침입자를 발견하고 일제히 조악한 날붙이를 쥐며 일어났다.


두 사람이 시선을 교환했다.


“고맙다, 솔직히 네가 없었으면 나는 바루마한테 당했을 거야.”

“어··· 갑자기?”

“그냥 말하고 싶더라고. 그럼 잔챙이부터 걷어내 볼까?”

“그거 좋지.”


두 사람이 동시에 다른 방향으로 튀어 나갔다.


상대의 수도 그들을 포위할 정도가 아니니, 게릴라전처럼 전력을 깎아낼 요량이었다.


키룩!

크에엑!


좌우로 갈라진 둘이 아귀들을 단숨에 베어갔다.


두 사람의 실력에 이제 일반 아귀 정도는 문제가 아니었다.


크롸롸!


그때, 아귀 장군이 포효했다. 놈은 그 몸집에 어울리지 않는 대도(大刀)를 들고 일어섰다.


알렉스는 마지막 한 놈을 마무리한 후 말했다.


“혼자 할 수 있지? 나는 보스를 잡은 이력이 필요 없으니 보상은 네가 독식하도록 해.”

“물론······ 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저거 생각보다 강해 보이는데?”


크롸롸롸―!


쿵, 쿵, 쿵.


아귀 장군과 흰 뱀.

두 쌍의 붉은 눈이 어느 쪽을 노릴지 번갈아 본다.


그리고 그때였다.


스르륵.


돌연 아귀 장군의 위로 더욱 거대한 투영이 겹치듯 내려앉았다.


‘뭐지?’


예의 환영은 곧 본체에 녹아들듯 사라졌다.

그리고 기분 탓인지, 그때부터 아귀 장군의 눈빛이 더욱 강렬한 안광을 토해냈다.


알렉스는 슬금슬금 정도운이 있는 곳에 합류했다.


“힘들 거 같으면 도와줘?”

“어··· 아무래도 그래야 할 거 같다.”


쿵, 쿵, 쿵!


“크롸롸롹!”


마침내 놈이 움직였다.


두 사람의 행동은 일사불란했다.


쾅!


아귀 장군의 대도가 땅을 찍자 땅거죽이 높게 치솟는다.


정도운은 백색 안광을 터뜨렸다. 좌측에서 검을 휘두르며 들어갔다.


사악!


그 순간.


아귀 장군의 허리를 감싼 뱀이 기기묘묘한 각도로 목덜미를 물어왔고, 그는 순간적으로 몸을 비틀며 녀석의 독니가 목덜미를 무는 것을 피해냈다.


‘주인의 빈틈을 오히려 역습의 찬스로 만든다. 마치 호위무사처럼···!’


성가신 조합이다.


알렉스가 뒤이어 들어오며 푸른 기운이 아른거리는 검을 내리쳤다.


이번엔 아귀 장군이 대응한다.


콰앙!


알렉스는 오히려 반격을 당해 뒤로 훌훌 날려졌다. 날아가는 그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뭐야 이 힘은···!”


강하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정도운의 말대로 이건 석벽 미로 보스의 수준이 아니었다.


“쳇.”


두 사람은 거리를 벌리고 녀석을 탐색했다.

정도운은 말했다.


“얘네, 영혼의 단짝 같은 거야. 말 그대로 사각(死角)이 없어. 엇박자로 들어가도 기가 막히게 빈틈을 메꿔준다고.”

“크크크. 영혼의 단짝이라니.”


알렉스가 자세를 잡다가 그 포인트에 뻘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만 좀 웃겨. 이거 진짜 위험하다니까.”

“그래서 웃기게 한 거야. 긴장 풀라고.”

“말은······.”


크롸아아―!


아귀 장군이 대도를 들고 일순간 허공을 날 듯이 박찼다. 목표는 무기를 맞댄 알렉스였다.


“···!”


예상을 뛰어넘는 속도에 알렉스가 대경실색하며 옆으로 몸을 던졌다.


콰앙!


그대로 놈이 덮친 석벽의 한쪽 벽면이 박살 나고, 정도운의 안광이 그 배후를 노리며 파고들었다.


사악―!


기다렸다는 듯 흰 뱀이 움직인다.


서걱!


그러나 대비하고 있다면 전처럼 애먹을 이유가 없었다. 정도운은 흰 뱀의 견제를 뚫고 가볍게 아귀 장군의 등짝에 일격을 먹인 후 빠져나왔다.


두 쌍의 시뻘건 눈들이 정도운을 직시했다.


“이크.”


미로의 보스, 거기다 환영을 흡수한 아귀 장군은 분명 강력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합공을 이겨낼 정도는 아니었다.


하물며 두 사람은 지금 괴조 바루마와의 싸움으로 감각도 한껏 물올라 있었다.


두 사람은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며 아귀 장군의 방비를 점점 무너뜨렸고, 머잖아 손발이 어지러워진 아귀 장군은 결정적인 빈틈을 허용했다.


서걱!


먼저 흰 뱀의 목이 잘린다. 알렉스의 검이었다. 정도운은 수그리는 그를 타고 넘어가 아귀 장군의 목을 양단했다.


쿠웅···


육중한 몸뚱어리가 쓰러지며 지축이 울린다.


빰빰―빠라밤!


[ 공적, 보스 아귀 장군과 흰 뱀을 물리쳤다! ]

+대량의 모험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5은화를 얻었습니다.


“후우···.”


두 사람은 숨을 골랐다.


그리고 그때였다.


처억.


새로운 두 인물이 보스방에 진입했다.

자칸이라는 이름의 흑의인 남자와 그를 보필하며 온 부당주였다.


“···.”


양측 간에 침묵이 흘렀다.


먼저 반응한 건 부당주였다.


“버러지 같은 놈들이 감히 본 파의 대업을 망쳐······!”


양손에 붉은 기운을 휘감아 출수하려던 부당주는 직후 멈칫했다.


한쪽 벽면.


누군가 벽에 기대어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정갈한 상앗빛 수도복(修道服)을 군데군데 찢어 활동복처럼 만든 산발의 여자였다.


“아서, 여물지 않은 것들은 여물지 않은 것끼리 붙게 두지?”

“···!”


모두의 이목이 한쪽 벽면에 팔짱을 끼고 있는 여자에게 돌아갔다.


“히, 히끅.”


산발녀는 오들오들 떠는 여자 하나를 인질처럼 옆에 두고 있었다.


“무루냐?”


정도운과 알렉스가 그녀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 이상 아는 체를 하진 못했다. 반갑게 인사할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산발녀의 아우라도 보통이 아니었고.


“수도원의··· 방랑 마녀······!”


부당주는 감히 경거망동하지 못했다.


“네놈은 뭐 하는 놈, 아니 년이지?”


자칸이 검을 들어 그녀를 겨눈다.


“주, 주군. 보기 드문 고인(高人)이시니 제가 잘 말해보겠습니다.”


오히려 부당주가 놀라 그를 만류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향해 운을 떼었다.


“녹빛 요람의 진령사(眞靈士) 후보시여, 도대체 여기까진 어쩐 일로······?”

“네가 알 바 있나? 괜한 말로 논점을 흐리려 하지 마라.”

“여부가 있겠습니까. 하면, 제가 끼어들지 않는다고 하면 개입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무슨 일이 있더라도······.”

“운도 실력이며 약육강식도 자연스러운 섭리이지. 죽어 나자빠져 대지의 양분이 된다면 거기까지인 거다.”

“그러시군요.”

“뭐 그건 됐고, 한창 좋은 장면에 끼어들지 말라는 거야.”

“예, 물론입니다.”


‘저 여자가 더 강한 건가?’


정도운은 왜인지 얼어붙은 알렉스를 일별했다.

그가 보기에, 눈앞의 흑의인은 이 상황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리고 왜인지 흑의인을 보자, 무언가 속에서 불끈하는 감정이 있었다.


‘이건··· 분노?’


오늘 처음 보는 녀석인데. 왜 화가 나는 거지?


다른 이유는 없었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왠지 흑의인을 향한 은은한 적개심이 솟구쳤다.


“주군, 놈들을 참하여 서둘러 대업을 마무리하십시오.”


부당주가 자칸에게 속삭였다.


“······그 이야기라는 건, 저런 놈들로도 성에 차는 건가?”

“어쨌거나 보스를 잡은 자들입니다. 그 행적만은 옛 영웅과 같으니, 지금 정당하게 결투하여 저들의 목숨을 앗아간다면 살성과 동일한 행적을 가져갈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흠···.”


자칸은 불쾌한 눈으로 산발녀를 흘겼다가 되레 뭐? 하는 살벌한 시선을 받고 움츠러들었다.


저 여자에겐 그저 존재만으로 본능적으로 그를 압도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자칸은 차오르는 굴욕감을 애써 억누르며 정도운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너희 두 놈, 지금부터 너희를 베겠다.”

“우리가 싸워야 할 이유가 없는데요.”

“약탈자를 만난 적이 있나?”


억지를 부리는 자칸의 눈에 서서히 어두운 안광이 깃들기 시작한다.

옛 살성의 그것과 비슷한 광경이었다.


“악당이 인간의 존엄을 짓밟는 데는 이유가 없지. 자연재해와 똑같다고 생각해라. 그편이 이해하기 편할 것이다.”

“······.”


정도운은 하는 수 없이 검을 들었다.

사실 그 역시도, 상황이 조금 특이할 뿐 상대가 약탈자와 같다면 물러날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알렉스는 이번에야말로 한 걸음 물러났다.

정도운은 그걸 느꼈음에도 이번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부당주도 물러서면서 적당한 공간이 만들어졌다.


자칸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자, 그럼 시작하지.”



***



카앙!


검은 안광과 하얀 안광이 서로를 노려본다.


첫 격돌의 순간 자칸은 깨달았다.

눈앞의 이자는, 부당주가 지나가듯 말한 살성의 대척점··· 미로의 주인공인 영웅이라고.


‘하지만 어찌···? 영웅은 없다고 하지 않았나?’


정확히는 앞길에 방해가 될 만한 그런 건 굳이 준비하지 않았다고 했을 터였다. 하지만 그렇다면 눈앞의 이자는 무언가. 영웅이 미로에서 자연 발생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리고 그걸 깨달은 순간이었다.


자칸의 의식은 낯선 장소에 불려와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흉흉한 어둠을 품은 기인(奇人)과 마주했다.


“홍련파 일당이라고 했나··· 이야기에 대한 이해가 빈약하군.”


흑발의 기인은 무심하게 턱을 괸 채, 자칸을 보며 뇌까렸다. 그 모습이 그를 주눅 들게 한 산발녀와 겹쳐 보여서 자칸은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원본의 이야기를 알았다고 해서, 그와 같은 행적을 걸었다고 해서 네가 진정 살성(煞星)이라도 되었다고 착각했나.”

“······.”

“어림도 없지. 너는 가짜다. 몸도 마음도 진정한 죽음의 화신 앞에는 발끝도 미치지 못하는··· 그저 따라쟁이일 뿐인 추하디추한 가짜···.”


흑발의 기인이 준엄하게 꾸짖었다.

자칸은 발작하듯 반박했다.


“웃기지 마라, 네놈과 내가 뭐가 다르지? 나는 원본의 살성처럼 미로의 누구보다 강했다. 살성처럼 무언가를 죽이는 데 천부적인 재능도 가졌어! 같은 행보를 걸었단 말이다!”

“크크큭······.”


흑발의 기인, 살성의 투영이 조소와 함께 머리를 쓸어넘겼다.


“그 강하다는 건 사람을 가려가며 강한 것이냐? 네놈이 그렇게 강하다면, 어찌 저 여자에게 치욕감을 느꼈을 때 곧바로 검을 뽑아 덤벼들지 않았지?”

“···!”


발끈한 자칸이 그의 목에 검을 들이대었다.


“네놈을 죽여주마. 이 자리에서 네놈을 참하고 증명하겠다.”


살성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오히려 비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다시 말하지··· 네놈은 약하다. 몸도, 마음도. 무엇 하나 제대로 흉내 낼 줄 아는 것도 없지. 무엇보다 옛이야기의 원본인 내가 인정할 수 없겠구나.”


흠칫.


자칸은 그를 겁박하려다가 깜짝 놀라 물러섰다.


살성의 투영으로부터 압도적인 절망과 갈구, 그가 걸어온 길에 대한 피의 역사가 그의 배경처럼 엿보였기 때문이었다.


“네놈은 그 사고방식부터 글러 먹었어. 상대보다 약하면 굽히고, 조금만 불리하면 타협하고······ 아이야, 진정한 죽음의 화신이란 그따위 것이 아니란다. 그저 조금 비슷한 재능을 타고났다고 해서, 오는 길에 쓰레기 몇을 베었다고 해서 살성이면 천하의 개나 소가 모두가 살성이겠느냐. 으흐흐흐.”


광소와 함께, 그의 본질이 파장처럼 흘러나온다.


추악한 탐욕과 이기심!

남의 마음을 이해하지 않으며, 우롱하고 유린할 때 비로소 즐거움을 느끼는 성정!


남이 원하는 것을 내주지 않는다.

친애의 악수를 받으면, 오히려 남의 연인을 강간하고 비웃으면서 소중한 것을 부숴준다.


그야말로 순수악(純粹惡).


‘아, 악마···.’


오직 남을 나락에 빠트리고, 절망하게 만드는 것으로 기꺼워하는 자.


그것이 그들이 역사에서 엿본 죽음의 화신, 살성의 진정한 모습이었다.


자칸은 저도 모르게 그의 사악한 본성(本性)을 마주하고 부르르 떨었다.


그러다 이를 악물었다.


“······네가 허락하지 않아도! 이야기의 끝까지 살아남으면, 나는 살성의 그릇을 품게 된다. 네놈과 같은 것을 말이다!”


그것이 이야기의 힘.

부당주가 알려준 것이었다.


“으흐흐··· 마지막까지 가짜 놈답구나. 그래도 만난 기념으로 한 가지 알려주지.”

“···?”

“네놈들이 어디서 손실된 문헌이라도 보고 온 모양인데··· 이 석벽 미로에서 나는 주역이 아니다. 그저 ‘지나가던’ 일개 약탈자에 불과하지.”

“뭐, 뭐라고···?”

“설령 주역이 맞는다손 쳐도··· 애당초 네놈들의 환상만큼 옛이야기라는 게 그렇게 대단한 힘을 내려주는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크큭.”


살성은 조소하며 고개를 돌려 어딘가를 보았다.


그러다 이내 무엇인가를 확인하고, 악마 같은 눈웃음을 다시 자칸에게 향했다.


“이제 알겠느냐? ‘배역’을 받은 게 오로지 너밖에 없으면 모를까, 진정한 주역으로부터 배역을 받은 자가 있다면 누구에게 힘을 내리고 뭐고 할 권한은 애초부터 내게 없었다는 말이다. 으하하하하하!”

“···!”


대면은 거기까지였다.


짙은 절망감과 함께 자칸의 의식이 다시금 현실로 부상했다.


살성은 최후까지 떠나는 그를 놓지 않고, 절망을 안겨주고 비웃었다.


“아, 그래! 나약한 네놈보다 차라리 저놈이 더 인정해줄 만하니 저놈한테 내 힘을 내려줘야겠어! 으하하하하하!”



***



같은 시각.

정도운도 두 빛의 인영을 마주하고 있었다.


“······.”


이목구비만 보일 뿐인데도, 그들의 인자한 눈빛이 부담스럽다.


수백 년 만에 미로에 재림한 영웅들은 그들의 후계를 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마치 인정한다는 듯이.


당신 정도면, 미약한 도움이나마 자신들의 유지(遺旨)를 넘겨줄 의향이 있다는 듯이.


데엥, 데엥.


어디선가 귓가로 들어본 적 있는 종소리가 울렸다.


‘이건···.’


정도운은 의아한 듯 고개를 들었다.


첫날의 괴수가 나타나기 직전에 울린 경종과 같은 소리였다.


정도운의 의식 또한 그렇게 현실로 부상했다.



***



[ 남매로부터 영웅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

[ 고유(固有)가 격상의 존재에 영향을 받습니다. ]


정도운과 자칸.


두 사람이 격돌할 때 장내의 모두가 보았다.


정도운에게 신묘한 빛의 환영이 깃드는 광경을.


정도운에게는 빛의 환영이 스며들어 능력을 강화시켜 주었지만, 자칸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 자리의 이들은 몰랐으나, 애당초 그러한 외부의 간섭이 없어도 둘 사이의 무력은 정도운의 근소 우위였다.


거기에 옛이야기 속 주인공들의 수혜가 엇갈렸으니, 이미 승부는 기울어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상태로 두 사람이 서로의 무기를 들고 맞붙었다.


카앙!

휘리릭!


푸욱―


두 사람의 신형이 연속으로 얽히며 고속으로 접전을 펼쳤고, 이내 검이 누군가의 가슴을 관통하고 밖으로 나왔다.


정도운이 자칸을 단숨에 제압한 것이다.


“···주, 주구우운!!”


자칸의 비틀린 입가로 한 줄기 핏물이 흘렀다.


“빌어···먹을···.”


고유 능력마저 자취를 감춘 자칸과 반대로, 정도운의 하얀 안광은 여전히 서기(瑞氣)와 같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운 속에는 새로운 힘이 깃들어 있었다.


[ 공적, 미로의 살인귀를 제압했다. ]

+모험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3은화 99동화를 얻었습니다.


홍련파의 오랜 시간에 걸친 안배는 정보 부족, 그리고 뜬금없는 영웅이 등장한다는 변수로 엉뚱한 이에게 그 축복이 간 것이었다.


“오···.”


지켜보던 산발의 여자, 무르젤카는 예상을 뛰어넘는 광경에 입술을 오므리며 살짝 탄성을 토해냈다.


“안 돼에에!”


부당주가 절규한다.


그리고.


쿠구구구···!


미로의 진정한 주인이 기지개를 켜고, 석벽 미로의 결말이 임박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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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등잔 밑이 어둡다 24.08.10 18 1 14쪽
10 밖으로 24.08.07 29 1 15쪽
» 영웅과 악당 24.08.04 43 1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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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석벽 미로 (3) 24.07.25 88 4 18쪽
3 석벽 미로 (2) 24.07.24 61 3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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