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에 본래 집이 있다네
윤서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맘껏 잡아먹으라고 뒤돌아 막란 앞에 섰다. 그런데 잔다. 쳐 잔다. 코를 골면서 막란 서방이.......
이런 천하의 개....... 쌍놈! 공든 탑이 무너졌다. 흔들어 깨워도 기절한 것처럼 잔다. 아무리 하고 싶어도 명색이 여인네라 먼저 하자는 말을 못해서 명분을 세워 오늘 기회를 잡았는데........ 허무하게 다 날라 갔다.
막란은 이틀하고도 사흘을 내리 잤다.
“부인 배고파요.”
일어났다. 서방이 천자문을 외울 때는 윤서도 흥분을 해 몸이 달구어졌는데, 지금은 막란의 자고 일어난 얼굴을 보니까, 그냥 줘 패고 싶은 마음만 있지 다른 마음은 들지 않는다. 윤서를 업고 먼 길을 떠나려면 일단 멕여야 하니까 상을 차려왔다. 그런데 또 잔다. 등짝을 있는 힘껏 찰싹 때린다.
“왜 때려요 부인!”
“갈 길이 머니 인내하고 있는 중입니다. 어서 요기나 하세요.”
“천자문을 열흘 만에 뗀 서방입니다. 자랑스럽지 않으세요?”
“어서 드시기나 하세요. 상을 엎어버리기 전에!”
“네.......”
길을 떠난다. 이제 다른 맘은 접어두고 부지런히 가야한다. 한양을 떠나 여러 지역을 살펴보니 민심이 말이 아니다. 지방 관리들의 부정과 중앙 정부의 부패로 인해 민심은 이미 임금에게 등을 돌려, 각 지역에서 민란이 일어날 기미가 보인다. 김철용 역시 이번에 민란을 일으키려 한다.
불안한 백성심리는 새로운 임금을 원한다. 대비를 폐하고 형제를 죽여 위태한 왕권을 유지하는 서자출신의 임금이 아니라, 적통으로 승계한 강력한 임금이 나와 백성들을 이끌어 주길 원한다. 그런 백성들의 마음을 이용해 윤서의 백부 최이척은 능양군을 택했다.
반정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정적들을 없애야 했고 실패해도 탈이 없는 화적들을 동원하려 하는 것이다. 실패하면 당연히 화적들은 몰살당하고 문제는 성공했을 경우다.
화적들이 반정의 주역이라면 대의명분이 중요한 백성들을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성공해도 화적들은 무사하지 못한다.
그래서 윤서가 화적 막란을 택했다. 서인과 사림의 정신적 지주인 최이현의 딸이며 인목대비의 후광을 안고 있는 그녀를 함부로 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반정은 반드시 성공시켜야 한다. 실패하면 윤서를 비롯한 모든 화적들이 몰살당할 것이고, 성공하면 아무리 화적이라도 윤서의 지도하에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대의명분까지는 아니더라도 능양군의 묵인 하에 용납될 수 있는 상황이다. 화적들은 목숨만은 건진다. 또 윤서의 남편인 막란을 양반으로 만들 수 있는 기회다.
막란의 등에 업히면 마음이 편하다. 궁둥이를 받치는 막란의 손길이 좋다. 마치 위태한 세상을 막란의 손으로 떠받치고 있는 것 같다. 졸음이 온다. 자야겠다. 잠결에 막란 서방의 목소리가 들린다.
“부인 천자문 다음에 또 뭐를 배워야 합니까?”
“.......”
“글자 천자를 익히니 더 배우고 싶습니다.”
“글자는 이치를 알기 위함입니다. 어떤 걸 더 알고 싶으신지요?”
“천지는 어떻게 만들어 졌는지 알고 싶어요. 혹시 글자를 더 배우면 알게 됩니까?”
“그런 쓰잘데기 없는 것을 알려고 글자를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글자를 배우면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세상을 만드는 재주를 갖게 됩니다. 아이를 만들 수 있고 그 아이는 다시 어른이 되는 방법을 알게 되고, 그 어른은 나라를 만드는 힘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를 만드는 방법은 저도 압니다.”
“서방님은 모르는 것 같습니다. 아신다면 천자문을 다 떼고 나서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을 겁니다.”
“부인은 지금도 하고 싶어요? 저는 항상 하고 싶습니다.”
“모든 일은 장소와 때가 있는 법입니다. 여인도 분위기를 타고요. 이 모든 것은 책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글자를 배우라는 것이고요.”
“그러면 글자를 배우면 모든 여인을 꼬실 수 있는 지요?”
“그러기 전에 저한테 맞아 죽습니다.”
“부인은 꿈이 뭐였습니까?”
“무공을 배워 조선천지를 뒤흔드는 무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여인네라 과거를 볼 기회가 없는 것이 한입니다.”
아버지 최이현이 말려도 윤서는 활쏘기를 좋아했다. 칼과 창은 구하기도 어렵고 허락하지도 않아 활쏘기에 만족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과녁에는 맞지 않았다. 열 발 중에 한두 발이 맞으면 다행이었다. 그래도 활쏘기를 멈추지 않았다. 활을 쏘면 모든 근심과 걱정이 어린 마음에도 함께 날아가는 것 같았다.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여자인 윤서가 활에 집착하는 것을 염려해, 아버지 최이현이 윤서의 활 뒷부분을 살짝 휘게 만들어 과녁에 명중하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윤서는 활을 자신이 잘 다루는지 아직도 알지 못한다.
“저도 과거볼 기회가 없습니다. 그래서 글자 배우는 것을 싫어했어요.”
짠하다. 윤서가 과거를 볼 수 없는 것은 안과 밖의 일을 구별하기 위해 나라가 만든 것이라면, 막란이 과거를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은 노비의 신분으로 살라는 의미다. 그래도 마음 약한 서방에게 있는 그대로의 말은 할 수 없다.
“변명입니다. 아기가 어른이 되고 어른이 나라를 만들며 여인을 알아내어 남녀의 이치를 아는데 무슨 놈의 과거가 필요합니까?”
“난 다 알아요. 부인이 왜 과거가 필요 없다고 말하는지요.”
“뭐를 다 안다고 그러십니까?”
“남녀의 이치....... 그러니까 남녀가 언제 하고 싶은지 그런 것은 과거시험에 안 나온 다는 것 아닙니까.”
막란과 말을 주고받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통하는 것 같으면서도 통하지 않는 답답함이 좋다. 사람을 헤칠 때 잔혹한 막란의 이면에 숨어있는 순박함과 순수함을 엿볼 수 있어 좋다.
*
화적의 산채.......
다시 나흘 밤 닷새를 걸어 산채에 도착했다. 먼저 도착한 솔개가 이미 무기를 획득한 경위에 대해 윤서를 산채식구들에게 거짓을 좀 보태 영웅으로 만들어 놨다. 과부여인을 설득해 천삼을 이용 민란의 우두머리와 단판을 지어, 금 한 돈 잃지 않고 반정에 쓰일 북방민족의 무기를 얻어 냈다는 것이다. 솔개 또한 그 속에서 신기를 발휘해 과부여인의 비밀을 알아내어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막란은 윤서가 일을 잘 수행하도록 밤낮으로 업고 다녔다고 소문을 냈다. 꺽쇠가 윤서와 막란을 맞이한다.
“아씨 수고 많으셨습니다.”
“며느립니다. 말씀을 낮추세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아씨는 아씨입니다.”
“부인....... 아비는 똥고집이 심합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막란아 아씨 업고 다니느라 애 많이 썼다.”
아비 꺽쇠가 처음으로 막란에게 칭찬을 해 주었다. 아직 함께 살아본 날이 많지 않아 서로 서먹한 사이다.
“나 천자문도 떼었소!”
더 칭찬 받기를 원했다. 아비의 정이 그리웠다.
“쓸데없는 짓을 했구나. 뭐에 쓸 일이 있다고.......”
사람들이 막란의 곁에 몰려든다. 천자문을 뗐다는 말에 덴년이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막란아 정말이야? 그럼 글자를 니가 알아?”
“세상의 이치를 알려면 배워야 하오. 아비도 죽기 전에 천자문이나 떼시오.”
“꺽쇠 아비는 머리가 나빠서 안 돼.”
“덴년이 아줌마가 도와주면 다 하게 돼 있어요.”
“내가 어떻게?”
“옷을 열장 껴입고 옆에 있으면 돼요.”
“서방님! 그런 말을 함부로 하시면 어떻게 해요!”
“뭐 어때요? 어른들이십니다. 자격이 있습니다.”
“이 분들은 나이 드셔서 안 됩니다. 저도 막판에 실패하지 않았습니까?”
“막란아....... 벗어도 시원찮을 판에 왜 옷을 껴입으라고 하는 거여?”
오랜만에 상봉한 사람들의 대화가 정감이 간다. 산채식구들의 운명이 달린 결전의 날이 다가온다. 기약 없는 내일을 모른 채 오늘만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박한 생활모습이다.
이제는 반정을 위해 연판장을 받는 일이 남았다. 연판장은 반정에 뜻을 같이 한다는 조정 신료들의 이름이 들어간 일종의 각서다. 이 연판장에 능양군과 인목대비의 도장이 들어간다면 반정의 준비는 끝나는 것이다.
연판장을 뺏기면 그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은 모두 역적이 되어 삼족이 멸하는 대역 죄인이 된다. 그래서 연판장을 돌리는 사람의 임무가 중요하다. 애초에는 백부 최이척이 맡기로 하였으나 윤호산 쪽의 감시가 심해져 화적들의 일이 됐다.
하급관리들의 연판장은 꺽쇠와 솔개가 맡기로 하고 당상관 이상의 고위관료들은 윤서가 맡기로 한다. 윤서는 내로라하는 관료들과는 친분이 있기에 서로 만나는 것은 그래도 의심을 덜 수 있기 때문이다.
연판장의 문장은 윤서가 작성했다. 도연명의 시를 비유해 반정의 정당성을 써 내려갔다. 〈내 집은 잠시 머물다 가는 여관이요, 나는 떠나가야 할 나그네 같구나. 떠나가서 어디로 향할 것인가, 남산에 본래의 집이 있다네.〉‘여관’은 지금의 왕을 ‘남산’은 능양군을 은유적으로 비유했다. 이제 반정세력들과 인목대비와 능양군의 도장만 받으면 된다.
*
며칠 후 전관평(뚝섬) 사냥터.......
전광평(뚝섬)은 왕의 사냥터라 이곳에서 사냥을 하는 것은 엄격히 금지 되었다. 다만 일 년에 단 한 차례 신하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이레 정도 허락이 된다. 이때는 사냥을 좋아하는 신하들과 양반들은 누구라도 출입할 수 있다.
윤서가 막란과 함께 사냥을 나왔다. 과녁에 화살을 쏘는 것은 수 없이 해 봤지만 짐승을 향해 활시위를 당기는 것은 처음 해본다. 살생을 싫어하는 이유도 있었지만 사냥을 빌미로 온갖 청탁과 뇌물을 주고받는 이곳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다.
윤서는 사슴을 쫒는 척하면서 사위 조찬한과 함께 있는 윤호산에게 접근한다. 이미 그의 수하들에게 많은 뇌물이 들려 있다.
“대감 날이 좋습니다. 많이 획득하셨습니까?”
“네가 어쩐 일이냐? 사냥은 싫어한다고 들었는데?”
“아버님이 좋아하셨죠....... 획득해서 구휼(빈민구제)에 쓰이는 것을 취미로 하셨습니다. 저도 대감을 따라 사냥을 배우려구요.”
“따라오지 마라! 저리 가! 아녀자가 올 곳이 아니다!”
윤호산은 사냥터에서 윤서를 보는 것이 싫다. 사람들에게 뇌물을 받는 광경을 윤서가 목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 그러십니까? 저를 보면 아버님 최이현 대감의 환영을 보는 듯해서 이러십니까? 아니면 청탁과 뇌물 받는 현장이라서 그러십니까? 두려울 게 없으면 사냥이나 가르쳐 주세요!”
“나 말고 사냥 잘하는 대감들이 넘친다. 이판 대감이 저기 있으니 가서 가르쳐 달라고 해!”
이판(이조판서) 대감은 윤서 아버지 최이현과 친했던 인물이다. 윤서를 떼어놓기 위해 윤호산이 언덕 너머를 가리킨다.
“왜 이러십니까? 대감이 사냥솜씨가 제일이라고 들었습니다.”
윤호산이 윤서를 피해 수하들과 함께 도망치듯 사라진다. 윤서가 쫓으려하자 사위 조찬한이 막는다.
“그만 하시지요. 의도는 모르겠으나 윤호산 대감님의 심기는 그만 건드리시지요.”
“토포사님이 여긴 어인 일이십니까? 여기에 도적이라도 있어 납시었습니까?”
“더 비꼬면 이 꼽추 놈을 화적의 혐의로 잡아가겠습니다.”
“혼례를 치룬 내 낭군입니다. 혐의가 있으면 증거도 있겠지요. 증거가 있습니까?”
“.......농이 지나치십니다. 아무튼 더 따라오면 아무리 농을 쳐도 가만히 있지는 않겠습니다.”
꼽추가 낭군이라니....... 또 윤서의 장난질에 놀아날 수는 없다. 급히 윤호산의 뒤를 따른다. 그가 떠나자 이판이 있다는 언덕 너머로 향한다. 가슴 깊이 간직한 연판장을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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