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의 복수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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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블몽블
작품등록일 :
2024.08.05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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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4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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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6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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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바뀐 것과 바뀌지 않는 것 1

DUMMY

창을 열자 멀리서 치솟은 불길이 보였다.

어둠 속에서 타오르는 붉은색.

알고 있는 풍경이다.


저 불꽃은 결코 잊을 수 없는 밤의 시작이었으니까.


"······오늘······!"


소란이 번진다.

달조차 없는 깊은 밤.

오롯이 타오르는 불꽃 만이 하늘을 태운다.


"왜······."


왜 지금이지?


분명 목소리는 내게 기회를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가문이 무너진 오늘의 난 고작 열 살.

열 살 아이의 조그만 몸으로는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


오히려 조금 더 어릴 때로 돌아왔다면 할 수 있는 게 조금 늘어날지도 모른다.

아버지를 설득할 수 있을지도.

하지만, 하필 오늘.

지금.


'지금은······ 안돼.'


이 몸으로 싸우기는커녕 제대로 도망칠수나 있을까?

그때처럼 간신히 목숨만을 부지한 채 비참히 도망갈 뿐.

같은 사건이 반복될 뿐이다.


똑같이 아버지를 잃고 똑같이 가문을 잃는다.

아이의 몸으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는가?


······아니. 아니다.


할 수 있는 게 있을 것이다.

분명 기회라고 했으니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을 터.

그게 아니라면 굳이 이 시간으로 되돌아올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아버지는······.

역시 방에 계시려나.'


잊을 수 없는 20년 전, 오늘.

평시처럼 잠들었던 나는 소란에 잠을 깼고 불안함을 떨쳐내려 애쓰며 아버지를 찾았다.

이번에도 분명 아버지는 방에 계실 것이다.

그리고 일어나 계실 거다.

이만한 소란이면 성벽에서 불이 솟았다는 보고가 아버지에게 전달되었을 테니까.


"도련님?"


손수 문을 열고 나가자 그리운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집사장, 필립.


"일어나셨습니까?"


필립이 어린 나를 위해 눈높이를 낮춘다.

필립의 뒤로 하인 여럿이 뛰어가는 게 보인다.

내가 불안하게 그쪽을 힐끗거리자 필립이 내 손을 잡아 주의를 끌었다.


"별것 아닙니다. 곧 수습될 겁니다."


아니.

그렇지 않다.

날 달래는 필립의 말을 부정할 뻔했으나 가까스로 입술을 깨물 수 있었다.

가문의 마법사가 불이 난 곳에 이미 나가있다.

하지만 이미 성벽에서 시작된 불은 끌 수 없다.

저 불은 평범한 불이 아니니까.


"아버지는?"


"방에 계실 겁니다."


평소라면 아버지께 가시겠습니까, 라고 물었을 테지만 오늘 필립은 그렇게 묻지 않았다.

필립은 곧 소란이 가라앉을 거라 말했지만 사실 전혀 그렇지 않다.

공격이 시작됐다.

소란은 점점 더 깊어질 거고 가주인 아버지에겐 점점 더 여유가 없어질 거다.

무언가 하려면 지금뿐이다.


"아버지한테 갈래."


내가 그렇게 말하며 필립을 향해 손을 뻗자, 필립은 곤란한 얼굴을 하면서도 나를 안아 들었다.

내 걸음으로 이 난장판을 뚫고 가느니 어리광을 피우는 어린애가 되는 게 효율적이다.


"주인님께서 많이 바쁘십니다.

시간을 못 내주실 수도 있어요."


필립이 끌어안은 나를 향해 그렇게 속삭였지만 내 결심은 바뀌지 않았다.

나는 도리질 치며 필립의 목을 껴안았다.

필립이 내 얼굴을 볼 수 없도록.


"······알겠습니다."


필립은 내 등을 다독이며 아버지의 방으로 향했다.

내가 때아닌 소란에 겁을 집어먹은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주인님. 도련님이 오셨습니다."


아버지의 방문은 열려 있었다.

가주의 방에 도착한 것을 깨달은 나는 필립의 목을 껴안은 팔을 풀어 고개를 돌렸다.

사람이 여럿 몰려있었고, 그 가운데 아버지가 서있었다.


"아버지!"


필립이 나를 바닥에 내려주자마자, 나는 아버지를 향해 뛰었다.

어른의 걸음으로 대여섯 걸음에 불과한 거리였지만 20년 만에 아버지를 다시 만난 나에겐 아득할 정도로 멀게 느껴졌다.


익숙한, 그리고 미치도록 그리워한.

꿈에서도 그리웠던 얼굴이 의아함으로 물든다.


“리안?”


단숨에 발치까지 달려갔지만 난 곧장 입을 열지 못하고 망설였다.

아니, 그토록 그리워한 품에 달려가 안기지도 못했다.

그저 아버지의 옷자락을 단단히 붙잡았을 뿐.


무엇부터 말해야 하나.

무엇부터 꺼내야 하나.


"왜 그러느냐."


열 살의 나는 또래보다 작은 편이었다.

아버지는 차마 입을 열지 못하는 날 향해 천천히 허리를 숙였고, 단호한 선을 가진 얼굴이 내 눈높이로 내려왔다.

선명한 붉은 눈동자가 시선을 맞춰온다.


내가 닮은.

그리고 나를 닮은.

숙부, 벤야민 랑게르나는 타고나지 못한 랑게르나 특유의 붉은 눈동자.


"소란 때문에 깼느냐?

괜찮을 거다."


다정한 듯한 말투에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으나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다.

결코 괜찮지 않을 거다.


성벽부터 시작된 저 불꽃은 곧 잿빛 성 전체를 뒤덮는다.

불이 성을 태우고 시선이 그쪽으로 쏠린 사이, 숙부가 데려온 제이베르 제국의 군사가 들이닥칠 것이다.

병력을 알아차리는 순간 모든 게 너무 늦다.

제국의 병력은 우리의 시선 밖에서 들어올 테니까.


“피하셔야 해요.”


나는 간곡히 부탁했다.

함께 피해야 한다고.

이 땅에 미래가 없으니, 함께 도망쳐 후일을 도모해야 한다고.


아버지는 내 당돌한 주장에 날 꾸짖는 대신 주위를 채운 가신들을 향해 눈짓했다.

잠시만에 필립을 포함한 사용인들과 가신들이 주위를 비웠다.

커다란 가주의 방에 나와 아버지만 남았다.


"······나쁜 꿈이라도 꿨느냐?"


두 뺨을 감싼 아버지의 손길이 따뜻하다.

살아있는 사람의 손.

나처럼 살아있는, 꿈속이 아닌 살아있는 사람의 체온.

그 체온이 더더욱 날 서럽게 했다.


"아뇨, 아버지. 아니에요.

믿을 수 없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눈물이 차오르고 있다.

시간이 없는데, 아버지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모르겠다.

허나 아버지의 입에서 튀어나온 대답은 내 기대와 달랐다.


“안된다.”


나를 마주 본 눈동자에서 실망감은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를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달아 참담했지만 동시에 안도했다.

아버지의 반응은 내가 가장 두려워했던 반응이 아니었으니까.


아버지가 날 겁쟁이로 여기는 것.

내게 실망하는 것.


다행히도 아버지의 눈빛이는 어떠한 실망도 비난도 담기지 않았다.

단지 아비의 다정함과 조금의 씁쓸함이 담겼을 뿐.

그리고 약간의 안타까움이.


아버지는 눈을 잠시 내리깔았다가 다시 내게 시선을 맞춰왔다.

내게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 랑게르나에 대해서.

우리가 추구하고 지켜나가야 할 가치와 명예에 대해서.


“리안. 네겐 아직 어렵겠지만, 우리 랑게르나는······.”


하지만, 아버지가 날 설득하는 말을 들을만한 여유가 없다.

이야기를 다 끝나기 전에 성벽이 무너질 테고, 적군이 뚫고 들어올 테니까.

때문에 나는 차오르는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알아요.”


안다.

알고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 홀로 남은 평생을 곱씹었던 우리 랑게르나의 가치.

아버지를 포함한 모든 랑게르나가 추구해왔고 추구해야 했던 가치.

하지만, 아버지의 부탁으로 인해 나만은 지키지 못했던 우리의 가치를.


“위대하고 긍지 높은 랑게르나.

우리는 벨모르의 가장 높은 벽이며 늘 제자리를 지켜야 할 방벽이라는 것을.”


거침없는 내 대답에 아버지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리고 기쁨이 서렸다.

아직 어린 내게서 랑게르나가 추구하는 가치가 튀어나오리라 기대치 않았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버지의 눈빛이 다시금 단호해졌다.


“잘 아는구나. 그러니 나는 떠날 수 없다.”


그럼 나는요?

그것이 우리 랑게르나의 가치였다면, 아버지는 날 왜 떠나보냈었나요?

왜 날 홀로 살아남은 겁쟁이로 만들었나요?


물음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나는 내뱉지 못했다.

지금의 아버지에겐 난 아직 떠나지 않았으므로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리라.


“리안, 리안. 진정해라.”


아버지가 날 달랬지만, 여전히 눈물이 흘러넘쳐 시야를 가렸다.

모르겠다.

방법을 모르겠다.


“이것을 네게 주마.”


눈물이 흐르는 내 뺨을 감싼 커다란 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도리질치는 나를 단단히 붙잡은 채, 아버지는 자신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끌러내렸다.


조금 빠르다.

원래라면 성벽이 다 무너지고 아버지가 나를 비밀 통로로 빼돌리며 내 목에 걸어줬던 가문의 목걸이다.

허나 나는 원래보다 훨씬 빠르게 아버지를 찾아왔다.

그리고 나조차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이야기를 꺼내려다 말문이 막혔고, 그것을 달래기 위해 아버지가 목걸이를 건넨다.


아주 익숙한 목걸이다.

눈을 감고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한 물건이다.


당연하다.

내게 남은 유일한 가문의 물건이자 아버지의 유품이었기에 생이 한 번 끝날 때까지 한시도 품에서 놓지 않았으니까.

결국 죽는 순간까지 내 목에 걸려있지 않았던가.


엄지손톱만 한 붉은 보석이 박힌, 투박한 목걸이가······.


"······음?"


목걸이를 끌러내리던 아버지의 손길이 멈췄다.

그리고 무언가를 발견한 사람처럼 보석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잠시 뒤.


쩌적. 쩡!


요란한 소리와 함께 목걸이에 장식된 붉은 보석에 금이 갔다.


"······이게······?"


당황으로 물드는 아버지의 얼굴.

나 또한 의아함으로 얼어붙은 채 아버지처럼 목걸이의 보석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기억과는 다르다.


저 보석은 내가 죽을 때까지 온전했다.

근데, 왜 지금 저게 깨져?


- 신파는 언제까지 찍을 테냐.


"······!"


머릿속을 관통하는 목소리.

낯선 듯 익숙했다.

이 목소리는!


- 시간이 없다는 걸 알고 있지 않느냐.

서둘러라. 같은 짓을 반복하고 싶으냐.


그 지적은 적절했으나 나는 움직이지 못했다.

목소리가 내게만 들리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이 목소리는 뭐지?"


아버지의 얼굴에 혼란이 섞인다.

그리고 손에 쥔 목걸이와 내 얼굴을 번갈아 살핀다.


"······리안, 설마······."


아버지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목걸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정확히는 목걸이에 장식된 붉은 보석, 이제는 반으로 쪼개져 색이 빠지고 있는 보석을.


이상했다.

보석에 금이 간다고 그 색이 바래는 일 따윈 없을 텐데.

금이 간 보석의 빛깔이 이상하게 옅어 보였다.


내가 기억하는 보석의 색은 나와 아버지의 눈동자처럼 선명한 붉은색이다.

랑게르나와 상징과 같은 붉은 보석.

헌데 아버지의 손에 있는 저 보석은 같은 것임에도 그 빛깔이 훨씬 옅었다.

마치 잉크가 새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흐릿한······.


아버지의 입이 열린 것은 그때였다.


"당신은 아르다르보입니까?"


······아르다르보?

낯선 이름이었으나 아버지는 무언가 확신을 가진 사람처럼 단호했다.

가문의 물건을 살피며 고민하던 아버지에게 튀어나온 낯선 이름.

아마 그것은 내가 받지 못한 가문의 지식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 나를 아는구나.


목소리, 아르다르보는 아버지의 물음에 긍정했다.

그리고 이어진 아버지의 반응에 나는 깜짝 놀랐다.


"······그래. 그렇구나."


하하하하!


갑자기 터진 유쾌한 웃음.

무척 기쁘고 기꺼워하는 웃음이었지만 나는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나로서는 아버지가 왜 웃으시는 건지, 뭐가 그렇게 기쁜 건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한바탕 웃어 젖힌 아버지가 웃음기를 떨치고 나를 마주 봤다.

보다 진지해진 얼굴로.

그리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하지만 그 물음은 내가 아닌 목소리, 아르다르보를 향했다.


"아르다르보.

그대가 현현(顯現) 한 것은 시벨리안 랑게르나와의 약속을 지켰기 때문입니까?"


영문을 모를 이야기가 아버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나를 사이에 두고 아버지와 아르다르보가 대화를 나눈다.


- 그렇다.


"대가는?"


빠르게 오고간 대화에 잠깐의 사이가 생겼다.

그리고 그 사이에 남겨진 단어에 불길함이 서렸다.

······대가?


- ······지불된 핏값은 절반이다.


무슨 피?


대답이 불길했다.

대가라는 질문에 지불된 핏값이라고 했으나 대가가 곧 핏값이라는 뜻이다.

게다가 해결된 것은 절반이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순간 내가 죽어서 시간을 거슬러 왔음을 떠올렸다.

죽음.

보통 핏값이라 함은 목숨을 의미한다.


"그렇군요.

오늘이 랑게르나의 마지막이군요."


아버지가 갑자기 그런 결론을 내린 맥락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절반의 핏값이 지불됐다는 말에서 오늘이 랑게르나의 마지막이랑 결론을 추론할 수 있는 건지.


"아니, 아니에요. 난 그걸 막기 위해······."


내가 서둘러 말했으나 아버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리안.

이것은 미래를 위한 대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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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노르달 3 24.08.14 70 3 11쪽
9 노르달 2 24.08.13 73 3 12쪽
8 노르달 1 24.08.12 87 3 14쪽
7 주인을 잃은 숲 3 24.08.11 90 3 11쪽
6 주인을 잃은 숲 2 24.08.10 100 3 11쪽
5 주인을 잃은 숲 1 24.08.09 111 4 12쪽
4 바뀐 것과 바뀌지 않는 것 3 24.08.08 125 2 12쪽
3 바뀐 것과 바뀌지 않는 것 2 24.08.07 139 3 12쪽
» 바뀐 것과 바뀌지 않는 것 1 24.08.06 150 4 13쪽
1 회귀 24.08.05 205 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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