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의 복수법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몽블몽블
작품등록일 :
2024.08.05 20:07
최근연재일 :
2024.09.14 22:20
연재수 :
39 회
조회수 :
2,376
추천수 :
116
글자수 :
208,719

작성
24.08.09 20:20
조회
110
추천
4
글자
12쪽

주인을 잃은 숲 1

DUMMY

출구를 감춘 덤불을 헤치고 나가자 빼곡하게 솟은 나무들이 보였다.

고작 반나절 가량을 있었을 뿐이지만, 공기가 제대로 통하지 않은 비밀 통로에서 밖으로 나오니 숨이 탁 트이는 게 느껴졌다.

겨우 나온 바깥이란 게 마물의 숲이었지만 말이다.


"······후우······."


마물의 숲은 잿빛 성 뒷편에서 시작되어 하얀 산맥 초입까지 넓게 펼쳐진 거대한 숲이다.

오래된 나무들이 복잡하게 뒤엉켜 하늘을 가린 덕분에 마물의 숲은 한낮에도 빛이 제대로 들지 않는다.


빛이 제대로 들지 않는 거대한 융단.

그 융단 사이로 희미하게 흩어지는 연기가 보였다.

함성은 더이상 들리지 않았다.


"······전투는 끝났나보군요."


- 그래. 이미 소강 상태인 것 같군.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겠지.


다시금 코끝이 시큰해졌지만 이번에는 울지 않았다.

아버지는 죽음을 각오하고 내게 랑게르나의 미래를 맡기셨다.

이미 벌어지고 돌이킬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생각을 멈춰야 했다.


- 어디로 갈테냐?


이전 생과 달리 이번에는 길을 알고 있다.

목적지를 정하면 빠르게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은 길지 않았다.


"노르달로 가죠."


마물의 숲을 가로질러 하얀 산맥만 넘어가면 레반티스 영지다.

그리고 노르달은 그 레반티스 영지의 끄트머리에 있는 작은 마을로 내가 이후 2년 동안 숨어있었던 마을이기도 하다.

낯선 땅에서 모험을 하기보다는 효과적으로 살아남았던 장소로 돌아가는 게 나은 선택일 것 같았다.


- 그래. 좋은 생각이다.


나는 주변을 살펴 방향을 잡았다.

다행히 대략적인 지형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일단, 맨몸이 아니기도 했고.


'꽤 따뜻하네.'


아버지를 떠올리며 겹쳐 입은 외투를 여몄다.

몸에 맞지 않는 탓인지 자꾸 흘러내렸지만, 숲의 서늘한 바람을 막기엔 충분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해가 지기 전에 숲을 빠져나가야 했기에 걸음을 서두르는데 아르다르보가 갑자기 내게 말을 걸었다.


- ······리안.


나는 왜냐고 묻지 않았다.

이유를 알 것 같았으니까.


"······아직 해가 지기 전인데, 왜······."


랑게르나에게 마물의 숲은 안전하다.

이 문장은 옳은 문장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했다.

정확히는 절반만 맞았다.


랑게르나에게 마물의 숲은 안전하다.

단, 해가 지기 전까지만.


해가 떠있는 동안의 마물의 숲은 모든 랑게르나에게 복종한다.

고개를 조아리고 감히 덤벼들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니, 알아서 피해간다.


랑게르나의 모든 아이들은 해가 떠있는 동안 만큼은 마물의 숲에서 절대 마물을 만나지 않는다.

그것이 잿빛 성에서의 상식 아닌 상식이었다.


하지만, 해가 진 후의 마물의 숲은······.

설사 랑게르나라 할지라도 위험하다.

낮에는 마주칠 리 없었던 모든 마물을 만날 수 있고, 심지어 공격당할 수 있다.

랑게르나가 아닌 자들보단 생존 확률이 높겠지만, 밤이 깊은 후의 마물의 숲은 랑게르나에게도 위험하니까.


이게 나와 아르다르보가 해가 지기 전에 마물의 숲을 지나가려 했던 이유였다.

시간은 넉넉했다.

아직 해는 중천이었으니까.


그래서 전혀 걱정하지 않았는데, 왜.


- 숲의 유령(Forest Wraith)이군. 조심해라.


흐릿한 몸체와 이지러진 이목구비.

그 가운데서 샛노랗게 번뜩이는 눈동자가 나를 향해 번뜩였다.


낄낄낄낄.


소름끼치는 웃음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 날카롭지도 귀를 찢을 듯 큰 소리도 아니지만 등줄기를 오싹하게 만드는 불길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였다.


숲의 유령은 물리력 쪽은 형편없지만 정신 공격에 특화된 마물이다.

다른 마물 중에서 그나마 나은 상대랄까.

사로잡히지만 않는다면 승산은 있다.


키득키득키득.


웃음소리가 다시금 내 귓가를 간지럽힌다.

그리고 이어진 무언가 속삭이는 듯한 말소리.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일 뻔한 순간, 아르다르보가 말했다.


- 홀리지 마라!

지금 네 수준에 사로잡히면 벗어나기 어려워!


유령의 속삭임을 떨치기 위해 입술을 짓씹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르다르보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순간 끌려들어갈 뻔했다.


"압니다."


귀기울이면 안된다.

저 속삭임은 날 고요한 죽음(Silent Death)으로 이끈다.

사로잡히면 끝이다.


나는 유령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았다.

유령은 내게 속삭임(Whispers)이 통하지 않자 심기가 매우 불편해보였다.

샛노란 눈동자가 사납게 흔들렸다.

놈에게서 여유로운 기색이 사라졌다.


그리고 유령은 속삭임 같은 정신 공격보다 직접 공격을 하기로 결정한 듯했다.


- 온다!


캬아아아악!


비명같은 외침과 함께 나를 향해 유령의 흐릿한 형체가 빠르게 쇄도했다.

다행히 감당할만한 속도였지만, 문제는 내가 현재의 몸에 익숙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캬아아아아아악!


거리를 재고 몸을 틀었으나 생각했던 것보다 몸이 움직인 거리가 짧았다.

맞다.

나 지금 열 살이지!


"큭!"


서른 살의 몸에 익숙한 내 움직임으로는 유령의 공격은 온전히 피하기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형체가 일정치 않고 허공에 떠다니는 놈이라 방향 전환이 빨랐다.

휘청이며 몸을 뒤틀자 피하기 무섭게 유령의 손톱이 날 향해 달려들었다.

아르다르보가 외치지 않았다면, 그대로 머리에 바람 구멍이 뚫렸을 것이다.


- 리안! 뒤!


고개를 돌리는 것을 포기하고 일단 검을 들어 공격을 막았다.

그리고 있는 힘껏 검을 휘둘렀다.

그런데.


캬아아아아아악!

캭! 캬아아아아!


"······?"


보지도 않고 그대로 휘둘렀으니 제대로 된 타격이 들어갔을리 만무하다.

헌데 유령은 발작하듯 몸을 뒤틀며 괴로워했다.

마치 온몸에 불이라도 붙은 것 같은 반응이었다.


'······그러고 보니.'


숲의 유령 같은 종류의 마물에 대항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였다.

마법이나 성력.

그러나 성력은 사용할 수 있는 자들이 극소수였기에 논외로 다.

그래서 절대 다수의 경우 숲의 유령과 같은 마물들을 상대하는데에 쓰는 것은 마법이었다.


······그런 마법 중 가장 효과적인 것은······.


"······불······."


캬악! 캬아아아아아!


유령은 여전히 날뛰고 있었고, 나는 그런 유령을 주시하며 내 손에 쥐어진 단검을 바라보았다.

독특한 무늬를 가진 오다르 산 강철 검.

그리고 방금 알게 된 사실이긴 하지만, 이 검은 이그니서스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유령의 반응은 이상했다.


'······이 검이 이그니서스이긴 해도······,

이그니서스는 불을 견디는 검이지 불을 품은 검은 아닐텐데?'


의아함을 떠올린 순간, 아르다르보의 말에 머릿속을 관통했다.


- 리안.

검을 쥔 상태로 불을 연상해봐라.


'불이요?'


- 그래, 불.


불이라는 단어에 순간 아르다르보와 비밀 통로에서 주고 받은 대화가 떠올랐다.


'이그니서스가 있으면 모든 랑게르나는 불꽃술사가 될 수 있다.'


아르다르보와 대화를 떠올린 나는 곧장 불꽃을 상상했다.

검을 중심으로 타오르는 불꽃을.

그러자.


"······!"


- 역시, 재능이 없진 않군.


머릿속으로 불꽃을 연상하자마자 단검 전체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용광로에서 달궈진 대장장이의 쇳덩이처럼, 붉게.

단검에 불꽃이 깃든 것이다.


"······이게······."


즉석에서 이그니서스에 불의 힘을 부여하다니.

마치 내 자신이 불꽃술사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칼날에서는 연기가 피워올랐지만, 단검은 전혀 뜨겁지 않았다.


- 이제 좀 할만하겠군.


아르다르보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서렸다.

맞는 말이었다.

불의 힘이 부여된 이그니서스가 상대라면 숲의 유령은 하찮기 그지없는 상대니까.


캬아아아아아!


숲의 유령이 분에 가득 찬 목소리로 외쳤지만 전혀 무섭지 않았다.

숲의 유령은 불꽃이 부여된 무기에 '제대로 된 타격'을 받는다.

그렇다면!


"하아!"


나는 피하는 대신 유령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유령은 내 반응을 예상치 못했는지 다소 당황하는 소리를 내며 허공에서 휘청였다.


키이이!


놈의 손톱이 머리카락을 스치는 걸 느끼며 단검을 위로 질렀다.

단련되지 않은 아이의 힘이었지만, 불을 품은 이그니서스 공격이었다.

타격은 충분했다.


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유령은 이제까지 중 가장 처절한 비명을 질렀고.


파앗!


폭죽처럼 터져 사라졌다.


"······후우······."


지나치게 긴장한 탓일까.

유령을 처치했다는 안도감과 동시에 어지럼증이 쏟아졌다.


- 버거웠던 모양이군.

그래도 잘했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르다르보의 목소리에는 기특한 감정이 다소 섞여있었다.

내가 이그니서스에 불의 힘을 부여할 수 있었기 때문인가?

난 초점이 잘 맞지 않는 눈을 문지르며 말했다.


"솔직히 놀랐습니다.

예전에 이 검을 썼을 때 불의 힘을 사용한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말이에요."


이 단검은 회귀 전에 내가 꽤 애용하던 무기였다.

나이가 들고 장검을 다룰 수 있게 되면서 보조 무기가 되긴 했지만, 보조 무기로서도 이 검을 상당히 아꼈다.

애초에 난 충분히 자랄 때까지 단검을 주로 썼었으니까.


그만큼 실제 많이 썼던 검인데도 불구하고 방금과 같은 경험은 처음이었다.

이그니서스인 걸 몰라서 그랬던 건가?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머릿속에서 의문점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아르다르보의 설명이 해결해 주었다.


- 무언가를 성취할 때 인지(認知)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은 영향을 끼친다.

그저 열심히 하는 것과 스스로가 할 수 있다는 걸 아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니까.


"이 검이 이그니서스임을 안 것이 영향을 끼쳤다는 말입니까?"


- 네가 불을 쓸 수 있는 랑게르나임을 깨달은 것 또한 그렇다.


"······불을 쓸 수 있는 랑게르나······."


아르다르보의 말이 맞았다.

이 검이 이그니서스라고 한들 내가 불을 쓸 수 있다는 걸 몰랐으면 나는 불의 힘을 부여할 수 있었까?

아니, 아닐 것 같았다.


아르다르보의 말처럼 인지는 생각보다 무의식에 많은 영향을 끼치니까.


아마 아르다르보가 '이그니서스가 있으면 모든 랑게르나는 불꽃술사가 될 수 있다'는 명제를 알려주지 않았다면, 나는 아르다르보가 '불을 연상하라' 는 말에 의심을 품었을 것이다.

왜? 라는 의문과 내가 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이전에는 가능한 것 자체를 알지 못했기에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 검이 이그니서스임을 알았어도 결과는 같았을 것이다.


'이그니서스가 있으면 모든 랑게르나는 불꽃술사가 될 수 있다'는 명제를 몰랐다면 말이다.


하지만, 검을 쓰기 전 나는 아르다르보에게 '이그니서스가 있으면 모든 랑게르나는 불꽃술사가 될 수 있다' 는 명제를 들었고, 불꽃술사로 태어나지 않아도 랑게르나라면 이그니서스를 매개로 불을 다룰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認知)했다.


가능하다는 걸 알기에 확신할 수 있었고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믿음은 기대치 않은 성과로 나타났다.


- 꽤 자유롭게 쓰는구나.


손에 쥔 이그니서스에 불의 힘을 여러 번 불어넣어 보고 있자니 아르다르보가 약간 감탄 섞인 어투로 내게 말했다.

한 번 인지(認知) 하고 나니 힘을 쓰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마치 호흡하는 것과 같은 감각.

불꽃을 상상하면 그대로 실현되었다.


"······으······."


안타깝게도 체력 소모는 극심했지만.


- 무리하지 마라.

제대로 걷기도 전에 뛰려고 하면 다칠 뿐이다.


"······알겠어요."


아르다르보의 만류에도 아쉬움이 가시지 않았다.

마치 아주 재밌는 장난감을 손에 넣은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마음대로 가지고 놀고 싶은 고양감이 치솟았지만, 체력이 받쳐주지 않았다.


- 단련하면 늘어날 거다.


"그래야죠."


아르다르보를 향해 그렇게 대꾸한 뒤, 숲의 유령과 싸우느라 내팽개친 짐을 주워들었다.

그리고 아르다르보에게 불의 힘에 대하 구체적인 것을 물어보려는 순간, 갑자기 엄청난 굉음이 잿빛 성 쪽에서 터졌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회귀자의 복수법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0 노르달 3 24.08.14 69 3 11쪽
9 노르달 2 24.08.13 72 3 12쪽
8 노르달 1 24.08.12 86 3 14쪽
7 주인을 잃은 숲 3 24.08.11 88 3 11쪽
6 주인을 잃은 숲 2 24.08.10 100 3 11쪽
» 주인을 잃은 숲 1 24.08.09 111 4 12쪽
4 바뀐 것과 바뀌지 않는 것 3 24.08.08 124 2 12쪽
3 바뀐 것과 바뀌지 않는 것 2 24.08.07 138 3 12쪽
2 바뀐 것과 바뀌지 않는 것 1 24.08.06 148 4 13쪽
1 회귀 24.08.05 202 4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