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의 복수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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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블몽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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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05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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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8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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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뀐 것과 바뀌지 않는 것 3

DUMMY

"······최초의 늑대······."


시조와 함께한 최초의 늑대에 대한 이야기는 나도 들어본 적 있다.

현재의 내 나이보다 어렸던 시절, 유모가 베갯머리에서 들려주던 가문의 이야기에서 종종 등장하던 시조 시벨리안 랑게르나와 평생을 같이한 영물(靈物).

그 늑대가 말도 할 수 있는 무언가인지는 전혀 몰랐는데.


"그게 전부입니까?"


- 그래. 내가 원하는 것은 그게 전부다.


아르다르보가 가문의 전설에 등장하는 그 늑대라면, 랑게르나의 존속에 의의를 두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최초의 늑대는 시조와 생사(生死)를 같이 했다고 하니까.

시조 시벨리안 랑게르나처럼 그의 후손들을 소중히 여기는 걸지도.


하지만, 정말로 그게 전부일까?


분명 납득할 수 없는 이유는 아니었지만 무언가 석연치 않았다.

모든 힘은 대가를 바란다.

회귀에 나와 아버지의 목숨값이 대가로 지불되었다고 하더라도 아르다르보가 내게 기회를 준 이유.


유모가 뭐라고 했더라?


『리안 도련님, 명심하세요.

······우리 랑게르나는······.』


아련하게 어렴풋한 기억.

무언가 떠오를 듯 떠오르지 않았다.

······당연할지도.

이건 20년도 넘은 이야기이자, 아르다르보의 이름을 듣기 전까지는 완전히 잊고 있었던 동화니까.


- 대답이 되었나?


어차피 비밀 통로의 문은 이쪽에서 열 수 없다.

그리고 그 출구는 잿빛 성의 뒤편, 마물의 숲 한가운데에 있다.

내 걸음으로는 반나절은 걸려야 가주의 방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테고 그럼 이미 모든 게 끝나있을 거였다.


아니, 내가 돌아가면 오히려 더 좋지 않다.

마물의 숲을 벗어나는 순간, 가주의 방 근처는 커녕 내성(內城)에 닿기도 전에 제이베르 제국군에 붙잡히게 될 테니까.

잿빛 성 부근에서 사로잡힌 붉은 눈동자의 사내아이.

내가 아드리안 랑게르나임이 밝혀지는 것은 순식간일 것이다.


이미 할 수 있는 것은 끝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것은 지독한 미련 때문이다.


- ······아드리안.


"······알겠습니다. 이제 가죠."


난 그렇게 대꾸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입안으로 피비린내가 번져갔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깊게 호흡하며 주변에 흩어진 물건을 주웠다.

아버지가 비밀 통로를 닫기 전에 나와 함께 밀어넣어준 꾸러미들.


깔끔한 의복 한 벌과 작은 배낭 하나.

배낭 자체는 작았지만 그건 성인 기준이고, 지금의 내게는 살짝 버거운 크기였다.


'······잘 안보이는데.'


통로의 위쪽에 박혀있는 야광석 덕분에 배낭에 뭐가 들어있는 것 정도는 구별할 수 있었지만, 자세히 살피기엔 역부족이었다.

성인용으로 꾸려진 짐인 것 같아 좀 추려서 가지고 가려고 했건만, 무리인가.

그때, 내가 영 불편해 보였는지 아르다르보가 거들었다.


- 불부터 붙여라.


불?


- 오른쪽으로 네 두 걸음 앞쪽에 있다.

그걸 챙겨.


이전 생에 이 통로를 지나갈 때엔 그런 걸 본 적 없는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했지만 난 순순히 손을 뻗어 아르다르보가 가리킨 곳을 더듬었다.

과연 무언가가 손에 잡혔다.


- 가주의 비밀 통로는 전시를 대비해 만들어 둔 통로다.

급하게 빠져나갈 것을 대비해 이런 것을 쌓아두지.

안에 부싯돌이 있을 거다. 찾아봐라.


어둠 속에서 감각에 의지해 더듬자, 부싯돌 같은 것이 만져졌다.

기름을 먹인 나무도 함께.


- 조심해라.


나는 주의를 기울여 나무에 불을 붙였다.

불이 잘못 옮을까 싶어 나무를 바닥에 내려놓은 상태로.


화르륵······.


조그만 불꽃이 어둠 속에서 피어올랐다.

통로 안쪽을 제대로 보는 건 처음이다.

이전에는 야광석의 약한 불빛에 의지해 그냥 빠져나갔으니까.

통로는 내가 상상한 것보다 좁고 낮았다.


- 놔둔지 좀 된 모양이군.


제대로 된 광원이 생기자 배낭 안의 물건을 살피기 훨씬 수월해졌다.

짐을 그대로 들고 갈 수도 있지만, 배낭이 보기보다 무거웠다.

대충 보아도 내겐 필요 없는 물건이 섞여있어 추려낼 필요가 있어 보였다.


"······지도······."


필요없는 것 몇가지를 덜어내자, 중간에 지도가 나왔다.

오른손이 횃불에 묶여 있는 탓에 제대로 살피기는 어려웠지만, 인근을 상세히 기록한 지도인 것 같았다.

잿빛 성을 중심으로 마물의 숲과 건너편의 하얀 산맥의 지도.

이정도까지 상세한 지도는 영주(領主) 가문에서나 손에 넣을 수 있다.


······이건 쓸모가 있을지도.


지도를 다시 챙긴 뒤 짐에 포함된 의복을 펼쳤다.

역시나 성인용이라 내겐 너무 컸다.


- 바지는 버리는 게 낫겠군.


때문에 아르다르보의 말처럼 바지는 미련없이 버리고 외투만을 걸쳤다.

상의 또한 하의처럼 무척 컸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적어도 얼어 죽진 않겠네요.'


외투 없이 같은 차림으로 산을 가로질렀던 이전 생을 떠올린 나는 자조적으로 미소지었다.

얇은 실내복으로 하얀 산맥을 넘으면서 거의 죽을 뻔했으니까.

랑게르나 영지를 포함한 북쪽은 다른 지역보다 겨울이 빨리 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검은······."


배낭 가장 바닥에 깔린 것은 단순한 모양의 단검이었다.

이렇다 할 장식 하나 없이 깔끔하고 무난한 작은 검.

내가 놀란 것은 이 검이 익숙하다는 점 때문이었다.


- 아는 검인가?


"네. 아는 검입니다."


16살 때 동부 평야 근방에서 용병질을 하면서 구했던 검과 닮아 있었다.

묘한 끌림에 꽤 비싼 값을 주고 샀던 기억이 있었다.

손에 감기는 느낌이 좋아 죽기 직전까지 보조 무기로 자주 사용했던 검이다.

착각인가 싶어 검집을 뽑아 살폈으나 틀림없었다.


칼날 가운데 있는 오다르 산(産) 강철 특유의 무늬.

만들어지는 철마다 그 특유 무늬가 다르기에 그 무늬가 각 무기를 구별할 수 있는 특징이 된다.

틀림없다.

같은 칼이다.


- 아는 검이라면 예전에 썼던 건가?


"이전 생에서, 아버지한테 받은 건 아니고 우연히 구해다 썼습니다.

16살 즈음에."


- 확실한가?


"네."


난 그렇게 말하며 검을 검집에서 반쯤 뽑았다.

그러자 칼날의 오다르 산(産) 강철 특유의 무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오다르 산(産) 강철은 만들어지는 철마다 그 특유 무늬가 다르기에 그 무늬가 각 무기를 구별할 수 있는 특징이 된다.


"이 무늬. 똑똑히 기억합니다."


- 흐음······.


"······전쟁 후에 유출됐던 모양입니다."


지금 아버지가 내게 건네준 칼이 후에 동부 평야에서 발견된다는 것은, 잿빛 성이 전소된 후 수색이 있었다는 뜻이 된다.

내가 기억하기론 잿빛 성은 터만 간신히 남을 정도로 완전히 불타버리는데 말이다.

그런 불속에서 이 검이 멀쩡하게 살아남았다는 의미는, 하나.

타지 않는 검.


그리고 그 내 의심에 아르다르보가 쐐기를 박아주었다.


- 그건 이그니서스(Ignisus)로군.


"설마 했는데, 진짭니까?"


성인이 된 후로는 장검 위주로 썼지만, 충분히 자라기 전까지는 단검을 썼다.

힘이 없는 어린애는 정면으로 들이받는 것보단 치고 빠질 줄 알아야 했으니까.

그리고 이 검은 내가 구한 검 중에서도 가장 좋아 오랫동안 사용한 검이다.


어쩐지 아무리 오다르 산(産) 강철이라지만 검이 지나치게 좋은 것 같더라니.

덕분에 비싼 값을 주고 구했어도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안 들었는데, 심지어 이그니서스?


나, 생각보다 물건 보는 눈이 있었는지도.

하지만, 이어진 아르다르보의 말에 그 우쭐함이 싹 날아갔다.


- 설마 그 검이 이그니서스인지 몰랐나?


"네, 그냥 좋은 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이그니서스를 그냥 검처럼 썼고? 랑게르나인 네가?


아르다르보의 질문에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록 눈에 보이지 않았으나 아르다르보에게서 측은함과 안타까움이 동시에 느껴졌으니까.


- 아드리안.


"네."


- 랑게르나의 상징이 뭐지?


"늑대와······ 불이죠."


- 그럼 랑게르나가 대대로 불에 내성이 있다는 것도 알겠군.


"네, 압니다."


- 불꽃술사가 많다는 것도?


"······네? ······그렇죠······?"


랑게르나는 대대로 무인(武人)이 많은 가문이지만, 종종 불꽃 마법에 뛰어난 마법사가 나타나기도 했다.

불꽃술사.

불 마법에 특화된 마법사를 보통 그렇게 부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아르다르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깨달았다.


"저는 마법에 재능이 없습니다만."


이그니서스는 불을 견디는 검의 총칭이다.

때문에 이그니서스는 마법을 직접 전투에 적용해 근접전을 치르는 전투 마법사들이 애용하는 무기다.

그만큼 귀하고 대단한 물건이지만 마법사가 아닌 내게는 그저 좋은 검일 뿐이었을 뿐이다.


그렇게 생각한 내게 아르다르보의 이어진 말은 충격적이었다.


- 랑게르나의 직계는 모두 불의 수호를 받는다.

이는 마법사가 아닌 자도 매개가 있으면 불을 다룰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럼 이그니서스가 있으면 모든 랑게르나는 불꽃술사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 그렇지.

그리고 랑게르나의 그림자 검은 가장 유명한 이그니서스 중 하나다.


······그림자 검이?

머릿속에서 어떤 퍼즐이 맞춰졌다.

아르다르보가 '그림자 검은 랑게르나가 아닌 자에게는 의미가 없다' 고 한 이유.


"그게 가능한 랑게르나는 직계 뿐이군요. 그것도 징표를 타고난 랑게르나."


직계이자 징표를 타고난 랑게르나.

나와 아버지는 가능하지만 벤야민 랑게르나는 할 수 없는 것.

결국 반쪽짜리 랑게르나인 벤야민 랑게르나는 이그니서스인 그림자 검을 온전히 쓸 수 없는 것이다.


- 그래. 그림자 검이 뛰어난 검이긴 하지만, 온전한 랑게르나가 아닌 자들에게는 무용하지.


"그림자 검이 이그니서스라면, 랑게르나가 아닌 자 중 적어도 불꽃술사에게는 쓸모 있는 게 아닙니까?"


- 그림자 검의 가치가 이그니서스로서의 가치뿐이라고 생각하느냐?


모른다.

나이 열 살에 가문이 몰락한 내게 그림자 검에 대한 지식은 세간에 알려진 수준밖에 없다.

그림자 검에 대해 알려진 것은 자루부터 검신까지 흠 없이 새카만 검이라는 것, 그리고 뛰어난 이그니서스라는 것뿐이다.

그리고 내가 아는 것도 그 두 가지뿐이고.


궁금증을 떠올리는 순간, 아르다르보가 이어 내뱉었다.


- 좀 더 궁금한게 있는 것 같다만, 슬슬 떠나야한다.

날이 지기 전에는 마물의 숲을 가로질러야 하니까.


아르다르보의 말이 옳았다.

시간을 꽤 지체했으니 슬슬 날이 밝기 시작했을 테고, 이 통로의 출구는 마물의 숲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으니까.

해가 진 마물의 숲을 맨몸으로 가로지르는 것은 미친 짓이니 해가 밝을 때 마물의 숲을 지나야 한다.


난 생각을 정리하며 물건을 챙겼다.

내가 쓸 수 없는 것과 필요없는 것을 추리고 나니 물건이 많이 줄었다.


'출구는······.'


내려놓은 횃불을 집어들자 불꽃이 흔들린다.

바람이 부는 곳이······, 출구겠지.


이번에는 많이 헤매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불꽃을 흔드는 바람을 따라가며 아르다르보와 계속 말을 주고 받았다.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졸음을 쫓고 허기를 잊기 위한 일이기도 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멀찍이 어스름한 빛이 멀찍이 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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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뀐 것과 바뀌지 않는 것 3 24.08.08 125 2 12쪽
3 바뀐 것과 바뀌지 않는 것 2 24.08.07 139 3 12쪽
2 바뀐 것과 바뀌지 않는 것 1 24.08.06 149 4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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