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의 복수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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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블몽블
작품등록일 :
2024.08.05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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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7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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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뀐 것과 바뀌지 않는 것 2

DUMMY

"······네······?"


멍청한 내 되물음에 아버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나 대신 아르다르보를 향해 말했다.


"가문의 수호자여.

랑게르나를 부탁합니다."


- 시벨리안 랑게르나의 이름으로 약속하지.


"충분합니다."


"아버지?"


불안한 목소리로 아버지를 불렀지만, 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의 한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무언가를 챙겨 내게 돌아왔다.


"그림자 검은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 어차피 보석이 없으면 온전치 못하니, 후일을 기약하는 게 좋겠군.


"하긴, 지금의 리안에겐 버거운 짐 밖에 되지 않겠군요.

수호자가 그리 말씀하시니 믿겠습니다."


나를 배제한 두 사람, 아니 한 사람과 목소리의 대화가 이어졌다.

그 대화를 조금도 따라갈 수 없었다.


“리안.”


우는 나를 달래던 아버지의 목소리에서 다정함이 사라졌다.

그리고 나를 다시금 똑바로 마주보는 눈동자.

나와 닮은 눈동자에 단호함 결심이 서렸다.


"잘 들어라."


이윽고 뱉어지는 무언가 결심한듯한 말.


“······아버지······?”


난 여전히 혼란에 빠진 채 아버지를 마주했다.

눈물 때문에 시야가 흐렸으나 선명한 붉은 눈동자에서 불꽃이 일어나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나는 널 믿는다. 아니, 믿었다.

그러니 너도 나를 믿어다오.”


대화가 달라졌다.

시점이 달라진 게 문제가 아니다.

내용이 전혀 다르다.


성벽에서 시작된 불꽃은 아직 번지지 않았다.

가문의 마법사가 그 불이 마법의 불꽃이라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 잿빛 성의 모든 사람들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곧 화재가 진압되고 소란이 가라앉을 거라 믿었으니까.


하지만, 곧 가문의 마법사는 알아차릴 것이다.

이 불은 결코 꺼뜨릴 수 없음을.

무슨 짓을 해도 꺼지지 않음을.


당연하다.

저 불은 제이베르 제국에서 숙부에게 빌려준 화염술사의 작품이었으니까.


저 불이 내성(內城)으로 번지기 시작했을 때, 아버지를 포함한 모두가 사건의 심각성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제이베르 군이 마물의 숲에서 나타났을 때, 가망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아버지는 나를 가문의 비밀 통로에 집어넣었다.


아직도 그 기억이 생생하다.

아버지는 날 달랬고, 혼자 떠나도록 종용했다.

허나 나는 아버지가 무어라 말씀하시든 떼를 쓰며 매달렸다.

혼자 가지 않노라고.

나도 함께 가겠노라고.


그런 나를 아버지는 애써 떼어놓으시고 날 가주의 방과 연결된 비밀 통로에 밀어넣는다.

그리고 그대로 뒤돌아 문을 잠근다.

내가 따라갈 수 없도록 무거운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그대로 떠나버리는 것이다.

나는 따라가지 못한 채 밤새도록 그자리에서 울다가 모든 소란이 가라앉은 뒤에야 통로를 빠져나간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아직 불의 피해는 외성(外城)에 그쳤으며, 제이베르의 군대는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가 절망을 점치기 전이란 뜻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가주의 방과 연결된 비밀 통로의 문을 열었다.

도망가는 것을 수치로 여기는 랑게르나가 불가능을 점치기 전에 퇴로를 연 것이다.


“가라.

언제나 네가 랑게르나라는 것을 기억하라.”


복잡한 장치를 해제하자 비밀 통로의 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성인 남자가 힘껏 밀어야 닫히는 두꺼운 문.

열 살 아이인 내 힘으로는 꼼짝할 수 없을 정도로 무거운 문이다.


"아버지?"


내가 황망히 내뱉었으나 아버지는 단호했다.


"첫 단추 잘 끼웠으니 이번에도 해낼 수 있으리라 믿으마."


아버지는 내게 그렇게 당부하며 나를 들어올렸다.

아버지의 허리께에 간신히 닿는 내 몸집으로는 아버지의 손을 뿌리칠 수 없었다.

그제서야 아버지가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깨달은 내가 횡설수설 내뱉었다.


"아, 니. 아니에요.

할 수 있어요. 아직 불이 번지지 않았으니까ㅡ."


하지만, 아버지는 그런 내 말을 제대로 듣지 않은 채 말을 잘랬다.


"아니, 안된다."


"ㅡ왜ㅡ!"


내 기막힌 외침이 탄성처럼 터졌으나 아버지는 쓸쓸한 눈으로 날 마주할 뿐이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하다는 듯.

난 그런 아버지의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에요. 바꿀 수 있어요.

지금부터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내가 알아요.

그러니까 할 수 있ㅡ!"


내가 다급하게 외쳤으나 아버지의 몸짓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단호한 몸짓으로 비밀 통로의 앞에선 아버지는 그자리에 나를 내려놓었고, 그대로 비밀 통로의 안쪽으로 밀어넣었다.

열 살 아이의 힘으로는 버틸 수 없을 만큼 강한 힘으로.

나는 버티지 못하고 뒤로 넘어졌고, 아버지는 그대로 문을 닫았다.

묵직한 걸쇠를 거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다시, 또다시.

수십, 수백, 수천 번 꿈속에서까지 되뇌었던 저 쇳소리가 다시 울려 퍼진다.


“아버지!”


나는 뒤늦게 목놓아 외쳤으나 아버지에게 닿지 못했다.

아이의 몸으로 낼 수 있는 소리는 작았고, 곧 귀를 찢는 함성이 터졌기 때문이다.


와아아아아아!


수천의 병사가 엉겨 싸우는 소리가 들린다.

제이베르 군이 성벽에 닿은 모양이다.


그 함성 소리에 내 목소리 따윈 파묻힌다.

아니, 저 소리가 아니라도 반대편 벽까지 내 목소리는 닿기 어렵다.

성인 남자가 온몸으로 밀어붙야 옮겨질 만큼 거대한 벽.


내가 '돌아왔다'는 것을 확신했음에도 아버지는 날 떠나 보냈다.

내 기억과 똑같이, 자신이 방패가 되어 내가 살아남을 수 있도록.


그리고 자신 또한 전장으로 향하셨겠지.

랑게르나는 전장에서 도망치지 않는다.

그게 랑게르나니까.


······도망치지 않아야 하는데······.


“······아버지······.”


아버지는 그런 랑게르나의 미래를 위해, 내게 도망치라 말한다.

살아남으라고.

내가 마지막 랑게르나니까.


나는 아버지의 당부를 이해하려 노력했다.

그러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다.


- 아드리안.


입술을 짓씹는데 익숙해진 목소리가 나를 부른다.

나는 대꾸하지 않는다.

가슴이 미어져 숨을 쉴수가 없다.

목소리는 내가 대답하지 않자 목소리, 아르다르보가 다시 한 번 재촉했다.


- 아드리안 랑게르나. 가야 한다.


아드리안 랑게르나.

그래, 나는 랑게르나다.

난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물었다.


"아뇨. 설명하십시오.

아버지와 당신이 한 대화가 무슨 뜻인지,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그 설명을 듣지 못하면 여기서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아르다르보가 재촉했지만 시간은 있다.

원래도 그의 도움 없이 잘 빠져나갔으니까.

같은 상황이 다시 벌어졌고, 지금의 나는 처음의 내가 아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열 살 짜리 내가 빠져나간 길을 산전수전 다 겪은 지금의 내가 벗어날 수 없을 리 없다.


같은 시간에 같은 경로를 따라가면 반드시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

그러니 중요한 것은 상황 파악이었다.


- 네 아버지는 납득했다.


"제가 납득하지 못했습니다!"


기껏 시간을 되돌렸는데 아버지를 그대로 잃었다.

가장 간절했던 소원 중 하나였다.

아니, 내 소원은 그것 뿐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게 아버지가 곧 가문이었으니까.

가문에 집착했던 것도 아버지의 유언 때문이었으니까.


- ······너는 시간을 되돌렸다.


"압니다."


- 그게 쉬운 일은 아닐 거라는 것도 알겠지.


"그렇겠죠."


아르다르보가 잠시 침묵했다.

그에게 형상이 있다면 상당히 곤란한 얼굴일 것이 분명하다.


- 힘을 쓰는데에는 조건이 필요하다.

여러가지가 필요하지만,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너희 랑게르나의 피다.


"당신이 핏값이라고 말한 그것 말입니까?"


- 그래. 그 핏값 말이다.


"그게 내가 다시 아버지를 다시 잃는 것과 무슨 상관있습니까?"


- 다른 이유도 있지.


"······다른 이유?"


- 바꿀 수 없는 인과도 있다.

네가 지금 네 아비를 살린다면 내가 이곳에 존재할 수 없게 된다.


기가 막혔지만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여기서 아버지를 살린다면 랑게르나는 무너지지 않는다.

랑게르나가 무너지지 않는다면 내가 20년을 홀로 헤매다가 외롭게 들판에서 피를 쏟으며 죽을리도 없을 것이다.

쏟아지는 피가 없다면, 내가 마지막 남은 랑게르나가 아니라면 아르다르보 또한 잠에서 깰 필요가 없었으리라.


- 네 아비의 목숨이 지금 시점의 랑게르나의 핏값이기 때문이다.


나는 마법을 모르지만 형태가 없는 위대한 힘 중 대가를 치뤄야하는 종류가 많다는 건 알고 있다.

아르다르보가 말하는 힘은, 그리고 그 힘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조건이 그 대가를 의미하는 모양이었다.

결국 내가 죽은 시점에서는 내 목숨이, 현시점에선 아버지의 목숨이 대가란 뜻이다.


- 미래에서 핏값은 네 목숨으로 치렀다.

그리고 이 시점으로 돌아오기 위해서 또다른 랑게르나의 피가 필요하지.


"······."


- 그리고 네가 원한 것은 기회였다.


시간을 되돌린 것.

아르다르보는 그것을 내가 원했다고 말한다.


- 많은 인과는 이미 발생했고, 그 시점에서 '기회'를 얻기는 어려웠다.

알았을지는 모르지만, 내가 눈을 뜬 순간 네 놈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였다.


"······시간을 되돌릴 만한 힘이라면, 날 되살리기는 쪽이 더 낫지 않았습니까?"


- 그러길 바랐는가?


이번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바란 건 소생따위가 아니었으니까.

나는 잃어버린 모든 것에 대해 후회했고, 그리고 그것을 되돌릴 기회를 원했다.


- 네 소원이자 내 의무.

랑게르나의 이름이 지워지지 않기 위해선 소생보다 회귀 쪽 확률이 높다고 판단했다.


"당신은 미래의 핏값은 내 목숨으로 치뤘고 이 시점으로 돌아오기 위해선 또다른 랑게르나의 피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이 시점으로 돌아오기 위해 필요한 또다른 랑게르나의 피가 내 아버지 피 입니까?"


- 그렇다.

시점과 시점을 잇기 위해선 랑게르나의 피가 필요하니까.


"아버지는 그걸 이해했고요?"


- ······그래.


아르다르보와 짧게 주고받은 몇 마디만로 아버지는 단번에 핵심을 짚어냈다.

마치 아르다르보가 말하는 그 조건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그리고 나는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가문의 지식입니까."


대대로 내려오는 가주의 전승.

오직 가주들에게만 전해지는 랑게르나의 이야기.

나는 그저 추측했으나 아르다르보가 거기에 확신을 얹어주었다.


- 그래.

네 아비의 죽음까지는 어쩔 수 없는 인과(因果)다.

그러니 다음을 대비하라.


하지만 상황을 이해하는 것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별개였다.

머리는 차갑게 식었으나 서러움이 북받쳤다.


"아버지를 다시 잃었습니다!"


아버지를 다시 만나는 것.

그것이 내 모든 소원이라고 해도 좋았다.

무력하게 떠나보낸 그 뒷모습을 다시 보는 것, 허무하게 잃어버린 그 체온을 느끼는 것이 내 사무친 소원이었다.


기회가 다시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과오가 반복되었다.

유일한 혈육을 잃어버렸고 가문의 가르침을 따르는 대신 홀로 살아남기 위해 비밀 통로에 외따로이 떨어졌다.


"당신은 분명 되돌릴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왜!"


- 난 되돌릴 수 있다고 말한 적 없다.


"······!"


- 나는 기회를 주겠노라고 말했다.


그 말이 맞았다.

아르다르보가 내게 제안한 것은 정확히 '기회'였다.

시간을 되돌렸으니 아버지를 되살릴 기회를 다시 얻었다고 생각했을 뿐.


- 네 후회는 그것 뿐이었느냐?


내 후회.


난 죽음을 목전에 두고, 무엇을 후회했었지?


형편없이 살아온 세월.

복수도 가문의 이름도 찾지 못한, 이도저도 아닌 어설픈 삶.

잃어버린 아버지와 ······잃어버린 랑게르나라는 이름.


"······내게 무얼 원합니까."


원하는 것이 있으니 내게 기회를 주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목소리의 정체를 알고 계시는 듯 했으니 적어도 해로운 존재가 아니란 것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해롭지 않은 존재라 한들 이유없이 나를 돕진 않았을터.

어떤 이유이든 내게 '기회'를 선사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 나는 아르다르보.

최초의 랑게르나인 시벨리안 랑게르나와 함께한 최초의 늑대.

나는 랑게르나의 이름이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을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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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주인을 잃은 숲 1 24.08.09 111 4 12쪽
4 바뀐 것과 바뀌지 않는 것 3 24.08.08 124 2 12쪽
» 바뀐 것과 바뀌지 않는 것 2 24.08.07 139 3 12쪽
2 바뀐 것과 바뀌지 않는 것 1 24.08.06 148 4 13쪽
1 회귀 24.08.05 202 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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