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의 복수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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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블몽블
작품등록일 :
2024.08.05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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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4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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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5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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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

DUMMY

땅에 닿은 등이 차다.

흐릿해지는 시야로 매캐한 연기가 어지러이 겹쳐 보인다.

하늘이 맑다.

지나치게 맑다.


죽기엔 아까울 정도로.


“······.”


무거운 정적.

그토록 시끄러웠던 들판에 고요했다.

지독한 생사(生死)의 갈림길이 마치 꿈이었던 것처럼.


까악까악.


멀찍이서 까마귀 우는소리가 귀를 파고든다.

왼쪽 귓바퀴가 날아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저것이 까마귀의 울음소리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큼, 쿨럭! 컥!”


숨을 깊게 들이쉬려고 해봤지만, 호흡이 끝까지 닿지 않는다.

피섞인 기침만 쏟아질 뿐이다.


‘글렀나.’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다.

고작 숨을 몇 번 골랐을 뿐인데 이미 지쳤다.

얕은 호흡만이 반복해서 이어질 뿐이다.


애초에 용병질로 먹고살았으니 언젠가 전쟁터에서 죽으리란 생각은 했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는데.

이런 식으로 소모품처럼 내던져져서, 이토록 허무하게.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제대로 된 배경도 없는 주제에 전쟁터에 지원한 것?

아니면 용병이 된 것?

아니, 애초에.


‘······가문이 망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드리안 랑게르나.


유서 깊은 벨모르 왕국의 변경백 랑게르나 가문의 마지막 남은 자손이다.

아니, 정확히는 마지막 남은 ‘진짜’ 랑게르나.

내게서 가문을 빼앗은 숙부는 랑게르나의 징표를 타고 나지 못했으니까.


‘그 이름 따위 지워진지 오래지만.’


오래전 가문에서 쫓겨난 숙부가 가문의 영지와 국경을 마주한 제이베르 제국의 군대를 끌고 왔을 때, 랑게르나는 끝났다.

그리고 제국은 랑게르나 영지를 시작으로 벨모르 왕국을 그대로 잡아먹었다.


벨모르 왕국이 아무리 약소국이었을지라도 나라 하나를 무너뜨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랑게르나가 무너진 이후 벨모르가 제이베르에게 완전히 무너지기까지 3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내가 가문을 잃은 것은 고작 열 살 때의 일.

벨모르가 완전히 멸망한 것은 내가 13살 때의 일이다.

때문에 어떤 경로로 벨모르가 그토록 빠르게 무너진 것인지는 나도 자세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세월이 지난 후 확인할 수 있는 정보들로부터 추론할 수 있는 것이 몇 가지 있었다.

랑게르나를 시작으로 한 벨모르의 멸망에 내 숙부, 벤야민 랑게르나의 역할이 지대했다는 것.

비록 자세한 과정은 알 수 없었지만, 제이베르의 벨모르 정복전쟁이 끝난 후 벤야민 랑게르나가 제이베르의 황제에게 새로운 성(姓)을 하사받았다고 했으니까.


그렇게 랑게르나 이름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오늘 내가 죽으면, 랑게르나의 피는 완전히 끊긴다.

랑게르나는 애초에 손(孫)이 귀한 가문이니까.


‘······조용히 살기라도 할 걸 그랬나······.’


죽음이 코앞인 탓인지,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이내 지웠다.

홀로 살아남은 밤의 기억은 날 평생 따라다녔다.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은 아무것도 잊을 수 없게 했다.


모든 것을 잊고 평범하게 사는 것?

불가능했다.


복수?

하고 싶었다.

숙부가 업은 것이 제이베르 제국의 황제가 아니었다면.


모든 것을 잃은 아이는 할 수 있는 게 없었고, 살아남기에 급급했다.

배운 것은 목숨을 빌어 살아가는 법 뿐.


숙부를 죽이기만 하는 것이라면 가능했을지 모른다.

허나 잃어버린 랑게르나의 이름을 되찾는 방법.

그런 게 있었을까?


가장 낮은 곳으로 추락한 나는 살아남기 급급했고, 평생을 죽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어야 했다.

질척한 절망의 늪바닥에 처박힌 나는 죽음에 이른 오늘까지도 그 늪밖으로 기어나가지 못했다.

낮고 어두운 곳으로 점차 가라앉을 뿐.


‘······최소한······.’


최소한 숙부의 목이라도 그었다면 덜 후회될까.

어차피 이렇게 뒈질 거, 먼저 죽이기라도 할 걸 그랬나.

하지만, 동귀어진으로 삶을 불사르기엔······.


"······."


오른손은 감각이 없지만, 왼손은 그래도 어느정도 움직였다.

몸에 구멍이 뚫린 덕분에 고작 한 뼘 움직이는 것도 고역이다.

고통섞인 신음이 절로 흘러 나오는 것은 덤이다.


“······으······.”


한참을 헤맨 후에야 손끝에 차고 단단한 것이 닿았다.

보이지 않지만 무엇인지 안다.

손끝에 닿는 것은 피처럼 붉은 보석이 장식된 목걸이다.

20년 전 그날 이후로 한시도 몸에서 떼어놓은 적 없는 가문의 보석이자 동시에 아버지의 유품이기도 한.


『가져가라.

그리고 목숨과 같이 여기거라.』


20년 전 그날 아버지는 그렇게 말씀하시며 이 목걸이를 내 목에 걸어주셨다.

이 목걸이는 내게 남은 랑게르나와 아버지의 유일한 흔적이다.

아버지의 마지막 말씀이 아니어도 난 이 목걸이 만큼은 포기하지 못했다.

굶어죽기 직전에도 목걸이를 팔아치울 생각을 하지 못했고, 힘이 없던 시절 목걸이를 도둑 맞았다가 되찾기 위해 거의 죽을 뻔하기도 했다.


"······후······."


나는 목걸이의 보석을 움켜쥐었다.

신도가 십자가를 부여잡고 신에게 기도하듯이.


보석을 움켜잡은 손이 피로 끈적였다.

이 피는 내 피일 것이다.

지금 내 숨이 끊어져가는 건 가슴 바로 아래에 있는 자상 때문이니까.

때문에 목걸이 주변을 비롯한 상체는 그 상처에서 흐른 내 피로 질척했다.


『살아남아라.』


아버지의 마지막 말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내게 남긴 아버지의 마지막 말.

그것은 복수도 아니요 가문의 재건도 아닌 그저 살아남아라, 였다.

하지만 나는 그조차 이루지 못했다.


그래.

나는 랑게르나.

실패한 랑게르나다.


"······시X."


내 삶의 결론을 깨닫자 욕지기가 절로 튀어나왔다.

나는 결국 살아남지도 못했고 복수하지도 못했다.

가문의 재건은 커녕 아버지의 유언조차 지키지 못하고 이렇게 생을 마감하다니.


싫다.


싫어.


이런 식으로 끝나고 싶지 않다.

이런 식으로 잊혀진 채, 빚진 목숨조차 이토록 허무하게 소비해버리고 싶지 않다.


"······시X······!"


다시 한번.

다시 한번 더 기회가 주어진다면······!


- 기회가 주어진다면, 할 테냐?


비통함에 혀를 짓씹는 내 머릿속으로 묵직한 목소리가 관통했다.

귀가 아닌 뇌에 직접 때려박는 듯한 울림.

낮고 묵직하며, 위엄이 있는 목소리.


- 위대한 시벨리안 랑게르나의 마지막 자손이여.


“······누······.”


입을 열었으나 제대로 내뱉을 수 없었다.

들끓는 비통함에 흥분한 탓인지, 다시 입을 열자마자 피섞인 기침이 연이어 터졌다.


쿨럭! 쿨럭! 쿨럭!


한참동안 밭은 기침이 쏟아졌고 덕분에 티끌만큼 남아있던 기운마저 모조리 소모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로 끝이 보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목소리는 그런 내가 기침을 멈출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가 다시 물었다.


- 기회가 다시 주어진다면, 각오가 되어 있느냐고 물었다.


기회? 각오?


- 구태여 입으로 뱉을 필요 없다.

네 피가 내게 닿았으니 의지만으로도 충분하리라.


연달아 이어진 말의 절반도 이해할 수 없었으나 한가지는 확실했다.

목소리는 내게 기회를 준다고 했다.

아마도 그 기회란, 내가 후회하는 것들에 대한 기회리라.


- 답하라.

네게 기회를 준다면, 각오가 되었느냐?


저 목소리의 정체가 무엇이든 상관없다.

후회하는 것들을 돌이킬 기회를 준다면 그 상대가 설사 악마라도 상관없으니까.

그리고 대가가 무엇이라도 상관없다.


'각오가 되어있다면?'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난 본능적으로 알았다.

완전히 숨이 끊어지기 전에 이 대화가 마무리 되어야 한다는 걸.

목소리 또한 그것을 알고 있는 듯 빠르게 대답이 이어졌다.


- 좋다. 그렇다면 네게 기회를 주마.


방금 전까지 기회만 다시 주어졌으면 하고 바랐다.

거절할 이유가 없다.




***




높은 천장과 드리워진 천.

몸을 감싸는 천의 감촉이 부드러웠다.


'······어디지?'


의식이 끊기기 전까진 흙바닥에 뻗어있기에 등에 닿는 고급 천의 부드러움은 더더욱 이질적이었다.

이렇게 좋은 침대는 가문이 망하기 전에나 접할 수 있었는데.


'몸도······ 이상하게 가뿐해.'


숨이 끊기기 직전이었으니 쉽사리 나을 상처가 아니었다.

헌데 눈을 뜬 지금 몸의 상태가 무척 쾌적했다.

애초에 다치지 않았던 사람처럼.


그 이질감에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키는데, 침대 맞은편을 정면을 장식한 태피스트리가 눈에 들어왔다.

벽난로에서 흘러나오는 광원 때문에 붉게 물든 태피스트리.

태피스트리를 장식한 문양을 알아본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미친······."


나를 마주 보고 있는 붉은 눈의 늑대 문양.

늑대를 가문의 상징으로 삼는 가문은 많지만, 붉은 눈동자를 가진 늑대를 상징으로 가진 가문은 오직 하나뿐이다.


랑게르나.

사라진 나의 가문.


‘······그러고 보니······.

손이······ 작아.’


정면의 태피스트리에게 시선을 뺏긴 것도 잠시, 내 눈에 들어온 손이 이상하게 작았다.

나이 서른의 남자 손이 아니다.

굳은 일 한 번 한 적 없는 아이의 손.


‘아이라고?’


황당함에 나는 방 안을 훑어 거울을 찾았다.

멀지 않은 곳에 작은 거울이 보였다.

그리고 그 거울을 통해 낯설지만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내 얼굴이 아니다.

동시에 내 얼굴이었다.


자고 일어난 탓에 좀 부스스 하긴 하지만 곱게 손질된 머리와 잘 먹고 잘 자서 혈색 좋은 얼굴.

기껏해야 열 살을 됐을까 싶은 앳된 모습.

거울에 비친 얼굴은 분명 어린 시절의 나였다.


'······기회'라는 게 이런 뜻이었나.'


목소리는 내게 기회를 준다고 했다.

그리고 상황을 보아하니 그 기회라는 것이 시간을 되돌려준다는 의미였던 모양이다.


상황을 이해하고 나니 방에서 익숙한 것들을 찾을 수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잊고 있었던 풍경이다.

꿈에서까지 그리워했지만 결국 너무 오래되어 빛바래고 말았던 유년의 기억들이 다시 현실이 되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벽을 장식한 가문의 태피스트리.

한쪽 구석에서 조용히 타오르고 있는 벽난로.

틀림없다.

여긴 내가 유년 시절을 보낸 랑게르나 가문의 성, 잿빛 성(Gray castle)이다.


'······돌아왔다고······.'


난 당황 속에서도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죽기 직전 내 머릿속을 관통하던 그 목소리는 어떻게 시간을 되돌렸는가.


아니, 아니다.

'어떻게'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지금이 '언제'인가.


지금 보이는 풍경은 아무리 봐도 어린 시절 내가 사용했던 방이다.

그리고 내가 가문을 잃고 홀로 남은 것은 열 살.

즉, 지금의 내 나이는 많아도 열 살이라는 뜻이다.

이 방에서 다시 눈을 뜬 이상 열 살보다 더 어릴수도 있지만 그보다 나이가 많을리는 없으니까.


'정확히 언제지?'


방의 장식이 가볍되 벽난로에서 불이 꺼지지 않은 것을 보니 아마도 겨울 초입.

잿빛 성이 있는 브리셀론 북쪽의 겨울은 혹독하니, 때가 한겨울이라면 벽 사방이 두터운 모피로 장식되었을 것이다.

돌벽을 뚫고 들어오는 찬바람을 막기엔 모피가 제격이니까.


하지만 이러한 사실들로는 대략적인 시기만 알 수 있을 뿐 오늘이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사용인이라도 깨워야 하나?


허나 내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누군가 밖에서 이렇게 외쳤으니까.


“불이야!”


작가의말

안녕하세요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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