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 전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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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가연
작품등록일 :
2024.08.08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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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6 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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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8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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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공산당(1)

DUMMY

1. 서울의 공산당(1)


“근데, 역사학 하는 사람은 옷 잘 입으면 안 됩니까?”


크고 선해 보이는 눈은 웃고 있지만, 입가는 씁쓸해 보인다.


“아니 그게 아니고.. 저희 연구소 직원들이 한 교수님 멋있다는 얘기 가끔 해요. 좋은 의미로요. 하하하..”


이 과장이 허둥지둥한다.


“저 괜찮은 거, 저도 압니다. 회의 진행하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다음에 또 뵙죠.”


Centre d'Accueil et de Recherche des Archives Nationales(프랑스 국가 기록 보관소)의 로고가 박힌 에코백에 아이패드를 담으며 던지는 농담 섞인 목소리가, 낮고 단정하다.

정돈된 머리.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나이에 맞는 적당한 고가 브랜드의 셔츠, 자켓, 톤이 어울리는 바지에 구두를 갖춰 신었다. 순토 스마트워치와 몽블랑 백팩까지. 군더더기 없고, 과하지 않다.


- 근현대사 교수님이시라면서, 재즈를 좋아하세요?


- 근현대사 공부하시는 분이라고 들었는데, 만년필 좋은 거 쓰시네요.


- 근현대사 연구한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 신발 비싸다고 들었는데..


- 아, 그 집 한우가 맛있긴 하죠. 연구비 카드 쓰시는 거죠, 교수님?


사람들은 역사학을 전공한, 게다가 근현대사를 연구하는 지석이 구질구질해 보이지 않아서 서운한 지경인듯 했다.

외모에 대한 얘기들은 이제는 제법 눙치며 받아넘길 정도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듣기 편해진 것은 아니었다.

일제강점기와 위안부 연구 성과를 발표하는 자리에서의 마무리 인사가, 오늘 수트가 멋지시네요- 라니.


지석은 독립운동사 전시관 주차장에 세워 둔 차의 시동을 걸고 오디오를 켠다.

서울까지 드라이브 동반은 쇼스타코비치. 소련 곡이지만 냉전 시기에도 수많은 서구권의 상업 영상에 삽입되었던 <왈츠 2번>이 나오자, 이제는 세상에 없는 여배우가 긴 머리에 하얀 손수건을 묶고 해변가에서 춤을 추던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벌써 이십 년 전이다.


가끔 있는 장거리 출장은 회의 시간보다 이동시간이 더 길었어도, 이런저런 쓸데없는 생각을 할 시간을 준다는 점에선 나쁘지만은 않았다. 네비게이션이 필요 없을 정도의 이 지역 운전길은 매일 정신없이 시달리는 지석에게 주어지는 오아시스 같은 여유이기도 했다.


며칠 후 통장에 입금될 회의 수당만큼을 미리 계산해서, 고속도로에 진입하기 직전에 있는 단골 한우집에 전화로 주문해 둔 고기를 받아 차에 실었다. 얼마 전에 독일에서 직구한 무쇠 후라이팬에 구워서 저녁으로 먹을 생각을 하니 벌써 입맛이 돈다.


지방 출장을 갈 때면 그 지역에서 받은 회의 수당은 최대한 그 지역의 맛집에서 쓰고 오는 것이, 지석의 몇 안 되는 취미생활 중 하나이자 자신을 불러준 지자체에 대한 나름대로의 의리였다.


****


오후의 목적지는 서울역 앞 스마트센터. 정부 기관 회의를 할 수 있는 무료 회의실이 제공되지만 무료 주차장은 없어서 건너편 주차장에 돈을 내고 주차해야 되는게, 영 별로다.

그래도 서울 외 지역에서 기차 타고 올라오는 참석자들을 생각하면 위치 면에서는 그만한 곳이 없는지, 지석은 여기서 열리는 회의에 이번 달에만 벌써 세 건째 참석 중이다.

회의 수당은 다 합쳐서 60만원. 20만원씩 세 번이다.


- 자문 회의 한번 가시면 왕복 이동시간 두 시간, 회의장에서 두 시간, 다녀와서 자문 의견서 쓰시려면 여섯 일곱 시간 정도 걸리는데, 회의 수당은 20만 원.. 월급이랑 별도로 한 시간에 만 오천 원에서 이만 원 사이 추가 수입이면 나쁘진 않은데, 교수님은 강의 없는 밤이랑 주말에 글 쓰시니까, 야간이나 주말 근무잖아요. 아, 주차비도 빼야 되고요.


우여곡절 끝에 석사 논문이 통과되고 지난 학기에 박사과정까지 들어와서 몇 년째 허물없이 지내는 제자인 예서가 오늘 회의 얘기를 듣고 읊어줬던 계산법이다. 문득 엊그제 교수 모임 자리에서, 요즘 단가가 낮아져서 설계 도면 검토하는 데에 200만원도 겨우 받았다고 투덜대던 건축과 민 교수 생각이 난다.


지식의 대가에 정해진 가격은 없다지만 이 판은 원래부터 돈이 돌지 않았다.


역사를 되새기는 고고한 연구를 하는 데에 감히 수당의 많고 적음을 논하는 걸 터부시해 온 선배들의 체면 때문이었는지, 실용과 성장을 중시하는 분위기에서 사학과가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할 정도의 척박한 연구 환경 때문이었는지는 모른다.


물론, 그 와중에도, 눈치 빠른, 스스로를 ‘시대의 흐름에 순응하는’ 역사학자라 자평하는 사람들은, 언론과 정계를 이용한 역사적 이슈를 만들어 내고, 그것들을 계기로 새로운 연구 사업을 창출해 내는 놀라운 수완을 발휘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석을 더욱 짜증나게 하는 것은, 주변 사람들의 속 없는 반응이었다.


- 요즘 우리 바닥 돈은 한 교수가 다 쓸어가잖아.


같은 과이지만 연구하는 시대가 이천년이 넘게 차이가 나는 윤 교수는 마치 자기에게 와야 할 자문 요청이 지석에게 간 것처럼, 아니 자문비가 지석에게 잘못 입금되기라도 한 것처럼 툭툭 실없는 말을 던지곤 했다.


항상 저녁 시간 전에 연구실 문을 잠그고 퇴근하는 윤 교수가, 강의, 자문, 연구 논문 준비를 위해 매일 밤과 주말 내내 연구실에 처박혀 사는 지석의 일상을 알 리 없었다.


또한,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사업들의 결과물로 알맹이 없는 보고서 몇 장을 제출하는 행태를 보며, 그 사업에 딸린 법인 카드로 친목 모임 식사를 계산하는 모습을 보며, 지석이 혼자 내뱉는 분노와 자조 섞인 욕설에는 더더욱 관심을 가질 리 없었다.


자주 듣는 얘기 중, 얼마 되지 않는 전공 분야 교수 자리를 젊은 나이에 꿰찼다는 건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만, 운이 따랐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보다 누구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만큼의 치열한 노력이 있었다고, 지석은 항상 자부했다.


****


서둘러 올라간 회의실에는 시청 문화정책과의 박 계장과 몇몇 외부 참석자들이 이미 도착해 있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이쪽, 처음 인사하시는 거죠? 국가유산청에서 일 년 동안 우리 시청으로 인사 교류 나오신 학예연구사 선생님인데, 이번 달부터 업무가 바뀌어서 저희 회의 담당하시게 됐어요. 앞으로 교수님께 회의 연락은 강 선생이 드릴 거예요. 강 선생님, 인사하세요.”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강희선입니다.”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한지석입니다.”


짧은 악수를 나누고 명함을 주고 받는 순간 언뜻, 희선의 팔뚝 안쪽에 글자 같은 얼룩이 보였다. 지석은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찰나의 순간, 봐야 할 것을 놓쳤을 때 아쉬움의, 본능적인 발로였다.


‘뭐지, 내가 잘못 본 건가.’


쌍꺼풀은 없지만 제법 큰 눈에, 별 장식 없는 머리를 질끈 묶은, 많아 봤자 갓 서른 밖에 안 되어 보이는 여자. 서울로 오는 차 안에서 떠올렸던 여배우만큼의 미모는 아니었지만 수수함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흔한 화이트 반팔 셔츠에 네이비색 바지, 광화문 네거리에는 그런 스타일의 옷을 입은 사람이 매일 수십 명은 지나다닌다.


여자여서 군대를 안 갔다고 해도, 지금 초임이 아니라 중앙부처에서 근무를 하다가 시청으로 인사교류까지 왔다면, 상당히 이른 나이에 연구사가 되었다는 건데.. 세부 전공이 뭐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시험 쳐서 합격할 때까지 어지간히 공부만 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가볍게 바른 파우더와 립스틱이 어색하게 겉돈다. 첫 회의 참석 자리라 나름 예의를 차린답시고 평소에 안 하던 화장을 한 모습이, 어쩔 수 없이 서툰 티가 나는 듯 하다.


그런데.. 문신이라니?


하지만 아무리 궁금한게 있으면 참지 못하는 급한 성질의 지석이더라도, 처음 만난 여자에게 팔뚝 안쪽을 다시 보자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여기, 오늘 회의 자료입니다. 참석자 서명은 두 번째 칸에 부탁드릴게요.”


책상에 서류를 내려놓고 머리를 올려 묶는 희선. 마음처럼 잘되지 않는 듯 몇 번을 고쳐 묶는다. 지석의 예리한 시선은, 이번에는 놓치지 않았다.


<Memento Mori>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


8개월 전.

업무협의를 하느라 종종 들렀던 시청 건물인데도, 막상 여기서 일을 한다고 생각하니 희선의 얼굴엔 약간의 긴장이 묻어난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번에 인사 교류 온 강희선 연구사입니다.”


“요즘엔 중앙부처랑 시청이랑 교류하시는 분들이 꽤 있으시더라고요. 누가 오시나 했는데 강샘이 오신다는 얘기 들으니까 엄청 반가웠어요. 이렇게 같이 일하게 될 줄은 몰랐네요. 1년 계시는 거죠?”


“네, 1년이에요. 저도 아는 분이 계셔서 좋네요. 잘 부탁드립니다.”


박 계장과 희선은 낯이 익지만, 최 과장과는 처음이다.


“시청 근무는 처음이시죠? 어디 어디 계셨었어요?”


“연구원 생활은 국립한국박물관에서 했고요, 연구사 되고 나선 부서 몇 군데 돌았습니다. 교류 오기 직전엔 청에서 국제 교류 업무 했습니다. 지자체 근무는 처음이고요.”


“일 잘하신다고 소문이 여기까지 났던데 뭐. 잘 지내봅시다.”


“아닙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시청 근무 첫날의 서먹했던 대화가 아직 생생한데, 복귀까지는 이제 어느덧 4개월도 남지 않았다. 웬만한 일들은 다 손에 익어서 조금 편해질 무렵, 박 계장과 점심 식사 후 여느 때와 같이 산책을 하던 날이었다.


“강샘, 자문회의 운영 해 봤죠?”


“네, 청에서 많이 해 봤죠. 무슨 일 있으세요?”


“길거리 다니다 보면 조그맣게 세워진 돌에 간단하게 설명 적힌 거 있잖아요. 여기 누구누구 집터였다, 예전에 무슨 관청이 있었다, 뭐, 그런 거. 본 적 있죠?

그거 설치 검토하는 회의를 우리 과에서 운영하잖아. 근데 담당하던 이 주무관이 이번 달에 휴직 들어가요. 그래서 말인데..”


“제가 하죠 뭐. 옆에서 보니까, 회의가 자주 있는 것도 아닌거 같던데요.”


“아이고, 고마워요. 강샘이 해 준대니까 너무 고마워요. 내가 이번 주에 저녁 살게.”


목소리가 호들갑스럽다.


며칠 후, 업무 조정표의 결재가 났다.

인수인계서의 마지막 장 설명을 마친 이 주무관이, 서랍에서 파일철을 꺼낸다.


“강샘, 그동안에 해결 안 됐던 게 있는데.. 여기 이거. 박 계장님이, 따로 말씀은 없으셨죠?”


“네, 별도로 얘기 들은 건 없어요. 이건 뭔데 따로 모아두셨어요?”


“조선공산당, 이라고.. 시간 되실 때 한번 쭉 보세요. 제가 이런 말씀 드리긴 좀 그렇지만, 너무 복잡할 거 같으시면.. 샘 4개월 후에 복귀하시니까.. 그때까지 미루시는 것도, 방법이고요..”


왜인지, 말꼬리가 흐려진다.


“네, 어떤 건지 몰라도 나중에 한번 볼게요. 해야 되는 거면 제가 있는 동안 하고 가죠 뭐.”


<조선공산당 표석 설치 신청>.

첨부된 자료들이 제법 두툼하다.


****


올라간 소매를 내리며 희선은 자리에 앉아 회의 테이블 마이크를 켠다.


“안녕하세요,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이번에 새로 이쪽 업무 담당하게 된 강희선 학예연구사입니다. 오셔야 될 분들 다 오신 것 같아서,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회의 주제는 표석(標石) 설치 관련입니다.”


“그냥 공산당 건이라고 해요. 우리끼리 다 아는 처지에 뭘 번거롭게 말을 돌려.”


회의 테이블 중앙 자리에서, 쏘아붙이는 듯한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희선과 지석의 눈이 짧게 마주쳤다. 피곤한 하루가 될 것 같은 예감이다.


작가의말

안녕하세요, 민가연입니다.

최대한 현실을 반영한, 제대로 된 직업물을 집필하고자 노력하겠습니다.

다만 모든 인명, 지명, 기관명 등 고유명사는 사실과 무관하며

인용되는 사건들은 언론에 이미 공개된 내용을 바탕으로 창작을 가미하여 재구성됩니다.

스토리 구성상 부득이한 경우 일부 사건들의 선후관계가 바뀔 수 있습니다.

추천과 선호작 등록은 신입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많은 관심과 격려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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