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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가연
작품등록일 :
2024.08.08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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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2 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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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전쟁의 잔해 앞에서(3)

DUMMY

7. 역사 전쟁의 잔해 앞에서(3)



- 딸깍.


“강 선생님, 이 영상, 본 적 있으시죠?”


“네, 2015년 7월 5일에 독일 본Bonn에서 했던 39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영상이네요. 저희 청 담당자는 아마, 저 부분은 외우래도 외울 거예요.”


“그래도 같이 한 번 다시 봅시다.”


[Madame Chairperson, Thank you for the opportunity to deliver this statement on behalf of the Government of Japan.


의장님, 일본 정부를 대표하여 이 성명을 발표할 기회를 주신데 대해 감사를 표합니다.


... Japan is prepared to take measures that allow an understanding that there were a large number of Koreans and others who were brought against their will and forced to work under harsh conditions in the 1940s at some of the sites, and that, during World War II, the Government of Japan also implemented its policy of requisition. ...


... 일본은 1940년대에 일부 시설에서 수많은 한국인과 여타 국민이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끌려가 가혹한 조건 하에서 강제노동을 당하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정부도 징용 정책을 시행하였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조치를 취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 ]


“군함도, 아, 정확히는 메이지 산업 유산 등재 때, 일본 대사 발언이잖아요.

forced to work under harsh conditions. 가혹한 조건 하에서 강제노동, 이라는 부분..

지금까지 하나도 지킨건 없지만, 어쨌든 일본이 국제 사회에서 저런 표현을 했다는게 의의가 있었죠.”


“사실 그게, 그렇게 끝났던 게 아니었어요.

그 당시에도, 우리는 forced to work 부분을 강제노동, 강제노역이라고 해석했지만, 일본 정부는 귀국하자마자 기자회견에서, “‘forced to work’는 ‘일하게 되었다(働かされた)’를 의미”하는 거고, 앞서 발언이 강제노동을 인정한 것은 아니라고 바로 부정했죠.

당시 총리는 아베였고, 기자회견을 했던 일본 외무상(外務相) 은...

지금 일본의 총리가 된, 기시다 후미오,고요.


근데, 내가 이번에 새삼스럽게 주목한 부분은, 여깁니다.“


[... there were a large number of Koreans and others ... 수많은 한국인들과 여타 국민들이 ... ]


“하아, 이 부분을.. 알아 보셨군요?

많이들 놓치시는데.”


희선이, 빙그레 웃는다.


국가유산청 내에서도, 외국과 영어로 소통하면서 해외 출장이 잦은, 희선이 예전에 담당했던 국제 교류 파트를 그저 멋있다고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외부에 보여지는 것과 많이 달랐다.


가장 어려운 업무 중 하나는 국문과 영문 번역 대조 작업이었다. 딱 맞게 번역할 수 있는 단어를 고르기 위한 토론이, 하루를 넘기는 게 부지기수였다.


“Korean은, 한국인이죠. 사실 그때 일본 대사의 발언 중에, 또 하나의 중요한 단어가 그거였어요. 강제 동원 인정 부분에 묻혔지만요.

그 당시 일제강점기에, 강제로 동원됐던 노동자들이 ‘한국인’이었다고 표현한 거요.”


“강 선생님, 고향이 어딥니까?”


뜬금없는 질문에, 희선은 자세를 고쳐 앉고 지석의 얼굴을 빤히 본다.

의도를 알 수 없는 표정이다.


“서울입니다.”


“해외 출장 많이 나가시잖아요. 외국에서 누군가가 강 선생님한테 어디 사람이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하세요?”


“한국 사람이라고, 하죠.”


“근데, 한국 사람들끼리, 여행하다가 만나서 어디 사람이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합니까?”


“서울에서 왔다고, 서울 사람이라고... ”


“그렇죠. 일본이 그때 회의장에서, Korean이라는 단어를 쓴 거, 솔직히 전, 이게 엄청난 외교적 성과였다고 생각합니다.

그 시기에 ‘한국’의 ‘존재’를 인정한 거니까요.


요즘 일본은, the people from Korean Peninsula, 한반도 출신 사람들, 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어요.

일제 강점기 당시에 ‘한국’, ‘한국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이제, 다시 부정하는 겁니다.

‘한국인’이 아니라, ‘한반도 출신, 한반도에서 온 사람들’.

오사카 출신, 교토 출신... 이런 뉘앙스로.


언뜻 봐선 비슷해 보이니까, 언론에서도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많아요.

그렇지만 사실 이건, 내선일체의 관점에서 일제강점기의 모든 곳이 ‘하나의 일본’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 시기 사람들을 ‘국적’이 아닌 ‘출신지’로 부르려고 하는...

그런 의도가, 강력하게 반영된 거죠”


지석은 다시 노트북 화면을 켠다.


“참, 강 선생님, 일본어도 좀 하십니까?”


“학부때 교양필수여서, 조금은요.”


“나는 일본인입니다,를 뭐라고 하죠?”


“私は日本人です。와타시와, 니혼진데스.”


지석의 노트북 화면에, 나보이 극장 벽에 붙은 안내판이 가득 채워진다.

글자 부분을 확대해서, 희선 앞에 내민다.


[ 日本国民 ]


[ JAPANESE CITIZENS ]


日本人일본인과 日本国民일본국민, Japanese와 Japanese Citizens.


“일본어로는, 일본인이 아니라 일본국민...

영어로는, 일본인이 아니라, 일본 국적자에 가깝죠.

사실 citizens 이라는 단어를 굳이 붙이는 건, 꼭 태생이나 출생보다는, 그 국적이나 시민권, 집단에 속한 사람,이라는... 좀 더 넓은 의미의 표현인 경우가 많아요.

European Citizen, Global Citizen... 이런 식으로.”


“아직 확실하진 않습니다. 어제 오늘 이틀 찾은 자료로 단정하긴 어렵겠죠.

역사 연구는,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고요.

그래도 전, 이걸 만들 당시에,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내보일 수는 없던 사람들이 여기 있었던 게 아닐까..

막연히 그런 생각이 듭니다.”


“... 조선인, 한국인이었겠네요.

일본어로는 일본국민이라는 단어를 써서, 마치 그들의 주장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어로는, 일본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 즉, 일본 국적을 갖고 있지만 자신의 뿌리는 일본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포함되었을 수도요.

이걸 만든 누군가가, 그 사실을, 여기에 남겨두고 싶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드네요.


우즈베키스탄에는 연해주에서 강제 이주된 우리 동포, 고려인이 많죠.

어떤 한국인은 러시아군에, 어떤 한국인은 일본군에 서서 전쟁에 나갔을 거고...

아무리 세상이 바뀌었다고 해도, 그 시기의 혼란스럽던 정체성을 단순하게 정의하고 공개하기엔 쉽지 않았을거예요.”


“기운을 좀 빼드리자면, 어쩌면, 번역하는 과정에서 단순히 별 생각이 없었을 수도 있어요.

재밌는건, 아베 총리실에서 배포했던 영문 홍보자료에서도 이 안내판에 있는 Japanese citizens라는 단어를 그대로 인용했더군요.

어떻게 생각해야 될 지 모르겠습니다.”


희선은 지석의 노트북 검색창에 일본어 가타카나 몇 자를 넣어 본다.

관련된 링크를 찾는 건, 어렵지 않다.


“일본 국내에 배포한 일본어 보도자료 원문은...

일본인日本人, 으로 돼 있네요.”


“감상에만 젖어 있으면, 역사는 계속 반복될 겁니다.

일본은 상당히 오래전부터, 불편한 과거를 지우는 걸 치밀하게 준비해 왔어요.

사도광산, 구로베 댐... 숨어 있는 것들이 아직도 많습니다.


적어도 우리가, 이런 상황들을, 제대로 알고는 있어야겠죠.


들어가시죠. 푹 쉬시고, 각자 정리 좀 하다가 체크아웃 시간에 뵙겠습니다.

내일 또 비행기 타려면, 바쁘겠네요.”


****


어느덧 비행기는 카자흐스탄 제2의 도시, 알마티Almaty 에 착륙 중이다.


1980년대 말에서 90년대, 냉전시기의 종식과 구 소련지역과의 수교 개시를 계기로, 그간 다루지 못했던 동구권(東歐圈)의 이야기들이 우리나라 미디어에 등장하기 시작했었다.

어린애들은 보는 거 아니라며 부모님이 뒤집어 씌워 둔 이불 틈 사이로 몰래 봤던 ‘여명의 눈동자’, ‘모래시계’같은 명작 드라마들은, 알게 모르게 지석이 우리의 근현대사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지금처럼 다시보기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 하필 모래시계와 같은 기간에 방송하느라 제대로 챙겨보진 못했지만, 오래도록 기억에 남은 특이한 제목의 드라마가 있었다.


<까레이스키>


큰 인기를 끌지는 못했어도, 러시아 지역 우리 동포들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처음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약간 화제가 되긴 했다.

연해주에서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강제로 실려 목적지도 모른 채 며칠을 달려야만 했던 고통과, 비극적인 죽음들.

드라마 속 찰나의 이미지들은, 그 시기를 다룬 논문들을 읽을 때 지석의 기억 속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곤 했었다.


고려인 강제 이주 열차의 첫 종착지, 카자흐스탄Kazakhstan.


‘여길 오게 되다니.’


“강 선생님은 여행 많이 다니신 것 같던데, 카자흐스탄에도 와 보셨습니까? 저는 처음이라서요.”


“저도 처음이예요. 사실 출장이 아니면, 여행으로는.. 아직 여기까진, 쉽진 않죠.”


짐을 찾고 출국장으로 나오니, 정장을 차려입은 멀쑥한 남자가 희선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들고 서 있다.


[환영합니다

강희선 선생님]


“제가 강희선입니다. 실례지만, 누구신지...?”


“안녕하십니까! 저는 알마티 한국연수원에서 근무하는 김민영 행정관입니다.

저희 원장님이, 이번 저희 행사 때 두 분이 오신다는 보고 받으시고, 공항에 나가보라고 지시하셔서, 나왔습니다.

타슈켄트 들렀다가 오시는 길이라면서요. 수고 많으십니다.”


“저는 따로 연락을 받은 건 없었는데... 어쨌든, 이렇게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되는데...

이쪽은, 민한대학교 한지석 교수님이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희 관용차는 저기, 5번 출구 쪽에 세워놨습니다. 이쪽으로 같이 가시죠.”


해외 공관에서는, 태극기가 꽂힌 일명 1호차는 차관급 이상은 되어야 탈 수 있고, 연수원에서 쓰는 행정업무용 관용차도, 중앙부처 국장급 이상 정도가 공식 일정을 수행할 때나 내 주는게 관례였다.


‘강 선생이 국가유산청장을 대신하는 업무를 부여받고 왔으니, 신경을 좀 쓰나 보네.’


“저희 원장님이랑 강 선생님은, 서로 아주 잘 아는 사이시라고 들었습니다.”


김 행정관이 먼저 말을 건넨다.


“ ...예전에 같이 근무를 했었어요. 벌써, 10년쯤 됐네요.”


“10년 전이요? 강 선생님 그렇게 안 들어 보이시는데... 초면에 실례지만 연세가 어떻게 되십니까?”


“저, 올해 서른 셋입니다.”


더 놀란 건, 지석이다. 갓 서른 정도라고 생각했었는데, 지석보다 겨우 네 살 아래였다니.


“근데 원장님께서, 절 잘 안다고 하시던가요?”


“네. 아주 잘 아는 사이시라고.”


목적지인 <카자흐스탄 호텔 KAZAKHSTAN HOTEL>에 도착했다.

지진이 잦은 알마티에서 1977년에 완공된 최초의 고층 호텔이자 이 도시의 상징적인 건물 중 하나로, 구 소련 시기에 외국인 접객과 업무를 위해 지었던, 당시 기준으로는 최고급이자 초고층의 호텔이다.

조식 포함 1박에 60달러.

알마티의 저렴한 물가가 실감된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편하게 왔습니다.

내일은 저희가 택시 타고 알아서 가겠습니다.”


“뭘요, 제 일인데요. 그럼, 내일 오후에 또 뵙겠습니다.”


체크인을 마친 둘은, 호텔 근처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는다.


“양고기가 냄새도 안 나고, 맛있네요.

근데 그 원장님이랑 같이 근무하시는 동안, 친하게 지내셨나 보죠?”


“아니요.”


지석의 얼굴을 빤히 보며 나오는 대답은, 단호하다.

희선은 말을 뱉고 나서 조금 민망해진다.


“교수님, ... 혹시, 10년 전쯤에, 국보 청동 병(甁) 도난 사건, 기억나세요?”


“기억나죠. 그때, 엄청났었잖아요.

박물관에 강도가 들어서, 진열장을 깨부수고... 국보랑 또 다른 전시된 유물들 몇 점도 같이 훔쳐 갔잖습니까.

뉴스 보면서 얼마나 섬뜩하던지...

다른 곳도 아니고 국립박물관에서 그런 일이.

다행히 유물들은 얼마 안 가서 다 찾았다고 들었습니다만.”


“저, 그 사건 때, 국립한국박물관에서 같이 근무했어요.

그... 양민홍 원장님이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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