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 전공입니다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대체역사

민가연
작품등록일 :
2024.08.08 21:49
최근연재일 :
2024.08.16 02:25
연재수 :
9 회
조회수 :
279
추천수 :
6
글자수 :
49,419

작성
24.08.13 04:31
조회
11
추천
0
글자
13쪽

나는 고려사람(1)

DUMMY

8. 나는 고려사람(1)


"저, 그 사건 때, 국립한국박물관에서 같이 근무했어요.

그... 양민홍 원장님이랑."


“어려운 경험을, 같이 하셨네요.”


"제가, 저희 청 연구사 중에 일찍 입사한 걸로 세 손가락 안에 들 거예요.

그분 덕에 제가 연구사가 빨리 됐죠. 시험 말고 다른 걸 생각할 틈이 없게 만들어 주셨거든요."


"그 원장님이, 강 선생님 공부하는 데 도움을 많이 주셨나 보죠?"


"이것도 생각해 보면... 그분과 근무했던 흔적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탁, 테이블 위에 포크를 놓고는 소매를 걷어 보인다.


팔뚝 안쪽, 새하얀 살 위에 작고 까맣게 적힌 글자들.


<Memento mori>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지석은 무심한 척, 가운데에 놓인 음식을 희선 앞에 덜어 준다.

사실 온 신경은 그 문신에 쏠려있지만...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난감하다.


"한동안 잊고 살았는데, 내일은 어쩔 수 없이 그분을 만나게 되겠네요.

교수님, 전 다 먹었어요. 그만 덜어주셔도 돼요.“


덤덤한 얼굴의 희선.

하지만 아무리 궁금해도, 오늘은 더 물을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럼, 이만 일어나죠."


****


국립한국박물관, 여느 때와 다름없는 날이었다.


“김샘, 오늘도 야근하십니까? 벌써 열두 시가 다 돼가요.”


김선희 연구사는, 사무실에서 박스 한가득 쓰레기를 채워서 나오는 참이다.


“네, 이것저것 정리할 게 계속 나오네요. 집 이사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닌데, 박물관 이사는... 아유, 이거 두 번은 못 하겠어요.”


“그러게요, 뉴 밀레니엄 기념으로 박물관 이전 결정은 진작 해 놓고, 세상에, 아무리 예산이 없어도 그렇지, 이게 도대체 몇 년 걸린 건지.

근데 하필 우리 있을 때 이사를...

하여튼, 일 복 있는 사람들은 따로 있다니까요.

김샘, 연구원들한테 좀 도와달라고 하시지.

희선씨랑은 많이 친하잖아.”


“애들은 공부하느라 바쁘잖아요. 그냥 저 혼자 마무리만 하고 가려고요.”


“양민홍 샘은, 오늘도 먼저 퇴근했나 보죠?”


“먼저 퇴근 아니고, 정시 퇴근하셨어요.

으이그, 양샘한테 너무 뭐라고 하지 마세요. 나쁜 사람은 아니라니까.

최샘은, 오늘 당직이신가 봐요?”


“네. 문 다 잠겼는지 다시 한 바퀴 돌고 오려고요.”


큰 덩치 덕에, ‘곰’이라는 별명이 붙은 최재현 연구사.

휘적휘적, 박물관 뜰을 가로질러 창고를 둘러보고, 돌아와서 전시실 유리문을 열쇠로 잠그고, 유리문 위로 올라간 셔터에 손을 뻗어 내려 보는데...

꿈쩍도 하질 않는다.


‘아, 맞다. 이거 고장났지.’


수화기를 들고, 정문 앞 경비실 번호를 누른다.


“네, 경비실장님, 저 오늘 당직 최재현입니다.

이거 셔터, 아직 안 고쳐졌죠?”


“그렇잖아도 총무과에 제가 몇 번 얘기하긴 했는데, 이사 갈 날이 얼마 안 남았다 보니까... 다음주부터 중요한 것들은 먼저 다 옮기잖습니까.

그, 셔터가, 고치는 데 돈이 많이 드나 봐요.

두고 갈 건물에 우리 예산 쓰는 게, 아무래도 총무과에서는...”


“그쪽 과 입장도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닌데, 매번 당직 설 때마다, 마음이 좀, 그래요.

물론 경비실에도 두 분 계시고, 당직실에 저도 있고, 그렇긴 하지만...

아무튼, 알겠습니다. 오늘 밤에도 수고하십시오.”


선희가 마침, 안쪽에서 전시실 유리문을 열며 당직실 앞으로 나온다.


“어머, 최샘, 막 잠그셨나봐요. 제가 쫌만 일찍 나올걸.

전시실이랑 사무실이 문이 같아가지고...

야근할때마다 번거롭게, 죄송하네요.

새 박물관은 그래서 설계 때부터 입구를 아예 나눴잖아요.”


“아닙니다. 이거 뭐, 금방 다시 잠그기만 하면 되는데요.

김샘, 지금 퇴근하시는 거면, 한 10분만, 당직실 좀 지켜줄래요?

나, 요 아래 살짝 내려가서 담배 한 대만 태우고 올게.

박물관 건물 앞에서는 못 피잖아.

혹시 비상 점검 전화 올지 몰라서 그래요.”


“네, 다녀오세요.”


“열쇠는 여기, 전화기 옆에 있어요.

고마워요. 금방 다녀올게요.”


선희는 당직실 의자에 앉는다.

책상에는 누군가가 가져다 놓은 근처 박물관 도록, 교정을 보다가 만 논문, 메모지 등이 어지럽게 쌓여 있다.


무심히 한 권을 꺼내서 읽어 보고, 다음 책을 꺼내려는 순간...!


“가만히 있어! 안 그러면, 진짜 죽을 수도 있어.”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목덜미의 서늘한 기운.

반항할 틈도 없이 선희의 입과 팔에 청테이프가 칭칭 감기고, 이내 빨랫줄로 몸 전체가 의자에 묶였다.


“김 사장, 거긴 어때? 여긴 준비 다 됐으니까, 작업하러 올라오쇼.

아줌마, 열쇠 어딨... 아, 여깄네.”


복면을 쓴 남자가 휴대폰으로 통화하는 사이, 공포감에 갈 곳을 잃었던 선희의 시선이 당직 전화기에 멈춘다.


‘<112> 저 비상버튼만 누르면 돼’


이 상황이 무슨 상황인지, 판단은 중요하지 않다.

지금은 누군가에게 빨리 연락을 해야 한다.


그때, 연장을 든 남자가 나타났다.


“최 사장, 밑에 경비가 두 명이고, 당직이 한 명이라고 하지 않았어?

밑에서 오다 보니까 세 명이길래 어쨌든 작업해서 김 중사한테 맡기고 왔는데, 얘는 또 뭐야?”


“몰라. 내가 오니까 이 아줌마가 있던데.

뭐, 모르겠고, 일단 할 일부터 합시다.”


선희의 눈에는 눈물이 차오른다.

무섭다. 두렵다.


‘저 사람들은 뭘 하려는 걸까. 어쨌든 저 전화 버튼만 누르면..’


두 남자는 갖고 온 연장들과, 열쇠꾸러미를 집어 들고 나간다.

하필, 전시실 입구 유리문은... 잠겨 있지도 않다.


- 타다다닥.


발소리가 당직실에 가까워진다.


“최 사장 이 새끼, 지는 얼굴 가렸다, 이거구만.”


김 사장이라 불리던 남자가, 선희의 눈을 청테이프로 감고...


몇 분쯤 지났을까.


- 퍽.

- 쨍그랑.


단 두 번의 소리. 그리고, 소름 돋는 정적.


두 남자가, 당직실 앞 유리문을 밀어 제끼고, 달아난다.

선희의 몸은 공포에 굳었지만, 청테이프 아래 두 눈만은 부르르 떨고 있다.

아픔 따위는, 느껴지지 않는다.


****


[어젯밤, 국립한국박물관에 전시 중이던 국보 청동 병을 비롯한 주요 유물들이 강탈당했습니다. 취재에 김하나 기잡니다.


- 사건이 벌어진 건 어젯밤 열두 시경. 국립한국박물관에서 전시 중이던 국보 청동 병과 백자 세 점이 도난당했습니다.

강도들은 경비실의 경비원 두 명과, 야외에 있던 당직자, 당직실에 있던 직원 등 총 네 명을 청테이프와 노끈 등으로 묶고, 전시 중이던 진열장의 유리를 해머와 곡괭이로 깬 뒤, 유물을 훔쳐 달아났습니다.

현재까지 증언을 종합하면 침입자들은 세 명으로 구성된 소규모 조직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경찰은 모든 수사망을 총동원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새 박물관으로의 이전을 앞두고 벌어진, 국보 도난이라는 참사에, 지역사회는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조금 전, 사건에 대한 경찰청에서의 질의응답이 끝났습니다. 박민수 기자 연결합니다.


- ... 이번 범죄는, 너무나 잘 알려져서 시중에서 거래가 불가능한 국보를 탈취한 것으로 봐서는, 전문적인 문화재 털이범은 아닐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여러 가능성을 열어 두고 수사하고 있습니다.


- 박물관에 보안 업체나 CCTV는, 없었습니까?


- 지난 주에 외부 업체와의 보안 계약이 만료됐는데, 다음 주부터 이전 작업이 진행되다 보니, 예산상 갱신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그렇게 파악됐습니다.


- 진열장이 완전히 부서졌는데, 목격자나, 소리를 들은 증인은 없습니까?


- 건물 내에서 벌어진 일이다 보니까... 외부까지 소리가 들렸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보이지만, 인근 주민들을 대상으로 계속 탐문중입니다.


오늘 브리핑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



가끔 어떤 현실은, 영화처럼 복잡하거나 화려하지 않다.


열린 문, 무참하게 박살난 진열장, 사라진 국보.


****


“희선씨. 잠깐 내 사무실로 좀.”


박물관장실에, 김영민 관장과 양민홍 연구사가 앉아 있다.


“... 유물을 찾아야 되잖아. 빨리 경찰을 만나야지.

이런 부탁해서 미안한데... 아이고, 양 선생, 대신 얘기 좀 해.”


“김 선생 일은 안됐지만, 그래도 이렇게 시간만 보낼 순 없잖아.

희선씨가 김선희 선생하고 친하니까, 그래서 우리가 부탁하는 거야.”


“... 알겠습니다. 전화해 볼께요.”


[뚜두두두]


- 어, 희선씨.


“선생님, 좀, 어떠세요?”


- ... 몸이 아픈 건 아니어서. 좀 전에 씻었어요.


“선생님... 이런 말씀 드리기 죄송한데요... 경찰서 가셔야 된다고...

관장님이랑 양 선생님이... 급하게 찾으... 셔서요...

사무실에 나오실 수 있냐고... 물어보라고...”


- ... 희선씨.


“선생님... ”


- 나, 그 당직실 의자에 오늘 새벽까지 묶여있었어.

집에 온 지 이제 겨우 반나절...


“... 죄송해요.”


- 아니야, 희선씨가 미안할 일은 아니지.

그래요, 지금 이럴 때가...

바로 나간다고 전해줘요.


****


이국의 호텔 방 불을 켤 때, 깨끗이 정돈된 방의 정적은 가끔 사람을 철저히 외롭게 만든다.

하지만 지금 지석에게는, 그럴 여유는 없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노트북을 세팅하고, 일정을 점검한다.

내일 오전 일정은 <고려극장> 방문이다.


[ - 아, 이 연구관님, 그렇잖아도 자료는 지금 확인했습니다.

- 네 교수님, 요즘 휴강 안 된다고 하셔서.. 휴일이 있는 주에 맞추다 보니까 일정이 그렇게 됐네요. 저희 청에서는 아직 누가 갈지 정해지진 않았지만,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 근데, 카자흐스탄 가는거면, 혹시 ‘크즐오르다’에도 갈 수 있습니까?

- 거기까진 멀어서 못 가실거예요. 그래도 말씀하셨던 ‘우슈토베’랑 ‘바슈토베’는 일정에 넣었습니다. ]


지석이 아무리 학계에서 인정받는 신진 학자이자 꽤 괜찮은 대학의 교수 명함을 갖고 있다 해도, 어떤 일정은 공적인 출장이어야만 가능한 경우가 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말이 어울리는 지석이 1주일이라는 시간을 억지로 비웠던 건, 이번 출장의 방문지들 때문이었다.


홍범도 장군이 말년에 수위 생활을 하셨던 <고려극장>.

벌써 설립 90주년이다.

개별적으로 오거나 공연을 보는 것이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대를 이어가며 이곳을 지켜온 극장장과 대화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는 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남북분단과 냉전시기를 거치며 우리 기억에서 멀어질 수 밖에 없었던...

1937년, 시베리아의 겨울 바람과 함께 닥쳐왔던 고려인 강제 이주.

내일은 연해주 시절부터 현재까지 고려인들의 정신적 구심점이자 안식처였던 그 곳, 고려극장의 사람들을 만나러 간다.


혹시라도 실례가 되는 일은 없을지, 역사학자라는 직업이 부끄러워지진 않을지, 지석은 챙겨온 자료들을 몇 번이나 또 들여다보았다.


****


조식을 각자 먹고, 로비에서 만난 희선의 얼굴이 평소와 약간 달라 보인다.

어색한 색조 화장으로 감춘 눈이 조금 부어있지만... 지석은 모른체 한다.


희선이 우즈베키스탄에서 깔아 둔 택시 앱은 카자흐스탄에서도 많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저희 직원분이 몇 년 전에 다녀가셨을 때는 고려극장이 알마티 안에서도 다른 곳에 있었대요.

저는 여기 오기 전까지, ‘고려극장’이 정말 극장 건물을 얘기하는 건 줄 알았거든요.

생긴지 90년이 됐다는데, 건물은 다른 건물이라고 해서... 무슨 얘긴가, 했죠.”


“처음 들으시는 분들은 충분히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을 겁니다.

사실 ‘극장 건물’이 아니라 극단, 공연 단체의 이름이잖습니까.

오늘 가는 그 건물이 홍범도 장군이 계셨던 건물은 아니더라도, 정신은 그대로 남아있는 거니까요.

벌써 다 왔나 봅니다.”


[국립아카데미 고려극장]


카자흐스탄 극장 중 가장 높은 등급인 ‘아카데미극장’의 명칭을 부여받은 고려극장의 간판이, 한글로 적혀 있다.


1층의 홍범도 장군 기념 전시실.

소박한 전시품과 패널들이지만, 설명하는 단어 마디마디에 애정과 존경, 자부심이 묻어난다.


하나하나 찬찬히 들여다 보는 지석과 희선.

작은 체구지만 단단해 보이는 여성이 어느새 둘 옆에 와 섰다.


“내가, 신 마리나요. 극장장.”


“어머, 오신 줄 몰랐어요. 안녕하세요 극장장님, 처음 뵙겠습니다.

국가유산청 강희선 연구삽니다. 여긴, 민한대학교 한지석 교수님이시고요.”


“반갑습니다.

대한민국으로 모셔간 우리 홍범도 장군님은, 잘 계십니까?”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역사학 전공입니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작품 컨셉, 목표, 일정 등 24.08.09 18 0 -
9 나는 고려사람(2) 24.08.16 13 0 12쪽
» 나는 고려사람(1) 24.08.13 12 0 13쪽
7 역사 전쟁의 잔해 앞에서(3) 24.08.12 16 1 13쪽
6 역사 전쟁의 잔해 앞에서(2) 24.08.11 22 1 12쪽
5 역사 전쟁의 잔해 앞에서(1) 24.08.10 30 1 12쪽
4 서울의 공산당(4) 24.08.09 35 1 12쪽
3 서울의 공산당(3) 24.08.09 39 1 12쪽
2 서울의 공산당(2) 24.08.08 45 1 11쪽
1 서울의 공산당(1) 24.08.08 67 0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