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 전공입니다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대체역사

민가연
작품등록일 :
2024.08.08 21:49
최근연재일 :
2024.08.16 02:25
연재수 :
9 회
조회수 :
282
추천수 :
6
글자수 :
49,419

작성
24.08.09 21:00
조회
35
추천
1
글자
12쪽

서울의 공산당(4)

DUMMY

4. 서울의 공산당(4)


“그 표석이 뭐가 어쨌는데요?”


“그게.. 없어졌어. 누가 파갔나봐.”


“네? 그게 그렇게 쉽게 파져요? 시멘트로 꽝꽝 세웠던 거 같은데 신기하네..”


“아니, 지금 그런 속 편한 얘기할 때가 아니고, 강샘이 한번 가 봐. 만들던 자료는 나한테 주고 가면 내가 마무리해서 낼게.

출장 처리도 내가 해 놓을 테니까, 과장님 들어오시기 전에 빨리 가서 사진 찍어와.”


“네 그럼, 다녀올께요.”


희선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미경이 보내온 휴대폰 메시지를 확인한다.


제목 : 어떻게 이런 일이

게시자 : 이판사판나라걱정TV


[“여러분! 이거 보세요, 서울 한복판에 공산당 안내판, 이거 계속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이러다가 우리나라 망합니다!

시청에 민원 넣었더니 뭐라는 줄 아세요? 여기, 내가 받은 공문입니다, 여러분.

기안자,가 누구냐면 문서 쓴 사람입니다.

얘가 뭐라고 썼는지 보세요. 전문가들이 모여서 회의해서 결정한 거래요.

난 이 안내판 때문에 요즘 잠을 못 자요. 내가, 내가, 해치워 버릴 겁니다!”]


한껏 흥분한 중년 남성이 카메라에 대고 침을 튀겨 가며 소리치다가, 공문으로 회신한 민원 답변서를 흔든다.

<기안 : 연구사 강희선> 글자가 화면에 가득 찬다.


‘아 진짜.. 엄마 아빤 내 이름을 좀 더 흔한 걸로 지어주지.. 이럴 때 묻어가게. 그리고 아저씨, 제일 아래 직급 직원이 기안하는 거예요. 그 위에 검토자도 있고, 결재자도 있거든요, 좀 제대로 알고 까세요.’


빠른 걸음으로 도착한 설치 장소는 시청에서 멀지 않은, 점심이나 저녁때 몇 번이나 지나다닌 곳이다.


근데.. 없다.


설치를 위해 보도블록 한 장을 들어내고 접착용으로 발랐던 시멘트 위, 표석이 있던 자리는, 휑하니 비어있다. 희선은 주변을 빙 돌아가며 사진을 찍는다.


시 전체에 설치된 표석은 벌써 300개가 넘었다. 표석의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다반사였지만, 관심 있는 소수의 누군가는, 문구가 마음에 드네 안 드네, 없애야 된다 더 크게 세워 달라, 다양한 요구를 시청에 접수하곤 했다.


비록 민원들에 시달리기는 했지만, 표석은 사라져 버린 역사적 장소의 마지막 흔적이면서, 그 흔적 위에서 살아가는 현재 사람들의 생각이 가감 없이 표출되는 장소라는 점에서, 희선은 그것들을 진심으로 좋아했다.


하지만 이번엔, 사라졌다. 여태껏 이런 적은 없었다.


특정한 표석에 대해 철거를 격렬히 요구하면서 그 앞에서 며칠 동안을 시위했던 사람들조차도, 정부 기관에서 정당한 절차에 따라 설치했다는 최소한의 사실관계는 존중하는 게, 그간 서로 간의 예의였다.


희선의 휴대폰 진동이 울린다.


“네, 계장님, 없어진 거 맞아요. 경찰서에 수사 의뢰부터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강샘, 근데 뭐라고 의뢰하지? 벌써 몇 군데 인터넷 뉴스에선 그 표석 도둑을 정의 구현자 같이 적어놨더라고.


“뭐라고 써 있었는지 내용 말고, 물건을 보셔야죠. 제가 지금 들어가서, 바로 문서 올릴께요.”


발걸음을 옮기려다가, 다시 그 자리를 바라본다. 입맛이 쓰다. 아주 단 커피가 땡겼지만, 시계를 보니 퇴근 전에 문서를 올리기에도 빠듯한 시간이다.


내부 보고용 보고서를 만들어야 된다는 박 계장의 성화에 일단 휴대폰의 사진부터 보내 놓고, 급히 사무실 건물로 돌아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다.


- .. 이러한 사유로 해당 공공기물의 절도 및 재물 손괴 사건에 대한 조속한 수사를 의뢰하오니 적극 협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전자 결재 시스템에서 기안문 상신 버튼을 누르고, 탕비실로 향하는 희선의 발걸음이 무겁다. 좀 전까지 바쁘다고 메신저로 난리를 치던 박 계장은, 손에 믹스커피 한 잔을 든 채, 멍하니 탕비실 벽에 기대 서 있다.


“강샘, 난 솔직히.. 그 도둑 잡으면 더 걱정이야.

표석을 찾으면, 도둑을 잡으면..

그 다음엔, 어떡하지? 그걸, 다시 설치해?”


희선의 머릿속도 복잡해진다.


***


지자체 연구사의 업무는 너무나 다양해서, 표석 생각에 깊이 빠질 겨를도 없이 몇 주의 시간이 정신없이 흘러버렸다.


“샘, 잘 지냈어요? 나, 국제교류과 이진영 연구관이예요.”


국가유산청에서 같이 몇 년 전에 짧게 근무했던 연구관에게 오랜만에 걸려 온 전화다.


“희선샘 다음 주에 우리 청으로 돌아온다며? 우리 과로 발령난다던데, 얘기 들었어요?

우리 청이 내년에 조직개편이 있잖아. 그래서 일단 임시로, 한 6개월 정도 우리 과 지원 근무 하는 걸로, 인사가 날 건가 봐.”


“네 저 다음 주에 다시 가긴 하는데, 어디로 갈지는 아직 얘기 못 들었어요. 제 인사 발령을 다른 분들은 다 아시는데 저만 모르나 봐요. 저번에도 그러더니만..”


오라는 대로, 가라는 대로.. 때 되면 자리를 옮기는 게 국가직 공무원의 숙명이긴 하지만, 그래도 내 얘기를 남에게 먼저 듣는 건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다.


“아니야, 아니야. 인사과에서 오늘 결재 났으니까, 오늘내일 중으로 희선샘한테도 연락 갈 거예요. 근데 내가 전화한 건, 급한 일이 있어서 그러는데..

복귀하면 바로 그다음 주에 출장 좀 다녀왔으면 해서.”


“네, 그럴께요. 저야 뭐, 사무실 일 말고는 특별한 일정 없으니까요.”


“고마워요. 그럼 빨리, 여권 사진 찍어서 보내줘요.”


“여권이요? 아, 출장이.. 해외예요?”


“응. 우즈베키스탄이랑 카자흐스탄.”


“강샘, 강샘, 강샘?”


톡톡, 희선의 책상을 건드리는 박 계장의 목소리가 급하다.


“연구관님 잠시만요, 저희 계장님이 찾으셔서요. 제가 이따가 다시 연락드릴께요.”


희선이 의자를 옮겨 다가가자, 박 계장은 모니터의 영상을 크게 확대해서 띄운다.


제목 : 정의는 살아있습니다

게시자 : 이판사판나라걱정TV


[“여러분! 제가 해 냈습니다. 그냥 뽑아왔어요.

아주 우리 사회에서 이런 나쁜 것들은 빨리 싹을 뽑아버려야 됩니다. 자 그럼 지금부터 정의 구현식을 시작하겠습니다.”


- 퍽.

곡괭이가 표석에 가서 박힌다.

- 퍽.

표석에 적인 글자들이 이곳저곳 깊이 패인다.

남자는 곡괭이를 집어던지고, 총에 맞은 듯 군데군데 패인 표석을 기대 세우고,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구멍들을 가리킨다.


“속이 후련하지 않습니까! 정의는 승리합니다 여러분!”]


말없이 동영상을 보고 있는 둘의 등 뒤로, 최 과장이 지나가다가 멈춰 섰다.


“저 사람이 그랬대?”


“네, 그래 보이.. 네요.”


“박 계장, 저 동영상, 누가 찾은 겁니까?”


“그때 저 표석 설치하는 자문회의 때 오셨던 문 부장님이 보내주셨어요. 언론사에서는 이미 기사 작성 끝났다고 하고요.

경찰이 신변 확보 시작했는데, 저런 사람들은 자기가 한 일을 자랑하고 싶어 하니까, 어디 숨지는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인터넷 판에는 오늘 밤부터 기사 뜰 거고, 신문이랑 방송에는 내일 기사 날 거라고 합니다.”


“두 분, 잠깐 내 자리로 와요.”


최 과장 앞의 작은 테이블에, 셋이 모여 앉았다. 커피 세 잔이 놓여 있다.


“이제부터는 경찰, 검찰의 영역입니다. 지금 우리가 선 잘 긋지 않으면 감당 못 해요.

우리는 절차에 따라서 행정을 했잖아요. 절차상 문제도 없었고요.

박 계장님이 우리 과 중심 잘 잡아 주시고, 인터뷰 요청 같은 거 오면, 외부 대응은 꼭 홍보실 통해서만 하세요.

바로 범인 잡혀도, 처벌 수위 확정될 때까진 시간 좀 걸릴 겁니다.

저 표석을 다시 설치할지 말지 얘기 나올 텐데.. 그건, 다 끝나면, 결과를 보고, 결정하는 게 맞을 것 같아요.

발 빼자는 게 아니고, 객관적으로 상황을 보자는 겁니다. 이해되시죠?”


“네, 알고 있습니다.”


“난 우리 직원들이 잘못한 거 없다는 거, 알고 있어요. 세상이 이렇게 극단적으로 돌아가는 게 참.. 안타깝긴 한데, 그래도.. 우리는 해야 될 일 열심히 하면서, 그렇게 삽시다.

그리고 강 선생, 그동안 수고 많이 했는데 막판에 복잡한 일을 맡겨서, 내가, 미안하게 됐어요.

청으로 돌아가서도 앞으로 우리 시 일 있으면 좀 많이 도와주고, 그러면 좋겠네. 건강 잘 챙기시고.”


“저도 일 하면서 많이 배웠습니다. 감사해요. 근데 저, 아직 일주일 남았는데, 과장님은 벌써 절 돌려보내고 싶으신 거예요?”


최 과장이 앞에 놓인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둘을 본다.


“내가, 인사 발령이 났어. 내일 날짜예요. 지금 인사과 다녀오는 길이야.

좀 여유로운 데 가서, 쉬다 오래네.

원래 공무원 생활 오래 하다 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고.. 하는 겁니다.”


****


퇴근길, 희선은 이진영 연구관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연구관님 죄송해요. 오늘 저희 사무실이 좀 정신이 없어서 이제야 전화드리네요. 아까, 어디요? 우즈벡? 카자흐?”


“두 군데 다 다녀와야 돼. 일정이 빡빡하긴 한데, 예산이 없어서 그렇게 됐어요.

희선샘 청에 돌아오기 전에 출장 세팅은 내가 최대한 다 해 놓을 테니까, 와서 한 며칠만 업무 감 잡고 바로 출장 가면 돼요.

그리고 얘기했다시피 예산이 별로 없어서, 이번에 관련 전문가를 한 분밖에 못 모시고 갈 거 같은데, 불편한 캐릭터는 아니니까, 부담은 없을 거예요.”


해외 출장은 차라리 혼자 가는 게 더 편하다. 어정쩡한 전문가라면, 괜히 현지에서 뒤치다꺼리하느라 오히려 더 신경이 쓰일 때가 많았다.


“민한대학교 한지석 교수님이라고, 근현대사 연구하시는 분이예요. 근데 이 바닥 사람답지 않게 아주 멋있어.”


“그런 번질번질한 스타일, 전 별로.”


“어? 만난 적 있어?”


“얼마 전에, 회의 때 한 번 만났어요.”


“그래요, 서로 얼굴 아는 사이면 더 잘됐네. 일단 출장 일정표는 메일로 보내줄께요. 자세한 얘기는 다음 주에 출근해서 하고, 마무리 잘하고 와요.

참, 그 공산당 뉴스 봤어. 희선샘 고생했겠더라.”


“연구관님까지 왜 이러세요. 공산당 아니고, 독립운동 표석 건이라니까요..!

네, 다음 주에 봬요. 여권은 집에 가서 메신저로 보내드릴께요.”


송별회도 사양하고 정시에 퇴근한 최 과장의 빈 자리가 떠오른다. 문득 희선은, 자신의 처지에 대해 생각한다.

학예연구사라는 직업인은 연구자에 더 가까울까, 공무원에 더 가까울까.

이 자리를 얻기 위해 수험서와 함께 지샜던, 무수히 많은, 치열했던 밤들.

나는 언젠가 이 자리를, 어떤 모습으로 떠나게 될까.


희선이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 연구관은 벌써 출장 일정표를 보내왔다.


1일차 : 인천공항-우즈베키스탄(타슈켄트) 출국

2일차 : 우즈베키스탄 고려인 협회(협회장 : 김 아나스타샤) 면담

3일차 : 우즈베키스탄(타슈켄트)-카자흐스탄(알마티) 항공 이동

4일차 : 고려극장 방문, 카자흐스탄 한국연수원장(원장 : 양민홍) 면담

5일차 : 카자흐스탄 고려인 무용단 한국무용 발표회 국가유산청장 축사 대독(代讀)

6일차 : 현지조사(우슈토베, 바슈토베)

7일차-8일차 : 카자흐스탄(알마티)-인천공항 귀국


‘생각보다 뭐가 많네.. 대독이 있으니 정장도 갖고 가야 되겠구나.’


일정표를 훑던 희선의 시선이, 한 이름에 고정된다.


‘양민홍..? 그, 양민홍?’


흔한 이름이 아니다. 검색창에 이름을 치니, 사진과 프로필이 뜬다. 맞다.

그 여자는, 나를, 그때의 우리를.. 기억하고 있을까.

희선은 스스로를 위로하듯, 팔뚝 안쪽에 새긴 글자들을 가만히 쓸어내린다.

조선공산당_출처  중앙일보.jpg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역사학 전공입니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작품 컨셉, 목표, 일정 등 24.08.09 19 0 -
9 나는 고려사람(2) 24.08.16 13 0 12쪽
8 나는 고려사람(1) 24.08.13 12 0 13쪽
7 역사 전쟁의 잔해 앞에서(3) 24.08.12 17 1 13쪽
6 역사 전쟁의 잔해 앞에서(2) 24.08.11 23 1 12쪽
5 역사 전쟁의 잔해 앞에서(1) 24.08.10 30 1 12쪽
» 서울의 공산당(4) 24.08.09 36 1 12쪽
3 서울의 공산당(3) 24.08.09 39 1 12쪽
2 서울의 공산당(2) 24.08.08 45 1 11쪽
1 서울의 공산당(1) 24.08.08 67 0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