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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가연
작품등록일 :
2024.08.08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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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6 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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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9 0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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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공산당(3)

DUMMY

3. 서울의 공산당(3)


“아서원(雅叙園)도 넣으시죠.”


“아서원? 아서원이.. 뭡니까?”


“중국요리집입니다.”


“중국집이.. 중요합니까?”


“중요하죠. 그 중국집에서, 일이 많았거든요.”


다들 지석의 입만 보고 있다.


“우리가 지금 중심을 잡아야 되는 건, 여기서 단순히 공산당이 창당대회를 했는지를 알리는 것보다 그게 어떤 의미가 있어서 이 터에 표석을 세우는가, 라는 겁니다.

이 터는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모여서 뭔가를 했기 때문에 중요한 거거든요.”


장식 취급을 받던 테이블 위의 음료수에, 슬슬 손이 가는 분위기다.

지석도 생수 옆의 오렌지 쥬스 병을 열고 한 모금 마셔 본다. 역시 복잡한 회의일수록 달달한 간식이 필요하다.


“3.1 운동 때 독립선언문이 낭독된 곳이 어딘지는 다들 아실 겁니다. 태화관이라는 요릿집이었죠. 그 당시에, 뭐, 한식이든 중식이든, 어쨌든 요릿집은 요즘으로 치면 소규모 회의장이나 행사장 역할을 했습니다. 칸막이도 있고, 방도 있고, 좋잖아요.

조선공산당 창당대회도 중국요리집에서 비밀리에 열렸습니다.

근데 공산당 창당 전에도 중요한 일이 있었어요. 같은 요릿집에서요.”


“그것도 독립운동 관련인가요?”


문 부장은, 휴대폰으로 계속 이것저것 찾아보는 중이다.


“많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1920년대에 미국 국회의원단이 우리나라에 온 일이 있습니다.

그때, 광복단 결사대,라는 조직이, 이 방한단을 마중 나오는 일본 총독과 고관들을 암살해서 독립 열의를 세계에 알리려는 계획을, 어딘가에 모여서 세웠죠. 안타깝게 실패했지만요.

아, 아마 김상옥 의사는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분이 이 계획이 실패한 후에 상하이로 망명을 하셔서, 임시정부의 의열단에 입단을 하시고,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는 의거를 하시고.. 얘기가 그렇게 연결이 됩니다.

어쨌든, 그때 모였던 곳이, 어디겠습니까?”


“..아서원이군요.”


“부장님은 이제 다 이해하신 것 같네요.”


타다다닥, 지금까지 노트북에 열심히 타이핑하던 희선이 고개를 든다.

좌중을 둘러보며 말을 꺼내려다가, 목을 축이려던 지석과 눈이 마주친다.


“그럼, 표석은 설치하는 걸로 의견이 모아진 걸로 하고요, 장소는 옛날 사진 같은 자료들이 충분하니까 그 자리에 세우는 걸로 하고, 문구는 어떻게, 한 교수님, 좀 정리를 해 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일단 적어 봤는데, 마음에 안 들거나 이상한 대목 있으시면 바로바로 말씀하세요.


<광복단 결사대 활동지 및 조선공산당 창당대회 터.

이곳은 1920년 8월 24일 미 의원단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휘 아래 광복단 결사대와 암살단이 조선총독 등 일본 고관을 처단하려 모였던 아서원雅叙園 자리이다. 1925년 4월 17일 여기서 열린 창당대회에서 조선공산당이 결성돼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독립운동 앞에, 사회주의,를 넣읍시다. 그 시기 독립운동을 다 이끈 건 아니니까요. 정확하게 쓰죠.”


기자답다.


“네, 아까 한 교수님이 불러주신 거 잘 타이핑 했고요, 지금 문 부장님 주신 의견 반영해서, <..조선공산당이 결성돼 사회주의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이렇게 쓰겠습니다.”


그래도, 이 교수는 성에 차진 않는 모양이다.


“공산당 앞에 다른 걸 먼저 쓰니까 좀 낫네요. 사실 같은 말이어도 아 다르고 어 다른건 우리쪽 전문인데. 한 교수님, 생각보다 플렉시블 하시군요? 내 기준에서는, 나름 타협점인 것 같습니다.”


“플렉시블.. 그렇게 생각하시면, 뭐, 감사합니다만, 시청 직원들도 할 말이 있어야 되잖습니까. 줏대 없는 ‘플렉시블’한 웬 역사학 교수가 문구를 바꿔서 이렇게 고쳐 썼다, 그렇게 할 순 없잖아요.

강 선생님, 표석의 설명문은 아서원이라는 동일한 장소에서 벌어진, 독립운동사에 중요한 사건을 연대순으로 적은 겁니다. 공산당 꼴 보기 싫어서 뒤로 넘긴 게 아니고요.

누가 물어보면 그렇게 대답하시면 될 겁니다.

다른 분들도 의견 있으시면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내 개인적으로는 충분히 이해를 합니다만, 기자의 머리로는 아직도, 이건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네요. 좀 시끄러울 각오는 하셔야 될 겁니다.”


“다들 개인적인 의견이라고 강조하시니 저도 개인적인 생각을 말씀드리면, 사실 전, 다른 설명까지 굳이 끌어다가 더 쓸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합니다.

근데 워낙 민감한 부분이니, 저도 한 교수님 제안에 동의합니다. 아, 문 부장님이 말씀하신, 사회주의,를 추가한 버전이 더 좋을 것 같고요.”


“문 부장님, 홍 교수님, 말씀 감사합니다. 저는 뭐 특별한 의견은 없습니다만, 같은 공무원 출신으로, 박 계장님이랑, 강 선생님, 강 선생님 맞죠? 두 분이 감당하시려면 신경 좀 쓰이시겠구나.. 그런 걱정은 되네요.

표석 내용은 정리한 대로 하는 거에 다들 이견 없으신 것 같은데, 이 교수님, 좌장께서 이제 회의 마무리 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교수가 테이블에 놓인 발언용 마이크를 새삼스레 켠다.


“개인적으로는 결론이 썩 마음에 들진 않습니다만, 회의 결과에 대해서 시에서 정리 잘하셔서, 잘, 아주 조심조심, 진행 시키시길 바랍니다. 오늘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지석 앞에 놓인 회의 자료엔 이미 메모와 낙서가 가득하다.

공산당,이라는 단어에 동그라미를 열 번쯤 더 쳐 보고, 자료를 덮어버린다.

교수라는 직업의 단점 중 하나는, 맛깔나는 쌍욕을 공공장소에서 내뱉기가 영 불편하다는 점이었다.


“위원님들, 아직 좀 이른 시간이긴 한데 그래도 다 같이 식사하고 가시죠. 저희 과 이름으로 요 앞 곰탕집 예약해 뒀습니다. 계장님이랑 먼저 가 계시면 저는 회의실 정리 좀 하고 바로 따라가겠습니다.”


“그럽시다.”


“아이고, 안건이 영 복잡해서 그런가, 벌써 배가 고프네요.”


“근데 우리 한 교수님은 참 옷을 멋있게 입으시네.. 역사학 하신 분 안 같아 보여요. 누가 보면 변호사인줄 알겠어.”


“아, 예, 제가 원래 옷을 잘 입습니다. 그나저나 저는 약속이 있어서 저녁은 어렵겠네요. 강 선생님, 정리하시던 일 마저 하시고 잠깐 저 좀 봅시다.”


모두 빠져나간 회의실에는 지석과 희선 둘만 남았다.


“교수님, 하실 말씀이..?”


“강 선생님, 오늘 회의 처음이시라고 해서 제가 좀 걱정이 돼서 말씀드리는건데, 이 건은 정치의 영역은 아니지만, 정치의 영역이 될 겁니다.

윗선에다가 이 건에 대해서 따로 보고를 한 번 하시던지요.”


“교수님.”


“..?”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한데요.. 이 건이 좀 복잡하고, 누가 봐도 시끄러울 게 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특별 취급을 하면, 예외적인 사례만 쌓이게 되는 거잖아요.

만약에 바깥에서 난리가 나면, 그 난리도 결국엔 이 시대를 담은 기록이 될 겁니다. 그런 것들이 쌓여서, 또 하나의 역사가 되는 거고요.

우리가 이 시대의 역사를 어떻게 적어나갈지에 대해선 계속 고민이 필요하겠지만, 역사적인 사실 자체를 지울 수는 없는 거니까요.”


의외로, 조곤조곤 말하는 마디마다 강단이 있다.


“흠.. 그렇게 생각하신다니, 저도 마음이 좀 낫네요. 어쨌든 오늘 첫 회의인데 같이 저녁 못 해서 미안합니다. 제가 혼자 해야 될 일이 있어서요.”


“아닙니다. 앞으로 자주 뵐 텐데요 뭐. 저희도 밥값 굳고 좋죠. 근데 저는 이거 설치한 다음부터는 아마, 밥맛을 모르게 될 거 같긴 해요. 하하하.”


단호하던 표정은 사라지고, 웃는 모습이 제법 귀여운 상이다. 둘은 회의실 불을 끄고, 운영 카운터에 열쇠를 반납하고, 엘리베이터를 탄다.

둘 사이의 공기가 약간 어색했는지, 지석이 말을 붙여본다.


“근데, 강 선생님, 연구사라고 하셔서 여쭤보는건데, 혹시, 전공이 뭡니까?”


“.. 큰 틀에서 보면 역사학입니다.”


“그게 무슨..?”


“음.. 나중에 다시 말씀드릴 기회가 있겠죠.”


건물 문을 열고 나서니, 바깥은 아직도 밝다.


“오늘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조심해서 가세요!”


“네, 또 봬요.”


주차장은 곰탕집과 반대 방향이다.


‘오늘 회의는 좀 더 길게 얘기를 했어도 될 것 같았는데.’


왠지 모를 찝찝한 기분을 애써 누르며 시동을 켜니 아까 듣던 쇼스타코비치 CD가 자동 재생된다. 지석이 제법 오래 탄 이 차를 바꾸지 못하는 이유 중엔, CD로 음악을 듣는 재미를 포기하기 싫다는 것도 있었다.


‘그 여자, 이런 일을 예전에 해봤나? 보기보다 배짱이 있네. 아, 팔뚝에 문신.. 그건 뭐지?’


음악 때문일까, 지석은 자꾸 희선 생각이 난다. 이십 년 전 영화 속에서 왈츠를 추던 여배우와 희선은, 아무래도 분위기가 닮은 것 같다.


****


“지금부터 조선공산당 표석 설치 기념 행사를 시작하겠습니다.


<인터내셔널 가> 제창이 있겠습니다.


깨어라 노동자의 군대 굴레를 벗어 던져라

정의는 분화구의 불길처럼 힘차게 타온다

대지의 저주받은 땅에 새 세계를 펼칠 때

어떠한 낡은 쇠사슬도 우리를 막지 못 해

들어라 최후 결전 투쟁의 외침을

민중이여 해방의 깃발 아래 서자

역사의 참된 주인 승리를 위하여

인터내셔널 깃발 아래 전진 또 전진”


서울에서 가장 번잡한 곳 중 하나인 명동 입구, 특급호텔 앞을 지나치는 사람들의 표정에 의아함이 떠오른다. 카랑카랑한 목소리들은 소리를 높이려다가 낮추고, 또다시 높이려다가 하늘을 보느라 쉬어간다.


어느덧 길에는 중년의 남성과 여성 몇몇이 핸드폰 카메라를 세우고 멈춰 섰다.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지금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을 열심히 찍고 있는 것인지, 언뜻 봐서는 알 수가 없다.


“오늘은 참.. 뜻깊은 날입니다.

그럼, <조선공산당 표석> 설치 기념행사를 마치겠습니다. 이제 기념사진 촬영이 있겠습니다.”


앞으로 나서는 사람들은 움츠렸다가,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들었다가, 만감이 교차 되는 듯한 복잡한 표정이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표석 옆에 서서 사진을 찍히는 사람보다 그들을 찍고 있는 사람이 더 많아 보인다.


그래도, 그렇게 끝난 줄 알았다.


****


정신 없이 바쁜 오후 시간, 희선 휴대폰에 학예사 동기 미경이 보낸 메신저가 뜬다.


- 썬썬. 이거 봤음? 이거 너 아님? 난리난듯

link : www.jichsinmu.co.kr/34486

<제목 : 어떻게 이런 일이>

- 나 지금 삼실이라고~ 오늘 5시까지 시 의회에 낼 자료 만들어야 된다고!!!! 지금 꼭 봐야됨?

- 지금 보는 게 좋을 거 같은데 뭐 바쁘면 나중에 보던지~ 야 근데 보긴 보는 게 좋을 듯

- 알겠어 뭔진 모르겠지만 이따가 보께 일단 땡큐


마음이 바쁜 희선은 일단 휴대폰을 덮어버린다.


[따르릉]


“네, 박선영입니다. 네? 언제요? 그게 왜요? 아뇨, 저희도 모르죠. 일단 알아보겠습니다. 네.”


옆자리의 박 계장이 부산하다. 이곳저곳 전화를 돌리고 뭔가를 검색하더니, 이젠 아예 휴대폰을 들고 복도로 나갔다가 한참 후에 들어온다.


“강샘.”


“아, 계장님, 자료 거의 다 됐어요. 마지막 부분에 표만 넣으면 돼요.”


“아니.. 그게.”


“뭐가요?”


“그거 있잖아. 우리 얼마 전에 설치한 거. 광복군, 중국집, 공산당 어쩌고. 그거 표석.”


“그 표석이 뭐가 어쨌는데요?”


“그게.. 없어졌어.”


작가의말

<인터내셔널가>는 국제주의와 사회주의를 대표하는 노래입니다. 동구권에서 보편적으로 불리지만 원곡의 가사는 프랑스어이고, 가사는 번역한 국가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한국어도 시기에 따라 여러 버전이 있습니다만 여기서는 현재 기준으로 많이 불리는 가사를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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