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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가연
작품등록일 :
2024.08.08 21:49
최근연재일 :
2024.08.16 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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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6 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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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려사람(2)

DUMMY

9. 나는 고려사람(2)


“반갑습니다.

대한민국으로 모셔간 우리 홍범도 장군님은, 잘 계십니까?”


“그럼요.

카자흐스탄에서 홍 장군님 유해 모셔갈 때 장면은 뉴스에서도 많이 보셨을 테고요, 지금은 국립대전현충원에 계십니다.”


전시된 군복과 패널들 사이, 홍범도 장군의 사망증명서와 고려극장 수위직을 해임한다는 명령서에는 <복사본> 종이가 붙어 있다.


“원본 유물은 카자흐스탄 대통령께서, 대한민국 독립기념관에 기증하셨죠.”


지석은, 감회가 새롭다.

이 유물들이 기증된 것을 기념하는 전시 기획에 참여했던 게 불과 몇 달 전이다.


“가시기까지... 들으셨겠지만, 여러 얘기들이 있었습니다.

장군님 고향이 원래 평양이시고, 크즐오르다에 있는 묘소는 우리 수십만 고려인들의 정신적 구심점이기도 했으니까요.

언젠가는 고국으로 보내드려야 됐지만, 막상 보내드릴 결심을 하는게 쉽진 않았습니다.

여기 계시면 우리가 더 잘 모실텐데... 하시는 분들도 많았어요.


그러던 중에, 국군 장병들이 쓰던 탄피를 모아서, 홍범도 장군님 비롯해서 여러 독립전쟁 영웅들 흉상을 만들어서 사관학교에 세웠다는 뉴스가, 참, 감동적이고... 우리 마음에 위로가 됐지요.”


단단해 보이는 첫인상과 다르게 목소리에는 우수(憂愁)가 묻어 있다.


“어디 가셨나 했더니, 다들 같이 계셨군요.”


고려인 협회 부회장, 김 게오르기.

제법 큰 키에 깔끔히 정리된 머리. 직책에 비해 얼굴이 앳되다.

지석에게는, 흔하지 않은 수트 컬러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얼마 전 몇 번을 고민하다가 결국 사지 못한 신상이다.


‘좋은 옷 입으셨네...’


“다른 곳들도 같이 둘러보시죠. 여기 있는 북은 한국에서 몇 년 전에 기증해 준겁니다. 우리가 이렇게 안내판도 만들어 놨어요.

평소때는 전시하고 공연 있을땐 무대에서 쓰고... ”


신 극장장은, 겨울이 있는 나라의 공연장 입구 근처엔 꼭 있는 코트 보관룸을 지나쳐, 안쪽 복도 문을 연다.

작은 방들이 몇 개 붙어 있다.


“저쪽 방은 우리 의상실, 그 옆엔 탈의실이랑 화장실이 있고...

아 이 방, 열어보셔도 됩니다. 오늘 공연 없습니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여다본 곳은, 분장실이다.

큰 거울, 조명, 그리고 이 분장실을 사용했던 배우들이 귀빈들과 찍은 사진들, 출연작 기사가 실린 신문 스크랩이 벽을 가득 채웠다.


가끔씩 지석의 머릿속에 떠오르던 옛 드라마의 한 장면에도 이곳의 배우가 출연했었나 보다.

둘은 한껏 감상에 젖은채, 신 극장장을 따라 바로 옆 계단을 오른다.


“여기는 우리 연습실 겸, 대기실 겸, 작은 행사도 하고, 그러는 곳입니다.”


파스텔톤의 연한 초록색과 우아한 흰색 조각으로 장식된 2층 벽 한 쪽에는 <고려극장 90주년> 현수막이,

크게 난 창문 양쪽으로는 고려극장의 역대 극장장과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이 극장을 대표했던 배우들의 사진이 자랑스럽게 걸려 있다.

방에 가득 찬 햇살과, 벽, 나무 마루, 흑백사진이 아름답게 어우러진다.


“지금은 연습이 없는 시간이라 우리 대표 배우들하고는 내일 공연 전에 인사하십시다.

게오르기, 이분들 오후에 연수원 가신다니까 좀 모셔다드리지.”


“그러려고 왔습니다, 극장장님.

선생님들, 괜찮으시면 제 차로 이동하시죠.”


지석이 희선을 본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희선.


“극장장님, 바쁘실텐데 오늘 시간 내 주시고, 안내까지 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내일 또 뵙겠습니다.”


“인간문화재 선생님들 매년 여기까지 보내주셔서 우리 단원들 가르쳐 주시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요. 벌써 몇 년째 됐잖습니까.

덕분에 저희 공연 레퍼토리 구성에 도움이 많이 됩니다.

청장님께, 우리가 항상 감사해한다고 꼭 말씀 전해주세요.”


****


게오르기 부회장은 시원하고 서글서글한 성격이었다.

처음 만난 자리였지만, 셋은 한국어와 영어를 섞은 대화를 나눠가며 즐겁게 점심 식사를 했다.


“한국말은 아직, 배우는 중입니다. 저 같은 고려인 3세들은 학교에선 러시아말을 배웠으니까...

게다가 카작 독립 후에는 카작어가 점점 중요시되고 있거든요.”


“아닙니다. 굉장히 잘하시는데요. 솔직히 놀랐습니다.”


“다행입니다.

참, 교수님, 지금 차고 계신 그 스마트워치, 낚시나 캠핑갈때 아주 좋아서 저도 갖고 있습니다.

교수님 취미도 그쪽이십니까? ”


"아... 저는 일하느라 씁니다. 옛 분들 활동하셨던 터나 건물 같은 곳들은 지금 지도랑은 잘 맞질 않아서요.

위치 체크하는 기능이 마음에 들더라고요.

또, 이 버튼을 누르면... "


희선을 사이에 두고, 둘은 한참동안 시계 얘기를 나눈다.


“부회장님, 제가 예전부터 궁금한 게 하나 있었는데요.”


“고려인 관련이면, 뭐든지 말씀하시죠.

시계나 수트 얘기도 괜찮고요.”


“우리 어릴때긴 한데, 한국에서 ‘까레이스키’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카자흐스탄 고려인 이주 얘기였어요.

‘까레이스키Корейский’라는 제목이 ‘한국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아, 오시는 분들마다 그걸 물어보시던데, 그게 드라마 제목이었군요?

아마, 그때가 러시아하고 수교 직후이다 보니까... 영어식으로 단어를 해석하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까레이스키는 ‘한국의’, ‘한국사람의’ 라는 뜻의 형용사입니다.”


“그렇군요...

그러면, 고려인 분들은 스스로를 어떻게 부르시나요?”


“Корё-сарам.

고려-사람 이라고 합니다.”


“사람...?”


“네, 우리 말의 그 ‘사람’요.

우리는, 우리 말, 그대로 씁니다.


나는, 고려 사람.


자, 지금 나가시면, 시간이 맞겠습니다.”


한국에서도 잘 보기 힘든 고급 차를 얻어 탄 희선과 지석은 잠시 각자의 생각에 빠진다.

출발 때 차 유리에 송송 맺혔던 빗방울들은 이젠 제법 빗물이 되어 흐르고 있다.


“저깁니다. 다 가깝습니다.”


“오늘 점심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비까지 오는데, 태워주신 것도 감사하고요.”


“일 잘 보십시오. 비가 좀 그쳐야 될텐데요.

내일 공연, 초청장을 잘 돌렸으니 많이들 오실겁니다.

그럼 또 뵙겠습니다.”


알마티.

카자흐스탄의 행정 수도는 아스타나이지만, 행정과 외교 외의 모든 중심지는 알마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에서의 직항 비행편 노선도 아스타나가 아닌 알마티와 개설되어 있다.

그런 입지적 조건, 수십만의 고려인, 한국 문화에의 관심도를 생각해서 일찌감치 개설된 알마티 한국연수원의 위상과 규모는, 이제는 LA, 파리 연수원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였다.


“양민홍 원장님과 약속돼 있습니다. 여기, 여권입니다.”


건물 앞 경비실에서, 지석은 희선의 눈치를 살핀다.

희선의 얼굴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2층으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 똑똑.


“희선씨, 오랜만이야. 아니, 이젠 강 선생이라고 불러야 되겠네.

교수님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원장 양민홍입니다.”


“안녕하십니까, 민한대학교 한지석입니다.”


“앉으세요.

여기, 이 동네 특산 차니까 한 잔씩들 드세요.”


방 가운데에는 태극기가, 그 양쪽으로는 국정 목표와 대통령 사진이 걸려 있다.

전형적인 해외 기관장 집무실 인테리어다.


“이번에 청장님께서 일정상 오실 수가 없어서요, 제가 인사말씀 대독하려고 왔습니다.”


“그래요, 얘기 들었어요. 아쉽지만 그 덕분에 희선씨, 아니 강 선생도 보고 좋네.

한 교수님, 저랑 강 선생은 예전에 같이 근무해서 잘 아는 사이예요.”


“공항에 나와주신 행정관님 통해서 말씀 들었습니다.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두 분 대화 나누시죠.”


“강 선생, 연구사 시험 합격하고 나서 박물관에 한번 놀러 오지 그랬어. 그렇게 발길을 딱 끊고... ”


“... 원장님, 괜찮으시면 저는 연수원 내부 구경 좀 하고 와도 될까요?

어떻게 운영되는지 궁금해서요.”


“그러세요 교수님, 한번 쭉 둘러보고 오세요.

오늘 교육이 있는 날이라 열려있는 강의실 있을 거예요.”


지석은 자리를 피한다.

둘 사이의 관계가 궁금하지만, 한편으로는 굳이 신경쓰고 싶지 않기도 하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눈치를 보는 건 이미 여기가 아니라도 충분히 겪고 있는 일이었다.


연수원에서는 한글 교실, 전통 문화 체험, 요즘 가장 인기라는 K-pop 댄스클래스까지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중이다.

지석은 교육장 사진, 벽에 붙어있는 여러 교육 결과물들의 사진을 태블릿으로 찍고, 사진 안에 몇몇 내용들을 간단히 메모해 둔다.


내일은 고려인협회 소속의 무궁화 무용단과, 한국연수원 학생들이 함께 1년간 연습한 결과물을 선보이는 공연날이다.

살짝 본 공연장의 규모가 상당히 크다.


‘내일 공연 때 얼마나 채울 수 있을까...’


-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희선이 보낸 메시지다.


- 저도 거의 다 봤습니다. 지금 나가겠습니다.


정문으로 향하는 길에 내리는 빗줄기가, 심상치 않다.


****


“... 일단, 상황을 좀 보고요...

... 네. 저도 바로 준비해서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희선은 컵에 남은 물을 들이켜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강 선생님, 식사 다 하신겁니까?”


“아, 교수님, 비 때문에 뭔가 문제가 있나봐요.

일단 공연장으로 가 봐야될 것 같습니다.”


“같이 가죠. 짐 챙겨서 로비에서 봅시다.”


지석이 방에서 내려오기도 전에, 이미 희선이 앱으로 불러둔 택시가 식당 입구에 대기 중이다.

쏟아붓는 듯한 비, 천둥 번개에 바람까지.

어제 10분만에 왔던 길인데, 오늘은 왜인지 한 시간이 넘게 걸린다.


“... 그래서 오늘 공연, 우리만 다 책임질순 없잖아요. 담당자들은 오고 있대요?”


양 원장의 목소리가 공연장 문을 넘어 복도까지 카랑카랑하다.


“원장님, 청에서 예산지원을 받았고, 고려인 협회 입장도 있으니... ”


“행정관님, 지금 누가 여기 원장입니까?”


날이 섰다.


“... 협회 부회장님이랑 청 담당자가 바로 온다고 했으니, 조금만 기다려 보시죠.”


희선은 머뭇거림 없이 공연장에 들어선다.


“원장님.”


"아, 강 선생. 오후 공연 말인데... "


- 펑.


정적.

테스트중이던 음악도, 조명도 일순간 사라졌다.

희선과 지석만, 칠흙같은 어둠속에서 어리둥절하다.


"우리 연수원이, 겉은 리모델링해서 보기엔 괜찮지만 건물은 50년이 넘었어요."


양 원장은 태연히 휴대폰 손전등을 켠다.


"비가 이 정도 오면 가끔 정전이 돼서, 오늘도 혹시나 해서 상의하려던 참이었... "


"경찰들이 와서, 차들이 겨우 정리돼서 빠져나왔습니다.

정전이야 익숙하지만, 신호등까지 다 나가버리는건 오래간만이네요."


게오르기 부회장이 막 도착했다.


"그렇잖아도 그 얘기 하려던 참이었어요.

공연, 아무래도 힘들지 않겠어요?"


"1년에 한 번 있는 공연이라 멀리 사시는 어르신들은 벌써 출발하신 분도 계시고, 학생들도 며칠전부터 들떠있고... 기대가 큽니다.

솔직히, 저희는 공연을 취소할 생각은 할 수가 없습니다.

근데 이 건물 문제가 아니라 시내 전체가 전기가 나간 판이니...


강 선생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아직 시간이 좀 있으니까... "


희선의 말끝이 흐려진다.

취소하려면, 사람들이 몰려오기 전인 지금 해야 한다.

강행하려면...

사실 전기가 없는 상황에서 공연은, 불가능하다.

업무 경험이 적지 않은 희선이라도, 이런 상황에서 바로 의견을 내는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휴대폰 손전등에 비치는 사람들의 그림자는 한동안 모두 말이 없다.


침묵을 깬건, 김 부회장이다.


"그러고 보니, 전기가 없는 곳에서 쓸 수 있는 조명이, 있군요."


"무슨...?"


"몇 개나 모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저희 협회 단체 메신저로 연락을 돌려보겠습니다.

통신이 안 끊겨서 다행이네요."


"그런게 있어요? 공연을 할 정도의?

설마, 휴대폰 손전등 말씀하시는건 아니죠...?"


"그보단 훨씬 그럴싸할 겁니다.

한 교수님, 교수님 덕분입니다.

정말 될 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한 번 해 보기나 합시다."


영문을 알 수 없는 건, 지석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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