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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가연
작품등록일 :
2024.08.08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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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6 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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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8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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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공산당(2)

DUMMY

2. 서울의 공산당(2)


“안녕하세요,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이번에 새로 이쪽 업무 담당하게 된 강희선 학예연구사입니다. 오셔야 될 분들 다 오신 것 같아서,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회의 주제는 표석(標石) 설치 관련입니다.”


“그냥 공산당 건이라고 해요. 우리끼리 다 아는 처지에 뭘 번거롭게 말을 돌려.”


회의 테이블 중앙에 앉은, 오늘의 좌장(座長) 격인 이창현 교수가 툭, 말을 내뱉는다. 아무래도 안건이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아, 네.. 회의 자료에도 나와 있듯이, <조선공산당 창당지> 표석을 설치해 달라는 신청이 접수됐습니다. 설치 희망 지역은 명동 입구입니다. 신청자 의견이 타당한지, 표석에 적힐 내용은 적합한지에 대해서 검토가 필요합니다.”


“신청 들어오면 우리가 다 검토를 해야 되는 건지, 그 얘기부터 다시 좀 해 봅시다.”


지석은 서류를 덮고, 안경을 벗고, 얼굴을 감쌌다가, 보란 듯이 팔을 괴었다. 경험상 이렇게 흘러가기 시작하면 회의가 쉽게 끝나지 않는다.

스케줄러를 꺼내서 확인해 보니 게다가 오늘 저녁때는 별 일정도 없다. 없는 약속을 지어내서 자리를 먼저 일어날 정도의 융통성도 없는 자신의 고지식함이 문득 한심스럽다.


회의 구색상 여러 분야의 사람들을 불러 모아 놓았는데, 쭉 둘러보니 몇몇은 이미 회의를 길게 늘이기로 악명이 높은 사람들이다. 중간에 앉아 있는, 공무원 출신인 김 소장이 역할을 해주면 그나마 좀 정리가 되려나 싶다.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어서 이런 회의 석상에서 마이크만 주면 놓지를 않는 걸까. 밥 같이 먹어줄 사람이 없어서 밥 시간 될 때까지 회의하고 저녁까지 먹고 가려고 일부러 저러는 건가.. 아, 내 고기!’


퍼뜩, 주차 요금과, 한우 상자가 떠올랐다. 지석이 주차한 사설 주차장은 저녁 일곱 시까지 차를 빼지 못하면 내일 찾아야 한다. 회의를 반드시 제시간에 끝내야 한다는 마음의 핑곗거리가 생긴 지석은, 안경을 다시 고쳐 쓴다.


같은 소리를 한두 번 들은 게 아닌 듯 박 계장이 술술 설명한다.


“표석은 사라진 문화유산의 터, 같은 걸 기념하는 표지물입니다.

신청이 들어오면 그 유적이 공공의 가치 또는 역사적 가치 등이 있다고 인정될 경우, 해당 자리에 설치하거나, 이미 도로나 건물이 있으면 최대한 근접한 자리에 설치되는데요, 아시겠지만 시청에서는 민원이 접수될 때 신청 서류가 양식에 맞춰서 갖춰져 있으면 부서 차원에서 바로 거절하는 건 어렵습니다.

신청 내용이 타당한지, 가치가 있는지, 전문가 선생님들 모시고 검토를 해서 회신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지금 당신들이 여기 와 있는 거잖아, 전화로 이미 다 설명했잖아, 라는 다음 말은, 차마 뱉지 않는다.

아직까지는 지석이 딴짓을 좀 해도 되는 구간이다.


“강 선생님, 오늘 안건, 윗선에는 보고 됐습니까?”


올 초에 새로 자문위원으로 위촉된, 유명 중앙 일간지 문화부의 문재식 부장이 묻는다.


‘의도가 있다. 저 여자는 알아챘을까?’


지석은 희선이 어느 정도의 감을 갖고 있는지 일단은 지켜보기로 했다.

지금 상황에서 뭐라 설명을 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자문위원님들이 검토해 주신 내용이 거의 그대로 반영되는 거라서, 과장님 선에서 결재되는 사항입니다. 시장님까지는 원래 보고 되지 않는...”


“내 참, 그러니까 지금, 우리보고, 서울 시내 한복판에다가 공산당 소개를 어떻게 할지 검토하라는 거잖아요. 한 교수님은 이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어디, 전공하신 분 얘기 좀 들어봅시다.”


이 교수가 희선의 말을 자르고, 지석을 지목한다.


“그럼 이왕 이렇게 된 거, 제가 정리를 좀 하고 가는 게 진행이 빠르겠네요. 박 계장님, 괜찮겠죠?”


“네, 부탁드립니다.”


지석은 자리를 고쳐 앉고, 회의 테이블에 놓인 마이크를 켰다.


“우선, 순서를 좀 짚고 가죠.

공산당 표석에 적힐 문구부터 검토하는 게 아니고, 설치를 할지 말 지부터 논의를 한 다음에, 그다음에 문구는 검토하는 걸로,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조선공산당 설명을 간단하게 드리겠습니다. 간단하게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이고, 대한민국 참 좋은 나라네요. 벌건 대낮 회의 시간에 대놓고 공산당 얘길 해도 안 잡아가고, 하하하하.”


공무원으로 퇴직 후에 작은 오피스텔에 혼자 연구소 사업자를 내고 소장 명함을 파서 다니는, 김 소장이 끼어든다. 저런 쌍팔년도식 개그라니. 모두들 시큰둥하다.


‘법대 교수 이창현, 퇴직 공무원 김용석, 기자 문재식, 조선시대사 교수 홍인철, 그리고 나.’


이 중 근현대사 전공자는 지석 외엔 없다.

희선이라는 여자의 전공은 모르겠지만, 학예연구사라니 기본적인 이해도는 있겠지.


“조선공산당은 1925년에 창당된 사회주의 정당입니다. 그 시기는, 아시겠지만 일제강점기죠.


1919년 3.1운동을 전후해서 국내외 독립운동가와 지식인들 사이에서 사회주의 사상이 크게 확산됐는데, 실제로 사회주의 운동가들 중에서 상당수가 독립운동에 종사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국제적으로 제국주의 열강들은 조선 독립운동을 외면했지만, 소련은 지원하는 분위기였던 것도 중요한 배경 중 하납니다.

요약하면, 조선공산당이 창당되던 시기엔 사회주의라는 개념을, 민족을 해방시키기 위한 독립운동 이념의 일부로 받아들였던 겁니다.


정당 발전사는.. 이름을 다 말씀드리면 복잡하실테니 생략하고, 그 구성원들과 세부 조직에 따라서 1차 조선공산당부터 4차 조선공산당까지 구분하는 정도, 일단 기억하시면 됩니다. 그 중 2차당은, 한번쯤 들어보셨을 6.10. 만세운동을 계획했고, 3차당은 민족주의 세력과 함께 신간회와 근우회에 중요한 비중으로 참여했죠.


1928년 12월에 4차당을 마지막으로 해체됐는데, 계속 재건 움직임이 있었어요.

지금 북한의 조선로동당은 1945년에 재건된 조선공산당의 북조선 분국이 만들어진, 1945년 10월 10일을 창당기념일로 삼고 있습니다. 이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은 1946년에 북조선공산당으로 바뀌면서 사실상 조선공산당하고 분리되고, 1946년에는 북조선로동당이 만들어지죠.


이런 상황에서, 남겨진 조선공산당을 중심으로 남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 세 개의 당이 1946년에 합당을 통해서 남조선로동당을 결성하면서, 공식적으로 그때까지의 조선공산당은 해체됩니다.

1949년엔 남조선로동당과 북조선로동당이 통합되면서 하나의 조선로동당이 되는데, 이게 현재 북한 세력의 중심이고요. 이 정도 설명드리면 될지 모르겠네요.”


“그럼, 이 조선공산당이 지금 북한의 조선로동당하고 같은 겁니까?”


지석은 테이블 위에 놓인 물로 목을 축이고, 질문한 홍 교수를 바라본다.


“조선로동당이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에서부터 나온 건 맞지만, 반대로, 1925년 창당 당시의 조선공산당이 현재 북한의 조선로동당이라고 말하긴 어렵습니다. 선후관계를 보시면 아시잖습니까.”


“그럼 뭐, 상관없네요. 사실 그대로 표석에 쓰면 되겠네요. <여기는 조선공산당이 결성된 곳이다.> 이렇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 부장이 정색하고 나선다.


“홍 교수님, 이게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죠.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옛날에 공산당이 활동한 걸 세금으로 표석까지 세운다고 하면, 그걸 누가 좋아합니까? 국민들 정서를 생각해 보세요. 당장 언론에서도 난리 날 겁니다.”


“이건 애초부터 말도 안되는 얘기예요. 신청이 들어온다고 그걸 다 받아주고 앉아 있어..”


“아이고 문 부장님, 이 교수님, 공무원들이 무슨 힘이 있습니까. 신청이 들어오면, 맞든 틀리든 검토를 해 봐야죠. 신청한 사람도 우리 시민이잖아요.

자자, 우리 이럴게 아니고, 안 되면 왜 안된다, 되면 왜 된다, 그것부터 얘기를 좀 차근차근 해 봅시다. 이렇게 하다간 오늘 회의 안 끝나요. 우리가 결론을 내줘야 시청에서도 민원 회신을 할 거 아닙니까.

한 교수님, 조선공산당 설명해 주신건 잘 들었습니다. 근데, 그래서 어쨌다는 겁니까?”


그나마 정리를 하는 건, 실없어 보이던 김 소장이다.


“해방 60주년이었던 2005년 3.1절 이후부턴, 여운형, 김재봉, 권오설 등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도 독립유공자로 공식적인 인정을 받기 시작합니다. 교육과정에선, 1920년대 조선공산당은 좌우합작 중심으로 다뤄지지만 1930~1940년대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은 상대적으로 깊게 다루지는 않고요. 이 얘기는 하자면 끝이 없을 것 같긴 한데..

아무튼 요약하면, 우리나라 독립운동사를 논할 때 조선공산당이 중요한 한 페이지를 차지하는 건 분명합니다.”


“난, 사실 이게 영, 마음에 안 들어요. 중요하다고 하시니, 중요하다는 것까지는, 뭐 제가 잘 모르니까 양보를 하겠는데, 꼭 설치까지 해야 되는지는.. 난 모르겠어요. 굳이 불쏘시개를 만들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그러게요. 이걸 보는 사람들은, 여기 두 분 교수님처럼 그렇게 깊이 생각 안 한다니까요. 그 사람들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그게 일반적인 시각이예요.

그냥, 공산당, 글자만 볼 거란 말입니다.

역사학 하시는 선생님들 마음을 제가 모르는 건 아니지만서도, 이러시면 여럿 난처해질 수 있어요. 내가 경험상, 걱정돼서 하는 얘깁니다.”


문 부장과 이 교수는 말을, 꾹, 누르고..


지석도 얕은 한숨을 내쉰다.


“제가 지금 여기에 역사학자로 앉아 있긴 하지만, 선생님들이 걱정하시는 거 모르는 건 아닙니다. 신경 쓰이시는 것도 충분히 일리가 있고요.

혹시 오해하실까봐 분명히 말씀드리는데, 저도 공산당 안 좋아합니다. 그래도, 중요한걸 안 중요하다고 할 수는 없잖습니까.”


“그렇죠, 이건 취향의 문제가 아닙니다. 마음에 드는지 아닌지 하고,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지 아닌지는 별개죠. 더 자료가 없어지기 전에 그 자리에 흔적이라도 남기는 게 표석 설치 목적이기도 하고요.

우리가 고민해야 될 건, 표석을 설치할 만큼 중요한지 아닌지, 그겁니다.”


홍 교수의 차분한 목소리가 끝나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침묵을 깬 건, 이 교수다.


“10분만 쉬었다가 합시다. 니코틴이 떨어져서 안 되겠네.”


이 교수와 문 부장, 김 소장이 함께 바깥으로 나간다.


****


“제가 오늘 좌장이니, 중간 정리를 하죠.

건물을 보존해서 재개발을 못하는 것도 아니고, 길에 표석 하나 세우는 거니까..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하다고 하니, 설치는, 하는 걸로 합시다.

박 계장님, 근데 우리 만장일치는 아니니까, 이견 있었다고 회의록에 적어주시고요.”


이 교수가 말을 이어간다.


“근데, 그 문구는 아무래도 좀 손을 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한 교수님, 좋은 의견 있으시면 말씀해 보세요.”


종이에 뭔가를 한참 끼적이던 지석이 고개를 든다.


“아서원(雅叙園)도 넣으시죠.”


“아서원? 아서원이.. 뭡니까?”


모두들, 의아한 표정이다.


“중국요리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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