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 판타지 속 무림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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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손
작품등록일 :
2024.08.20 04:33
최근연재일 :
2024.08.31 15:05
연재수 :
1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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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5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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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분수를 모르는 자 (3)

DUMMY

···역시는 역시나 역시군.


한숨을 쉬며 일어서는 유길 앞에서 아르님이 주변을 슥 둘러보았다.


“수레를 얻어타고 갔다고 들었는데 아니었나? 어디에도 보이질 않는데.”


“그냥 보냈어. 나 때문에 상관없는 사람까지 말려드는 건 질색이라서.”


유길의 대답에 아르님이 코웃음을 쳤다.


“그런 자가 상관도 없는 일에 끼어들어서 날 엿먹이다니.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 같은데?”


“마음대로 생각해. 어차피 나한테 해명이나 듣자고 이렇게 잔뜩 끌고 온 것도 아닐 거 아냐?”


유길은 주변의 다른 기수들을 쓱 훑어보았다.


다들 무장이 제각각인 걸 보니 아마도 용병. 공통점이라곤 다들 어깨에 검은 갈기 장식을 달고 있다는 것과 인상이 더럽다는 것 정도였다.


그중 대장으로 보이는 흉터투성이의 거한이 눈짓으로 유길을 가리켰다.


“이 놈이요? 당신이 말했던 동방인이란 게.”


“그렇소.”


“···겉으로 봐선 딱히 특별한 건 모르겠는데. 좀 곱상하게 생긴 거 빼면 우리랑 별 다를 것도 없는데? 얼마전에 쳐죽였던 샌님 하나가 딱 저렇게 생겼었는데 말이지.”


비웃음을 담아 말하는 거한 뒤에서 또 한 명의 기수가 걸어나왔다. 이번엔 여자였다.


“흐응, 나도 좀 실망이긴 하네. 최소한 키는 이것보다 더 클 줄 알았는데.”


갈색빛을 띤 피부와 치렁치렁한 검은 머리.


굴곡진 몸매를 그대로 드러낸 적색 로브와 보석으로 치장한 지팡이가 자신이 마법사라는 걸 과시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생긴 것도 우리랑 크게 다르지 않고. 동방인이라길래 잔뜩 기대했는데 김 샜어. 좀 더 대단한 구경을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나른한 표정으로 말하는 여자를 향해 아르님이 쏘아붙였다.


“방심하지 마. 무슨 수를 쓴 건지는 모르지만 페스타를 처치한 놈이야. 내게도 이상한 술수를 썼었고.”


“예이, 예이.”


여자가 고개를 까닥이며 지팡이를 들었다. 그녀가 빠르게 주문을 속삭이자 그 끝에 검은 빛이 잠깐 맺혔다 사라졌다.


휘리릭! 휘릭!


다음 순간, 유길의 그림자에서 수많은 밧줄들이 뻗어나오며 그의 몸을 칭칭 휘감았다.


순식간에 포박당해 움직일 수 없게 된 유길을 보며 여자가 빙그레 웃었다.


“조금 아프지? 너무 겁먹진 마. 금방 편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꽈아악-


그 말과 함께 밧줄들이 한층 더 조여왔다.


하지만 유길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태연히 중얼거렸다.


“속박 주문인가··· 위력을 보니 그리 높은 위계는 아닌가보네.”


“···뭐?”


내내 기분 좋게 호선을 그리고 있던 여자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하지만 유길은 무시하고 아르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나한테 뭘 얻고 싶어서 이러는 건데?”


“간단해. 내가 원하는 건 가주 자리다.”


“그거랑 나한테 이러는 게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는데. 그냥 화풀이하고 싶은 거 아냐?”


“그런 부분도 없진 않지. 너만 아니었다면 여기 있는 알리시아가 엘리아에게 걸린 저주를 풀어주겠다면서 저택에 찾아올 예정이었거든.”


아르님이 여자를 눈짓하며 말을 계속했다.


“그 후 아버지에게도 몰래 저주를 걸어 반신불수로 만들고 이 용병들을 친위대 삼아 가문을 장악할 생각이었는데··· 너 때문에 모든 게 엉망이 됐지.”


차가운 눈으로 쏘아보는 아르님을 향해 유길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도 여전히 이래야 할 이유가 뭔지는 모르겠는데.”


“간단해. 이제 새로운 계획이 생겼기 때문이지.”


“새로운 계획?”


유길의 물음에 아르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넌 이제부터 사교도가 될 거다. 부정한 사술로 엘리아가 호전된 것처럼 속여 아버지를 현혹한 자가 되는 거지. 난 그 사실을 허스그라드의 최고평의회에 고할 거고.”


“아아.”


누명을 씌우겠다 이거군.


헛웃음 짓는 유길을 향해 아르님이 말을 계속했다.


“아버지는 이미 사교도로 몰렸던 엘프를 구명하면서 의심을 샀던 전적이 있어. 그런데 또 너 같은 자가 나타나 백약이 무효였던 엘리아를 하룻밤만에 낫게 해줬다··· 그간 이를 갈고 있던 자들에겐 좋은 먹잇감이 되겠지.”


“그래. 무슨 생각인지 대충 알겠네.”


“그런 고로 네 머리를 증거물로 가져갈 거다. 살려서 끌고 가면 쓸데없는 소리나 해댈 테니, 이쪽이 깔끔하겠지.”


아르님이 허리춤에 찬 검을 스르릉 뽑았다.


여자, 알리시아가 그를 향해 진지하게 바뀐 표정으로 말했다.


“잠깐, 아르님. 함부로 접근하지 마. 저 녀석 뭔가 심상치 않아.”


“나도 알고 있다.”


아르님이 거한에게 눈짓을 보냈다. 거한이 어깨를 으쓱였다.


“이놈까지 처리하는 건 계약에 없었던 것 같은데? 우린 추가금을 좀 까다롭게 따지는 편이라. 울고있는 애새끼 하나 쳐죽일 때도 은화 한 닢씩은 더 받는다고.”


“그런가?”


“하지만··· 오늘은 새 고용주에게 봉사 한 번 하는 셈 치지.”


거한이 씩 웃으며 손을 들었다. 주변의 용병들이 활과 쇠뇌를 들어 유길을 겨눴다.


“만나서 반가웠다, 동방인. 그럼 잘 가라.”


거한의 말과 함께 화살비가 쏟아졌다.


슈슈슈슈슉-!


고슴도치가 되었을 유길의 목을 자르기 위해 아르님이 고삐를 당겼다.


하지만 다음 순간, 반사적으로 다시 고삐를 잡으며 제자리에 멈춰서야 했다.


“뭣-”


눈앞에 자신이 상상한 것과는 전혀 다른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투명한 벽에 가로막히기라도 한 듯, 유길의 주변에 멈춰버린 화살들.


유길이 그걸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탄강기. 나쁘지 않네.”


다음 순간, 공간이 출렁이는가 싶더니 멈춰있던 화살들이 일제히 튕겨나갔다.


채채채채챙!


“끄악!”


“억?”


되쏘아진 화살에 맞은 몇몇 용병들이 비명을 지르며 말에서 떨어졌다.


재빨리 몸을 숙인 아르님의 팔에도 화살이 스치고 지나가며 긴 상처가 그어졌다.


“큭!”


이를 악무는 아르님 옆에서 거한이 당혹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저, 저게 대체 뭔···?”


“다들 비켜!”


어느새 뒤에 있는 알리시아의 손 위에서 커다란 불덩이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아르님과 거한이 재빨리 말을 몰아 양 옆으로 피했다.


화아악-


알리시아의 손을 떠난 불덩이가 공기를 달구며 유길에게 쏘아졌다.


아직 밧줄에 묶인 상태의 유길을 게걸스러운 화염이 그대로 집어삼켰다.


쿠콰아앙!


“으윽···!”


멀리서도 느껴지는 열기와 충격에 아르님과 거한이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알리시아만은 고개를 똑바로 든 채 일렁이는 불길을 응시하고 있었다.


잠시 후, 그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부릅떠지며 하늘을 향했다.


“위! 위쪽이야!”


아르님과 거한이 고개를 들었다. 그 눈에 어느새 밧줄을 끊고 공중으로 도약하고 있는 유길이 보였다.


마치 보이지 않는 계단을 딛듯, 허공을 밟으며 나아간 그가 멍하니 올려다보던 용병을 향해 뚝 떨어졌다.


“어···.”


천근추(千斤墜).


평소보다 몇 배는 무거운 무게로 떨어져내린 유길이 투구와 머리, 타고 있던 말까지 짓이기며 용병을 바닥으로 처박았다.


콰지지직!


사람과 말을 참혹하게 으깨버리는 참경.


그 모습을 멍하니 보던 동료 용병이 욕설과 함께 검을 휘둘렀다.


“씨, 씨바알!”


하지만 검은 유길의 옷자락도 스치지 못했다. 답례로 유길의 손가락이 용병의 목 깊숙이 파고들었다. 피거품을 토하며 용병이 말에서 떨어졌다.


“쏴라! 쏴!”


활과 쇠뇌를 든 놈들이 다급히 유길을 겨누고 사격했다. 하지만 화살 대부분은 빗나가고 두 개는 유길의 손가락 사이에 잡혔다. 유길이 손을 떨치자 날아간 화살이 쐈던 놈들의 얼굴 한가운데 꽂혔다.


“이, 이게 대체 뭔···.”


거한은 아무것도 못한 채 눈앞에서 벌어지는 살육극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 모든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러는 사이, 유길이 거한의 코앞까지 당도했다.


그 서늘한 눈이 거한의 눈과 마주쳤다.


“우, 우와아악!”


거한이 비명인지 함성인지 모를 소리와 함께 철퇴를 휘둘렀다.


지금껏 수많은 희생자들의 머리를 으깨왔던 철퇴. 도망치는 이들을 학살할 땐 세상을 부술 수도 있을 것 같던 무기가 너무도 허무하게 빗나갔다.


유길이 말했다.


“난 별로 안 반가웠다. 잘 가라.”


슈각-


그 손날이 바람처럼 거한의 목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포도송이처럼 뚝 떨어진 거한의 머리가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갔다. 그리곤 아르님의 발치에서 딱 멈췄다.


“······.”


아르님도 이젠 경악한 눈으로 유길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동방인이란 게, 이런 존재였나?


그 허무맹랑한 이야기들이, 음유시인들이 돈푼이나 받으려 꾸며낸 가짜가 아니었다고?


“아르님!”


우두커니 서있던 아르님의 귓가에 새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리시아였다. 이젠 아예 말에서 내려 주문에 집중하고 있었다.


“내가 강화 주문을 걸어줄 테니 잠깐만이라도 발을 묶어! 그 사이에 어떻게든 해볼 테니!”


하지만 아르님은 대답하지 못했다. 멍하니 있는 그를 향해 알리시아가 악을 썼다.


“이러다간 우리 둘 다 죽어, 이 새끼야! 죽는다고!”


“······!”


아르님이 잠에서 깨어나듯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를 향해 알리시아가 푸른 빛을 머금은 손을 뻗었다.


스으으-


주문의 기운이 주입되며 아르님의 몸에 전에 없던 힘이 차올랐다. 손에 든 검도 시퍼런 영기로 일렁이며 마법무기로 변모하고 있었다.


알리시아가 다음 주문을 준비하며 외쳤다.


“가! 어떻게든 잠깐이라도 붙들어!”


“···알겠다!”


고개를 끄덕인 아르님이 박차를 가하며 유길을 찾았다. 먼 발치서 한 용병의 목을 붙잡아 부러뜨리고 있는 그가 보였다.


“동방인-!”


아르님이 외치며 그쪽으로 말을 달렸다.


득달같이 쇄도해오는 그 기세에 주변의 용병들까지도 일순 경직될 정도였지만, 유길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죽어랏!”


아르님이 가까워진 유길을 향해 검을 내리치던 순간,


우직!


유길이 먼저 말의 무릎을 걷어차 간단히 부러뜨렸다.


히히히힝!


“어억?”


그대로 말이 고꾸라지며 아르님의 몸도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큭, 크···!”


얼얼한 고통을 참으며 몸을 일으키는 아르님을 향해 유길이 걸어왔다. 아르님이 욕설을 토하며 검을 휘저었다.


“개자식!”


터억!


검은 유길의 손가락 사이에 간단히 붙잡혔다. 잠시 멍청한 표정을 지었던 아르님이 용을 쓰며 검에 힘을 넣었다.


“끄윽! 끄으으···!”


하지만 잡힌 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애쓴다, 애써.”


유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검을 잡은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채애애앵!


“커헉!”


산산이 부서진 검 조각이 비산하며 아르님도 뒤로 나가떨어졌다. 군데군데 검 조각이 박힌 채 신음하는 그를 향해 유길이 허리를 굽혔다.


“어떠려나. 이제 슬슬 잘못 걸렸다는 생각이 드시려나?”


아르님이 피거품을 끄르륵거리며 말했다.


“···어라.”


“응? 뭐라고?”


귀를 기울이는 유길을 향해, 아르님이 히죽 웃었다.


“죽어라.”


그의 눈에, 멀리서 주문을 완성시키고 있는 알리시아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뒈져, 괴물새끼야!”


알리시아의 일갈과 함께 그 손에서 붉은색 광선이 일직선으로 쏘아져나왔다.


지이잉-!


사멸의 광선.


표적이 된 자의 살과 뼈를 녹이고, 영혼마저도 불살라 소멸시켜버리는 가공할 주문.


그 이질적인 빛의 줄기가 공간을 이지러뜨리며 유길을 덮쳤다.


‘잡았다!’


아르님과 알리시아의 얼굴에 화색이 떠오르던 순간-


유길의 코앞에서, 붉은 빛줄기가 퍽 하고 꺼지며 소멸했다.


“······?”


환희하려던 알리시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아르님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르겠단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유길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 내가 마법저항이 좀 높아서··· 다섯 번째 위계 이상 가는 주문이 아니면 안 먹힐 거야. 무슨 주문인지 몰라도 그 아래인 모양이네.”


“그런··· 말도 안 되는···.”


웅얼거리는 알리시아를 놔두고 유길이 뿔뿔이 도망치고 있는 용병들을 쳐다보았다.


“사람을 죽이려고 왔던 놈들이 무사히 돌아가면 안 되지.”


어느새 그 손에 바닥에 있던 돌멩이 몇 개가 잡혀 있었다. 유길은 잠시 용병들과의 거리를 가늠해보다 가볍게 손을 떨쳤다.


슈슈슈슉-


각기 다른 방향으로 날아간 돌멩이들이 용병들의 머리통을 차례로 깨트렸다. 철 지난 꽃잎처럼 말에서 줄줄이 떨어지는 그들을 보며 아르님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흐, 흐허허.”


어처구니가 없었다.


형과 형수의 피를 손에 묻힌 순간부터, 자신에게 평안한 최후 따윈 없을 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다.


어린 조카를 저주로 신음하게 만들고, 아버지의 자리를 찬탈할 계획을 짜면서도 결국 대가를 치르게 되리란 건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모든 걸 손에 넣은 후, 권좌에서 정적들의 공격을 받으며 몰락할 걸 상상했지 이런 황당한 최후는 꿈꿔보지 못했다.


누릴 수 있는 모든 걸 누린 후 늙고 병든 몸으로 죄책감을 곱씹으며 죽어갈 걸 생각했지 이런 개죽음을 예견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 죽음이, 지금 눈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네가 시작한 거니까, 원망하진 마라.”


아르님이 마지막으로 본 건, 머리 위로 떨어져내리는 유길의 손날이었다.


털썩


한쪽 머리를 잃은 몸뚱이가 옆으로 힘없이 쓰러졌다.


유길은 손에 묻은 피를 가볍게 털어내며 마지막 상대를 쳐다보았다.


알리시아는 놀랍게도 도망치지 않고 있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또 다음 주문을 준비하는 그녀를 향해 유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할 수 있는 거 다 해봐. 그러고 가야 미련이 안 생기지.”


으득, 하고 알리시아의 이빨이 입술을 짓씹었다.


입안에 퍼지는 비릿한 피맛과 아픔. 하지만 사랑하는 남자를 눈앞에서 잃은 참담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죽인다···.”


살의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그녀가 말했다.


“넌··· 반드시 내가 죽일 거야. 팔다리를 모두 토막치고 힘줄을 하나하나 뽑아내면서 살려달라는 애원을 들으며 죽일 거다.”


“알았으니까 해보라니까. 기다려 줄게.”


유길은 느긋하게 근처 바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알리시아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분노와 오기, 그리고 건드려선 안 되는 생명력까지 쥐어짜 무리한 시전을 억지로 강행한다.


“끄··· 으···!”


이전의 매력적이던 모습은 사라진 지 오래.


얼굴 곳곳에 핏줄이 불거지고 흐트러진 머리가 휘날리는 모습은 흡사 미친년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주문이 완성되었다.


구우웅-


주변의 공간이 둥글게 일그러지며 알리시아를 감쌌다.


마치 커다란 유리공 속에 갇힌 듯한 모습으로, 그녀가 광소를 터뜨렸다.


“흐, 아하하! 성공이다!”


절대적 면역.


공간 그 자체를 왜곡시켜 대부분의 공격으로부터 시전자를 보호하는 고위 방어주문.


평소였다면 감히 넘보지도 못했을 높은 위계의 주문을 완벽히 구현해냈다.


물론, 그 때문에 상당량의 수명을 희생하고 정신에도 영구적인 상해를 입은 꼴이 되어버리고 말았지만.


“뭐야, 방어 주문이었냐.”


유길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알리시아는 아랑곳않고 다음 주문을 준비했다. 그녀의 손이 호박빛 영기를 머금은 채 허공에 커다란 원을 그렸다.


쩌어억-


눈앞에서 차원의 문이 열리며 어딘지 모를 도시의 전경이 나타났다. 이 또한 신중히 사용해야 하는 주문이었지만 지금의 그녀에겐 그런 건 안중에도 없었다.


“···죽일 거다.”


알리시아가 살기 어린 눈으로 재차 말했다.


“마탑의 연줄을 모두 동원해서라도, 마족의 사도로 몰아 신전까지 끌어들여서라도 죽이고 말 거다. 반드시-”


“그래, 그래.”


유길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손에 어느새 짧고 뭉툭한 검이 하나 들려 있었다.


바라보던 알리시아의 입에 가소롭다는 미소가 맺혔다.


‘쓸데없는 짓을.’


설령 고대 마도제국의 무구(武具)라 해도 이 주문을 뚫을 순 없다.


아예 공간 자체를 잘라버린다는, 나락의 무기 같은 거라도 가져온다면 몰라도.


비웃으며 차원문으로 들어가는 그녀를 향해, 유길이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후웅-


시커먼 궤적이 길게 뻗어나가며 알리시아가 있는 곳까지 스치고 지나갔다.


순간 움찔했던 그녀가 다시 웃으며 조롱했다.


“이 주문을 우습게 보지 마. 지속시간이 짧은 게 단점일 뿐, 그 동안엔 어떤 공격도 통하지 않···.”


그런데 갑자기 굳어지는 입.


그뿐만이 아니었다. 차원문으로 걸어들어가던 다리도 땅에 붙어버린 듯 움직이질 않았다. 아니, 아예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어···?”


그녀의 눈앞에서 차원문 속 도시의 광경이 삐딱하게 기울어졌다. 자신을 경악한 눈으로 바라보는 도시 주민들의 모습도 스쳐갔다. 이어 세상이 거꾸로 뒤집히며 모든 게 어둠 속으로 추락해갔다.




잘린 목이 차원문 안으로 떨어지기 전, 그녀의 눈에 마지막으로 비친 광경이었다.



* * *



유길이 데르빈이 말했던 참나무를 발견했을 땐 달이 떠오른 지 한참 지난 후였다.


‘···좀 빨리 처리하고 올 걸 그랬나.’


놈들이 타고 온 말이라도 하나 잡아탔으면 좋았을 텐데, 다 죽거나 도망쳐버려서 그러지도 못했다.


이젠 또 어떻게 허스그라드까지 가야 하나.


저 아래서 하염없이 다른 상단이나 여행객들이 지나가길 기다려야 하나 고민하며 걷던 그때,


“응?”


참나무 밑에서 빨갛게 타오르는 한 점의 불빛.


자세히 보니, 누군가 담뱃대를 든 채 불을 붙이고 있었다.


데르빈이었다.


얼빠진 표정으로 다가온 유길을 향해 그가 연기를 뿜으며 고개를 들었다.


“왔군. 어서 타쇼. 바로 출발해야 달이 하늘 가운데 오기 전까지 조금이라도 더 갈 수 있으니까.”


“······.”


유길은 아무 말 없이 일단 시키는 대로 탔다.


출발할 준비를 하는 데르빈을 향해 그가 슬쩍 입을 열었다.


“분명 달이 뜨기 전까지만 기다리신다고···.”


“이랴!”


데르빈이 못 들은 척 채근하자 말들이 푸륵거리며 움직였다.


수레가 덜컹거리며 달빛이 깔린 길을 나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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