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 판타지 속 무림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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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손
작품등록일 :
2024.08.20 04:33
최근연재일 :
2024.08.31 15:05
연재수 :
1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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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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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31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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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강림 (2)

DUMMY

“헉, 헉···!”


나락 99좌의 군주들 중 하나인 잔혹의 대공, 고리투스를 섬기는 불길(不吉)의 전도사.


동시에 일흔일곱 번째 교단의 부제인 펜 에비르는 정신없이 숲속을 달리고 있었다.


“어디서 저런··· 말도 안 되는···.”


가쁜 숨 사이로 한탄이 새어나왔다. 잘린 왼팔에서 흘러내린 검은 피가 뒤쪽으로 길게 궤적을 남기고 있었다.


방금 전에 벌어졌던 건 싸움 같은 게 아니었다.


문자 그대로, 일방적인 학살.


부하들이 추풍낙엽처럼 쓸려갔을 때만 해도 그저 재주가 좀 있는 놈이구나 싶었다.


오랫동안 양민들이나 사냥하느라 지루했던 몸. 간만에 싸움 다운 싸움을 해보겠다 싶어 기꺼운 마음으로 본 모습을 드러냈다. 위대하신 분들께 세례 받은 자신의 진면목을.


그 결과가, 지금 이 꼴이었다.


쉬이익- 뻐억!


뒤에서 갑자기 날아든 돌멩이 하나가 펜의 등허리에 직격했다. 몸의 중심을 때리는 묵직한 충격에 펜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끄아악!”


석궁은커녕 노포에 맞아도 꿈쩍도 않을 몸이 그 하찮은 일격에 휘청였다. 펜은 왼팔이 잘린 자리에서 돋아난 촉수를 뻗어 가까스로 균형을 잡고는 계속 달렸다.


“헉, 헉!”


하지만 이번엔 더 큰 것이 날아왔다.


슈우웅- 푸화악!


“커헉!”


펜의 가슴을 뚫고 커다란 나무줄기가 튀어나왔다. 결국 달리던 두 다리도 힘이 풀리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끄으··· 윽!”


쑤욱!


오른손으로 간신히 나무줄기를 뽑아낸 펜이 이를 악문 채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 그 괴물이 느긋한 자세로 서 있었다.


유길이었다.


“여기가 끝이냐? 더 도망가보지, 왜.”


“······.”


펜은 분노와 자괴감으로 이를 갈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너무도 명확한 격차.


무슨 수를 쓴다고 해도 이길 수 없는 상대.


자신이 모시고 있는 사제라 해도 저놈을 상대로 당해낼 수 있을까?


평소 같았으면 불경한 생각이라고 펄쩍 뛰었겠지만, 도저히 그런 의문을 떨칠 수가 없었다.


“네놈은··· 대체 뭐냐? 마법사? 신전기사? 아니면 저 증오스러운 빛이 내려보낸 사도라도 되는 거냐?”


“그런 것들하곤 관계없고. 그냥 오늘 어떤 할매 때문에 빡친 사람.”


“······? 그게 대체 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펜을 향해, 유길이 어느새 손에 쥐어진 검을 휘둘렀다.


슈각-


“끄아아악!”


남아있던 오른팔마저 간단히 절단되며 펜이 바닥에 뒹굴었다.


어둠살을 든 유길이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의문 같은 거 가지지 말고 그냥 때리는 대로 쳐 맞어. 니들은 그러면 돼.”


이를 악문 채 바닥에서 부들거리는 펜.


그를 보던 유길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러고 보니까 너 같은 놈들은 목숨 하나씩 더 있지? 잘 됐네. 밤새 심심하진 않겠어.”


“미, 미친 놈···.”


펜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대로라면 정말 눈앞의 괴물 같은 놈에게 밤새 농락당하다 소멸하는 최악의 결말만 남은 것 같았다.


어차피 살아서 빠져나갈 수 없다면···


차라리···!


마음의 결정을 내린 펜이 이를 악물었다.


그가 뭉툭하게 잘린 양 팔을 유길에게로 향했다. 그 절단면에서 촉수가 수없이 쏟아져나오며 유길을 덮쳤다.


“이거나 처먹어라!”


쿠콰콰쾅!


하지만 가볍게 도약한 유길의 옷자락 하나 건드리지 못하고 애먼 바위와 나무들만 박살냈다.


근처에 사뿐히 착지한 유길이 말했다.


“얼마 전에 붙어본 놈은 이거보단 빨랐는데, 넌 어째 급수가 좀 떨어지는 거 같다?”


하지만 펜은 이미 등을 돌려 다시 도망치고 있었다.


이번엔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향. 바로 마차와 야영지가 있는 쪽이었다.


굳이 지금 와서 거기로 돌아가겠다는 건···


‘데르빈을 인질로 삼겠다 이건가.’


그렇겐 안 되지.


퓨웅-!


유길이 땅을 박차며 화살처럼 쏘아졌다. 그리곤 펜에게 바짝 붙어 쫓아가며 계속해서 칼질을 날렸다.


온몸이 너덜너덜해지도록, 하지만 죽거나 쓰러지진 않을 정도로.


여기서 간단히 끝내버리면 아쉬우니까.


“끄아악! 크윽!”


펜은 비명을 지르고 피를 쏟아내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이윽고 그 눈에 늘어선 마차와 야영지의 전경이 들어왔다.


도륙당한 부하들의 시체와, 그 반대편에 멀거니 서있는 데르빈의 모습도.


‘됐다!’


하지만 다음 순간, 유길의 발길질이 펜의 허리를 걷어찼다.


뻐억!


“꺽!”


콰아아앙!


날아간 펜의 몸뚱이가 마차 하나를 박살내며 반대쪽으로 튕겨나갔다. 자욱하게 일어난 먼지와 파편이 주변으로 비산했다.


그 사이 유길은 데르빈 곁에 착지했다. 멍하니 쳐다보던 데르빈이 기가 질린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런 말 하면 불쾌할지도 모르겠지만··· 꼭 가지고 노는 것 같구려.”


“···아니라고는 할 수 없긴 하죠.”


이딴 놈들이 목숨을 위협하는 고난일 리는 없을 테니.


오늘 느낀 찝찝한 기분을 깨끗이 해소하고 갈 생각이었다.


그때, 유길의 눈에 방금 마차가 박살나며 흩어진 짐들이 보였다.


부서진 궤짝과 찢겨진 천, 그리고 그 사이로 비져나온 검붉은 덩어리들.


얼핏 보면 푸줏간의 고깃덩어리 같지만.


“설마··· 사람이오, 저거?”


데르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가죽을 벗기고 힘줄을 뽑아낸 후, 그 위에 알 수 없는 문양까지 잔뜩 새겨놨지만 절대 몰라볼 수 없는 형태.


“크으으···.”


먼지구덩이 속에서 만신창이가 된 펜이 몸을 일으켰다.


유길이 서늘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역겨운 짓거리 해놓은 죄까지 추가다. 곱게 안 죽여도 할 말 없지?”


“······.”


펜은 대꾸하지 않고 근처의 마차 위로 펄쩍 뛰어 올라갔다. 걸레처럼 변한 육신에서 흘러내리는 검은 피가 마차에 실린 짐들 위로 스며들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하마··· 내가 뭘 하든 네놈을 이길 순 없다는 걸. 그리고 여기서 빠져나갈 수도 없다는 걸.”


“잘 아네. 맞다 보니까 갑자기 지능이 올라가기라도 한 건가?”


펜은 대꾸하는 대신 자신이 올라탄 것과 다른 마차들을, 그리고 거기 실린 궤짝들을 훑어보았다.


아직 ‘의식’을 발동시키기엔 한참 모자란 양의 제물.


최소한 지금 준비된 것의 두 배는 되어야 태초부터 이어져 온 유배를 비집고 고귀하신 존재를 이 비천한 땅에 모실 수 있다.


‘하지만···.’


이제는, 대신 추가할 귀한 제물이 있지.


하나도 아니고 둘 씩이나.


“웃어?”


씨익 웃는 펜을 보며 유길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손이 어둠살을 휘두르려는 순간-


갑자기, 펜이 촉수로 자신의 가슴을 꿰뚫었다.


푸욱!


일격에 심장이 파괴되며 검은 피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피를 토해내면서도 펜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더욱 진해졌다.


“······?”


갑작스런 상황에 의아해하는 유길과 데르빈을 향해 그가 중얼거렸다.


“이것으로··· 의식의··· 완성··· 이다···.”


비록 대(大)강림이 아닌 소(小)강림.


자신이 섬기는 잔혹의 대공도, 99좌의 군주들 중 하나도 아닌 이름조차 없는 격 낮은 존재겠지만.


그것만으로도 이 일대를 나락과 다름없는 꼴로 만들어버리기엔 충분하리라.


눈앞의 저 괴물까지도 포함해서.


“······!”


뒤늦게 무언가 눈치챈 유길이 재빨리 어둠살을 휘둘렀다.


쏘아져 나간 검은 궤적이 그대로 펜의 허리를 양단했다.


서걱-


간단히 둘로 나뉜 몸뚱이가 피를 뿌리며 마차 아래로 떨어졌다. 하지만 펜의 얼굴에 드리운 미소는 끝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드드드드드-


갑자기 마차에 실린 짐들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뚝 멈추더니 이내 눈처럼 녹아내렸다.


주르륵-


거무죽죽한 액체로 변한 짐들이 펜의 동강난 몸뚱이를 향해 몰려들었다. 곧 펜의 몸도 액체로 변하며 모든 게 함께 뒤섞였다. 검붉은 물결이 몰아치며 순식간에 바닥에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소용돌이 위에는 어느새 알 수 없는 문양이 신기루처럼 떠올라 있었다.


세 가닥 촉수가 뻗어 나오는 듯한 기괴한 문양. 바로 나락의 상징이었다.


유길의 입에서 욕설이 새어나왔다.


“···씨발.”


처음 보는 광경이, 아니었으니까.


「배신자다! 배신자가 마족을 소환했···!」


「어서 피하세요, 유길 님! 여긴 저희가-!」


이젠 잊었다고 생각했던 그날의 광경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며 뇌수를 후벼판다.


숨이 가빠지며, 발밑이 무너져내리는 듯한 아득한 감각이 온몸을 죄어왔다.


“저, 저게 대체 뭐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요?”


제정신으로 돌아오게 만들어준 건 데르빈의 목소리였다.


유길이 어둠살을 꽉 쥐며 씹어뱉듯 말했다.


“···도망가세요.”


“······?”


데르빈이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로서는 이 상황이 도무지 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밑도 끝도 없이 도망가라니, 대체 무슨-”


“가라고! 빨리!”


지금껏 들어본 적 없던 노성이 데르빈의 귀청을 때렸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바라보던 그의 눈에 미세하게 떨고 있는 유길의 어깨가 보였다.


심상치 않다는 걸 느낀 데르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겠소. 부디 당신도 몸조심하시오.”


유길은 대답하지 않고 점점 더 커져가는 소용돌이만 주시했다. 뒤에서 데르빈이 뛰어가는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소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푸욱!


고기를 잡아찢는 듯한 둔탁한 소음.


놀라 뒤돌아본 유길의 눈에, 공중에 떠있는 데르빈의 모습이 보였다.


“커··· 헉···?”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그의 입으로 피가 울컥울컥 뿜어져 나왔다. 가슴에선 어느새 기다란 촉수 하나가 튀어나와 있었다.


“이, 게··· 대··· 체···?”


피거품을 뿜으며 중얼거리는 그를, 유길이 절망적인 눈으로 쳐다보았다.


곧 그 몸뚱이가 경련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덜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두 눈이 터질 듯 불거지고 온몸의 모든 구멍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어느새 터질 듯 부풀어오른 모습으로, 데르빈이 최후의 단말마를 토해냈다.


“끄아아아악!”


뻐엉-!


사방으로 흩어지는 육편과 핏물.


그 속에서 촉수들이 뭉친 덩어리가 둥실 떠올랐다.


피나 살점 따윈 전혀 묻지 않은, 소름 끼칠 정도로 순수한 검은색을 띤 채로.


[···생각만큼 성대한 환영연은 아니로군.]


머릿속으로 파고드는 나직한 목소리.


다시는 듣고 싶지 않았던 그 목소리.


접어놨던 종이가 펼쳐지듯, 뭉쳐있던 촉수들이 스르륵 펼쳐졌다. 그것들이 이리 휘감기고 저리 휘감기며 서서히 사람과도 같은 형체를 만들어갔다.


호리호리한 몸통이 먼저 갖춰지고, 이내 기이할 정도로 길쭉한 팔과 다리가 돋아났다. 털 한 올 없는 매끈한 검은 피부 위로 비슷한 느낌의 거죽이 한 겹 더 덮어씌워졌다.


다음으론 입도 코도 무엇도 없는 얼굴이 등 뒤에서 올라왔다. 몇 가닥 굵은 촉수가 그 뒤에서 머리카락인지 뱀인지 모를 모습으로 넘실거렸다.


마지막으로 그 얼굴에 길고 가느다란 눈매가 그어졌다. 서서히 뜨이는 눈 사이로 기이한 노란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허나 탓하진 않으마. 지금 갖춰진 구색만으로도 충분히 즐길 수 있을 것 같으니.]


완전히 뜨인 노란 눈이, 유길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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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강림 (1) 24.08.30 28 3 15쪽
12 숲의 주인 (4) 24.08.29 30 3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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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분수를 모르는 자 (2) 24.08.24 46 1 15쪽
6 분수를 모르는 자 (1) 24.08.23 48 2 14쪽
5 귀족가의 비밀 (3) 24.08.22 52 1 12쪽
4 귀족가의 비밀 (2) 24.08.21 52 2 12쪽
3 귀족가의 비밀 (1) +1 24.08.20 66 1 12쪽
2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 24.08.20 78 1 15쪽
1 동방에서 온 사람 24.08.20 92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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