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머리 러시아군 대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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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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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5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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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DUMMY

스윗한 로판 제국의 로판 아카데미.


제1생도군단의 하루는 아침 6시부터 시작된다.


“베틀리츠, 이 등신아. 빨리 일어나!”


“으음······ 엄마 5분만······.”


오전 6시.


한 5분쯤 전부터 이미 의식은 돌아와있었지만, 그래도 그냥 감고 있던 눈이 떠진다.


나팔 소리와 함께 침실에 밝은 전등이 켜지고 교관 목소리가 복도에 울려퍼진다.


기상 후 세면과 환복에 주어지는 시간 30분.


기도 시간 동안 이어지는 교관의 부츠와 단추 검사.


“귀관의 부츠 손질은 정말 훌륭하군!”


연해주에서도 감탄받았던 부츠닦이 실력을 다시 한번 칭찬받은 뒤에.


오전 7시부터 8시까지는 아침 수업. 그러니까 0교시다.


그 후 주어지는 20분 간의 산책(안하면 처벌 받는다)을 마치고 나면 8시 반부터 첫 수업.


식사 전까지 세 번의 수업이 있고, 사이마다 10분간 휴식.


식사 후에 정오부터 15시 20분까지 다시 세 시간의 수업이 시작된다. 교실 수업 두 번, 체조나 제식 훈련 한 번.


그 뒤엔 16시부터 16시 30분까지의 식사를 마치고 나면 중대별로 정렬해서 해산.


18시까지는 자유 시간, 20시까지는 교실에서 숙제 준비 시간. 20시 30분에는 저녁 차 시간. 21시에는 취침.


불을 끄고 야간 등을 켠 순간부터는 모든 대화가 금지되고, 위반자는 당직 장교실 입구에서 10-15분간 서 있는 벌을 받지만······.


당연히 지켜질 리가 없다!


21세기에도 틱톡과 릴스를 소란스럽게 하는 10살짜리 혈기왕성한 애들이 모여있는데 얌전히 잠에 들 리가 없지 않은가?


물론 거기서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몰래 하는 체스 정도면 얌전한 스포츠인 법.


소리 없는 베개싸움과 쿠차말라(햄버거).


나는 깃털을 뒤집어쓰고 난투극을 벌이는 훈훈한 광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의외로 러시아 살만한거 아닌가?’


미국이나 영국에서 학교 다녔으면 내가 이렇게 편하게 학창생활은 보내진 못했을 것 같은데.


내가 생각해도 미친 소리 같지만, 거기서 노란 원숭이라고 취급받느니 러시아 제국에서 살아가는게 훨씬 편하지 않을까?


망하지만 않는다면 말이지.


싶던 찰나였다.


사고는 그때 벌어졌다.


“야, 루슬란. 너 이 자식. 매일 자기 혼자만 쏙 빠져나가고!”


“이번엔 네가 한번 당해봐라!”


“얘들아, 밀어!”


별안간 기습공격을 가한 아이들에 의해 나는 밑에 깔리고 말았고.


“자, 잠깐만!”


코가 바닥에 눌린 가운데, 우르르 밀린 몸들의 무게로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젠장, 누가 도와줘!’


나는 목숨을 구하기 위해 사람의 더미 속에서 필사적으로 빠져나왔지만.


다음 순간 정신을 까무룩 잃어버리고 말았다.



* * *



정신이 비몽사몽하던 나는 밤중에야 깨어났다.


슬쩍 주위를 둘러보니 애들이 없다. 아무래도 장난이 걸려서 죄다 끌려간 모양이고.


그나마 나는 ‘자고 있는걸로’ 취급되어 처벌에서 빠져나간 모양이었다.


거참, 죽다 살아났네.


혀를 차고 있던 그순간, 나는 무심코 숨을 삼켰다.


“흡.”


내 눈 앞에 비친 것은 웬 환영이라고 해야할지 잔상이라고 해야할지.


사람의 모습을 한 귀신이었다.


그것도 내가 아는 얼굴.


내가 그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니, 그쪽도 나를 빤히 바라보면서 말했다.


- 어.


“장군신?”


- 내가 보이냐? 드디어?


“당신이 왜 여기에 있어?”


- 그건 네 엄마한테 물어봐야지.


장군신 박춘명. 사실 장군도 신도 아닌 것 같지만.


‘그럼 그냥 박춘명이군.’


하필 장군신도 아니고 장포대라니.

대령도 낮은 직급은 아니지만, 장포대신이라고 하면 뭔가 짜치지 않은가.


- 시끄러. 그건 네 엄마가 사이비라서 그런거 아니야.


“당신이 나를 구해준건가?”


- 아니, 딱히 그런건 아닌데.


하기야, 저 사람 더미에선 내 힘으로 빠져나왔지.


그러나 죽을 위기에서 각성한 덕분인지는 몰라도 박춘명이 보이게 되다니.


근데 갑자기 왜 나온건지는 모르겠구만.


- 내가 안보이는 동안에도 꽤나 재미있는 계획을 꾸몄던 것 같은데.


“물론이지.”


나는 장군신, 아니 장포대신을 향해서 말했다.


- 군인으로서 출세할 생각이냐? 장군?


박춘명의 어조에서 반짝임이 묻어나왔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군인으로 출세를 해봤자 얼마나 한다고.


러시아 제국군 군인 월급은 딱히 의식주를 걱정할 정도는 아니지만, 내가 바라는 것보다는 한참 아래에 있었다.


“사업을 할거야.”


- ······사업?


그걸 위해서 지금 공부도 족보에 외주 맡기려고 하지 않는가.


생도들이 가장 원하는 물품.


그것은 바로 담배. 담배다!


그 외에는 칫솔이나 우표 정도가 있겠지만, 이거야 어차피 합법적으로 들여올 수 있는 것들이고.


“알렉산드르 형이 그랬는데, 지금 6, 7학년들은 담배에 환장을 한대.”


알렉산드르는 베틀리츠네 셋째 형이다. 원래 7학년인데, 한 해 꿇어서 현재 6학년.


호그와트의 빨간머리 집안처럼 온 형제가 제1생도군단에 진학한 케이스다 보니, 학년 시험 족보라도 얻을 수 있을줄 알았는데


‘나 신입생 때는 선배 앞에서 일어서서 대답 안했다고 맞았는데, 요샌 그런거 없나? 거 참 학교 많이 좋아졌다니까.’


어째 이렇게 거들먹거리는 소리만 듣고 왔다.


하지만 그보다 더 귀중한 정보를 얻었으니 됐어.


담배만 어떻게 들여올 수만 있으면 내가 이 교도소······ 아니, 생도군단의 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고학년 판매책은 베틀리츠네 형을 써먹으면 될테고.


- 담배 밀수라. 그래봤자 자잘한 용돈벌이 밖에 안될텐데.


사실 그 말이 맞다.


생도가 받는 일일 수당은 고작해야 25코페이카.


병사 수당보다는 10코페이카 정도 높긴 하지만, 거기서 거기다. 진짜 담뱃값이지.


하지만 이게 다 연습이라니까.


어차피 여기에선 돈 많아봤자 별 쓸모가 없다고.


저 이외의 물품들은 딱히 들여온다고 해도 못쓴다. 교관들이 싸제품들을 엄금하고 있거든.


이 덕분에 생도군단에선 금수저든 흙수저든 다 똑같은 물품을 써야하는데, 오히려 이걸 다행으로 여기는 친구들이 많다.


귀족 타이틀은 달고 있어도 딱히 넉넉하지는 않은 형편들이 꽤 되거든.


나도 그렇고.


어쨌든 슬슬 그러면서 사업 감각이나 좀 익히면 되지 않을까?


- 그래,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졸업하면 뭐할건데. 웅대한 계획이 있으니까 굳이 돈도 못버는 군대에 온거일거 아냐?


그렇지.


나는 훌륭한 ‘미래 지식’을 써먹기로 계획하고 있었다.


러시아 장교들이 밑에 부하들을 자기 영리사업의 노동력으로 굴려먹는 것은 오래된 관행이 아닌가?


심지어 21세기 러시아군도 그런다.


- 횡령과 리베이트도 안 빠질테고.


그러니까 제1생도군단에 진학한거지. 여기저기 인맥이나 뚫어놓게.


러시아 군인들, 사실 정말 불쌍한 사람들이거든요?


그러니까 좀 해처먹어도 돼.


- 어린 놈이 어디서 그런 지식은 배워가지고······.


내 지식이 다 당신한테서 온거일텐데 무슨 그런 말씀을.


- 그렇게까지 해서 최종적으론 뭘할건데?


그야 돈 많이 벌고 다른 나라로 가서 죽을 때까지 놀고 먹는거지.


- 네 엄마가 목숨을 바쳐서 무당될 운명에서 구해줬는데 넌 백수를 하겠다고?


어허.

엄연히 전업투자자가 꿈이라니까.


나의 주변을 빙글빙글 맴돌던 장포대신이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서 내 계획은 어때?”


- 흐음······.


군인의 힘을 빌려 사업가로 출세해서 군자금 모아 이 나라를 뜨겠다는 발상.


혁신적이지 않나?


- 평범해. 너무 평범해.


나는 나의 원대한 계획을 평가절하해버리는 박춘명의 말에 와락 얼굴을 구겼지만.


듣고 보니 그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 너 같은 생각하는 놈들이 이 러시아에 한둘이 아닐거다. 그놈들이 다 경쟁자일텐데 그게 얼마나 효율이 나올까.


- 햇병아리 소위로 임관해서 병사 몇 놈 데리고 노동력 뽑아먹어봤자 얼마나 나올거 같냐? 누가 따라주기는 하고? 짬찌 시절엔 꿈도 못꿀거고, 최소 몇 년은 굴러먹어야할거다.


- 거기다 그런 진흙탕에 손을 담그고도 멀쩡하고 싶으면 상관들한테 상납도 해야할거고. 목표액까지는 더 멀어지겠지?


- 게다가 혁명 나버리면 꼼짝없이 부패 장교로 몰려서 총 맞아죽을걸. 그 전에 1차대전 참호밥 되는 것부터 피해야겠네.

생도군단 7년, 군사학교 2년 마치고 19살에 임관하면 딱 6년 남는데······ 그 안에 돈 모아서 이 나라를 뜰 수 있을까?


“······.”


나를 골똘히 바라보던 박춘명은 한숨을 푹 쉬었다.


“가만, 내가 그 와중에 어디 휩쓸려 죽어버리면 당신은 어떻게 되는거지?”


박춘명은 엄마가 나를 지키라면서 내 몸에 붙들어놓은 망령.


내가 죽어버리면 어떻게 되는거지?


영원히 구천을 떠도는건가?


- 낸들 알겠냐.


모르는 쪽이 더 문제일 것 같은데.


- 내키진 않지만 어쩔 수 없군.


박춘명도 마찬가지 생각을 했는지, 그는 뜸들이더니 말을 꺼냈다.


- 기왕 너처럼 양심을 포기한 놈이라면 크게 한탕 벌 수 있는 기회가 오긴 하는데······.


“뭔데?”


- 의화단.


의화단?


그거 중국인들이 권법을 보여주겠다면서 붕쯔붕쯔하다가 진압당한거 아냐?


- 흠, 이건 기억 공유가 안된건지, 아니면 발상의 차이인지 모르겠네.


이하 박춘명 씨의 설명으로는 이랬다.


내년, 아니 올해말부터 벌어질 의화단의 난은 청을 도와 양이를 몰아내자며 들고 일어났지만.


역시나 8개국 연합군에게 사뿐히 즈려밟히고, 북경에서는 시즌 n번째 대약탈이 벌어질 예정이라고 한다. 당연히 여기에 러시아도 참전.


박춘명의 말은 기왕 그런 빅 이벤트가 기다리고 있으니, 거기에 껴서 한몫 챙기자는 뜻이었다.


아 그렇구나. 순수한 내 생각으로는 도저히 떠올릴 수 없는 발상이었어!


아이디어는 고맙지만, 이 흉참한 망령 같으니!


이런 혜자 이벤트를 들으면······ 약탈, 아니 '부의 재분배'를 실현하러 갈 수밖에 없잖아!


그러나 박춘명은 급하게 손을 내저으면서 외쳤다.


- 아니아니, 최재형 그 양반 지금 군수 사업하고 있잖아.


"아."


- 미리 준비하라고 얘기해놓는거 어때? 돈 좀 만지면 너한테 매달 주는 후원금도 늘어날거고. 적어도 담배 팔아서 용돈 버는 것보단 나을걸.


흐음.

나쁘지 않은 얘기다.


약탈이라는 도덕적 선은 넘지 않으면서도 이득을 챙기자는 발상.


하지만 좀 아쉬운데, 춘명아.


이런 빅 이벤트 앞에서 고작 용돈벌이로 만족해야 쓰겠어?


- 근데 아까부터 왜 계속 반말이야? 꼬맹이 주제에?


아, 왜 이래. 정신연령은 동일할텐데.


우리는 같은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동지잖아. 안 그래, 또 하나의 나?


- 개소리.


“그래? 그럼 제대로 위아래 한번 따져보자고.”


난 1889년생인데 우리 박춘명 씨는 대체 몇 년생일까?


- ······.


나는 자비로우니까 형이라고 부르는건 면제해주지.


- 그래, 고오맙다.


아무튼 좋았쓰.


가자, 보상 10배 이벤트로.



---

1.

작중 생도군단 묘사는 대부분 알렉산드르 베틀리츠(1893년 입학)와 아드리안 보르쇼프(1900년 입학)의 회고를 참고하여 작성되었습니다.


본문에 나온 알렉산드르 베틀리츠가 신입생 시절 2학년 선배들에게 제재를 당했다는 내용은 사실이지만, 정확히는 일어서서 대답하라고 갈구던 선배를 때렸기 때문입니다(그래봤자 초딩 싸움이긴 하지만).


참고로 알렉산드르 베틀리츠는 수업 중에 교사 앞에서 계란후라이를 해먹거나 대롱으로 친구들한테 침묻은 흡습지를 쏘다가 실수로 교사한테 맞히는 등 장난이 심했습니다. 3학년 때 1년 꿇기도 했고요. 그런데 정작 본인 말에 따르면 학교는 수석 졸업했다고 합니다.


2.

제1생도군단에서는 고학년 생도들의 흡연이 제법 만연했던 것 같습니다.


여기에 대한 학교측의 대처도 제법 재미있는데, 1904년 교장으로 부임한 그리고리예프 장군은 흡연을 적발하자 생도들을 모아놓고 “나도 13살 때부터 담배 피웠고, 생도군단에서 엄한 처벌도 받았지만 그래도 계속 피운다”고 외쳤습니다.


그리고리예프는 6학년과 7학년에서 흡연을 “묵인”하기로 결정했고, 담배를 피우던 생도들은 흥미가 떨어졌는지 학년 말까지 약 20%가 흡연을 그만두었습니다.


文피아딸기님 후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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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이륙 준비 +17 24.09.11 4,812 269 12쪽
17 발전 +14 24.09.10 4,975 294 12쪽
16 착수 +15 24.09.09 5,141 308 12쪽
15 내기 +18 24.09.08 5,145 282 12쪽
14 파티 +12 24.09.08 5,580 289 14쪽
13 황족 +21 24.09.07 5,734 311 13쪽
12 귀환 +19 24.09.06 5,668 344 12쪽
11 제안 +27 24.09.05 5,810 325 10쪽
10 호의 +22 24.09.04 5,892 307 14쪽
9 경매 +25 24.09.03 5,925 322 13쪽
8 수확 +27 24.09.02 5,975 325 12쪽
7 시작 +13 24.09.01 6,072 304 11쪽
6 참전 +10 24.08.31 6,571 311 14쪽
» 귀신 +21 24.08.30 6,724 313 12쪽
4 입학 +30 24.08.29 6,948 353 12쪽
3 연줄 +20 24.08.28 7,184 357 11쪽
2 스타팅이 왜 이래 +24 24.08.27 8,129 392 12쪽
1 프롤로그 +41 24.08.26 9,245 383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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