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머리 러시아군 대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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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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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5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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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5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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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안

DUMMY

“부모가 조선인인 제가 왜 아라사군으로 복무하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자네가 아라사에서 태어났기 때문이 아닌가? 아니면 아라사가 강대국이라서든지.”


“둘 모두 맞습니다. 다만 진정한 이유를 꼽으라면, 조선보다는 아라사가 오래갈 것 같았기 때문이지요.”


“오래 간다······?”


숙친왕은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청의 고관인 그가 이웃한 조선, 아니 작금의 대한제국에 든 망조를 모를 리가 없다.


러시아도 오래 못갈거야 마찬가지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 물살이 드러나지 않은 상태다.


내 대답이 의외였는지 숙친왕은 허허 웃으면서 장난스러운 말을 건넸다.


“자네의 뜻이 장구하는 계책에 있다면, 대청으로 오는 것은 어떠한가. 적어도 조선인으로서 양이들의 나라에서 사는 것보다는 대접이 나을 터인데.”


아냐.

난 인종차별 같은거 당한 적 없어. 적어도 아직까지는.


게다가 청나라처럼 가라앉는 배에 탑승하라고?


내가 바라는건 청이 망하기 전까지 빨아먹을 단기적인 협력일 뿐이다.


그러나 내가 무어라 대답하기 전에 숙친왕이 재차 입을 열었다.


“아니면, 자네가 보기엔 대청도 곧 망할 나라 같은가?”


네.


하기야 남의 나라 망조도 보이는 인간한테 자기 나라 망조가 안보일 리가 없지.


솔직히 북경이 불탔는데 그걸 못느끼면 위정자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자격이 없다.


‘일이 좀 더 쉬워질수도 있겠는데.’


나는 숙친왕을 바라보며 잠시 말을 골랐다.


좀 자조하는 농담으로 던진 말 같지만, 이럴 땐 화끈하게 질러주는게 좋겠지.


어차피 내가 북경을 떠나면 두 번 다시 볼 일 없는 사람이다.


아니, 애초에 러시아 장군의 당번병 따위가 숙친왕 같은 고관과 마주 앉을 기회가 생기는 것도 아마 지금이 마지막.


숙친왕이 무례함에 노발대발하면 그걸로 끝이지만, 그렇다고 딱히 잃을 것은 없다.


그러니 나는 기왕 이리된거 직설적으로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청은 곧 망할겁니다.”


개그로 던진걸 다큐로 받자 숙친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째서지?”


“작금의 형세를 보고도 그리 느끼지 않는 사람은 없을테니까요.”


그러나 숙친왕은 ‘천한 놈 따위가 어디서 감히’ 따위의 말을 꺼내는 대신, 조용히 반론했다.


“이러한 소란은 예로부터 천하에 종종 있었으나, 중흥하여 나라와 사직을 보전한 사례도 그만큼 많았다. 이런 일로 대청이 무너지겠는가?”


그래.

수도가 불타거나 황제가 잡혀가도 결국 거시적으로 봤을 때 한때의 소란으로 끝난 사례는 많다.


하지만 과연 지금 이것이 한때의 소란일까?


“60년 전 영길리인들이 쳐들어와 일으킨 전쟁을 경자의 변(庚子之變)이라 한다지요.”


현대인에게 익숙한 표현으로는 제1차 아편전쟁.


“헌데 그로부터 한 갑자를 돌아 공교롭게 올해도 경자년입니다. 후세 사람들은 아마 이번 일을 두고도 경자의 변이라고 부르겠지요. 그 한 갑자 동안 청은 대체 무엇이 변했습니까?”


청의 쇠락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1차 아편전쟁에서 거하게 코가 깨지고 굴욕적인 조약을 맺은게 무려 60년 전.


그때 태어난 아이가 자라 노인이 될 때까지의 시간이다.


청의 역사에서 무려 4분의 1을 차지하는 이 시간을 잠시의 소란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부자는 망해도 3대는 간다지만 하필 자기 대에 폭탄돌리기에 당첨된 것과 똑같은 이치.


망조가 들어도 좀비처럼 살아가던 나라들이 있긴 하나, 그것을 감안해도 청 제국도 이제 그 수명이 다할 때가 되었다.


“······과연 재지 있는 아이로구나.”


선기는 긴 침묵 끝에 말했다.


그래도 아저씨 마음에 들었어.


내가 아무리 러시아군을 뒷배 삼고 있다고 해도 어린아이의 말을 이정도까지 들어줄줄은 몰랐다.


이 시대 기준으로는 충분히 기인이라고 할만한 것이다.


그러니까 특별히 내가 동앗줄을 하나 내려주도록 하지.


“왕야께서 그리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혹 거기에 기대 한 말씀 더 올려도 되겠습니까?”


“말해보게.”


나는 즉각 영업용 모드로 들어갔다.


“대청의 앞날이 정녕 어찌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겠지요. 허나 만약 저의 어리석은 생각대로······ 저 한족들이 청을 무너뜨리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박춘명의 기억으로는 청이 망하고 구 황실 특권을 보장해준다는 조약을 맺었다는데, 그게 제대로 지켜졌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현재 만주족은 한족의 레짐 체인지에 깊은 공포를 느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왜? 지들이 해놓은 짓이 있거든.


“미리 대비를 해놓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대비?”


숙친왕이 갑자기 변한 내 태도에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습니다. 천하의 대세란 진정 헤아리기 어려우니, 혹 그때 가서 복벽을 도모하려고 하셔도 기반이 없다면 어렵지 않겠습니까. 국외에 좋은 투자처를 미리 찾아놓으시는 것이 어떨는지요?”


당연히 그 투자처는 나와 연결된 연해주의 한국인 사업체를 말하는 것이다.


2회차 회귀자처럼 미국이나 영국에서 재벌물 찍기엔 숙친왕 역시 중국을 벗어나본 적이 없는 사람.


저기보다는 러시아 연해주가 훨씬 가깝지.


심적으로든, 지리적으로든.


사실 내 입장에선 청나라 부흥운동을 위해서든 일신의 안위를 위해서든 그딴건 내 알 바 아니긴 하다.


그래도 나라 망할 징조를 느끼고 있는 사람에겐 제법 솔깃한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무슨 목적이든 분산투자한다 생각하고 미리미리 이쪽에 돈 좀 옮겨놓으면 나라 망해도 곧바로 튀면 되잖아?


10년 쯤 뒤에 강제로 양민 1이 될 운명이라지만, 지금은 이 거대한 중국의 수뇌부에 속한 선기다.


주무를 수 있는 돈이 한두푼이 아닐테니, 숙친왕에게는 별 것 아닌 푼돈이라도 우리 입장에선 그 중 극히 일부라도 받아먹을 수 있으면 땡큐 베리 머치.


당연히 그 커넥션은 내가 주무른다.


만약의 일이지만 청이 망하고 재수없게 주인이 쓱싹당하면······.


‘그때 가서 꿀꺽 삼켜도 될거고.’


그러나 나의 사기꾼스러운 생각을 읽은 것인지, 한참 숙고하던 숙친왕은 별안간 벌떡 일어섰다.


“이만 돌아가보겠네.”


“장군님을 뵙지 않으시고요?”


내가 황급히 붙잡았지만 숙친왕은 가볍게 물리쳤다.


“아까도 말했듯이 왕부와 현산이 무사한 것을 확인했으니 되었네.”


뭐지. 빡쳤나.


하지만 나는 걱정하지 않았다.


총든 러시아군이 내 뒤에 있는데 화친을 구걸하러 온 입장에 뭐 어떻게 할거야.


나름 배포 큰 저 아저씨가 그럴 것 같지도 않고.


어차피 약탈도 끝물인 김에 아쉬워서 던져본 제안이니 이것 자체는 되면 좋고 안되면 말고지.


그러니까.


바실레프스키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는 뜻이다.



* * *



바실레프스키의 설명을 들은 나는 길게 탄식했다.


‘시발. 좀만 참을걸.’


리네비치와 바실레프스키가 펼치는 ‘사실 러시아군은 나쁜 놈들이 아니었고, 오히려 북경에 나쁜 녀석들이 들어오는걸 막고 있었다고 한다······’ 작전.


내가 들어도 개소리였지만, 페테르부르크에 잘못 걸리면 심히 피곤해질게 분명한 러시아군 장교들 입장에서는 반드시 성사시키고 싶은 눈치였다.


헌데 이 작전의 핵심은 청 조정이 만족스러워야 한다는거고, 그러려면 당사자인 숙친왕의 뽐뿌가 좀 들어가야하는데.


문제는 내가 숙친왕의 심기를 거슬러 버린 것 같다는 것.


‘말 좀 들어준다고 깝치지 말걸 그랬나.’


아니 잠깐. 생각해봐.


어차피 윗선에서 조인트 까이는건 바실레프스키잖아? 그럼 나랑은 상관없는 일 아닌가?


페테르부르크에서 혀를 차거나 말거나 약탈품 회수 같은건 어차피 불가능하다. 그런 짓했다간 북경에서 반란이 일어날걸.


하지만 까라면 까야하는게 군대의 생리.


바실레프스키는 중립적으로 보이고 싶은지 어디서 미국 기자까지 데려왔다.


역시 국뽕 기사는 외신발이 최고지.


“어른들의 범죄 행위로 가득한 북경에서 순수함을 지킨건 오직 두 어린아이 뿐이군요. 러시아군의 소년과 그에게 구해진 중국 공주라. 두 사람의 우정은 정말 좋은 기삿거리가 될겁니다!”


바실레프스키에게 무슨 소리를 들은건지, 북경 약탈을 취재하다 인간혐오에 걸린 것 같던 표정의 기자 눈에 생기가 돌아왔다.


“잘 좀 찍어주시오. 이건 두 나라 우호의 상징과 같은 장면이니까.”


“물론입니다. 역시 아직 인류에겐 희망이 남아있······.”


젠장.

내가 지금 여기에서 뭐하는건지 모르겠군.


조만간 러시아군이 철수한다 만다 하는 소리까지 도는 상황이니 한시라도 빨리 재고 처분해도 모자랄 판에.


나는 현산과 함께 팔자에 없는 소꿉장난하는 컨셉샷까지 찍어야만 했다.


이 모든 헛짓거리를 하고 난 뒤에도 내게 떨어지는 것은 없었다.


바실레프스키는 내 어깨에 손을 올려놓은 채 단지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날 아버지라고 불러도 좋다.”


나를 언론 플레이에 이용해놓고 준다는 대가가 이거야?


지금쯤 한국에 있을 친애비에, 최재형에, 비류코프만 해도 여포와 동률인데 여기에 바실레프스키까지 추가하라고?


그런 짓을.


그런 짓을······


“예, 아버지!”


당연히 해야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소장 빽인데 이걸 참을 수 있을 리가.


비류코프 소장도 있긴 한데 그 양반은 퇴역했잖아.


나는 바실레프스키가 더욱 흡조할 말을 꺼냈다.


“혹시 모르니 청의 다른 친왕과도 친분을 쌓아보는게 좋지 않을까요?”


이건 내가 절대 숙친왕을 이미 화나게 했기 때문은 아니고.


오직 상관을 보위하기 위한 충정으로 궂은 일을 도맡아 하는 것 뿐이다.


안 그래도 저기 재고 쌓인거 다 처리해야돼.


나를 팔아 면피용 기사를 챙긴 바실레프스키는 반색하며 기꺼이 자기 이름을 팔도록 허락해주었고.


나는 곧장 새아버지 바실레프스키의 이름을 대고 결연히 경친왕 애신각라 혁광을 찾았다.


아주 귀한 선물을 들고.


바로 건륭제의 시였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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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전야 +13 24.09.14 4,625 300 12쪽
20 반응 +13 24.09.13 4,469 297 11쪽
19 이륙 +37 24.09.12 4,960 340 14쪽
18 이륙 준비 +17 24.09.11 4,811 269 12쪽
17 발전 +14 24.09.10 4,975 294 12쪽
16 착수 +15 24.09.09 5,141 308 12쪽
15 내기 +18 24.09.08 5,144 282 12쪽
14 파티 +12 24.09.08 5,578 289 14쪽
13 황족 +21 24.09.07 5,733 311 13쪽
12 귀환 +19 24.09.06 5,668 344 12쪽
» 제안 +27 24.09.05 5,810 325 10쪽
10 호의 +22 24.09.04 5,891 307 14쪽
9 경매 +25 24.09.03 5,923 322 13쪽
8 수확 +27 24.09.02 5,974 325 12쪽
7 시작 +13 24.09.01 6,071 304 11쪽
6 참전 +10 24.08.31 6,571 311 14쪽
5 귀신 +21 24.08.30 6,723 313 12쪽
4 입학 +30 24.08.29 6,946 353 12쪽
3 연줄 +20 24.08.28 7,182 357 11쪽
2 스타팅이 왜 이래 +24 24.08.27 8,129 392 12쪽
1 프롤로그 +41 24.08.26 9,244 383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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