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대
쿠로파트킨이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알렉산드르 대공은 극동에의 강경한 개입을 주장하던 베조브라조프 파벌에 속해있다.
반면 쿠로파트킨은 지금은 실각한 세르게이 비테 전 재무장관과 함께 일본과의 마찰을 반대하던 쪽.
그는 강경파인 베조브라조프 파벌이 압록강 채벌권을 대한제국에서 뜯어간 것이 전쟁의 원인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정확한 스탠스는 이러했다.
“제국에 있어 가장 바람직한 상황은 러시아의 보호 아래 한국이 독립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한국 문제를 민감하게 여기고 있으므로, 굳이 러시아가 한국에 개입하지 않는다면 일본은 전쟁을 도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베조브라조프가 연관된 목재 회사는 압록강 목재 개발을 목적으로 용암포 조차권을 획득하였고, 이는 일본의 심기를 거대하게 거슬러 버렸다.
러일전쟁의 원인이 오직 그 하나 뿐이겠냐만은, 줄곧 전쟁을 회피하려던 입장이면서도 일본과의 전쟁 수행을 총괄하게 된 쿠로파트킨으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전쟁의 원흉 베조브라조프의 라인인 알렉산드르 대공이!
저런 장난감을 띄워보겠다고 인력도 물자도 밀린 상황에서 비행기를 실어보내라고 명령한 것이다!
러시아의 자랑인 비행기를 전장에서 사용해보라는 차르의 명령서까지 들이미니 거부할 수도 없는 노릇.
그렇다고 여기 있지도 않은 황족에게 항의를 할 수도 없었던 판이니 자연히 그 화살은 비행기의 개발자로 알려진 루슬란에게로 모두 돌아갔다.
격노라기보다는 알렉산드르 대공과 관계 있어보이는 상대에 대한 약간의 짜증이었지만.
예컨대 소 뒷걸음치다가 쥐 잡은 셈이었다.
* * *
러시아 제국의 항공 책임자가 된 알렉산드르 대공을 쿡쿡 찔러서 써먹어보자고 한건 나였지만, 그게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은 몰랐다.
문제는 거기에 연관된 나 역시 우리 대선배의 눈 밖에 나버렸다는거지.
‘침착하자. 물증 따위가 있을 리가 없어. 이건 어디까지나 심증 뿐이다.’
쿠로파트킨이 먼저 알렉산드르 대공을 추궁했으면 모르겠지만, 전쟁 준비로 눈코뜰 새 없이 바쁜 그가 그런 짓을 하고 앉았을 리가 없다.
알렉산드르 대공 또한 그걸 외부에 떠들고 다닐리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정찰에는 확실한 쓸모가 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정찰을 맡은 기병이 진출하기 어려운 곳을 둘러볼 수도 있고, 적군은 비행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심리적인 압박이 느낄 수밖에 없겠지요.”
나는 끝까지 잡아떼면서도 그래도 은근슬쩍 비행기의 유용성을 강조했다.
설령 지금의 전장에서 비행기가 자신의 쓸모를 증명한다고 해도, 총사령관인 쿠로파트킨이 부정적으로 보고하거나 아예 쓰지 않겠다고 결정해버리면 골 때리는 일이 될테니.
그러나 돌아온 반응은 싸늘했다.
“나를 가르치려 드는건가?”
아 예. 그렇게 나오시는군요.
나는 냉큼 엎드렸다.
“아닙니다. 저는 비행기의 개발자로서 그 가치를 확신하고 있지만, 감히 각하의 지휘에 관여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에라, 모르겠다.
비행기는 러시아의 자랑이고, 시범적으로 써먹어보라는 차르의 명령도 있었으니 완전히 무시할 순 없겠지.
- 그거야 모르지. 전쟁에 출진한 장군은 임금의 명도 듣지 않는다는 말도 있으니.
원래 그 말은 장수의 현장판단을 존중한다는 뜻 아니었던가.
역사상으로도 많은 장수들이 전장의 형세를 살펴 지구전을 펼치다가 군주의 의심을 사 숙청당하곤 했다.
그들에 비하면 쿠로파트킨은 운이 좋은 편. 열심히 일본군과의 싸움을 회피하면서 한타를 위해 전력을 차곡차곡 모으긴 했으니까.
그리고 끝끝내 승리를 쟁취해낸 다른 명장들과 달리 개발리고 군인 인생에 오점을 남기게 되지.
그러니까 닥치고 내 말 듣는게 낫지 않을까?
- 소위가 대장한테 할 수 있는 말은 아니군.
그러니까 지금 참고 있는거잖아.
어쨌든 본대에 남아있어봤자 그런 영 좋지 않은 꼴만 볼게 뻔하다.
기왕 생긴 쿠로파트킨의 의심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원래 계획대로 하는게 낫겠군.
“각하, 저는 순수한 애국심으로 자원 참전한 생도일 뿐입니다. 보직 역시 항공에 관련된 곳보다는 일본군과 직접 맞서 싸울 수 있는 곳을 원합니다.”
내가 필사적으로 알렉산드르 대공과의 연관성을 부정하자 쿠로파트킨의 표정이 살짝 누그러졌다.
“그래? 희망하는 곳이라도 있나?”
“저는 우수리 지역에 대해 잘 압니다. 그곳의 연대로 배속시켜 주십시오.”
쿠로파트킨은 나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자네 고향이 프리모리예라고 했지?”
“예, 그렇습니다. 각하.”
한참 동안 물끄러미 나를 응시하던 쿠로파트킨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알겠네, 고민해보지.”
그리고 얼마 후.
우리 셋은 쿠로파트킨의 부관을 통해서 결정사항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요안 콘스탄티노비치 로마노프. 참모부로.”
- 뭐, 이건 당연한 일이지.
“그리고 자네들 둘은······.”
뚱뚱한 부관이 수염을 긁으면서 말했다.
“우수리 카자크 기병 연대로 가도록.”
됐다.
* * *
“이건 음모야! 우리 셋이 같이 자원했는데 이 성전에서 나만 쏙 빠진다고?”
“참모부의 일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선배님.”
가서 할 일은 별로 없겠지만.
요안은 콧김까지 씩씩 뿜으면서 분개했지만, 페테르부르크의 황궁이라면 모르되 군중에서는 그의 신분은 그저 소위에 불과한 터.
쏘가리 주제에 상부의 배치에 항의하는 것이 말이 되는가.
‘굉장히 귀한 비단 쏘가리긴 하지만.’
그러니까 상부도 참모부에 고이 모셔놓고 관상용으로 쓰려는 것 아닐까.
내 입장에서도 같이 출진하게 되면 황족을 경호하는데 온 신경을 쏟아야할텐데, 차라리 요안은 그쪽에 떨궈놓고 오는게 편하다.
아들을 잃은 콘스탄틴 대공이 어떻게 날뛸지 모르지 않나.
거기다가 사실상 나의 영향으로 인해 참전한 사람이나 다름없는데 죽으면 뒷맛이 영 찝찝할 것 같다.
그의 역할은 차르에게 우리 혈서를 던져넣고 계급 올려주는데서 끝났으니까.
이제 안전한 후방에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보호받고 있도록.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요안이 주먹을 불끈 쥐면서 소리쳤다.
“걱정 하지 마라.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너희가 있는 곳으로 갈게!”
아냐. 오지마.
우리는 요안이 탈주 의사를 더 굳히기 전에 황급히 자대인 우수리 카자크 기병연대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페테르부르크에서 귀향할 때마다 느끼는거지만, 아직 시베리아 횡단 철도가 완공되지 않은 이 시기에는 자대까지 가는 것조차 일이었다.
이르쿠츠크까지 열차로 2주 만에 도착. 이르쿠츠에서 다른 부대 군용열차로 갈아타고, 그들과 함께 말을 타고 바이칼 호수를 건넜다.
철도가 아직 완공되지 않은 탓에 겨울에는 얼음 위로 움직이고 여름에는 선박으로 호수를 건넌다고 하는데, 어째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젠장, 얼음 이거 튼튼한거 맞냐?”
“발 밑 조심해! 얼음이 녹는 철에는 까딱하다가 죽을수도 있다고!”
우리가 극동으로 향했을 때는 아직 1904년 초.
바이칼 호수의 위도상 아직 얼음이 녹을 시기는 아니었지만, 불안한건 어쩔 수 없었다.
우리는 바이칼 호수를 건넌 뒤 하얼빈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요양으로 가는 군용열차로 갈아탔다.
곧 도착한 우리가 본부에 신고하기 위해 찾아가니, 지휘관인 표트르 알렉산드로비치 도나우로프 대령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북경의 영웅이 우리 부대에 배치받았다는 이야기는 들었네만······.”
소위라고는 하지만 군사학교는 고사하고 생도군단도 채 마치지 않고 배속된 열 다섯 살짜리 소위들이다.
위에서 오더가 내려왔으니 받긴 하는데, 과연 험악한 카자크들을 내가 다룰 수 있을지 의심하는 것이리라.
“그 전공의 반만 사실이라도 상관없겠지만, 믿고 있겠네.”
도나우로프 대령의 말은 페테르부르크에서 흘러나와 내 고향인 연해주까지 퍼진 소문을 말하는 것이었다.
북경에서 쓰러진 바실레프스키를 대신해 부대를 이끌고 성벽을 반나절이나 지켰다느니 하는 헛소문.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본부에서 안내를 받아 곧장 소대로 향했다.
폴라코프 바흐미스트르라는 그 부사관이 가는 도중 입을 열었다.
“연대장님의 걱정도 일리는 있습니다. 카자크는 자존심이 강한 민족입니다. 웬만해서는 아마 소위님들을 쉽게 따르려고 하지는 않을겁니다. 게다가 처지가 처지인지라 불만도 많은 상황이구요.”
나는 눈썹을 들어올렸다.
고작해야 1개 소대에 불과하지만, 부대 장악은 그 어느 것보다 중요한 요소다.
나이 어린 소위를 쉽게 따르지는 않을거라 생각은 했지만, 어째 그보다는 더 중요한 이유가 있어보인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보시면 알게 될겁니다. 일단 생도 출신 자원병들부터 만나보시겠습니까? 이들은 아직 소위님 또래니 그나마 말이 통할겁니다.”
“우리 또래도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아무래도 하바롭스크 생도군단처럼 인근 생도군단을 다니는 학생들 가운데는 그 아버지가 카자크 부대에 복무하는 경우가 많으니, 이 참에 자원한 친구들이 제법 있습니다.”
카자크들은 21세가 되어야 소집되어 복무한다고 하는데, 기왕 장교가 되기로 마음먹은 김에 출진하여 전장의 영광을 얻고 싶은 친구들이 많은 모양이었다.
의화단의 난 때도 그랬지.
아무래도 일반병들보다야 그들의 의욕이 넘칠테니, 생도 출신 자원병들부터 만나보라는건 나쁘지 않은 발상이었다.
“어이, 다 일어나! 새 소대장님 오셨다!”
“예, 상사님!”
덩치는 산만 하면서도 얼굴은 아직 앳되어보이는-그래봤자 나보단 노안이지만-생도 하나가 잽싸게 튀어나왔다.
그런데 저 얼굴.
익숙하다. 아니, 이 녀석 뿐만 아니라 그 옆에 서있는 생도 출신 자원병들도.
“이고르?”
나는 눈을 좁히면서 물었다.
“소대장님이 어떻게 제 이름을······ 잠깐, 킴?”
상대 역시 내 얼굴을 알아봤는지 눈을 크게 떴다.
내가 옛날 기병부대 앞에서 부츠 닦고 있을 때 나를 괴롭히려고 몰려왔다가 역으로 참교육당했던 놈들 아닌가.
“루슬란, 왜 그래? 아는 녀석들이야?”
“그래. 잘 알지. 동네 친구들인걸.”
나는 만면에 웃음을 띄우면서 녀석들을 향해 반갑게 물었다.
“자원입대했다는 생도들이 너희였구나?”
그 모습이 어떻게 비쳤는지, 카자크 놈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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