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머리 러시아군 대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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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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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5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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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MMY

연합군의 야습으로 벌어진 소란에 잠든 북경도 슬슬 깨어나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우리가 장악한 동쪽, 약 320미터의 성벽으로도 의화단 병력들이 몰려왔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러시아 본대가 진입할 때까지 성벽을 지켜야하는 우리 임무는 굉장히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았다.


우리의 적은 의화단.


이놈들은 군대가 아니다.

그냥 양놈들 죽이겠다는 의지 하나만으로 모여든 민간인 집단에 불과하지.


그러니까 보초 주제에 60명 전체가 쿨쿨 곯아떨어진 것 아니겠는가.


- 타타탕!


“봐주지 말고 쏴버려!”


“으아악, 도, 도망쳐라!”


의기가 충천한 채 성벽 아래로 쳐들어온 의화단은 몰려왔다 물러나기를 반복하기가 몇 차례.


다른 나라 군대들도 속속들이 성벽을 점령하고 있었고, 해가 밝아오면서 본대도 도착하기 시작했으니 이곳에서의 전투는 슬슬 끝나가고 있었다.


내성까지 뚫리면 어디부터 털어볼까? 자금성? 이화원? 원명원?


내가 직접 터는건 아니지만, 러시아군을 데려가서 핑이라도 찍어주는건 간단하지.


그때 바실레프스키를 모시고 성벽을 순찰하던 내 눈에 무언가가 띄었다.


성벽 아래 죽어 나자빠진줄 알았던 의화단 한놈이 꿈틀꿈틀거리고 있었다.


불길한 기운이 내 등허리를 엄습한 가운데, 나는 본능적으로 바실레프스키에게로 달려들었다.


‘여기서 바실레프스키가 죽으면 좆된다!’


내가 한국인 노동자들을 통솔하고, 러시아군에 말빨이 먹히는데는 바실레프스키의 당번병이라는 내 신분이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만약 그가 죽거나 임무를 수행할 수 없을만큼 다친다면 말짱 황인 것이다!


그렇게 뒤늦게 따라온 계산이 내가 틀리지 않았음을 가르쳐주었고.


- 탕!


당황한 바실레프스키의 얼굴.


박춘명의 비명.


귓불에 느껴지는 뜨거운 기운과 함께 나는 정신을 잃었다.



* * *



바실레프스키는 당황해 급히 쓰러진 소년을 안아들었다.


그는 러시아군의 대응 사격에 의해 벌집이 된 의화단원을 보고 뒤늦게 상황을 파악했다.


“이 아이가 나를 살렸구나!”


바실레프스키의 감정은 이 순간 감동과 놀라움으로 가득 찼다.


‘정말 대단한 녀석이로군!’


아직 자라나는 생도 신분이면서도 애국심 하나로 이 위험한 전장에 나아온 것도 모자라, 그 누구보다 성실하고 정직하게 명령을 이행했던 아이였다.


거기다 이제는 자신의 목숨을 살려주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용맹한 병사는 살려야한다!”


다행히 피는 뚝뚝 흐르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 같아보였다.


달려온 군의관 또한 긴장이 풀리면서 기절한 것 뿐이니 편한 곳을 찾아 쉬게 해주라는 진단을 내렸다.


그러나 전투가 계속되고 마침 내성까지 돌파된 상황에서 그를 후방으로 돌릴 여유는 많지 않았다.


성문으로 연합군이 쏟아져 들어가는 가운데, 바실레프스키는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공사관 구원은 본대에 맡기고 우리는 일단 만주인 지구(내성)에서 거점으로 삼을만한 안전한 곳을 확보한다!”


그의 판단은 제법 합리적인 것이었다.


제대로 된 연계도 없이 중구난방으로 쳐들어간 연합군은 북경에 끔찍한 소동과 혼란을 일으켰지만, 그 여파는 고스란히 연합군에게도 쏟아지고 있던 차.


이는 자신을 구한 하준을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어차피 북경 안에 거점을 확보하기는 해야했다.


“저기 요새화된 저택이 보입니다!”


러시아군이 돌파한 동문에서부터 진입해 자금성 일대로 진격하다보면, 어하교 동쪽의 현재 정의로 일대에 있는 한 왕부와 마주치게 된다.


당연하게도 바실레프스키나 그 병사들은 숙친왕부(肅親王府)라고 써진 그 현판을 읽지는 못했지만, 알았더라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그 주인인 숙친왕마저도 지금쯤 혼란을 느낀 채 광서제와 서태후를 모시고 발바닥에 땀띠 나게 도망가고 있는 마당.


북경이 연합군의 손에 의해 함락당한 이상 이 도시의 모든 것은 그들의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저택이라면 충분히 지휘와 부상병들의 간호, 모두를 병행할 수 있겠군.”


바실레프스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굳이 언급하진 않았지만, 제법 으리으리한 저택이었기에 ‘부수입’을 챙길 수 있어보인다는 점도 덤이었다.


“문이 닫혀 있습니다!”


왕부는 대청의 친왕이 머무는 저택.


비록 숙친왕은 떠났지만 그 주인을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바칠 하인과 식객들이 문을 굳게 걸어잠그고 항거할 태세였다.


- 퍼퍼펑!


러시아군 병사들이 수류탄을 던지자 왕부의 육중한 문은 그대로 날아가버렸다.


덩치 좋은 카자크들이 총검이 장착된 소총을 휘두르며 진입하자 왕부는 극도의 혼란에 빠졌다.


목숨이라도 바칠 각오는 진짜 목숨의 위협 앞에서는 무력했다.


그렇게 숙친왕부는 그대로 진입한 러시아군에 의해 점령당했다.


다만 전지적인 시선에서는 이를 폭거(暴擧)라고 보기에는 약간 무리가 있었다.


이들의 목적은 왕부의 점령이지 파괴가 아니었기에 재수없이 개머리판에 맞아 뇌진탕에 걸린 몇몇 이들을 빼면 그 피해는 크지 않았다(어디까지 인명 피해만 따졌을 때다).


애초에 그렇게까지 파괴와 살육을 자행하면 지휘부로 쓰겠다는 당초의 계획조차 어그러진다.


하준과 박춘명을 포함해서 아직 이 세상의 누구도 모르는 사실이지만, 그리하여 연합군의 북경 점거 당시 홀라당 불타버렸어야할 숙친왕부는 간신히 그 참변을 면할 수 있었고.


“격격(格格), 저 흉포한 아라사 놈들의 눈에 띄어서는 아니됩니다!”


“어서 몸을 숨기십시오! 왕부는 넓으니 저희가 보호하겠습니다!”


왕부에 아직 남아있던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 * *



‘낯선 천장이다.’


- 일어났냐?


가장 먼저 보게 되는게 시커먼 아저씨 면상이라니. 제기랄.


생애 두 번째 기절에서 깨어난 나는 머리를 부여잡고 물었다.


“여기가 어디야? 내가 얼마나 잠들어 있었지?”


“반나절은 꼬박 정신을 잃고 있었다.”


박춘명에게 물어본 것이었지만, 엉뚱한 목소리가 튀어나와 대답했다.


내 눈 앞에는 바실레프스키 소장이 담배를 문 채 있었다.


“반나절이요?”


“그래. 상관을 위해 목숨까지 건 네 행동은 생도군단에도 귀감이 될 것이다. 내가 무슨 일이 있더라도 페테르부르크에 연통을 취해 훈장을······.”


하지만 훈장이고 뭐고 나는 그보다 앞의 말이 더 신경쓰였다.


반나절이라니.


‘시간을 그렇게나 낭비했다고?’


“인부들은 북경 안으로 들어왔습니까?”


“그래. 이제 막 도착했다.”


“그렇다면 조금도 지체할 수 없습니다. 즉각 장군님의 당번병으로 복귀하겠습니다.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일어나자마자 업무로 복귀해야겠다니! 너는 정말 훌륭한 군인이다, 루슬란!”


바실레프스키가 뜬금없이 길게 감탄을 했지만, 내 귀에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연합군은 북경에 입성하면서 병사들에 대한 보상으로 3일간의 자유시간을 주었다.


물론 3일 지났다고 이 야만인들이 얌전히 약탈과 살인 강간을 멈출리는 없고, 북경에 주둔하는 한 이 돈잔치는 계속되리라.


하지만 내 계획의 핵심은 어디까지나 ‘직접’ 터는게 아니라 터는 러시아군의 일손을 거들어주고 수수료를 빼먹는거다.


내 예상처럼 북경 각지의 왕부, 관아, 부호의 집, 거상의 창고를 털어대던 러시아군은 한 손이 모자랐다.


여기서 본대와 함께 도착한 한국인 노동자들이 빛을 발했다.


왕부에 모인 인부들 대부분은 내 권위를 인정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아직 순박한 촌놈 기색이 있어서인지 처음에는 머뭇거렸다.


“이거······ 순 강도질 아니냐?”


전직 훈장 정씨가 쭈뼛쭈뼛 손을 들고서 물었다.


원래 우리 마을에서 서당하다가 망해서 최재형의 군수품 운수 사업 인부로 지원한 양반이었다.


“이제까지 하던대로 러시아군 짐을 날라주는 일일 뿐입니다. 뭐가 문제입니까?”


강도질은 러시아군이 하는거고.


우리는 합법 사업이라고.


내 말에도 정씨는 미묘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유자로서 이런 일을 한다는게 조금······.”


아이고 지랄한다 지랄해.

야 이 이기적인 양반아, 당신 자식도 당신처럼 살게 놔둘래?


당연한 말이지만 그가 운영하던 서당은 망했다.


한학 따위는 러시아에서 별로 쓸모가 없었고, 그나마 유소년들에게 기초 교육을 시킨다는 의의도 근대적 교육을 주창하는 최재형과 몇몇 사람들이 아예 신식 학교를 세워버리면서 빛 바랜지 오래.


내가 연해주를 떠나기 전만 해도 그나마 학생 몇은 있었는데, 그나마도 신식 학교에 죄다 빼앗겨버린 모양.


그러니 훈장 체면에 이 먼 북경까지 노동자 1로 온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나는 착한 어린이므로 나이든 어른에게 그렇게 꼽을 주는 대신 다른 방법으로 접근하기로 마음먹었다.


“이건 강도질이 아닙니다.”


“?”


나는 주먹을 불끈 움켜쥐면서 외쳤다.


“아저씨께서는 훈장이셨으니 잘 알겠지요. 정묘년, 병자년에 우리 조선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수모를 겪었습니까?”


고작 북경이 좀 불타고 돈 뜯기는 것 정도로 호들갑은.


그에 반해 인조대왕의 항복. 그로부터 3백년, 우리 조선 백성들이 감내해야 했던 고통은······!


“이것은 한번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고, 우리 조상이 청에 빼앗긴 재물을 되찾아온는 일입니다. 어찌 이것을 단순한 약탈으로 치부할 수가 있겠습니까?”


“······!”


나의 완벽한 논리에 설득당한건지, 아니면 그냥 돈 벌고 싶은데 마침 명분이 주어졌기 때문인지.


한국인 노동자들의 눈에는 결연한 감정이 들어찼다.


‘우리가 안턴다고 저 사람들이 안털릴 것 같아?’


어차피 내가 못털어가면 뒤에 쳐들어온 영국군이나 일본군이 털어갈 재물이다.


러시아 병사들 또한 마찬가지로 생각했기에, 그들 역시 성실하고 정직한 하준 익스프레스 직원들을 반겼다.


운송 수수료는 정확히 약탈한 재물의 절반.


매우 헐한 값이다.


- 반이나 먹는다고? 그게 가능해?


자기 돈도 아닌데 뭐. 놔두면 못가져갈 재물, 반이라도 챙기는게 어디야?


러시아군도 마찬가지라 생각했는지, 끝도 없는 보물에 마음이 너그러워진 것인지 태클 거는 이는 별로 보이지 않았다.


한국인 노동자들이야 돈 더 주는 치들 짐이나 날라주면 그만이요, 흥정할 시간에 남의 집 터는게 더 득이 되니까.


내 수수료는 그 중 30%. 굉장히 저렴하지?


- 네가 대체 뭘했다고?


거 참.


내가 아니었으면 저 사람들이 대체 어디 가서 이런 일거리를 물어오겠어?


게다가 나는 장부 작성까지 도맡고 있다.


병사와 인부들이 넓은 숙친왕부 건물과 마당을 그득그득 채울 정도로 재물을 날라오고 있으니, 당연히 뭐가 누구건지도 기록을 해야하지 않겠는가.


사실 직접적인 노동보다 이런 작업이 더 중요하다.


인부들 입장에서도 똥 떼먹히거나 약속한 수수료 못받는 것보다는 백배 낫지.


당연한 말이지만 이걸 내가 다 먹을 수는 없고, 바실레프스키와 왕부에 주둔한 고위 장교들을 비롯한 이들에게도 열심히 뿌리는 중이었다.


만주를 탐내고 있는 페테르부르크에서는 청을 필요 이상 자극하는 것을 금했지만, 동서고금 막론하고 그런 명령이 지켜지는 곳은 없다.


그러나 장교들은 다르다.


군사들에게 약탈하는 것을 허용하는건 사기 진작이라는 명분이라도 있지, 자신들이 직접 여기 나서면 적잖이 눈치가 보이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이 좋은 기회에 손가락만 쪽쪽 빨 생각은 없을 터.


내가 알아서 상납하는 재물은 그런 딜레마에서 바실레프스키와 장교단을 해방시켜줬던 것이다.


그들을 등에 업은 내가 눈을 부라리며 장부를 작성하고 있으니 러시아군 병사들도 감히 어거지쓸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렇게 끊임없이 왕부로 들어오는 금은보화와 예술품, 심지어 집기까지 체크하며 장부를 적어나가고 있을 때.


나는 어디에선가 시선을 느꼈다.


한번이 아니다.


내가 마당에 서서 장부를 적고 있을 때마다 느껴지던 시선.


“나와라.”


내 말에 웅크려있던 그림자가 멈칫하더니, 이내 쪼르르 튀어나왔다.


다음 순간, 나는 눈매를 좁힌 채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여자애······?”






---

바실레프스키는 북경 전투 당시 동쪽 성벽을 순찰하다가 총격을 당해 가슴에 관통상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생명에는 별 지장이 없었던 모양인지 죽진 않았습니다.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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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혈서 +21 24.09.15 4,494 300 12쪽
21 전야 +13 24.09.14 4,625 300 12쪽
20 반응 +13 24.09.13 4,469 297 11쪽
19 이륙 +37 24.09.12 4,962 340 14쪽
18 이륙 준비 +17 24.09.11 4,812 269 12쪽
17 발전 +14 24.09.10 4,975 294 12쪽
16 착수 +15 24.09.09 5,141 308 12쪽
15 내기 +18 24.09.08 5,145 282 12쪽
14 파티 +12 24.09.08 5,580 289 14쪽
13 황족 +21 24.09.07 5,734 311 13쪽
12 귀환 +19 24.09.06 5,668 344 12쪽
11 제안 +27 24.09.05 5,810 325 10쪽
10 호의 +22 24.09.04 5,892 307 14쪽
9 경매 +25 24.09.03 5,925 322 13쪽
» 수확 +27 24.09.02 5,976 325 12쪽
7 시작 +13 24.09.01 6,072 304 11쪽
6 참전 +10 24.08.31 6,571 311 14쪽
5 귀신 +21 24.08.30 6,724 313 12쪽
4 입학 +30 24.08.29 6,948 353 12쪽
3 연줄 +20 24.08.28 7,184 357 11쪽
2 스타팅이 왜 이래 +24 24.08.27 8,129 392 12쪽
1 프롤로그 +41 24.08.26 9,246 383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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