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머리 러시아군 대원수

무료웹소설 > 작가연재 > 대체역사, 판타지

새글

핏콩
작품등록일 :
2024.08.25 21:27
최근연재일 :
2024.09.18 20:00
연재수 :
25 회
조회수 :
139,773
추천수 :
7,782
글자수 :
134,052

작성
24.09.11 08:10
조회
4,810
추천
269
글자
12쪽

이륙 준비

DUMMY

엄밀히 말하자면, 이것은 루슬란 본인보다는 그가 일으킨 나비효과가 겹쳐져 일어난 일이었다.


이즈음 대두된 황화론은 극동 현지에서보다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호응을 얻고 있었다.


아직 제 코가 석자인 극동 입장과는 달리, 멀리 떨어진 페테르부르크에서는 ‘이제 슬슬 저놈들 안받아도 되지 않나?’ 같은 의견이 올라오고 있던 차.


극동에서 발포된 거주구 분리 법안도 그런 발상 아래 이루어진 것이었다.


다만 여기에서 원 역사와 차이가 있다면.


“조선인은 근면하고 러시아에 충성스럽습니다.”


“그들은 대개 품행이 바르고 성질이 온화하며 러시아인과 잘 화합합니다.”


“조선인의 성격은 온순해서 술을 마시기는 하지만 난폭하지는 않고, 강도 살인을 목적으로 위해를 가하는 일은 중국인에 비하여 거의 없습니다.”


“위생적으로도 조선인은 러시아인보다 청결합니다. 적어도 보건상의 이유로 분리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의화단의 난 당시 루슬란의 지휘 하에 러시아군에 합류했던 한국인 노동자들은 성실히 그들의 약탈품을 운송했고.


그 과정에서 든든히 뽀찌를 챙겨먹은 바실레프스키를 비롯해, 전쟁에 참전했던 러시아 장교들은 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그들의 노고를 칭찬했다.


루슬란이 받은 성 게오르기 십자훈장(군사 훈장 표장)도 영예로운 것이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병사용 훈장.


그러나 성 게오르기 훈장 4등급에 성 블라디미르 3등급까지 받기 위해 귀환한 전쟁영웅이 하는 말은 무게감이 달랐다.


“하지만 조선인들은 중국인처럼 노동자로 입국하는 것이 아니고, 대개는 전답을 개간하고 가옥을 지어서 토착 영주를 바라는데 더욱 위험한 것 아닌가?”


“그게 오히려 조선인들의 귀화 의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그들은 러시아에 적극적으로 동화되려 하고, 모든 소비도 러시아 영토에서 하고 있습니다.”


“조선인은 황색인종 중 성질이 가장 유약하고, 강자로 인식되면 곧 항복하는 기질이 있습니다.

그들은 또 그들이 접촉하는 일체의 문명을 모방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만일 정부가 조금이라도 힘을 기울인다면 그들은 쉽게 러시아화하여 충성하게 될 것입니다.”


“이미 중국 원정에 많은 조선인들이 기꺼이 비전투 노동력으로 참전하지 않았습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직접 참전해 조선인들을 관찰한 장교들의 보고다 보니, 아무리 꽉 막힌 페테르부르크의 관료들이라 해도 아예 귀를 닫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현실적인 문제도 존재했다.


극동의 황화를 막기 위해 동양인들의 유입을 억제하는건 좋은데, 그럼 극동 개척은 대체 누구한테 맡긴단 말인가?


“전부 내쫓을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황인들을 전부 내쫓으면 시베리아 철도는 누가 건설한단 말이오?”


지금 철도 건설의 많은 부분을 동양인 노동력이 담당하고 있는 상황이다.


일례로 우수리 철도를 건설할 때는 전체 노동자의 40%가 중국인과 조선인이었을 정도.


실질적으로 동양인을 배제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조선인과 중국인은 다르다’는 장교들의 말은 매력적으로 들렸다.


“그러니까 중국인들을 줄이는 대신 조선인들의 비중을 늘리자?”


“조선인은 러시아인보다는 못하지만 중국인보다는 25~30% 정도 높은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아마 더 많은 조선인 노동력을 투입한다면 철도 건설 역시 빠른 진척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까놓고 말해 믿을 수 없는 중국인 대신 덜 위협이 되는 조선인을 써먹어보자는 발상.


바로 그 러시아화되어 충성하는 조선인의 표본으로 훈장까지 받은 애국소년 루슬란 킴마저 있었으니, 중국인이 비운 자리에는 조선인들이 투입되기 시작했다.


연해주에 살고 있던 조선인들 역시 타지에 나가 한몫 잡은 이웃들을 보고 철도 건설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고.


물론 철도 건설이 짐 좀 날라주고 막대한 수수료를 챙길 수 있었던 북경 원정과 같은 수준의 노다지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대규모로 유입된 조선인들에게 막대한 고용을 발생시켰고.


철도 공사에 전념 중인 러시아의 철퇴 또한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 * *



“그럼 다행인거 아닙니까?”


“중국인들과의 관계가 악화되어봤자 좋을게 없다. 그들이나 우리나 모두 이 러시아에서는 소수자일 뿐이야. 헌데 이렇게 되면 서로를 보는 시선이 결코 곱지 않게 될거다.”


최재형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똑같이 탄압받는다면 모를까, 조선인은 무슨 수를 썼는지 러시아 정부의 저격에서 슬쩍 빠져나가버렸으니 말이다.


최재형은 이대로 정부의 손에 놀아나 극동에 사는 한국인과 중국인이 서로 으르렁거리며 싸우게 되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것이겠지.


하지만 일단은 조선인들이 살아남는게 더욱 중요하다.


‘중국인들과 엮이는건 지금은 리스크가 더 커.’


함께 똘똘 뭉쳐 동양인 인권을 주장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고, 황화론의 주된 타겟인 중국인들과 친하게 지내봤자 너희도 혹시 북경의 백성이냐는 소리만 들을 뿐.


러시아 정부의 칼 끝이 조선인들을 피해갔다면 그걸로 다행인 것이다.


일단은.


“그리고 이건 어디까지나 보류일 뿐이야. 우리는 계속 저들의······ ‘호의’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처지다.”


봐라, 춘명아.


이게 내가 러시아 제국의 위로 올라가야하는 이유다.


- 네 성격에 고통받는 동포들을 위해서······는 아닐거고.


아니.

사실 반 정도는 맞아.


내가 출세하지 않으면 언제든 페테르부르크의 콧바람 한번에 우리 동포들처럼 날려가버릴 처지란 말이지.


내가 출세한다면? 동포들이 비빌 언덕은 나 밖에 없게 되겠지.


나는 최재형의 착잡한 표정을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그럼 아저씨께서 페테르부르크까지 오신 이유는 그것 때문이로군요.”


“그래, 하준아. 너는 생도군단의 높으신 분과 친분이 있다고 했었지. 혹시 다리를 놓아줄 수 있겠느냐?”


의화단의 난이라는 고급 정보를 물어다줬으니 당연히 친분이 있으리라 생각하는게 정상.


사실 진짜 높으신 분(황족)이랑 같이 기도하긴 하는데, 그 형은 별로 도움 안될거야.


아버지가 힘이 있는거지 본인이 힘이 있는건 아니라서.


대신 고급 정보 하나를 드리지.


“아저씨. 우리 조선인들이 칼날을 비껴나간건 저번 중국 원정에서 충성심을 증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랬지.”


“잘 들으십시오. 이번에 한번 더 그런 기회가 찾아올겁니다. 2년 안에요.”


“······!”


최재형의 눈이 꿈틀거렸다.


그는 떨리는 입을 열어서 말했다.


“정말이냐? 이것도 그 생도군단의 높으신 분이 해주신 말씀이냐?”


“그렇습니다. 의화단의 난 때도 그랬듯이, 전쟁 수행에 협조할 준비를 해주십시오.”


사실 이럴 필요 없이 비행기만 완성되더라도 조선인들의 처지는 크게 나아지겠지.


하지만 그러면 내가 얻는게 없잖아.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조선인들도 내 출세를 위해서 전력투구를 해줘야하지 않을까?


이건 최재형한테도 나쁜 이야기가 아니다.


의화단의 난 때는 고작해야 만 수천 명에 불과한 파병 병력의 군납을 대는 것만으로도 한인 사업가들은 돈을 갈퀴로 긁어모았다.


헌데 그 전쟁이 만약······ 수십만과 수십만이 충돌하는 대전쟁이라면?


예상치 못한 전쟁에 러시아가 부랴부랴 병력과 물자를 긁어모으는데 급급해진다면?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는 마시죠.”


곧 금전적으로든 다른 방식으로든, 조선인들이 지분을 주장할 기회가 도래할테니.


그때까지만 온순한 피지배 민족인 척하자고.



* * *



페테르부르크의 기침 한번에 극동에서 무슨 난리가 나든 상관없이 제1생도군단은 평화롭기 그지 없었다.


사관학교가 아니라 요양원처럼 느껴질 정도.


- 얘네들 전체적으로 머릿속이 꽃밭인거 같긴 해.


박춘명이 투덜거렸다.


- 정치에도 관심없고, 시사에도 관심없고, 산책하고 자전거 타고 아가씨들이랑 테니스 치는데만 관심 있잖아.


그거야 이 학교에는 딱히 관련된 교육도 없으니까 당연한 일이다. 제1생도군단에서 정치학 따위를 가르칠 것 같아?


군인이 괜히 정치에 관심 가져봤자 애먼 생각이나 품는 법이지.


그런 골치 아픈 문제는 몇몇 특별한 사람들이나 관심을 두기 마련이다.


너나 나처럼.


그래도 이런 놈들이 아니었으면 나도 진작에 흑화해버렸을지도 모를 일.


1902년 말에는 아비시니아(에티오피아)에서 온 두 명의 흑인이 입학했고, 전례 없는 일도 아니었기에 다들 그러려니했다.


1903년. 우리는 5학년으로 진급.


그해 11월, 네바 강이 범람하여 페테르부르크에 큰 홍수가 났다.


당연히 페테르부르크에 위치한 생도군단도 홍수 피해를 입었고, 3일 동안이나 잠겨버렸다.


마치 베네치아를 연상케 하는 광경을 보고도 생도들은 수업 빼먹을 생각에 환호하고 봤다.


지하실이 물에 잠겨서 증기 난방이 작동을 멈췄기 때문에, 우리는 이불을 둘둘 만 채로 난방이 복구되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비가 쏟아져 내리는 창문 바깥을 보고 있자니, 박춘명이 불쑥 말했다.


- 미리 페테르부르크로 비행기를 옮겨 오지 않길 잘했네.


아아, 그래.

하마터면 다 된 밥에 코 빠뜨릴뻔했지.


주코프스키는 드디어 역사에 그 이름을 남길 킴-모자이스키 비행기의 제작이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는 편지를 보내왔다.


이제 시험 비행만 남아있는 수준이었는데, 과연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둘 중 어느 곳에서 비행기를 띄울 것이냐가 문제였다.


주코프스키는 운송이나 기타 여러 가지 어려움을 들며 자기 본진인 모스크바에서 시험 비행을 하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나는 비행기를 페테르부르크에서 재조립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곳으로 옮겨올 것을 명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상징성도 있고, 모스크바에서 비행을 할 경우 주코프스키의 업적이 더 돋보일 것 같다는 이유도 있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더 좋은 기회가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관객도 적었던 라이트 형제의 최초 비행과 달리 모든 사람의 눈 앞에서 비행기를 날릴 기회가.


심지어 여기에는 이를 세계에 전해줄 특별 손님들까지 존재했다.


“자, 이번에 근위생도군단(Пажеский корпус, 페이지 군단) 100주년을 기념하여 독일 황제가 자국의 생도군단을 대표로 파견하였다!

우리 제1생도군단도 특별 방문할 예정이라 하니 모두 차질 없이 준비하도록!”


나는 독일 생도들 앞에서 비행기를 날릴 생각이었다.







---

1.

작중 나온 조선인에 대한 평가는 실제로 러시아 정부의 황색인종문제조사회가 1910년 파견한 아무르 답사대 책임자 그라베의 평을 따온 것입니다.

이들은 중국인보다 조선인에게 우호적 평가를 남겼지만, 보시다시피 이 또한 인종적 편견에 기반한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이 보고를 통해 조선인 추방에 제동이 걸리긴 했지만요.

작중에서는 그 역할을 러시아군이 좀 더 앞서 수행했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2.

러시아 제국의 장교 훈련에서는 정치나 시사 문제에 대한 교육이 명백히 부재했다는 점이 지적됩니다.

키예프 생도군단 출신인 데니킨은 “학업 프로그램이나 교사들, 또는 당국은 학생들의 정신적 시야를 넓히거나 그들의 깊은 질문에 답하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다. 당시 러시아의 삶은 끓어오르고 있었지만, 이른바 ‘저주받은 질문들’, 모든 ‘정치’는 우리를 지나쳐 갔다”고 회고했습니다.

생도들도 정치적으로 무관심했던 것 같지만, 보르쇼프의 회고로는 제1생도군단에서는 1905년 혁명 당시 나름 교사에게 정치에 관한 질문을 쏟아부었다고 하니, 이것도 시기별로 군단별로 달랐던 것 같습니다.


3.

1905년부터 제1생도군단 교관이었던 도너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습니다.

“말해야할 것은 생도들과 교관들 모두 그곳(제1생도군단)에서 마치 요양원에 있는 것처럼 느꼈다는 점이다. 음식은 매우 맛있고 배부르게 제공되었다...나머지 시간에 당직자를 제외한 생도들은 자유 시간을 가졌다. 수영하러 가고, 산책하고, 자전거를 타고, 이웃 아가씨들과 크로켓과 테니스를 했다.”

이로 미루어보아 혁명 전까진 줄곧 평화로운 분위기가 유지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7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검은머리 러시아군 대원수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연재시간 재변경 안내(오전 8시 10분->오후 8시) +1 24.09.16 179 0 -
공지 이전 제목 "조선인이 러시아 다먹음"입니다. +9 24.09.12 1,170 0 -
25 자대 NEW +14 11시간 전 2,001 195 11쪽
24 들통 +14 24.09.17 3,523 258 11쪽
23 치욕의 날 +28 24.09.16 4,150 303 11쪽
22 혈서 +21 24.09.15 4,490 300 12쪽
21 전야 +13 24.09.14 4,624 300 12쪽
20 반응 +13 24.09.13 4,468 297 11쪽
19 이륙 +37 24.09.12 4,960 340 14쪽
» 이륙 준비 +17 24.09.11 4,811 269 12쪽
17 발전 +14 24.09.10 4,975 294 12쪽
16 착수 +15 24.09.09 5,140 308 12쪽
15 내기 +18 24.09.08 5,143 282 12쪽
14 파티 +12 24.09.08 5,578 289 14쪽
13 황족 +21 24.09.07 5,733 311 13쪽
12 귀환 +19 24.09.06 5,667 344 12쪽
11 제안 +27 24.09.05 5,808 325 10쪽
10 호의 +22 24.09.04 5,891 307 14쪽
9 경매 +25 24.09.03 5,923 322 13쪽
8 수확 +27 24.09.02 5,973 325 12쪽
7 시작 +13 24.09.01 6,071 304 11쪽
6 참전 +10 24.08.31 6,571 311 14쪽
5 귀신 +21 24.08.30 6,723 313 12쪽
4 입학 +30 24.08.29 6,945 353 12쪽
3 연줄 +20 24.08.28 7,181 357 11쪽
2 스타팅이 왜 이래 +24 24.08.27 8,127 392 12쪽
1 프롤로그 +41 24.08.26 9,242 383 7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