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머리 러시아군 대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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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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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5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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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팅이 왜 이래

DUMMY

김하준.


1889년 러시아 극동에서 태어난 이 소년의 인생은 스타팅부터 혹독했다.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조선으로 다시 날라버렸고, 어머니는 그가 낫자마자 마치 교대하듯이 시름시름 앓다가 사망.


고작 나이 다섯 살에 고아가 된 이 아이에게는 조금 특별한 비밀이 있었다.


하준에겐 어머니가 장군신이라고 불렀던, 알 수 없는 남자의 기억이 존재했다.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러시아 지역학 전공, 군생활, 그리고 죽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준은 자신이 미쳤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니, 어머니가 생전 이에 관해 남긴 말이 있었던 것이 그 이유 중 하나요.


둘째는 이정도 신비체험을 겪었으면 인정하는게 오히려 도리이지 않겠는가.


미래를 알게 된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하준은 머리를 감싸쥐었다.



* * *



좆됐네.


그날로부터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장막을 들추고 미래를 엿보았을 때의 충격은 쉽사리 가시지가 않는다.


‘조선이 망한다고?’


이건 뭐 그렇다치고.


‘러시아도 망한다고?’


그 뒤엔 일본군이 총 들고 와서 우리 동네를 엎어버리고, 그 다음엔 빨갱이들이 죄다 중앙아시아로 끌고 간다고?


여기서 가만히 농사 지으며 슬로우 라이프 즐기고 살다간 스탈린이 죄다 잡아다가 중앙아시아로 처넣는 미래나 기다린단 소리가 아닌가.


아니, 그 전에 재수 없으면 일본군이 벌인 학살 따위에 휘말려서 세상을 하직할 수도 있다.


1년 전.


러일전쟁, 적백내전, 4월 참변, 스탈린식 강제 이주를 거치며 헬게이트가 열리는 미래를 알게 된 나는 최대한 빨리 이곳을 탈출해야한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당연하게도 그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도 그럴게, 돈도 없고 부모도 없는 고아가 무슨 수로 혼자 연해주를 탈출한단 말인가?


아니 뭐, 탈출할 수야 있겠지만 그 뒤에는 무슨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줄 알고.


반면에 아직 이곳 연해주에는 내가 비빌 언덕이 남아있었다.


“다녀오겠습니다아.”


“이 녀석아, 굳이 너까지 일하러 가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 않으냐.”


조선에 있을 때보다야 살림이 펴나가고 있던 조선인들이지만, 그래도 입 하나가 늘어나는 것을 반길 사람은 없다.


인정이 야박할 정도로 없는 것은 아니었으되, 그렇다고 흔쾌히 아예 군식구 떠맡겠다고 나설 정도로 다들 넉넉한 형편은 아니라는 뜻.


나는 게다가 무당 아들이었으니 괜히 받았다가는 꿈자리가 뒤숭숭해지기가 십상.


그러다보니, 나를 거둔 사람은 역설적이게도 그 누구보다 이 마을에서 ‘개화’와 ‘미신 타파’를 외치던 이였다.


최재형(崔在亨).


이곳 안치헤 마을의 읍장이자, 이 동네 한인들 중 유일하게 내 기억 속에 그 이름 석자가 박혀있는 사람.


미국에 유일한이 있다면 러시아엔 최재형이 있다고 할 정도의 애국 실업가···지만,


안타깝게도 아직까지는 그정도의 사업가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래도 선원 생활을 하면서 적잖이 모은 돈도 있고, 러시아 제국에서 훈장까지 받았으니 한인들 가운데서 가장 성공한 사람 중 하나라고 봐야겠지.


그래서 그런지, 최재형은 내가 구두통을 들고 나서는 모습을 볼 때마다 혀를 끌끌 찼다.


“마실 나갈 겸 가는거니까 너무 걱정하진 마세요.”


“이 녀석아, 누가 마실을 10리 밖 군부대로 가느냐!”


아저씨는 공짜로 얹혀 살지 않으려는 아이의 몸부림으로 보이는 모양인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지만.


내 입장에선 딱히 그런건 아니란 말이지.


원래 군인은 돈 없고 빽 없는 인간의 유구한 출세수단.


장포대 박춘명 씨의 기억이 내게 있는 한 적어도 반은 먹고 들어가지 않을까?


1차대전과 러시아 혁명······이 문제긴 한데, 그 전까지는 어떻게든 되겠지. 다 계획이 있다.


그런 까닭에 나는 오늘도 노보키예프스키(Новокиевски)의 기병 연대 앞을 기웃거리면서 ‘영업’을 개시하고 있는 중이었다.


“야, 거지 새끼! 간밤에 안 굶어죽었구나!”


“닥쳐, 이고르. 또 처맞고 싶냐?”


내가 슥 짱돌을 쥐어들자 멀리서 놀리던 카자크 아이들은 침을 퉤 뱉으면서 슬금슬금 물러났다.


처음에 왔을 때는 자기들 노는데랍시고 텃세가 더 심했는데, 매콤한 핵짱돌 맛을 보여주고 나니 찌그러진 뒤에는 저러는 중이다.


아무래도 카자크들 중엔 군에 입대하는 경우가 많아, 지 부모한테 쪼르르 달려가서 일렀던 놈들도 있던 모양이지만.


“우르르 몰려가서 타타르 아이 한놈한테 두들겨 맞은게 자랑이냐!”


······라면서 되려 부모한테 얻어맞았다던가.


‘역시 낭만의 시대군.’


애들 싸움이 어른 싸움으로 발전했다면 부모가 없는 나는 상성에서 불리했겠지.


하지만 덕분에 방해받지 않고 영업을 계속할 수 있었으니 그야말로 럭키비키.


“오늘도 왔구나!”


“네, 아저씨들도 안녕하셨어요?”


나는 카자크 애새끼들과 맞대거리할 때와는 달리, 영업용 스마일을 지으며 손님들을 맞았다.


내가 구두통을 미처 열기도 전에 장병들이 길게 늘어섰다.


“어허, 내가 먼저 왔어!”


“좀 봐줘. 나 조금 있다가 데이트하러 나가기로 했단 말이야!”


이정도 성황이면 푼돈 받고 닦아주기엔 아까울 정도군.


나는 팔짱을 끼고 그 모습을 만족스럽게 지켜보았다.


1년 전, 내가 우수리 카자크 부대에 군화를 닦으러 왔을 때만 해도 이들의 태도는 무관심하기 짝이 없었다.


이 시대에는 현대의 구두약처럼 좋은 물건도 얼마 없고, 무엇보다 군용 부츠를 닦는 문화가 제대로 정착이 되어 있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내가 누구인가.


짬찌 소위 시절부터 광내기 스킬을 열심히 익혀온 박춘명의 기억을 물려받은 자.


내 손에만 들어오면 광택제의 성능에 상관없이 누구의 시선이든 사로잡을 수 있는 빛을 발할 수 있다.


불광이든 물광이든 상관없다. 나한테만 맡겨봐라.


호기심인지 동정인지 몰라도 나한테 부츠를 맡긴 병사 하나는 곧바로 그 영롱함에 매혹되어버렸고.


그게 소문이 난 모양인지 장교들도 하나둘씩 머리를 내밀기 시작하더니, 기병 연대 뿐 아니라 동부 시베리아 포병여단에서도 손님이 찾아올 지경이 되었다.


“역시나 여기에 있었구나.”


그렇게 얻은 손님 중 하나가 바로 눈 앞에 있는 대위님.


“비류코프(Бирюков Н. Н.) 대위님!”


정확히는 전(前) 대위지만.


여기 모인 부사관과 병사들 정도는 가볍게 제낄 수 있는 위치였다.


그도 그럴게, 이 사람 높으신 분들이랑 친하거든.


원래 이쪽 우수리 지방을 자주 돌아다니던 양반인데, 우연히 내 이야기를 듣고 부츠 한번 닦으러 온게 계기가 되어 안면을 텄다.


비류코프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대기 중인 손님들을 향해 물었다.


“잠깐 이 아이 좀 빌려가도 되겠나?”


“예, 예, 대위님!”


“저희는 조금 뒤에 닦아도 됩니다! 편하신대로 하십시오!”


그 심각한 표정에 잔뜩 쫄아버린 장병들은 그렇게 외쳤지만, 정작 당사자인 나는 태연하기 짝이 없었다.


그도 그럴게, 그가 이렇게 반응하는건 내가 던진 낚싯대를 물었다는 뜻이니까.


아니나 다를까 비류코프는 사람 없는 곳으로 이동하자마자 나를 향해 이렇게 물었다.


“어떻게 알게 되었니?”


“뭐를요?”


내가 모르는 척하자 비류코프는 더욱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서 담배를 물었다.


“네 말대로 정말 한국에서 초청이 왔다.”


나는 보이지 않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당연히 수락하셨겠죠?”


“물론이지. 좋은 조건이었으니까.”


비류코프는 말을 이었다.


“그러니 다시 물으마. 내가 한국의 러시아어 학교(俄語學校)에 초빙될줄, 어떻게 알았던거냐?”


뭐긴 뭐야, 미래지식이지.



* * *



박춘명이 비록 러시아사를 배웠다고 한들, 이 시기 러시아 극동에 있던 인물들 중에서 뭐 몇 명이나 알고 있겠나.


한국과 관련하여 활동이라도 했던 사람들이라면 또 모르되.


박춘명이 알고 있던 그 몇 안되는 인물 중 하나가 바로 눈 앞에 있는 비류코프 대위였다.


1896년 아어학교 교사로 부임해, 나중에 원산 영사를 지내는 인물. 끝.


그 외엔 한국에 제법 우호적이었다는 것 정도?


사실 나에겐 이만큼 단편적이고 쓸모 없는 정보가 없었다.


비류코프가 무슨 역사를 뒤틀만한 거물인 것도 아니고, 그에게 투자해서 뽕을 뽑아먹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애초에 남의 집에 얹혀사는 어린애가 누구한테 투자하고 말고 할 것도 없지만.’


하지만 그 개인에게는 이야기가 다르지.


내가 부츠를 닦아달라고 찾아온 비류코프에게 이 미래지식을 베풀어준건 약 반년 전.


영업용 스몰토크 중, 포병 대위로 있다가 전역하게 되어 앞으로의 진로를 고민하는 그에게 은근슬쩍 이 이야기를 가지고 내기를 건 적이 있었다.


그땐 당연히 흘려들었겠지만, 지금은 이야기가 다르다.


자신도 모르던 자기 미래를 내가 알려준 셈인데 믿지 못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리고 그가 생각했을 때, 답은 오직 하나 뿐이다.


‘예언.’


지금은 실로 오컬트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19세기.


숱한 점성술사가 사기 쳐먹고 돌아다니던 시절이다.


그 유명한 라스푸틴이 바로 이 시대 사람 아닌가.


비류코프 대위는 귀족 출신에 군의 상층부와도 끈을 가진 사람.


비류코프가 나를 찾아온건 순전히 우연이었지만, 일단 내 레이더에 포착된 이상 그도 내 계획에 편입될 수밖에 없었다.


이 자식을 잘만 조종하면 더 높은 스테이지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아니, 어쩌면 굳이 군대에 들어갈 필요도 없이 아기동자 김하준으로 오컬트에 환장한 귀족들을 빨아먹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나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사실 저는 예언······.”


“당연히 예언 같은건 아니라고 믿는다. 넌 총명한 아이니까. 아마 근거를 읽고 추론해낸거겠지.”


“예?”


아니 시발 형 T야?


“처음엔 조선······ 네 고향에서 이걸 알려줬을까 싶었지만, 이건 불가능하지. 나를 추천해주신 운테르베르게르 장군께서도 베베르 공사의 요청을 엊그제 받았다고 들었으니까.

지금도 조선 정부에선 정확히 누가 오는지 모르고 있을테고.”


그럼 예언 맞잖아! 인정해 안해!


“아마 너는 어디서 조선에 러시아어 학교가 생긴다는 이야기는 전해들었겠지.

내가 우수리에서 근무하며 조선인들의 특성을 잘 알고, 포병여단의 교관도 지냈으니 어쩌면 내가 교사로 갈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거지?”


나같은 어린애가 그런걸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게 예언보다 말이 안되는 것 아닌가?


아니면 어린애들은 무심코 자기가 아는 사람들을 어떤 역할에 집어넣는 경우가 있으니, 그렇게 찍은게 맞아든 사례 중 하나라고 생각하든지.


비류코프는 얼굴을 풀고 따뜻한 손으로 내 어깨를 꼭 잡았다.


“네 돌아가신 어머니가 샤먼이었다고 했었지? 하지만 그들은 대개 좋은 눈치와 추론으로 먹고 사는거야. 너는 어머니의 재능을 물려받은 듯하지만, 그런건 올바른 신앙이 아니다. 오히려 그걸 더욱 좋은 방향으로 쓸 수 있는 직업이 있지 않을까?”


이제 보니 독실한 정교회 신자셨군요. 아득바득 부정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에이 텄네, 텄어.


깔끔하게 미련을 버린 나는 비류코프를 향해 물었다.


“예를 들면요?”


“사업가라든지······. 혹은 군인에게도 그런 능력이 요구되겠지.”


비류코프의 말에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생각보다 단단한 신앙 가드에 막히긴 했지만, 어쨌든 비류코프에게서 얻어낼 수 있는건 존재했던 것이다.


“그럼 부탁 하나 들어주실 수 있나요?”


“좋다. 어쨌든 내기는 내기니까. 내가 들어줄 수 있는 소원이라면 들어주마.”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는 비류코프에게 말했다.


“생도군단(кадетский корпус)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도와주시죠.”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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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내기 +18 24.09.08 5,143 28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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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입학 +30 24.08.29 6,945 35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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