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욕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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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휘(消諱)
작품등록일 :
2024.08.31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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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1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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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4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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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DUMMY

「그럼 자네도 살아 돌아가지는 못할 터다!」


「그렇다고 해도 죽여야 해.」


「어째서인가!」


남자는 숲의 괴물이 내던지는 말에 아무런 답도 하지 않는다.

말해줄 이유가 없다.

너무나도 가볍게 비밀을 파헤친 자에게 돌아올 것은 징벌 뿐이니까.

그가 벌을 내리는 자로 합당한지는 생각하지 않기로 하자.

훔반의 목에 도끼를 댄 이상 생각해 봐야 부질없는 일이다.


「더 말하지 않겠다.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말도록.」


「인내심이라!」


훔반의 우렁찬 목소리에 남자가 대답 대신 고개를 주억거린다.

알고 있어도 말하지 않았으면 될 일.

그러나 이미 절반 정도 뱉어버린 이 순간에는 의미 없는 가정이다.

이제 괴물은 선택해야 한다.

죽을 것인가, 남자의 협박에 따를 것인가.


「대체 무엇이 당신을 그렇게 만드는가!」


「실패다.」


「실패?」


「그래. 실패해 본 적 있나?」


선택의 갈림길에서 남자는 한 가지 힌트를 준다.

이 자에게 이 단서를 주어야 하는 이유는 없다.

아마도 남자 또한 자기가 말할 수 있는 내에서 알려주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비밀을 말하고 싶지 않지만, 알게 하고 싶다.

그 모순된 심리가 남자를 감싸고 있는 모양이다.

결국 그 또한 한낱 인간이라는 방증이겠다.


「나는 이 숲에서 나가 본 적이 없다!」


「그런가.」


「내 임무는 이곳을 지키는 것! 단 한 번도 그 임무를 실패한 적은 없다!」


「과연.」


실패를 모르는 자.

남자에게 그 말은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그의 손아귀를 파고든다.

언뜻 들으면 너무나도 당연한 말.

어지러운 세상에서 실패는 곧 죽음이며 늪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그렇기에 모든 사람이 그렇게 아등바등 노력하는 걸 거다.

이곳에는 자기가 무력할 때 도와줄 사람이라고는 그 어디에도 없다.


「축하하네.」


그렇기에 남자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훔반에게 축하를 건넨다.

실패가 없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잃지 않아도 되는 것을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이야기니까.

지키고 싶었던 것들을 지키며 행복을 누렸다는 이야기니까.

그러기 위해 노력했을테니 축하의 말 한 마디 정도는 할 수 있다.

곧 죽을 수도 있는 자에게 남자가 그 정도 아량은 베풀 수 있다.


「의외로군.」


하지만 훔반은 남자의 이런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나 보다.

그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한가득 담겨 있으니 말이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같은 자에게서 나올 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말하지 않을 이유는 없잖은가.」


그러나 그 생각은 틀렸다.

남자 또한 인간이다.

더 증명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남자는 운명이라는 그물에 사로잡혀 버둥거리고 있는 한낱 사람이다.

더 증명할 이유조차 없을 정도로, 그는 모든 것을 잃고 방랑하고 있는 한낱 인간이다.

그가 다른 사람과 다른 것은 단 한 가지.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얄궂은 운명을 타고났다는 것 뿐이다.

그것이 그의 잘못은 아니지만, 이렇게 태어난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그저 안간힘을 쓰며 벗어나려 노력하는 것밖에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자네는 말하지 않을 이유가 있고.」


그렇기에 언뜻 들으면 아귀가 맞지 않는 말들이, 그의 행동과 말투로 작은 조각이 되어 퍼즐을 맞춰 간다.

너무나도 작지만, 없으면 안 되는 파편들이 모여 커다란 형체로 변해 간다.

그 형체를 훔반도 이제는 알아챘다는 듯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는 입을 열어 그가 원하는 말을 해야 한다.

아니, 이제는 열지 않을 수 없었다.

말을 하지 않겠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면 영원토록 말하지 못하게 될 테니까.


「그렇군! 내가 미처 그 생각은 못했군!」


「그래서, 어떻게 할 거지?」


「입 밖으로 내뱉지 않을 것이라고 맹세하지!」


「무엇에 대고 맹세할 건가.」


「어떻게 하면 되겠나!」


상대는 맹세할 준비가 되었다.

남자가 원한다면 신의 우둘투둘한 손등에 입맞춤할 거다.

그러나 그가 그런 꼴을 보고 싶을 리가 없다.

남자가 믿는 것은 그런 허약한 나부랭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숲을 걸고 맹세하게.」


「이 숲을...」


「못 하겠나?」


「그럴 리가! 나는 훔반, 푸른숲의 수호자다!」


푸른숲.

어딜 보아도 검은 형체밖에 보이지 않는 이곳을, 훔반은 푸른숲이라고 부르고 있다.

자신만은 옛 이름을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듯이 외치고 있다.

가슴 속에 품게 된 비밀 대신이라는 것일까.

남자는 그 모습을 흐릿한 눈으로 쳐다보며 누군가를 떠올리고 있는 듯이 섰다.


「맹세를 목숨같이 여기는 자! 그런 나는 맹세한다!」


괴물은 그런 그의 앞에서 커다란 목소리로 맹세한다.

그 속내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비밀의 대가로 자신의 목숨을 건 약속을 한다.


「비밀을 입 밖으로 내지 않겠다! 맹세를 어긴 자의 대가는 숲의 몰락이리라!」


목숨을 거는 것과 목숨이 날아가는 것.

둘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당연히 전자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너무나도 가혹한 처사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남자에겐 선택지가 없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그는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다.


「고맙군.」


그렇기에 맹세를 받았다.

소중한 것을 빼앗지 않기 위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했다.

아마 훔반도 남자의 선택에 이의를 달지 않을 것이다.

이의가 있다고 해도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지만 말이다.


「고마울 일은 아니다! 너 또한 그럴 수밖에 없을 테니!」


「그걸 알아준다면 더더욱 고맙군.」


고맙다는 말.

몇 번이고 할 수 있는 말.

그 때에는 할 수 없었던 말.

무엇이 그를 변하게 했는가.

남자는 죽음인지 삶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럼 용건은 끝난 건가!」


「아니. 할 일이 있다.」


그 경계선상에 그가 있다.

몇 번이고 삶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아있는 남자는, 이번에도 그 경계에 두 발 딛고 서 있다.

죽지 않고 끈질기게 서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이 뭔가!」


「네게 부탁할 일이 있다.」


「부탁이라! 그것이 뭔가!」


「성채를 향한 공격을 멈춰 주게.」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생명을 걸고서라도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옳은 일이고, 정당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는 푸른숲의 수호자에게 부탁한다.


「영원한 평화는 없을 터다!」


「오리라 생각하지 않아.」


그래, 그는 거창한 것을 바라지 않는다.

남자는 단 한 가지를 바란다.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을 바란다.


「잠깐이면 돼.」


그를 위해 남자는 살아있다.

살아있어야 할 이유 때문에 살아있다.

그 답을 들은 훔반은 탄식하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길게 약속할 수 없다!」


얄궂은 운명의 물레는 얽힌 실을 짜 내며 삐그덕거리고 있다.

그 소리를 들었음에도 수호자는 별다른 말을 할 수 없다.

그 또한 수레바퀴의 신탁을 받는 필멸의 존재다.

그러니 훔반이 남자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은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 거다.


「그건 나도 바라지 않아.」


그러나 남자는 그를 탓하지 않는다.

그도 모르지 않는 진실이기 때문이다.

실을 짜내는 것은 물레의 몫이지만 그 실을 다시 펴는 것은 사람의 몫이다.

포기하지 않고 맞서 싸운다면 실은 곧게 퍼져 찰랑거리는 아름다움이 되리라.

그래, 필요한 것은 시간 뿐.

엉킨 실타래를 풀 조금의 여유가 필요할 뿐이다.


「바라지 않는다라! 신기한 말이로군!」


「당연한 말이야.」


그것을 훔반이 알지 못해도 좋다.

그것은 실패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깐 시간을 벌면, 지금보다는 안전하게 목적지로 나아갈 수 있다.

굳이 아무런 의미도 찾을 수 없는 곳에서 어그러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는 시간을 찾는 거다.

조금이라도 좋으니 운명의 억센 손아귀를 피해 돌아나가려고 하는 거다.


「과연! 잘 알겠다!」


그리고 남자에게는 다행히도, 그의 앞에 선 수호자는 말이 꽤 잘 통했다.

그 어떤 인간보다도 대화가 수월했다.

모든 사람이 이처럼 말을 주고받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남자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고맙다.」


모든 사람이 이와 같다면 싸울 필요도 없을 터다.

서로 소중함을 안다면 굳이 혈전을 벌일 필요도 없을 터다.

하지만 남자가 사는 세상은 그 간단한 논리가 통하지 않는다.

상식이라는 사고작용이 그리 쉽게 이어지지 않는다.

남자는 어째서인지 생각해보려다 그만둔다.

몇십 년을 고민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다.

그런 문제의 해답을 구해보려 해 봐야 증명되지 않은 가설들만 나열될 뿐일 터다.

그러니 지금은 잠시 미뤄두는 수밖에 없다.

조금 더 시간이 날 때 구해도 늦지 않을 터다.


「그럼 이만 가 보아도 되겠나?」


「돌아가려는 것인가!」


「그래야 하지 않겠나.」


「아쉬운 일이군!」


남자의 말에 훔반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못내 아쉽다는 듯이 그를 쳐다본다.

잠깐이긴 해도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도끼를 들이밀었던 자다.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해도 자신을 죽이려고 달려들었던 자다.

그러나 어째선지 푸른숲의 수호자는 친구를 배웅하는 사람처럼 목소리를 낸다.

남자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눈으로 쳐다보면서도 그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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