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망한 대공전하의 난감한 시첩

무료웹소설 > 자유연재 > 로맨스

새글

라키7
작품등록일 :
2024.09.01 20:38
최근연재일 :
2024.09.18 20:17
연재수 :
13 회
조회수 :
91
추천수 :
0
글자수 :
81,726

작성
24.09.01 20:48
조회
15
추천
0
글자
16쪽

시첩[1]

DUMMY

"과학..이 있는 세상.."


나는 손님들이 남기고 간 음식 접시를 치우다 말고 문득 멍하니 멈춰 서서 중얼거렸다.


곁으로 다가온 제논이 한쪽 입매를 끌어올리고선 물끄럼한 시선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카디. 또 그 이상한 소리야? 그만 정신차리고 일해. 얼른 마치고 정리해야지."


어깨를 툭 치며 웃어주는 그를 보며 나 역시 그저 미묘한 낯으로 함께 웃을 수 밖에 없다.


스스로에게조차 설명할 수 없는 이 기이함을 말로 풀어낼 방법은 없으니까.


**


나는 저들이 말하는 '아론의 버려진 숲'에서 깨어났다.


눈을 감기 전 마지막 기억은 더이상 희망 없는 이 삶에 마지막 결정권 만큼은 내게 주겠다는 결심이었다.


흐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뼛가루가 으드득 갈려 형체가 시커멓게 허물어지는 그런 감각을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어느 순간, 얼얼한 몽롱함에 휩싸여 나는 다시 눈을 떴다.


눈 앞의 사람들이 뭔가 말을 하고 있었다. 내 위에 얼굴을 들이민 서너명의 사내들이 '어째서, 위험, 이런' 이라는 말들을 쏟아내며 걱정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도 뭔가를 중얼거렸던 것 같은데, 사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든 나의 뇌와 입은 명령과 실행이 서로 달랐던 듯 싶고 '카드회사에서 오신건가요?' 라는 말을 했다고 제논이 나중에 알려주었다.


그래서 내 이름은 '카디'가 되었다.


부모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신세는 전생이나 이번 생이나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저 음침한 숲에서 혼자 발견된 나는 이 조용한 시골 마을의 낯선 이방인 이었다. 저들의 삶과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는, 기억을 잃고 떠돌던 이상하고 불쌍한 여자 취급을 받은 채였다.


눈 떠 보면 시궁창인 인생은 한살부터 시작하나 스무살 부터 시작하나 사실 별 차이도 없다.


그나마 좀 다행이라 할 것은 이 세계 사람들 기준으로 외모가 썩 나쁘지는 않은 모양이라는 정도. 그 덕에 지낼 곳도 쉽게 정해졌고 일자리도 주어졌다.


마을 안, 적어도 내가 인식하고 있는 주변 또래의 남자들이 꽤나 친절하게 구는 걸 보면 아무래도 이 가정은 맞는 듯 싶다.


'카디 아론'


서른가구 남짓 정도가 전부인 이 조용하고 평온한 시골 마을에서 나는 제법 떠들썩한 이야깃 거리가 되어 있고, 또래 남성들의 친절과 또래 여성들의 불친절을 한몸에 감당하고 있는 제법 흥미로운 대상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


"근데 카디, 정말 오늘 저녁 불꽃 축제 안갈꺼야? 우리가 작은 마을이긴 해도, 이 축제만큼은 정말 자신 있다구. 이걸 보려고 열흘씩 걸려 마차타고 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난.. 좀. 시끄러운거 싫어해서. 팡 터질 때 깜짝 놀라는 것도 싫구."


접시 치우는 손길을 옆에서 거들던 제논이 서운한 티를 내며 입맛을 다셨다.


내게 지낼 곳을 내어준 사람이고 이 작은 식당의 젊은 사장이기도 한 그는 혼기가 찬 마을 아가씨들이 가장 마음에 들어하는, 소위 말해 이 마을 일등 신랑감인 인물이다.


"혹시 이것저것 경험해 보면 예전 기억이 날 수도 있지않아? 네 고향 이라던가, 어쩌다 그 숲에서 기절해 있었는지 라던가.."


스무살부터 시작한 인생에 그런게 있을리가.


어떻게든 기회를 만들고 싶은 눈치가 가라앉질 않았다. 호감가는 미소로 씨익 웃은 그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눈을 찡긋거렸다. 그 동안 베풀어준 호의를 생각하면 솔직히 거절하고 있는 내 핑계는 궁색한 편이긴 했다.


정말로 좋은 사람이기도 하고, 어쨌든 이 인생을 나름 순탄하게 살아보려 한다면 지금 내 위치에 여기가 최선의 자리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진심으로, 말썽을 일으키고 싶지 않다. 지금도 마을 처녀들 사이에 공공의 적이 되어있는 신세이면서 가장 눈에 띄는 과녁 앞에 서서 내게 활을 당기도록 여지를 만들기는 싫었다.


"미안. 난 정말 생각없어."


단호한 말투에 금새 풀이 죽었다. 시무룩한 낯으로 어깨를 늘어트린 그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마지못한 대답과 함께 천천히 돌아섰다.


"그래.. 네가 정말 싫다면, 뭐.."


짤랑! 경쾌한 방울 소리와 함께 가게 문이 열렸다. 제논의 친구들 서넛이 몰려들어 와글거리는 소리를 내며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제논! 가게 문 닫아야지! 아직도 이러고 있는거야? 카디, 너도 얼른 나와! 빨리 가자!"


**


작은 마을 광장이 꽤나 북적이며 들썩거렸다. 외지에서도 이 불꽃을 보러 오는 이들이 많다는 말은 가히 헛소리는 아니었던가 보다.


카디 아론으로 몇 달을 살면서 이 작은 마을에 구분 못할 얼굴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셈이었는데, 오늘 광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 사이에서는 내가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몇 없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카디! 너도 구경 나온거야?"


반가운 목소리가 어깨를 스치며 시선을 끌어당겼다. 한껏 꾸민 기색이 역력한 로엘과 그녀의 친구 두명이 수줍게 웃으며 우리 일행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 응. 시끌시끌하네. 정말 이 축제가 유명한가 봐."


로엘은 꽤나 온순한 성격에 내게도 그다지 눈을 흘기지 않는, 오히려 친근감을 표시한다고 까지 생각해도 무방한 내 또래의 순진한 시골 아가씨였다.


말간 복숭앗빛으로 발그레 해진 뺨을 한 손으로 가리며 애써 제논에게 시선을 두지 않으려는 귀여운 표정에 웃음이 났다.


"남자애들이랑 다녀봐야 별 재미도 없을텐데. 그러지 말고 우리랑 놀자."


로엘이 선뜻 내 손목을 붙들어 가볍게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떨떠름한 얼굴로 로엘의 눈치를 보던 그녀 곁의 친구들까지 짐짓 표정을 바꿔 미소지으며 이 행동에 힘을 보탰다.


"그래. 그러자. 내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아이스크림 맛보게 해줄게. 길턴 아저씨네 가게가 이 축제때만 만드는 특제품이야."


북적거리는 사람들 틈에 부대껴 우리는 조금씩 이리저리 치이고 있었다. 지나는 길에 계속 이렇게 밍기적 거리지 말아야 할 것 같았다.


"응. 그래 좋아. 같이 가자."


아무렇지 않게 여자애들 무리에 섞이려는 내게 제논의 아쉬운 목소리가 덧입혀졌다.


"저쪽 꽃나무 밑이 자리가 좋은데.."


어정쩡해진 묘한 기류 탓에 일행 모두 시선을 교차하며 한번씩 딴청을 피웠다. 매끄럽게 웃는 표정을 유지한 나는 결국 우물쭈물 대는 이 순박한 처녀 총각들을 위한 단호한 결론을 내려야 했다.


"그럼 우리 다 같이 아이스크림 사서 그 꽃나무 밑에 자리 잡자. 얼른 서둘러. 금방 시작할 것 같아."


**


펑! 퍼펑! 퍼버펑!!!


"꺄아" "꺅!" "와.. 정말 예뻐.."


밤하늘에 넓게 번져나가는 빛점들의 향연이 아름다웠다. 물론 불꽃을 처음 본 것은 아니지만, 내게는 이것이 처음 본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떻게 불꽃이 저렇게 오묘한 빛을 낼 수가 있을까. 쨍한 빨강과 노랑, 초록과 파랑 정도가 전부인 줄로만 알았던 경험에 비춰보면 이 세계의 불꽃은 진심으로 오묘하고 황홀하다.


말할 수 없이 선명한 오로라 빛 같기도 하고 은은하고 연약한 파스텔 빛 같기도 하다. 흐릿하게 번지다가 갑자기 밝아지고, 묽은 분홍빛으로 모양을 펼치다가 갑자기 황금색으로 변한 불새의 형상으로 허공에서 사라진다.


머리 위 하늘에서 펼쳐지는 화려한 축제의 저녁이 지나가면서, 나는 이곳의 공기를 깊게 들이마시는 것으로 내게 온 뜻밖의 평온을 감사하게 되었다.


사실 요즘같으면 처음 눈을 떠 얼마간 투덜거렸던 '삶의 푸대접'이란 생각이 민망할 지경이다. 하늘 끝을 보는 척 슬슬 눈치를 살피다가 남몰래 내 손을 잡는 제논이란 녀석이 싫지만은 않다.


나를 얄미워 하긴 하지만 그래도 어차피 좋은 사람일 수 밖에 없는 순박한 마을 처녀들, 하나같이 선하고 정이 많은 이 고요한 시골 마을에도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다.


안정. 정착. 울타리가 생기고 터전을 갖는 것.


얼마나 바랐던 삶인지 모른다. 누구도 엿보지 못했을 내 안의 소중한 갈망을 어떻게 이런 어이없는 상황이 실현시켜 주고 있는지 아이러니하지만.


그래. 마을에 남자가 이 녀석만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좀 차지한다고 설마 하늘이 무너지기야 하겠어. 무슨 뜻인지 내가 알 수도 없고 내 알바도 아니지만, 어쨌든 기회를 받았으니 한번 가져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야.


살짝 미움 좀 타지 뭐. 질투도 당하고 정도 쌓고, 어영부영 얽혀 이렇게 살면 어때서. 나도 한번 이렇게 보란 듯이 살아내란 뜻일 수도 있는거겠지.


제논에게 잡힌 손등을 가볍게 돌려 약간 더 안으로 밀어넣듯 맞잡았다. 손을 뺄거라 생각했던지 초조한 눈빛으로 나를 흘끔거리던 그가 갑자기 확 붉어진 낯으로 헛기침을 하며 미소지었다.


어휴.. 근데 정말 적성에 안맞네. 뭐가 이렇게 간지러워..


"앗, 차거"


둘 다 서로 다른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풋 웃어버리던 순간 갑자기 바닥을 짚고 있던 반대쪽 손등에 질퍽한 차가움이 밀려들었다.


마지막으로 터진 은빛의 거대하고 둥근 소리에 놀란 로엘이 들고있던 아이스크림을 놓친 모양이었다. 그녀가 황급한 낯으로 허둥거렸다.


"헉. 카디! 미, 미안해. 내가 헛손질을 해서.."


울상인 표정으로 연신 사과하던 로엘이 치맛자락에 달린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급하게 내 손등을 닦아 주었다.


"어쩌지.. 옷에까지 번졌네..미안. 미안해 카디."


울먹거리기까지 하는 그녀의 표정 뒤로 감춰놓은 영악함이 빤히 엿보였다. 급기야 헛웃음이 밀려와 큽 웃어버리고 말았다. 손등 위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훔친 손수건으로 잽싸게 내 치맛자락을 문질러대며 얼룩을 점점 더 키워놓고 있었다.


순진은 무슨. 어휴, 이제보니 이거 완전 속이 새빨간 여우였구만.


나는 살짝 고개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쩔줄 몰라하며 함께 따라 일어서는 로엘의 눈치에 느긋하게 바닥에 기대앉아있던 녀석들도 어쩐다 싶은 표정으로 눈을 굴렸다.


"괜찮아. 얼른 손 씻고 올게. 제논, 저녁은 가게에 가서 먹을거지?"


"무슨 소리야! 여기 이제 엄청 화려한 야시장이 설텐데. 당연히 오늘 밤은 룬 광장에서 보내야지!"


제논과 함께 기대앉아 낄낄거리던 녀석이 단호한 말투로 기세를 세웠다. 하나같이 기대에 찬 표정 속에 풋풋한 설렘이 묻어났다. 아무래도 오늘 밤 저마다 짝을 정해 역사의 매듭이라도 지어놓을 기세인 듯 싶었다.


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인 다음 먼발치에 보이는 수돗가를 향해 걸었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로엘이 제논의 앞에 한발 다가서서 쑥스러운 몸짓으로 뭔가를 말하고 있었다.


하긴. 기회는 공평하게 주어져야 하는 법이니까.


광장에 와글거리는 말소리들이 북적거렸다. 중앙에 세워진 제법 크고 오래된 분수에서 솨아아 소리가 터져나와 귀를 간지럽혔다. 아름답게 조각된 청동빛 여신 동상이 솟구치는 물줄기에 촉촉히 젖어들며 색이 다른 느낌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둥그런 분수 테두리에 투명한 초록빛을 반사하는 맑은 물이 찰랑거렸다. 가게의 낮은 처마마다 연결해 엮어놓은 긴 줄 밑으로 가벼운 램프등이 대롱대롱 매달려 은은한 주홍색으로 분위기를 밝혔다.


잠깐 차례를 기다린 나는 자리가 난 곳으로 다가서 반짝이는 회색 수도꼭지에 가만히 손을 댔다.


기다렸다는 듯 물이 나왔다.


내 손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 지 정확히 알고 있다는 듯, 투명하고 맑은 물이 시원하게 흘러나와 끈적해진 손등을 깨끗이 씻어내렸다.


**


내가 알고 있는 역사를 가진 지구가 아닌 것은 분명한데, 환경과 문명은 지구인가 싶기도 하다.


아마도 다른 차원의 세계? 정도 라고 스스로 납득할 수 밖에 없다. 분명 꿈이 아님은 너무나 명확하니까. 매순간 숨을 쉬고 때가 되면 음식을 먹고 졸리면 자고 피곤하면 쉬니까.


그리고 이렇게 절절히 살아 숨쉬고 있는 나는, 중세기 유럽 정도의 문명시대를 살고 있는 듯 하다.


이 세계 99% 정도의 사람들은 일종의 평민 혹은 서민 정도의 신분이며 대단히 풍요롭고 온화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신분제적 계급이 존재하긴 하지만 이곳은 이상할 정도로 고도화된 경제와 발달된 행정, 눈부신 문화 그리고 법률이 있다.


그런데, 한가지. 이 곳에는 과학이 없다.


한두사람의 천재적 기질과 99%의 노력(?)으로 이루어낸 과학의 성과물. 그 성과물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나아가 미래의 인류에게 공평히 분배되어 생성하는 부의 재분배 그리고 인류문명의 발전.


그 동력이 없다.


그럼에도 이 세계는 상하수도 체계가 있고 편리한 불과 난방이 있고 작물을 쉽게 키우는 능력이 있고 대기를 활용하는 기법이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있는 정도가 아니라 어이가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발달해 있고, 사람들은 너무나 당연하게 이것을 사용한다.


아니, 복종한다.


내 전생의 세계에서 과학이 차지하던 자리를 대신하는 힘. 그 힘을 가진 오직 단 하나의 계급.


'비첸' 이라는 명칭으로 불리우는 0.1%의 종족. 이 세계의 귀족을 칭하는 단어다.


**


문명이 꽤나 발달된 사회이긴 하나 그래봐야 둘러보면 고작 중세기 정도의 문명 수준이다. 전기나 통신 정도의 현대적 문명이라던가 자동차나 기차, 자동화된 공장 같은 기계적인 발달은 그림자도 없는 세계다.


그럼에도 이곳은 이렇듯 신기하다. 꼭지에 무슨 감지센서라도 달려있는 모양 필요로 하는 사람이 손을 뻗으면 언제든 거짓말처럼 맑은 물이 나온다.


언젠가 어릴적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보았던 장면의 기억처럼. 물방울에도, 불꽃에도, 바람에도 땅에도 모두 눈과 입이 달린 생명이 있고 사람과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으로 표현되던 것처럼.


마실 수 있을 정도의 깨끗한 물로 샤워를 할 수 있고 편리한 화장실도 얼마든지 쓸 수 있다. 버튼만 누르면 되는 부엌의 조리용 불꽃이 공기보다 당연하고, 단순한 조절기 만으로 사용할 수 있는 훈훈한 난방과 시원한 냉기도 이들에겐 별로 대수롭지 않다.


처음 얼마간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 한참을 끙끙거리다 물어본 적도 있었다.


그러나 내 상식의 테두리로 묻는 질문에 저들이 제대로 답할 수는 없었다. '전기나 에너지' 뭐 이런 것이 없는 세계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냐는 나의 질문은 저들에겐 당연히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그들의 답 역시 내게는 밑도끝도 없는 생소한 기이함 그 자체였다.


'그야.. 비첸의 권능이 있으니까. 근데 이게 왜 이상해?'


말문이 막히기도 하고 더 물을 기력도 없었다. 나면서부터 당연히 누리며 살아온 그들의 상식에 다른 길의 해답을 갈망해봤을 호기심따위 이 세계의 누구에게도 있을리가 없었다.


"악!! 뭐야 이게!"


헉 하는 느낌과 함께 멍한 망상이 깨졌다. 잡생각에 빠져있느라 손이 수도꼭지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 버린 모양이었다. 잠깐 이었지만 내 손이 막아버린 틈새를 타고 촥 하는 소리와 함께 옆으로 물이 꽤 튀어 있었다.


"아, 저기, 죄송합니다. 제가 잠깐 딴생각을 하느라.."


황망한 기분으로 얼른 고개를 숙였다. 깊이 굽신하여 사과의 뜻을 전한 뒤 얼굴을 들었지만 앞에선 화사한 차림의 여인은 그렇게 쉽게 내 사과를 받을 마음이 없는 듯 보였다.


"너. 감히 내가 누군줄 알고 물을 끼얹어? 그러고도 이 뻔뻔한 태도는 뭐야. 죽고싶어?"


누군지 내가 어떻게 알아. 이 마을 사람들 얼굴도 이제 겨우 다 외운게 고작인데.


별 것 아닌 일에 불같은 화풀이를 당하니 삐딱한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시큰둥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다시 한번 무릎을 굽혀 앳되 보이는 숙녀의 용서를 구했다.


"미안합니다. 물이 튀는 걸 미처 조심하지 못했어요. 그래도 깨끗한 물인데..뭐.."


마지막 말은 붙이지 말았어야 했나 싶다. 부라리고 있던 눈매가 점점 사나워지더니 분노에 몸이 달아 입술을 깨무는 게 보일 정도로 표정이 심각하게 변해버렸다.


"뭐해! 이 계집애 잡아! 방금 내게 오물을 뒤집어 씌웠단말야!"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요망한 대공전하의 난감한 시첩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3 역전[3] NEW 16시간 전 1 0 15쪽
12 역전[2] 24.09.13 4 0 11쪽
11 역전[1] 24.09.11 5 0 16쪽
10 냉대[4] 24.09.10 7 0 17쪽
9 냉대[3] 24.09.09 5 0 12쪽
8 냉대[2] 24.09.08 6 0 17쪽
7 냉대[1] 24.09.07 7 0 13쪽
6 시첩[6] 24.09.06 7 0 12쪽
5 시첩[5] 24.09.05 6 0 11쪽
4 시첩[4] 24.09.04 7 0 12쪽
3 시첩[3] 24.09.03 11 0 12쪽
2 시첩[2] 24.09.02 10 0 17쪽
» 시첩[1] 24.09.01 16 0 16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