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망한 대공전하의 난감한 시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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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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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1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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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7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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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대[1]

DUMMY

어제부터 내린 비에 기온이 낮다.


봄기운 살랑거리던 지난 며칠이 다 거짓말인 것처럼 제법 시간이 된 점심 무렵인데도 먹구름으로 컴컴한 하늘 아래 바람이 쌀쌀했다.


손끝을 감았다 지나가는 공기가 라이를 떠오르게 했다. 그의 차가운 손과 얼음처럼 서늘한 냉기는 어쩐지 이 날씨와 꼭 닮은 것 같다.


"루카, 혹시 추우세요? 덮을 것을 가져다 드릴까요?"


안헬이 애교섞인 미소를 지으며 데워온 찻물을 보충했다. 손끝이 야무지고 눈이 예쁜 이 아이는 '루카'의 신분이 내려진 바로 다음날 내게 배정된 전속시녀였다.


'비첸의 여인' 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저들은 모두 나를 '루카' 라고 부르며 고개를 숙인다. 내 허락을 받지 않으면 입을 열지 못하고 인사를 받아주지 않으면 고개를 들 수 없다.


아무리봐도 그냥 '귀족 시중들어주는 여자' 정도가 맞는 것 같은데, 궁 안의 모든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태도가 꺾여 나를 두려워하고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뚱한 얼굴로 적응못하고 있던 내게 눈치빠른 안헬의 간단한 언급이 정리을 맺어주었다.


'문양을 새겨주신 것은 전하와 같은 사람으로 대하란 뜻이거든요. 오직 권능을 가진 비첸만이 공식적으로 루카를 둘 수 있고 그 지위는 명부에도 오른답니다. 내려지는 서열은 문양을 주신 비첸의 정부인보다 높아요. 그 비첸과 같은 위치에 서게 되시거든요.'


'엑.. 부인보다 높다고?'


'비첸들은 대부분 정략결혼을 하니까요. 서로를 가문의 파트너 정도로 여기지요. 하지만 루카는 달라요. 지위를 내려준 비첸의 모든 것을 평생동안 함께 공유하거든요.'


'그렇게 엄청난 걸.. 왜.. 나한테.. 줘?'


'루카도 참.. 그걸 제게 물으시면 어떡해요.'


안헬이 머리모양을 다듬어 주던 손을 멈추고 잠시 킥킥거렸다.


'여튼, 말씀하신 것처럼 엄청난 거라.. 루카의 지위는 함부로 내려지는 게 아니긴 해요. 제국의 역사상 공식적으로 기록된 루카는 여덟명이 전부거든요.'


사각 거리는 펜소리가 은은하게 공간을 울렸다. 멍한 눈으로 낙서를 계속하는 내게 바짝 다가선 안헬이 궁금한 듯 눈을 빛냈다.


"뭘 그리고 계신 거에요? 거미줄 이에요?"


"응.. 뭐 그런 종류지."


내가 그리고 있는 것을 한참동안 눈으로 쫓던 그녀가 다시 활짝 미소지으며 입을 열었다.


"모양이 정말 예뻐요, 루카. 게임판 같기도 하고 거미줄 같기도 하고. 정말 독특한 문양이에요."


슥슥 줄을 그어 이 세계의 체계에 대한 구조도를 작성하던 손을 멈춘 나는 미소짓는 안헬의 눈과 마주하며 느긋하게 웃었다. 진작부터 이걸 한번 그린 뒤 머릿속을 정리하고 싶었는데 이정도 여유도 갖지 못할 만큼 정신없던 날들의 연속이었다.


새벽같이 일어나 대공전하의 아침을 준비해야 한다. 물론 요리는 내가 안하지만 식단을 살피고 음식의 간을 보고 내어도 좋다는 허락은 온전히 내 몫이다.


말도 못하게 입이 까다롭고 예민하신 대공전하는 조금만 짜거나 불편한 단맛이 들면 불벼락 같은 짜증으로 모두의 하루를 망쳐놓는다.


더구나 이 망할 놈은 손이 없나 발이 없나 물한잔도 내가 떠먹여야 하는 가련하기 그지없는 인간이다.


시도때도 없이 오라는 소리에 종종 거리고 불려가면 하루종일 곁에다 앉혀 놓고 온갖 시중을 들어라 괴롭히기가 일쑤다. 아주 그냥 물 시중은 기본에 간식도 먹여줘야 먹고, 옆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기분나쁘게 째려보면 어깨도 토닥이고 머리도 쓰다듬고 하나부터 열까지 비위를 맞춰야한다.


'설마 시첩이 무슨 뜻인지도 가르쳐야 하느냐?'


손등에 문양을 새겨줬던 날 밤, 그가 내게 던진 비웃음 섞인 질문이었다.


확 달아오른 얼굴로 멀뚱히 굳어버렸었지만 예상과 달리 녀석이 원한 건 그저 내가 가진 온기와 적당한 크기의 부피감(?) 뿐이었다.


손과 발이 정말 차가웠다. 가까이 있으면 냉동실 냉기 같은게 느껴질 만큼 온 몸이 차갑고 서늘한 사람이었다.


쌀쌀한 가을 아침, 깊은 산 속 계곡 물에 손을 넣은 것 같은 찌릿한 차가움이 내게 닿았다. 녀석은 마치 보온물병을 하나 끌어안고 자는 것처럼 그렇게 나를 꼭 안은 다음 만족스러운 얼굴로 쌕쌕 잠이 들었다.


그동안은 그럼 누가 이 엄청난 투정받이 노릇을 했느냐 물었을 때 안헬의 대답은 가관이었다.


'루카를 두셨으니 그러시는 거죠. 전하는 딱히 저희를 상대하시는 분이 아니신걸요. 기껏해야.. 유크린님 한테 간단히 필요한 걸 지시하시는 정도셨으려나..?'


망할.. 뭐야 그럼. 그냥 나만 잘못걸린거야?


"오늘은 좀 한가하셔서 다행이에요. 점심 드시고 나면 서쪽 별궁 정원으로 산책 가시겠어요? 봄 꽃은 메인정원보다 그쪽이 더 예쁘거든요."


"그러지말고 밖으로 나갈까? 나 여기 도시 구경 해보고 싶어."


아침부터 일정이 있다 한 라이는 일찍 외출해 오후에나 돌아온다 했고, 여전히 목석같은 태도로 내게 할일을 알려주는 시녀장 유크린도 오늘은 자리를 비웠다.


마침 기회가 좋았다. 대공전하의 케트미헨궁 밖으로 아직 한발짝도 못 나가본 나는 문득 밀어닥친 호기심에 열이 올라 간질한 마음이 조급해졌다.


안헬의 설명만으로 머릿속에 그려놓은 이 곳은 오직 권능이 있는 비첸들만 거주할 수 있는 거대한 도시다.


만리장성 같은 성벽으로 도시 경계 전체를 두르고 있어 '비첸의 성' 이라 불리는 도시라고 하는데 아무리 내 상식으로 인지해 보려 해도 그려지지 않는 엄청난 규모 때문에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생소함이 있다.


도시의 정 중앙에 그 크기와 기세가 어마어마한, 황제가 살고 있는 노이루티크궁이 있고 바로 그 옆에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궁전, 황태자궁인 슈오베른 궁이 있다고 했다.


황제의 차남이자 제국의 하나뿐인 대공, 라이크릭스는 그 궁전들에서 한참 떨어진 이곳 케트미헨궁에서 지낸다. 여기도 엄청나게 크고 눈부시게 화려건만 이보다 더 웅장하고 아름다운 궁전이 어떤 모습일지 미천한 내 감각으로는 도저히 감이 오지 않았다.


이 세 곳의 궁전을 제외하면 성 안의 나머지는 모두 권능을 가진 비첸들이 살고있는 무지막지한 규모의 대저택들이라 했다.


널찍한 거리의 중간중간에는 비첸들이 즐길 거리의 갖가지 상점들과 간단한 업무를 취급하는 기관이 있다. 궁궐이나 저택에 상주하는 하인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침이 되면 성 내로 출근했다가 저녁에는 성 밖 자신들의 집으로 퇴근해 돌아가는 것이 일상이라 했다.


'비첸의 성' 밖은 주요 핵심기관들과 거대 상단들의 본사가 위치해 있고, 대부분의 준귀족들과 부유한 평민들이 터를 잡고 살아가는 제국 시아멘타의 심장, 수도 르테비안이다.


얼추 짐작해보건대 성 밖 수도까지 나갔다 올 시간은 안될 듯 싶지만 그래도 이 궁궐 밖 도시 구경 한두시간 쯤은 괜찮을 것 같았다.


".. 외출..요? 루카, 그럼 혹시"


"안녕하세요, 루카. 인사가 늦었습니다."


약간 다급하게 붙어 나오던 안헬의 말이 뒤쪽에서 날아든 인기척 탓에 뚝 잘려나가 멈춰버렸다.


널찍한 발코니 티테이블에서 정원을 바라보는 쪽으로 앉아있던 나는 뜬금없는 인사 소리에 천천히 뒤를 향해 몸을 틀었다.


서너명의 시녀를 거느리고 선 인형같은 여인 하나가 우아한 자태로 허리숙여 인사한 뒤 조용히 자세를 고정한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전하의 약혼녀이신 시에린 영애셔요."


개미 발걸음 소리같은 안헬의 말이 약한 진동을 일으켜 귓가에 닿았다.


**


온갖 투정받이에 기껏해야 물시중이나 드는 내가 어째서 저 고귀한 비첸이자 로튼 후작의 외동딸, 심지어 라이의 약혼녀인 영애보다 신분이 높다는 건지 절대로 이해는 가지 않는다.


그러나 이 세계가 그렇다 하면 어차피 나의 이해와 상식은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런 모양이었다.


나중에 황후나 황태자비도 설마 나한테 이러고 인사하는 건 아니겠지 잠깐 멍청한 생각이 들어 동작을 멈췄다.


그사이 흐흠하는 낮은 헛기침으로 시선을 당긴 안헬이 재빠른 눈짓을 던져 상념을 깨워주었다.


"아, 네. 반가워요, 영애. 카디 아론입니다."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아주자 앞에 선 시에린이 그제야 자세를 바로 세우며 시선을 마주했다.


영롱한 갈색 눈매가 깊이있어 보였다. 싱그럽게 미소지은 입매가 기죽을 정도로 예쁜 사람이었다.


"과연, 소문대로 굉장히 아름답네요. 전하께서 한눈에 반해 들이셨다더니, 그냥 하는 소리들이 아니었군요."


무슨 미술품 감상하는 듯한 눈길에 슬쩍 심정이 상했다.


더할 수 없이 차분하고 정중한 태도였지만 뾰족하게 드러나는 적대적 불편이 분명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나는 널 인정하지 않아.


"인사도 겸해서 작은 선물을 하나 가져왔는데, 받아주시겠어요?"


"..네. 감사합니다."


서로 표정을 감춘 의례적인 말이 오고가기 시작했다. 공손히 건네지는 질문에 답을 하자 시에린이 함박 미소를 지어 보이며 내 곁에 선 안헬을 향해 지시를 내렸다.


"마차에 있으니, 네가 함께 가서 받아다 루카의 방에 놓아드리고 오너라."


"네, 아가씨."


꾸벅 인사한 안헬이 시에린의 시녀 한명을 따라 걸음을 서둘렀다. 별로 크지 않은 자그마한 발코니 안에 어쩐지 나만 혼자 남겨진 것 같은 기묘한 불안함이 가슴을 눌렀다.


"본의아니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 송구스럽습니다만, 혹시 외출하려던 중이신가요?"


웃음섞인 눈매가 상냥하게 휘어지니 드러나던 적의가 조용히 가라앉았다. 시에린의 얼굴 위에 친절한 호의를 베풀고 싶어하는 또다른 표정이 빠르게 덮였다.


"그게.. 오늘 여유가 좀 있어서 나가볼까 해요"


"그럼 제가 모셔도 될까요? 비첸 성에 오신 지 얼마 되지 않으셨으니, 루카를 안내해드리는 역할에 제가 가장 알맞겠는데요."


시에린이 의지를 보이자 뒤에 섰던 그녀의 시녀들이 재빠른 동작으로 내 곁에 둘러섰다. 정중히 몸을 낮추고 시선을 내린 이들이 명을 기다리는 태도를 보이며 앞쪽으로 길을 열었다.


저 여인보다 지위가 높다는 게 정확히 어느 수준을 말하는지 아직 알지 못한다. 그저 인사만 받을 수 있는 정도의 허수아비 같은 것 인지, 정말 내가 원하면 라이의 약혼녀건 뭐건 간에 귀찮으니 꺼져라 뭐 이래도 되는 정도인 것인지.


여튼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섣부른 실수를 저지르고 싶지 않았다. 여전히 어정쩡한 내 안의 정보체계에 의지해 또다른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었다.


"그래요. 안내해 주시면 고맙겠어요."


"아직 식사 전이시죠? 멀지않은 곳에 굉장히 유명한 카페가 있어요. 아마 마음에 쏙 드실겁니다."


시에린이 가벼운 동작을 보이며 내 곁으로 다가와 팔짱을 꼈다. 다정한 자매같은 그녀의 태도는 내 안의 깊은 곳 어두운 기억을 자극해버린 암울한 몸짓이었다.


**


"입맛에 맞으셨나요?"


예쁘장한 입가를 끌어올리며 묻는 시에린의 질문에 나는 가벼운 미소로 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명한 곳이라더니 과연 이름값을 했다. 음식은 물론 말할 것도 없고, 눈과 손에 닿는 모든 것이 황홀했다.


어떻게 이 세계의 모든 것들은 이토록 극진하고 화려한 맛을 내는지.


움직이는 동작에 따라 손등에 새겨진 문양이 자꾸만 이리저리 빛을 냈다. 그 덕에 카페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은 전부 다 같이 우리가 앉은 테이블로 향해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었다.


"정말 아름답네요. 거리도, 풍경도. 모두 그림같아요."


널찍한 창 밖에 시선을 고정한 나는 눈으로 날아와 뒤덮이는 것들에 숨길 수 없는 감탄을 드러내며 입을 열었다.


어쩌면 이 세계는 여기서 더이상 발전할 필요를 못느끼는 것이 당연한 지도 모른다. 인간이 누리고 싶어하는 모든 편의는 '비첸의 권능'이라는 것이 해결해 버리는 모양이었고, 기름진 대지와 뜻대로 가꾸어지는 환경은 유복한 저들의 삶에 부족한 것이 없게한다.


온 몸에 스며드는 달콤하고 촉촉한 맛. 청명한 환경과 나른한 일상이 이루어내는 이 맛이야 말로 이곳에 삶을 부여받은 어느 누구도 자신의 몫을 부정하지 않게하는 발목 밑의 족쇄일지도.


이런 삶의 전부를 가능하게 하는 '비첸의 권능'은, 과연 이 인류에게 축복일까 아니면 저주일까.


"드디어 그 유명한 루카께서 나오셨다고?"


조용한 딴생각의 세계는 다시 찾아든 인기척에 얇은 유리막이 부서지듯 바사삭 소리와 함께 쪼개져 나갔다.


낮은 저음의 소리가 난 곳을 향해 주변이 일사분란한 동작을 보이며 일시에 일어섰다.


지난날 투명한 구에 갇혀있을 때 나를 찾아왔던 사람.


라이의 얼굴에 술을 끼얹었던 황태자 데이키먼의 붉은 눈동자가 빤히 나를 내려다 보며 말을 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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