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망한 대공전하의 난감한 시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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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키7
작품등록일 :
2024.09.01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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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8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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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2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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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첩[2]

DUMMY

갑자기 닥친 상황은 얼떨떨했다.


뭔가 판단을 내리기도 전, 두 손은 빠르게 결박되어 뒤로 묶여 버렸다. 순간 덮쳐든 단단한 힘에 떠밀려 광장 한 켠으로 끌려가 우악스레 내쳐진 뒤 무릎 꿇려졌다.


물 좀 튀겼다고 뭐 이렇게 까지 하는 거냐 싶었다. 그러나 작고 둥그런 공간을 만들며 뒤로 물러선 사람들의 표정은 여간 심상치가 않았다.


아무래도 내가 건드린 사람이 생각보다 높은 지위인 모양이었다. 씩씩거리며 나를 노려보는 여인의 곁으로 길고 위엄있는 망토를 늘어뜨린 풍채좋은 남자가 다가와 섰다.


"감히 군부의 세번째 재상이신 데센타님의 영애를 모욕하다니. 목숨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언제든지 꺼내쓰는 능력이라도 있는 모양이지?"


그가 한껏 어깨를 부풀려 과도해 보일 정도로 거만한 몸짓을 강조했다. 복색이나 견장, 표식으로 두른 휘장 같은 걸로는 내게 닥친 상황을 판단하기에 나는 아직 이 세계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그렇지만 '재상' 이라면 언젠가 제논이 설명해 준 중간계급을 말하는가 싶었다.


0.1%의 비첸, 99%의 평민, 그리고 그 사이의 신분을 차지한 0.9%의 준귀족.


평민으로 태어났지만 남다른 실력과 노력을 인정받아 제국의 정식 기사가 되거나 관료의 자리에 오르거나, 또는 비첸의 혈통을 가졌으나 딱히 능력을 갖고 태어나지 못한 이들이 주로 하사받은 신분이라 했었다.


비첸에 비하면 별 것 아닌 이들이라는 투로 말하긴 했지만 어쨌든 그들도 상위 1%였다. 이 세계의 99% 를 이루고 사는 평민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제가 몰라뵙고 큰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난처하고 억울하긴 한데 솔직히 별로 무섭지는 않았다. 이게 준귀족 중에서도 신분이 많이 높은 건가 사실 잘 판단도 안되고, 현실적으로 와닿는 감각이 없어 어리둥절한 마음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 세계가 가진 발달된 문명에도 믿음이 갔다. 사회는 안정되어 있고 이 체제를 유지하는 시스템은 현대적이기 까지 했다.


인권 비슷한 개념이 존재하는 느낌이었다. 사람과 재산을 보호하는 법률과 행정은 단단한 기틀과 실속있는 안전망 속에 견고하게 짜여진 그물망 같았다.


이정도 일에 사과까지 이렇게 했는데 뭐 어쩌겠냐 싶었다. 눈 한번 부라려 호통이라도 친 다음이면 다음부턴 조심해라 돌아서겠지 하는 조금은 한가한 마음이었다.


"헤링게일. 그대는 이 곳 영지를 다스리는 사람으로서 도무지 아무 자각이 없군. 이게 지금 말로 주절거릴 일인가? 내 새 드레스에 저 천한 것이 튀긴 오물이 묻어 이렇게 묽은 자국이 번졌는데도!"


정신이 번뜩 들었다.


영지를 다스려? 그럼 저 사람이 내가 살게된 마을, 그리고 여기서 동서남북으로 뻗어있는 광활한 영지 '롯슬린'의 영주라는거야?


비록 물정 모르는 나지만 미미한 상식 안에서도 이 세계 영주는 높은 사람이었다. 나는 이제서야, 그 영주를 마치 하인부리듯 대하며 싸늘한 말투로 눈을 흘기는 저 여인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쳇. 이런 조그만 마을 축제에 저렇게 높은 사람들까지 꾸역꾸역 기어왔을 줄 알았나, 내가.


뭔가 다른 부분에서 조금 억울해졌다. 슬몃 심사가 뒤틀렸지만 나는 다시한번 고개를 땅으로 처박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가.. 정말.. 죽을 죄를 지은 줄도 모르고.."


"아가씨, 제가 감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뭣들 하느냐! 영광스런 대 시아멘타 제국의 율법에 따라, 지금 당장 저 계집의 손목을 잘라라!"


헉. 뭐? 실수로 물 좀 튀겼다고, 멀쩡한 손목을 잘라?


내가 믿던 그 잘난 법률 어디갔지? 분명 내가 듣고 체감했던 이 세계의 질서는 이런 게 아니었는데?!!


제국의 이름을 입에 올린 것만으로도 송구하다는 듯 영주가 공손한 몸짓을 보이며 양 손을 포개 소매 안으로 집어넣었다. 아무래도 저 동작이 이 웃기는 판결의 최종 단계인 모양이었다. 근처에 섰던 영주의 기사가 한걸음에 다가와 내 곁에서 검을 빼들었다.


순식간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눈 앞에서 일렁였다. 혼이 다 빠져나갈만큼 심장이 쿵덕거리고 개미 발바닥만도 못한 처지에 숨이 턱 막혔다.


"저, 저, 저기요. 잠깐. 잠깐만요. 이게 지금 대체, 무, 무슨! 악!"


당혹스런 몸부림에도 아랑곳 없이 건장한 사내 몇이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포위했다. 손에 걸렸던 결박이 풀렸다. 등을 꾹 누른 억센 손길에 컥 하고 신음이 뱉어져 나왔다.


어느새 내 상체는 땅바닥에 찍어 눌리듯 처박혀 버렸고 왼팔은 바깥쪽으로 길게 당겨져 내려치기 알맞은 자세로 고정되어 있었다.


"안됩니다, 영주님! 멈춰주세요!!"


에워싼 사람들 틈을 비집고 익숙한 목소리가 새된 외침을 터트리며 찢어지게 날았다. 웅성거리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무슨 일인지 구경하느라 기웃거리고 있었을 터였다. 익숙한 얼굴과 낯선 장면에 꽤나 놀랐는지 선한 낯으로 처진 제논의 눈매에 전에없던 붉은 핏발이 선명히 보였다.


허둥지둥 달려들어 쓰러지듯 내 등 위를 감싸안은 그에게서 벌벌 떨리는 공포가 전해 흘렀다. 차마 입도 떼기 힘들만큼 절절한 그의 두려움이 차가운 날을 세워 뼛속까지 들이쳤다.


"저는 이 마을, 솔리온에 사는 제논 우드 라고..합니다. 이.. 이 여인은..저희 마을에서.. 보.. 보호하는 사람..인데, 기억을 잃고.. 정신..이 온전치가.. 않습니다. 모르고 저지른 일이니..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시면.."


그가 지금 이자리에 얼마나 용기를 내 뛰어들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내가 알았던 이 세계의 알량한 법률은, 오직 평민들끼리의 사이에서만 적용되는 것이었음이 순간 뇌리에 새겨지기 시작했다. 이제보니 이건 그저 법도 뭣도 아니었다. 나보다 위에 선 계급을 가진 이 앞에서는 감히 눈도 함부로 뜨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음이 못내 서러웠다.


"그대, 언제까지 날 이런 곳에 세워둘 참이지?"


"송구합니다, 아가씨. 바로 정리 하겠습니다."


영주가 영애를 향해 공손히 허리를 굽히며 마치 절을 하듯 몸을 낮췄다. 이윽고 천천히 자세를 세운 그는 주변의 모두에게 들리도록 쩌렁한 목소리로 고함을 쳤다.


"이 마을의 질서가 용서할 수 없을 만큼 지극히 어지럽다! 죄를 지은 계집은 지금 당장 한쪽 팔을 잘라 노예로 삼도록 하고, 죄인을 감싼 저 자와 마을, 솔리온의 대표장로를 찾아 함께 영주성 감옥에 가두도록 하라! 후일 모두가 보는 앞에서 본보기를 보여 처형할 것이다!"


"영주님!!"


제논이 울부짖는 소리를 외치며 다시 한번 나를 힘주어 끌어안았다. 그는 둥그렇게 등을 굽혀 바닥에 몸을 웅크린 채 한팔로 내 등 위를 감싸고 있었다. 절대 안된다는 강한 표현을 온몸으로 내던진 그가 바깥쪽으로 당겨져있던 내 팔을 잡아채 자신의 몸 안으로 감싸 숨겼다.


"안됩니다, 영주님. 억울합니다. 이건 너무 부당합니다!!"


피라도 토할 듯 처절한 소리가 두갈래로 갈라지며 허공을 울렸다. 쥐죽은 듯 조용해진 냉엄한 공기 속에 악을 쓰며 흐느끼는 제논의 울음소리가 메아리처럼 퍼졌다. 그러나 그런 것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 명을 받든 이들이 일사분란한 동작으로 걸음을 떼려던 순간이었다.


"헤링게일"


차가운 음색의 낮은 소리가 이상하리만치 날카로운 기세를 일으켜 가만히 귓가를 파고들었다. 뚝 멈춰버린 공기의 흐름이 고요해진 광장의 분위기를 소름끼치게 가라앉혔다.


"설마 이걸 보여주려고 날 여기까지 초대한 건가?"


열없이 던져지는 비웃음 섞인 말투에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 돌아갔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향해지던 고갯짓 속에서 '헉' 하고 신음을 삼킨 엷은 비명이 마치 돌림노래가 돌아나오는 것처럼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인식의 속도는 빠르게 번졌다. 광장에 둘러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한몸으로 움직여 박자라도 맞추듯 우르륵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꿇어 엎드렸다. 모두가 일제히 고개를 숙인채 두 손으로 땅을 짚은 다음 입을 다물었다.


정확히 알 수야 없지만 아무래도 여기 있는 사람들 중 제일 높은 사람이 방금 그 말을 했겠다는 정도는 파악이 되었다.


가까스로 상체를 조금 세운 나는 저들이 향했던 방향을 향해 가만히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나를 감싸안고 곁에서 울던 제논은 아예 얼이 빠져버린 듯 입을 꾹 다물고선 바들바들 떨며 멈춰있었다.


뭐야, 저건. 구미호야?


광장 한켠의 길고 고풍스런 모양을 갖춘 단단한 대리석 벤치 위에 한 남자가 앉아있었다. 달빛에 반사된 그의 은빛 머리칼이 지나가는 바람에 가볍게 흩날리다 현란한 빛으로 시선을 끌었다.


멀리서 보기에도 길고 선이 고운 눈매는 처연하리만치 우아한 느낌이었다. 빚어 놓은 것처럼 날렵한 턱선 끝에 가늘게 맺힌 미소가 숨막히게 아름다웠다.


그는 긴 다리를 느슨히 꼬고 삐딱하게 걸터앉은 모습이었다. 고급스럽고 짙은 색감이 나는 반듯하게 선이 잡힌 바지와 가벼운 하늘색이 감도는 무늬없는 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왼쪽 어깨 위 황금빛 문양의 버클이 달린 하얀색 얇은 봄 망토를 걸치고 있었는데, 달빛이 내려앉은 그의 형체는 도무지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아찔한 미모였다. 사람이라기 보단 마치 하늘에서 쫓겨 내려온 신선을 보고 있는 듯 해 도저히 시선을 돌릴 수 없게 하는 힘이 있었다.


느릿하게 일어선 그가 미소지은 표정 그대로 천천히 걸음을 딛어 내쪽으로 다가왔다. 가까이서 보니 저 엄청난 외모가 현실이라는 감각이 올라와 뒷머리에 찌르르한 통각을 일으켜 놓았다.


"정신이 온전치 않은 건 .. 확실하군. 눈을 마주치네?"


쿡 웃은 그가 가벼운 투로 말을 뱉었다. 황망히 고개를 든 영주가 재빨리 나를 향해 낮은 호통을 던졌다.


"무엄하다!"


"그러니까.. 자네. 그대의 영지민들이 얼마나 무례하고 겁이 없는지, 그대가 얼마나 우스운 꼴로 제국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는지. 뭐 이런 것을 오늘 내게 보여주겠다.. 혹시 그런 결심이었는가?"


"다, 당치 않으십니다. 제가 어찌, 어찌..감히.."


아예 흙바닥에 이마를 처박으며 스스로 머리를 짓이긴 영주가 바들거리는 소리로 그에게 잘못을 빌었다.


근데 도대체 여기 있는 사람 중에 뭘 잘못한 사람이 과연 있기는 한건가. 희한한 꼴에 둘러싸여 멈춰있던 내 안에서 문득 우스운 마음이 불쑥 치밀며 열기를 끌어올렸다.


에라. 어차피, 영문도 모르고 얻은 인생. 민폐 그만 끼치고 여기서 종치지 뭐.


"저기, 미안한데. 이제 그만 정리해도 될까요?"


내 입에서 튀어나온 소리는 모든 것을 정지시켰다. 말소리는 커녕 가늘게 떨어지던 숨소리 조차도 멎어버렸고, 휘돌아 감기는 바람 소리마저도 깨끗이 사라진 듯 묵직한 적막이었다.


"전 이 마을에 온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사람입니다. 이 청년도 사실 잘 모르는 이구요. 며칠 새 조금 친해지긴 했지만 저를 위해 죽을 만큼의 사이는 아닙니다. 귀한 아가씨 옷을 버려놓은 것은 진심으로 사과할테니, 엉뚱한 사람 잡지 마시고 여기서 저만 처분하는 것으로 자비를 베풀어 주시지요."


경험으로 미루어보건데 제일 높은 놈을 치받아 버리면 게임은 대충 종료되기 마련이었다. 분노한 대빵이 제일 괘씸한 한놈을 붙들어 화풀이를 시작하도록 만들면 끝이었다. 이것으로 어차피 얽혀있던 다른 녀석들에겐 관심이 사라지고 줄줄이 엮으려던 것은 없던 일이 되는 셈이었다.


제 정신이 아닌 것으로 보고된 몸이니 이정도 행동에 이유를 달 필요도 없지 싶었다.


그냥 한방에 끝나면 좋겠다. 치사하게 여기서 또 끌고가 지독한 일 같은 건 제발 안 당했으면.


말을 마친 나는 애써 떨리는 손끝을 진정시키며 땅으로 고개를 떨구고 눈을 감았다. 일부러라도 잡생각을 떠올리려 노력했다. 쿵쿵 달음박치며 날뛰는 마음을 어떻게든 가라앉히려 궁리하던 찰나였다.


"이것 봐라? 말도 하네?"


그의 서늘한 냉기 속에 결이 다른 이상한 웃음이 섞여들었다. 본능이 가져다주는 소름끼치는 직감이 밀어 닥쳤다. 뭔가 사고를 친 게 분명했다.


내 경험과 내 상식이 통하지 않는 이 괴상한 세계에서 너무나 용감하게 못할 짓을 했음이 불현듯 눈앞에 밀려들었다.


쩌저적!!!


그러나 사고의 회로가 미처 다시 돌아가기도 전, 살이 찢어지며 뼈가 갈리는 소리가 무감각한 낯으로 내 귀를 파고들었다.


붉은 핏방울이 범벅처럼 튀었다. 힘주어 나를 감싸 안고 있던 제논의 팔에서 흐물거리 듯 처지는 느낌이 전해져왔다. 내 곁에 바르르 떨며 엎드려 있던 그가 툭 앞으로 고꾸라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느리게, 아주 느린 속도로. 눈을 뜬 나는 고개를 들었다.


앞에 선 사내의 손에 언제 검이 들렸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 비현실적인 감각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단 하나도 구분되지 않는 기이한 현실이 눈앞이었다.


"제.. 제..논..."


숨이 쉬어지질 않았다. 목구멍 끝이 부풀어오르듯 꽉 막혀 소리도 공기도 통할 수가 없었다.


좋은 사람이었는데. 전생이든 뭐든 모조리 통틀어, 이렇게 내게 주어진 시간을 아끼고 사랑할 수 있게 해 준 사람은 네가 처음이었는데.


... 왜.. 나 때문에, 어째서 또 나 때문에..!!!!


무엇 하나 제대로 가질 수도 없게 만들어 놓았으면서. 또 이렇게 모든 것을 망쳐버리는 단 하나의 원흉으로 남게 하는 거야!!


"억..어억..컥..커헉....."


온 마음이 찢어지며 일어난 가열찬 통증이 밀어올린 숨소리를 괴상한 통곡으로 바꾸어 입 밖으로 던져놓았다.


지금 내 눈에서 흘러나오는 게 저 가증스러운 눈물이 아니기만을 바랐다.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징그러운 감각이 말할 수 없이 끈적하고, 토할 것 처럼 역겨웠다.


"너.. 너.. 네가.. 네가.. 도대체.. 뭔데.."


온 몸을 비틀어 까드득 흙바닥을 긁어대는 나를, 그는 물끄러미 내려다 보며 미소짓고 있었다. 태어나 처음 보는 신기한 물체를 보기라도 하는 듯, 감정없는 눈매를 우아하게 깜빡인 그가 바닥을 향해 내려 놓은 검 끝을 지이익 그어 소리를 냈다.


"그래도 입을 여네? 눈도 뜨고? 그래, 그럼.. 가만있자.."


이 흥미로운 놀이를 계속 이어가기라도 할 모양인지 쿡 웃는 소리로 중얼거린 그가 엎드린 이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안돼..더 이상은. 이제 정말..안된단말야...


"너 거기 서. 이 개자식!!! 죽여버릴거야악!!"


번개처럼 몸을 일으켰다. 빠르게 동작을 이은 나는 방심하고 있는 무표정한 그를 향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달려들었다. 머릿속 공간을 지배하던 이성의 끈은 이미 끊겨 있었다. 뭔가 다른 생각과 어떤 계산이 서지도 않았다.


그저 일어나 덤비면 그의 손에 들린 피묻은 검이 결국 나를 찌르고 말리라 믿었다. 기왕이면 저것에 꿰뚫려 죽기 전, 저 망할놈의 자식 얼굴이라도 한번 할퀴고 죽겠다는 생각에 짐승같은 두 눈이 번뜩였을 뿐이었다.


그렇게, 이 거짓말같은 현실 속 누구에게든 뻗어 지르려던 용광로 같은 분노가 내 모든 것을 지배해버린 짧은 순간이었다.


쿠르르릉! 콰직!!! 쾅!!! 콰르륵!!!!


그를 향해 달려들던 찰나 알 수 없는 밝은 황금빛 기류가 갑자기 맹렬한 기세로 눈 앞을 덮치며 동시에 시공간을 비틀었다.


감각이 이상했다. 폭발한 분노에 잠식된 몸뚱이는 손끝의 감각마저 잃은 듯 했지만, 기괴할 정도로 선명한 색감은 내가 속한 세계 전체에 파고들어 낮은 몸부림을 펼쳐대며 뭔가를 와드득 깨부셔 버리고 있었다.


어... 뭐지... 이거 뭔가.. 잘.. 모르겠..는....데.......정말.. 이...상...한...


해괴한 느낌 속 까무룩 감겨가는 의식의 한 가운데에서도 그의 태연하던 낯짝이 살짝 일그러진게 보였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수려한 미간이 가늘게 찌푸려져 있었다. 비웃음 가득했던 붉은 입매는 뭔가를 말하려는 모양 조금 벌어져 있었다.


이번 감각은 .. 저번이랑은 .. 많이 .. 다른 것.. 같네...


조금씩 밀려오던 암전이 결국 내 안에 그득히 들어찼다.


기왕이면 저 자식 면상은 한번 들이받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이대로는 좀 아까운 것 같다는 떫은 생각을 하며, 나는 또 지난 번과 같은 깊은 암흑 속으로 서서히 잠식되어 사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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