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망한 대공전하의 난감한 시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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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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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1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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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8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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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0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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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대[4]

DUMMY

텅 비어버린 발코니로 돌아왔을 때, 안헬은 힘이 풀린 다리를 주체못해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일부는 눈치를 챈 듯도 보였다. 대공의 승낙이 필요하다는 것을 모르는 카디가 제멋대로 시에린을 따라 외출해 버린 낌새를.


'왜.. 아무도 말리지 않은 거야? 다들 어쩌려고 그냥 보기만 했어?'


'우린 몰랐어. 당연히 승낙을 받았으니 외출하시나보다 했지.'


'허락하셨을 리가 없잖아! 엊그제 폐하께서 루카를 보겠다 하신 것도 거절하셨는데!'


떨떠름한 기색들이었지만 마음 속 가책 또한 부정할 수 없었다. 서로 눈치보던 이들 중 나름 연륜있어 보이는 하인 하나가 머뭇거리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딱히 네 책임은 없어, 안헬. 자리를 비운 사이에 나가셨잖아. 그건 우리가 증언해줄게. 그냥 어제 저녁 전하의 승낙서를 받아서 외출하신 줄 알았다고 하면 네게도 큰 문제는 없을거야.'


'그래. 그리고 아마 별 일 없이 돌아오실거야. 감히 누가 루카의 면전에 대고 전하의 오터가멧을 확인하겠다고 나설 수 있겠어.'


태평한 소리를 해대며 저들끼리 안심하려는 분위기 속에서도 숨길 수 없는 미지근함이 시커먼 먹구름처럼 피어올랐다.


세살짜리 어린애 같은 사람이었다. 이제 막 말을 시작하고 겨우 걸음을 내딛는 아이처럼. 서투르게 쩔쩔매며 말간 눈망울을 굴리는, 늘 이렇게 하는게 맞는지 물어보는 것이 일상인 그녀는 간질거리는 입가를 참을 수 없게 할 만큼 사랑스럽고 예쁜 사람이었다.


그래, 별 일 없이 돌아올 수도 있겠지. 하지만.. 과연 시에린이 그저 호의로 루카와 외출했을까? 아니, 절대 그럴 리 없어. 무슨 생각일지 뻔히 알잖아.


시에린의 가문, 로튼 후작가가 라이크릭스를 손에 넣기 위해 펼쳤던 무시무시한 만행들이 하나 둘 안헬의 머릿속을 스쳤다.


황후를 구워삶고 황태자의 세력에 슬금슬금 붙어서고, 재상들의 여론을 파도처럼 일으켜 굳어있던 황제의 마음을 하나둘씩 움직이고.


대공을 차지하려는 경쟁의 최종 승리자가 되기 위해 로튼 가에서 뻗었던 대담하고 잔인한 손길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간악한 이간질은 황제의 화를 끝도없이 돋궈냈다. 정교한 로튼의 농간 속에, 라이는 감히 황제의 명에 거역하는 무엄한 위치에 세워지게 되었고 폭발하는 아비의 분노에 당해 초주검이 된 채 마차에 실려오는 지경에까지 이르고야 말았다.


허나, 아무리 그래봐야 소용없었다. 어차피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아온 제멋대로인 인생, 그정도 압박은 별로 대단할 것도 없다는 심드렁한 태도였다.


결국 로튼 가는 자신들이 처음부터 방향을 잘못 잡았음을 깨달았다. 얼마후 다시 심기일전한 그들은 라이의 주변에 희미하게 엮은 덫을 놓기 시작했고, 준비된 순간 확 당겨진 올가미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한 사내가 걸려들게 되었다.


비록 현직에선 물러났으나 여전히 시아멘타 제국 군부에 최고의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람. 어려서 혼자 남은 라이를 지켜내고 보살펴 주었던 군부의 전직 대신이자 이스의 아버지, 바크론경 이었다.


역모의 대죄가 뒤집어 씌워졌다. 그를 따르던 군부의 무수한 관료들에게 피할 수 없는 칼날이 차례차례 들이 닥쳤다. 아버지의 후광을 피해 전방을 떠돌던 이스에게조차 그 칼끝의 매서움은 예외없이 겨눠졌다.


길의 정점에서 라이는 항복했다.


저들이 들이민 요구사항 전부를 아무런 반항없이 그대로 받아들였다. 픽 웃어버린 다음 하고싶은 대로 하라며 그가 고개를 끄덕여준 댓가는 처형 전날 감옥에서 풀려난 바크론, 그리고 그의 하나뿐인 혈육, 이스의 목숨이었다.


대공을 움켜쥔 로튼 후작가는 거칠 것 없이 폭주했다. 비첸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 권력의 달콤함을 바닥까지 탈탈 털어 여한없이 맛보았다. 제국을 이루는 모든 유형과 무형이 자신들의 가문을 향해 고개를 숙이는 황홀한 백색 안개 속에 휘감겨 살았다.


그렇게, 그들의 묘수는 악수로 변했다.


기껏해야 국경의 한직이나 떠돌며 느슨하게 살아가던 이스가 작정하고 군부의 중심으로 뛰어들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가면서 그녀가 펼친 손 아래로 숨어있던 진짜 세력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충직했던 상관과 동료를 억울한 죽음으로 잃어버린 이들의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바크론이 현직시절 빈틈없이 엮어놓았던 단단한 체계는 고스란히 살아남아 이스에게로 넘어왔다.


이스는 통솔력이 강한 리더형 인물이자 군부의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아는 지략가 타입의 성향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가진 저 무수한 장점들을 다 없는 셈으로 친다해도,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단 하나의 강점만을 가지고도 자신이 원하는 영광을 온전히 제힘으로 거머쥘 수 있었다.


성검이라 칭해졌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보적인 그녀의 검력은 눈 앞을 막아서는 것은 무엇이든 베어 없애며 압도적인 승리로 전투를 쓸어버렸다.


그런 그녀의 실력과 후광 앞에 군부의 모든 세력은 아낌없이 충성했다. 계획했던 전부를 손에 넣은 이스는 마침내 비상하여 시아멘타를 날아 오르며 지난 날의 치욕을 발아래로 짓이겼다.


황제마저도 함부로 손대기 껄끄러울 정도로 막강한 힘을 쥐고있는 그녀는, 라이크릭스 대공을 철저히 비호하고 제국군의 모든 것을 손끝으로 움직이는 나라의 핵심 인물이자 군부의 첫번째 재상, 이스 하트웬이었다.


두각을 드러낸 이스의 군부가 대놓고 로튼과 척을 지게 된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로튼의 손이 뻗어있던 모든 곳은 꿈쩍없는 힘의 장벽에 막히기 시작했다. 슬슬 추를 기울인 균형의 저울은 평평하고 견고했던 로튼의 자리를 어느새 미끄럼틀 같은 아슬한 경사 위로 세워놓고 있었다.


이제 로튼은 시에린이 대공비에 안착한 다음 무슨 수를 써서든 라이를 사로잡는 것만을 최우선의 과제로 꼽고 있었다. 그것만이 지난 날 가문의 영광을 되찾게 해 줄 마지막 발판이 되리라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라이의 루카라니. 이런 상황에 라이의 곁에 선 카디를 그냥 두고 앉았을 로튼 가가 아니었다.


잘 정비해 놓은 길에 그녀를 올려놓았을 터였다. 계획대로 짜여진 빈틈없는 함정은 카디의 입에서 나올 '대공의 허락을 받지 않고 외출했다'는 솔직한 한마디를 받아먹으려 음산한 구멍을 벌린 채 먹이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그거면 모든 게 끝이었다.


나라의 첫번째 율법이자 제국의 근간, 비첸의 혈통에 관한 규율. 이를 어긴 일에는 누구도 나설 수 없다. 라이는 물론이고 설령 황제라 해도, 그 함정에 빠진 루카는 구해낼 수 없었다.


마침내, 안헬은 결심이 섰다.


자신의 뒤통수에 대고 화르르 쏟아지는 놀란 시선들을 하염없이 뒤로한 채 그녀는 뛰었다. 한치도 망설임 없는 달음박질 끝은 궁의 수석 말 관리사를 끌어당겼다.


어리둥절한 그에게 던져진 다짜고짜의 우격다짐은 그들을 태운 검은 흑마가 수도에 위치한 이스의 집무실까지 순간에 내달리도록 하는 믿지못할 기염을 토했다.


'멀지 않은 곳에 계시니 바로 여쭐 수는 있다. 헌데 지금 전하께서 이 일을 아시면, 너는 아마도 살아남기 힘들텐데.'


'전하께서, 사인한 오터가멧을 .. 내어주실까요?'


'글쎄. 일단 루카는 살려놓으실테지'


'그럼 저는 괜찮습니다.'


난처한 표정으로 웃으며 '나 이거 또 잘못한건가?' 중얼거리다 입을 앙 다물며 손끝을 쥐어뜯던 카디의 미소가 마지막으로 꼭 한번 더 보고 싶었다.


**


나는 라이의 집무실 앞으로 안내되었다. 눈 앞을 가로막고 있던 거대한 연갈색 문은 마침내 안쪽의 허락을 얻어 느린 움직임을 보였다.


들어서자마자 빠르게 내부를 스캔했다. 제발, 바닥에 널부러진 사람모양 같은 것이 없기를. 그저 공허하고 하얀 공간 그대로, 언제나처럼의 그 모습 오직 그것뿐이길. 제발. 부디 제발.


"와서 앉아"


짜증스런 일갈이 떨어졌다. 두근거리는 가슴께를 두 손으로 꽉 누른 나는 마침내 크게 한숨을 집어삼키며 라이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가 그와 마주한 자리에 얌전히 앉았다.


깨끗했다. 머릿속으로 상상했던 온갖 험악한 일은 벌어져 있지 않았다. 저만치 떨어진 벽에 붙어 선 이들 중에 분명 안헬이 서 있음을 알아볼 수 있었다.


"저기.. 미안해요. 그.. 허락을.. 몰랐.."


"나를 시험해 보고 싶으냐?"


뚝 잘린 말 끝에 차디찬 비웃음이 붙어섰다. 죄인마냥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니 내려쏘아보는 얼음장 같은 시선에 심장이 굳어가는 기분이었다.


얼마든지 나를 무릎꿇려 망가뜨릴 수 있는 거만한 눈빛이었다. 신경질적으로 구겨진 수려한 미간은 이미 그가 참을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 있음을 깨닫게 했다.


"그런 적이 있긴 했다. 내가 어디까지 참아주는지 선을 알아보려던 것들이 있었지."


긴 잔에 가득 담겨있던 텟셀이 어느새 그의 입 안으로 넘어가 자취를 감췄다. 이제보니 보통 많이 마신 게 아니었다. 테이블 위를 구르고 있는 빈 텟셀 병이 적어도 세 병은 족히 넘어 보였다.


"헌데, 내게는.. 그런 선 같은거, 없다. 같은 일을 말없이 그냥 넘어가기도 하고.. 다음 번엔 경고 없이 목을 베기도 한다. 똑같은 것을 저지른 놈들 중 하나는 내게서 상을 받아가고, 하나는 발목이 잘린 채 쫓겨난 적도 있었지."


라이가 손에 들린 술잔을 빙그르르 돌리며 딴소리를 하듯 중얼거렸다. 테이블에 팔꿈치를 느슨히 기댄 그는 한 손으로 관자놀이 근처를 짚어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고 있었다. 라이의 표정이 차츰 어둡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제야 멈춰있던 생각을 정리한 모양이었다. 탁 소리를 내며 테이블 위에 놓아진 잔에서 반쯤 채워진 텟셀이 테두리를 넘을 듯 찰랑거렸다.


라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청아한 느낌이 드는 그의 짙푸른 눈매가 가늘게 내려뜬 시선을 타고 나를 향했다.


즐겨입는 무늬 없는 흰 셔츠가 오늘따라 지독할만큼 녀석의 분노와 어우러져 보였다. 시린 달빛이 내린 절벽 끝에 선 도도한 은빛여우를 보고있는 듯한 기이한 전율에 주욱 소름이 돋았다.


느릿하게 걸어 내 앞으로 다가선 라이가 문양이 새겨진 손을 확 잡아채 자신의 눈 밑으로 들어올렸다.


"네게 새겨진 이딴 것을 믿느냐? 이게 있으니 뭐든 해도 될 것 같아? 까짓 손목, 잘라 버리면 그만이다. 못할 것 같으냐?"


"아.. 아닙.."


흐윽 소리를 참아 삼키느라 말이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그가 붙들고 있는 손목 주변으로 폐부까지 찔려오는 지독한 냉기가 스멀거렸다.


"두번 다시 함부로 까불지 말아라. 네게 있을지 모를 만에 하나에 대한 가정, 단지 그것때문에 내 곁에 두고 지켜보려는 것 뿐이니. 널 루카로 삼은 이유는 오직 그 뿐이다. 명심해라."


"..네.. 에.. 하윽.."


라이에게 붙들려 있던 손목이 홱 내쳐졌다. 거칠게 털어버린 그의 손길 탓에 상체가 휘청 흔들리며 옆으로 중심이 쏠렸다. 가까스로 테이블 모서리를 움켜잡은 나는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 쳐질 뻔한 처량한 신세를 겨우 면했다.


내심 좀 억울하기는 했다. 몰라서 그런건데, 뭐 이렇게까지 사람을 구겨놓는지.


그래도 이정도로 끝나는 거면 다행이었다. 얼른 자세를 반듯하게 세워 반성하는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이제 그만 그가 나가기만을 기다릴 시간이었다. 그러고 나면 안헬이 내 곁으로 다가와 잔소리를 늘어놓아 주리라 기대하는 중이었다.


"루카를 담당했던 이가 누구냐"


무덤덤한 라이의 목소리가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하며 뒷목을 뻣뻣하게 굳혔다.


왜 .. 이 타이밍에 .. 안헬을 찾아?


망설임 없는 움직임이 먼 발치에 어른거렸다. 눈쌀을 찌푸려 자세히 바라보니 안헬의 손이 뒤로 결박되어 있는 것이 이제야 인식되어 내 머릿속을 돌렸다.


양 쪽에 선 두 사람의 하인이 안헬을 가볍게 끌어당겨 바닥으로 내치듯 무릎꿇렸다.


"안헬 도스입니다, 전하. 그동안 루카의 전속시녀로 배정받아 일했습니다."


숙이고 있는 작은 몸을 타고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가 전해져 나왔다. 두려움에 물든 울음을 참고 있는게 분명했다.


"채찍형을 내리고 신분을 없애라. 형을 집행한 뒤 노예로 삼되, 도중에 죽어도 상관없다."


뭐.. 이 망할 자식이.. 또.. 뭐라고..


꽈드득 얼어버린 내게는 하찮은 눈빛 한번 돌아오지 않았다. 다시 자리로 돌아가 앉은 그는 성가시다는 듯 손을 한번 털어 허공에 두세번 저어보였다. 그 짧은 손짓에 순간 반응이 일어나며 둘러선 이들이 일제히 몸을 틀어 늘 하던 일을 향해 걸음을 딛었다.


내 눈앞의 세상은 완벽하게 허물어지고 있는데, 저들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제 할일을 시작했다.


시중을 드는 이들이 빠르게 테이블 앞으로 와 술병들을 정돈하려 손을 뻗었다. 몇몇은 벽을 두른 램프를 하나하나 점검하느라 눈을 빛냈고 누군가는 여기저기 창쪽으로 걸음을 걸어 바람과 커튼을 단속해 놓으려는 단정한 의지를 보였다.


그 일상적인 동작들 속에, 안헬은 별다른 반응없이 자신을 당기는 손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어딘지 약간 안쓰러운 몸짓으로 애써 무릎을 펴 일어나고 있는 정도가 평소와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다가올 뿐이었다.


이 세계를 살아가는 모든 것들은 제정신이 아님이 분명했다. 도대체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을 붙들고 왜 이런 지독한 짓을 밥먹듯이 저지르는지. 이제는 더이상 이해도, 용납도, 그 어떤 것도 내게는 허용되지 않았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안헬의 곁으로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끌려나가던 그녀는 불현듯 나타나 앞을 막아서는 나를 보며 두배쯤 커진 눈으로 얼어붙어 버렸다.


"안돼, 놔줘. 절대 안돼."


팔을 붙들고 있던 손 하나를 탁 쳐낸 뒤 안헬의 웅크린 상체를 두 팔로 감싸 안으며 라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예상했던 대로, 어이없다는 듯 가늘어진 그의 눈길이 짙푸른 빛을 발하며 나를 향해 있었다.


"화풀이가 필요하면 나한테 해요. 안헬은 아무 잘못 없어. 내가 나가는지 어쩐지도 몰랐던 사람한테 이게 무슨 짓이에요."


바르르한 떨림이 새겨지듯 맺혔다. 분하고 억울한 건지, 무섭고 두려운 건지. 하여간 악에 받친 내 안의 전부가 하나도 빠짐없이 흐름을 깨고 서서 말끄럼한 그의 시선을 뚫어져라 마주했다.


궁지에 몰린 쥐를 어떻게 가지고 놀다 죽일지 가늠해 보는 고양이처럼, 지긋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그가 천천히 일어나 내 앞으로 걸어왔다.


"머리가 나쁜가.. 아니면 설명이 부족한가.. 함부로 까불지 말라는 게 그냥 한번 해 보는 소리 같아? 화풀이? 내 화를 받을 자신이 있다, 그런 뜻인가본데. 그럼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손 하나 까딱 못해보고, 피를 토하는 심정이 어떤 것인지 한번 경험해 보겠어?"


투두둑. 내 의지 따위 가볍게 무시해 버린 투명한 눈물이 바닥으로 떨어져 소리를 냈다.


그가 가진 압도적인 힘이 온 신경을 찍어눌렀다. 깐에는 이를 악 물어 참아보려 해 봐야, 미친듯한 떨림도 찢어지는 공포도 아무것도 바람대로 멈춰주질 않았다.


무능하고 무기력한 나를 절감해야 했다. 어차피 이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최선을 다해 빌어보는 것 외엔 다른 도리가 없었다.


"나.. 필요할 수도 있다면서요. 전하가 말한 그.. 만에 하나에.. 내가 진짜.. 소용이 있을 수도.. 있는 거 잖아요.


그게 뭐든, 만약에.. 정말 혹시라도.. 내가 쓸모가 있는 순간이 온다면, 절대 다른 생각 않고 오직 전하만을 위해 사용되어 드릴게요.. 정말. 꼭 맹세해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딱 한번만 내 부탁 들어줘요. 안헬, 봐주세요. 제발.. 시키는대로 뭐든 할테니.. 제발요."


가늘고 차가운 그의 손이 내 턱끝을 움켜쥐었다. 흡 하는 짧은 비명과 함께 고개가 젖혀졌다. 송곳같은 시선으로 내려다 보는 그의 눈길은 흉폭한 분노에 뒤범벅되어 있었다. 가늘게 뻗어든 짙푸른 눈매가 새파랗게 이글거리는 유황불꽃 같았다.


"끝까지 신경을 거슬러 볼 생각인가 보구나. 그래, 그렇게 해라. 굳이 이런 방식으로 네 신세를 망치겠다면, 그것도 어차피 나쁠 것 없지."


짓눌러 참은 벌건 홧증이 차디찬 손끝을 타고 절절히 전해졌다. 팩 고개가 돌아가며 그의 손에서 놓아졌다. 내던지듯 거칠게 떠밀려진 나는 약간 걸음을 주춤거리다 뒤로 몇발짝 물러서게 되었다.


"가둬라. 앞으로는 들일 필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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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시첩[6] 24.09.06 7 0 12쪽
5 시첩[5] 24.09.05 6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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