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망한 대공전하의 난감한 시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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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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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1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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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8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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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4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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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첩[4]

DUMMY

바다같아..


시린 다크블루 빛의 난연한 눈동자가 열없는 기색으로 나를 향했다. 이리저리 반사되는 빛에 따라 짙푸른 빛이기도 하고 엷은 잿빛 같아 보이기도 했다.


눈을 마주치니 모든 것을 빼앗긴 기분이었다. 마치 깊은 바다 속으로 속절없이 잠겨들어가듯 나를 끌어당긴 그의 시선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다.


"이름이 뭐지? 나고 자란 곳은..?"


들고 있는 술을 천천히 음미하듯 한모금 삼킨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나른히 탐색하는 시선에 까닭모를 두려움이 덧입혀졌다.


"카디.. 아론.. 살던 곳은, 솔리온.. 마을입니다."


나는 꽤 강단있는 성격이고 누구한테 억눌리는 타입이 아니다. 고등학교 때까지 홑몸으로 버텨냈던 무수한 시간들 속에 이를 악물고 살아가는 일 쯤이야 내게는 그다지 대단할 것도 없는 편이었다.


어쩌면 그 근성의 마지막이 지난 축제 날 밤에 저지른 행동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른히 미소 지으며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베어버린 녀석의 광기 앞에 내가 가진 경험과 상식은 모두 죽어버린 것만 같다.


다정했던 마을의 모든 것을 뭉개버렸다는 그의 손끝을 보고도 끓어오르는 투지가 아닌 무기력한 서러움이 제일 먼저 달려와 눈 앞에 뒤덮였다.


어차피 반항할 주제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떨어진 이 알 수 없는 세상은, 고작 이정도 습득한 정보를 바탕으로 덤비고 맞서 보란듯이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세상이 아니란 걸 알았다.


"그 날, 네 입으로 말했을텐데. 그 마을에 온지 며칠 되지도 않은 사람이라고."


차가운 비웃음이 날카롭게 떨어졌다. 픽 웃으며 다시 술잔을 입에 대던 그가 갑자기 눈썹을 찌푸리며 울컥 치솟는 무언가에 급하게 몸을 구부렸다.


눈앞의 하얀 녀석이 기침을 해대기 시작했다.


그냥 몇 번하는 헛기침 수준이 아니었다. 한 손으로 가슴께를 짚은 그의 구부린 등이 바르르 떨리는 게 눈에 보일 지경이었다.


거의 피를 토할 듯 기침을 해대는 녀석의 뒷목에 푸른 핏줄이 섰다. 거칠게 쿨럭 거리는 소리가 공허한 공간 속을 찢어놓는 날카로운 메아리처럼 넓게 퍼져나갔다.


"젠장"


한참 만에야 숨이 멎는 듯하던 소리가 가늘게 잦아 들었다. 파르르 떨며 몸을 세운 그가 사정없이 인상을 구긴 채 중얼거렸다.


기침은 지가 해놓고 왜 기분이 상한건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심정이 확 바뀐 모양이었다. 못내 짜증스런 표정으로 이마를 짚고 섰던 녀석이 갑자기 손에 들린 잔을 홱 치켜들어 바닥을 향해 내리쳐 버렸다.


쨍그랑!!!!


고급스런 음각이 새겨져 반짝반짝 빛을 반사하던 투명한 유리잔이 순간 알알이 터지는 자잘한 파편으로 모습을 바꿨다. 바닥을 튀어오르는 무수한 빗물 방울처럼 작은 유리조각들이 이리저리 날았다.


그래봐야 드문드문 주변을 둘러 선 하인들은 그의 날카로운 신경질에도 아무런 감흥이 없어보였다. 늘 겪는 익숙한 일인 모양이었다. 눈썹 한번 꿈틀하는 이 없이 그저 평온한 얼굴로 눈 앞의 모든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지시가 내려지기 전에는 이 공간이 우르릉 소리와 함께 무너져 내린다 해도 손하나 까딱하지 않을 사람들인 것 같았다.


"제대로 말 못해?"


짜증은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그래봐야 더이상 답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이 세계의 마을 이름은 솔리온 밖에 모르고 여기서 내 이름은 카디 아론 밖엔 없으니까.


그럼 지금 여기서 '나는 대한민국 서울에서 살았고, 직업은 해커였고, 이름은 도율혜 입니다' 라고 자기소개를 할 수는 없으니까.


아랫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낮추는 내 동작이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고요한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가라앉아 있던 눈이 마침내 깜빡임을 멈추고 다른 곳을 향했다.


"하! 그래. 고집 있으시다, 뭐 그렇단 말이지"


씹어뱉는 소리로 한마디 얹은 그가 나의 둥그런 구 앞으로 한발짝 다가섰다. 녀석의 손이 가볍게 움직였다. 그 하얗고 가느다란 손끝이 잠깐 곡선을 그려 눈앞을 스치는가 싶던 순간 나를 감싸고 있던 이 단단한 물체가 팡 하고 터지듯 흔적없이 사라져버렸다.


"헉!!"


투명한 비눗방울 같은 게 툭 터져 없어졌다. 동그라미 속 허공에 동동 떠있던 나는 그대로 바닥을 향해 고꾸라지듯 곤두박질 치는 신세가 되었다.


철푸덕 소리와 함께 사정없이 엎어져 버렸다. 무릎과 손목에서 뼈가 으스러지는 것 같은 강렬한 통각이 쓸어내리듯 밀려들었다.


"치워라. 나중에 다시 보겠다."


감정없는 말을 맺은 뒤 돌아선 그는 자박자박 소리와 함께 내게서 멀어졌다. 하으윽 신음소리를 삼키며 몸을 웅크리는 곁으로 서넛의 하인들이 다가와 팔을 붙들어 일으켜 세웠다.


저들의 단단한 손길에 얽혀 질질 끌려나가는 내게 가늘게 떨어지는 푸른 눈빛의 시선이 말끄럼한 빛으로 내려앉았다.


**


"악!!"


나는 또 어딘가에 내던져 졌다. 양 팔을 붙들어 나를 이곳까지 끌고 온 두 사람이 약속이나 한 듯 하나의 동작으로 거칠게 밀어내며 바닥에 팽개쳤다.


몸에 힘이 들어가는 곳이 단 하나도 없었다. 분명 복도를 지나오던 길은 화사하고 밝은 빛이 온 사방에 번져있었는데 들어선 공간은 지극히 컴컴하고 습한 공기가 눅진했다.


"버텨봐라.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낯선 목소리가 싸늘하게 떨어졌다. 나를 밀어버린 두 사람 앞으로 한발짝 걸어나선 다른 이가 있었다. 단정하고 깔끔한 모습이었다. 어디 한군데 장식된 것 없는 밋밋한 차림에 눈에 띄지 않을 법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한눈에 보기에도 신분이 낮지 않겠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안에 들어선 다른 이들이 더할 나위 없이 공손한 태도로 그녀의 뒤에서 몸을 낮추고 있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비록 검을 차고 있지는 않지만 복색이 좀 달랐다. 제복 차림인 듯 싶기도 해 어쨌든 여느 하인들과는 다른 사람인 것 같았다.


"저.. 저기..잠깐만요."


돌아서 나가려는 그녀에게 안간힘을 쥐어짜 말을 붙였다. 여기가 마지막일 것 같았다. 이 컴컴하고 음습한 공간이 내가 이 세계에서 보게될 마지막 장면인게 분명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이제 진짜 끝내려는 용기가 생긴 건지도 몰랐다. 내가 망쳐버린 저들의 삶이 사실은 그게 아니라는 말이 듣고 싶었다.


"솔..리온 마을.. 사람들.. 어떻게.. 됐어요? 정.. 정말로.. 그 하얀 자식이.. 그 나쁜 놈이.. 설마 다 .. 다 죽..였나요?"


로엘의 수줍었던 발그레한 미소, 제논의 짓궂은 친구들이 건네던 장난스러운 말투, 또래 아가씨들이 가늘게 흘겨뜨며 중얼거리던 말들.


마을 금고지기 아저씨가 내게 보내주던 따뜻한 인사도, 바람이 차다며 여며주던 식품점 할머니의 외투깃에 내려앉은 주름진 손길도.


설마 모두 다 사라졌을까? 뭔가 오해일지도 몰라. 사실은 그게 아닐지도. 어쩌면 다들 무사히 아침을 맞이하며 또 다른 하루를 열고 있지는 않을까?


철썩!!


눈 앞의 장면이 빠르게 휘돌아 감겼다. 잠깐새 내게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미처 파악할 찰나조차 없었다.


"어.."


입안 가득 찌릿한 통증이 얼얼하게 퍼졌다. 찝찔한 피맛이 혀끝을 감싸 번지기 시작했다.


"네가 무엇이든, 설령 무슨 능력을 가지고 있든. 내게는 상관없다. 그러나 라이크릭스 대공전하, 그 분의 존엄을 모독하는 것은 용서 못해. 천박한 네 입, 그렇게 놀리지 말아라. 감히 너 따위가 함부로 입에 올려 말할 수 있는, 그런 분이 아니시다."


언제 잡힌 건지도 알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낚아챈 손길에 목이 졸리고 있었다. 커컥 숨이 끊어지는 소리로 바둥거리는 나를 툭 털어내듯 손에서 놓은 그녀가 조용히 몸을 일으켜 문을 향해 걸었다.


가늘게 흐려지던 눈 앞의 세상이 어느새 캄캄한 검은 빛의 미소에 빠져 주변을 뒤덮기 시작했다.


**


쪼르륵..


뭔가가 바닥에 떨어지는 희미한 소리였다. 번쩍 눈을 뜬 나는 정신없이 몸을 일으켜 소리나는 곳을 향해 손을 뻗었다.


물.. 물..좀... 제발... 물...


아무것도 구분되지 않을 만큼 컴컴한 공간이었다. 이 곳에 얼마나 갇혀 있었는지 알 수도 없고 시간을 세는 것은 더군다나 불가능했다.


시커먼 어둠에 온 몸은 잠식되었다. 숨을 쉬고 있는지 코 밑에 손가락을 대 본 적이 여러차례였다. 내가 어둠인지 이 어둠이 나인지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먹먹한 공간에 동동 떠있는 것 같은 시간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정직한 생명체의 반응이 하나 둘 몸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팠다. 점점 손대기도 싫을만큼 입술에 껍질이 서고 까끌해져 가는 내 안의 수분은 남김없이 모두 다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혼미해지는 상황 속에서도 왜 숨이 끊어지지 않을까 잠깐씩 원망스러웠다. 이렇게 사라져버리면 좋겠는데. 더 이상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진짜 끝이 닥쳐오면, 그러면 정말 바랄 게 없겠는데.


생명이 질기다는 것에 몸서리가 쳐졌다. 이렇게 죽지못해 끝까지 살아남아 있는 나는 미친듯이 목이 말라 견딜 수가 없었다.


이대로 죽여도 좋으니 물 한모금만 마시고 죽을 수 있게 해주면 여한이 없겠다는 생각이었다. 음식도 빛도, 아무것도 필요없으니 그저 물 한모금만. 그거 딱 한번만 마시게 해주면 산채로 뼈를 갈아 버린대도 괜찮을 것 같았다.


희미하게 떨어지는 물소리에 나갔던 정신이 빠르게 돌아왔다. 언제 불이 밝혀 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여튼 이 까만 공간에 주황빛 불이 눈부시게 밝혀져 있었다.


덜덜 떨리는 내 눈앞에 나른하게 웃고 선 저 재수없는 자식이 아무렇지 않은 손길로 물병을 기울여 바닥에 졸졸 물을 뿌리고 있었다.


"무.. 물.. 좀..."


"목말라? 마시고 싶어?"


바닥에 번져나가는 물이 황금보다 귀했다. 먼 발치에 흐르는 저 안타까운 물에 닿지 않는 손 끝이 미칠 것 같았다. 찰박 엎어놓은 물을 밟은 그가 한 걸음에 내 앞으로 다가와 섰다.


바닥에 엎어져 부르르 몸서리치는 눈길로 올려다 보는 내게 어느새 그의 시선이 빠르게 가까워졌다.


"하윽.."


거침없는 손길에 머리채가 확 쥐어 잡혔다. 천천히 몸을 숙여 손을 뻗은 녀석이 내 머리카락을 한 움큼 붙들어 사정없이 목을 꺾어 고개를 뒤로 젖혀버렸다.


"그럼 말해. 진짜 이름. 살던 곳이 어딘지, 말 하라고."


"대.. 대하..."


"뭐?"


"대..한..민국.. 서우..울...에서..사랐..이.. 이름.. 도.. 유..울..혜.. "


나도 내정신이 아니고 더군다나 내 입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 와중에 뇌도 입도, 뭐하나 제대로 명령하고 실행할 여유같은 건 없었다.


되는대로 지껄이고 있었다. 어차피 이 놈이 내 말을 알아들을 리도 없고 이제 나도 이판사판 될대로 되라는 마지막이었다.


정신나간 여자의 몸부림 쯤으로 여기고 제발 저 물 한모금만 베풀어 준 다음, 그런 다음 여기서 죽여주면 좋겠다.


바라는 건 오직, 그것 뿐이었다.


근데 나.. 또 뭐.. 잘못한건가..


알 수 없는 정적이 한참이었다. 헛소리 지껄인다며 바닥에 다시 내동댕이 치거나, 이게 아직 정신 못차렸다며 한바탕 밟아버리거나. 뭐 이렇지 않을까 발발 떨고 있는데 이상하리만치 반응없는 정적에 뭔지모를 분위기가 진심으로 수상했다.


녀석이 차분히 내게서 손을 놓고 약간 비틀거리는 동작으로 몸을 일으켰다. 슬쩍 보기에도 표정이 좀 묘하게 바뀐 듯 기이하게 가라앉은 눈빛이었다.


이제 또 결이 다른 공포가 색다른 낯으로 밀려들었다. 서늘하게 떨어지는 그의 명령에 이해하기 힘든 마음이 들쑥날쑥 엉켰다.


"살려서.. 데려다 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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