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망한 대공전하의 난감한 시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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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키7
작품등록일 :
2024.09.01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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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9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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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9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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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4]

DUMMY

나는 식습관이 정말 엉망인 편이었다.


멍하니 화면 속에 빠져 정신을 팔고 있다보면 어느새 놓아둔 음식은 차갑게 식고 팅팅 불어 그릇의 절반도 못먹고 버린 적이 많았다.


그렇게 혼자 끼니를 때우면서 모니터에서 보여주는 수많은 데이터에 정신팔렸던 시간과 지금 내 상황에 별 차이가 없는 느낌이다.


앞에 놓인 우아한 접시들이 진심을 다해 나를 유혹하고 있지만, 눈 앞에 펼쳐진 영화같은 장면을 쳐다보느라 도무지 음식을 먹을 의지가 솟아나질 않았다.


만찬장은 재상과 핵심 관료들 여러명이 함께 자리할 수 있는 제법 웅장하고 기품있는 곳이었다.


광활하다는 표현이 맞을 법한 옅은 황금빛 테이블 여러 개가 정확한 간격을 맞춰 병렬로 놓여있고 벽면 주변을 두른 신상 조각들은 자르르한 윤기를 빛내며 투명한 분수를 흘려내렸다.


노을 지는 무렵이었다. 붉은 햇살들은 폭이 넓고 매혹적인 창을 침범해 저마다 대리석 바닥 위를 자박자박 물들였고 벽면 곳곳에 장식된 시아멘타의 공식 휘장은 눈처럼 하얀 면을 깊숙히 파고든 청색빛 두근거림을 까닭없이 솟게했다.


이상할 정도로 마음을 벅차게 하는 공간이었다. 제국의 위엄과 비첸의 권능이 이뤄내는 신비한 경외감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도록 만드는 독특한 분위기를 가진 식당이었다.


나는 데이키먼이 안내해 주는 자리에 반항없이 앉았다. 시키는대로 했으니 뭐 잘못한 거 아니겠지 싶었는데, 뭔가 웅성웅성 정리가 된 다음에야 내가 공식적인 황태자의 자리에 앉혀졌음을 알게 되었다.


뒤늦게 들어선 황제는 이상할 정도로 기뻐했다. 어쩜 이렇게 기특한 생각을 했느냐며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를 칭찬했다.


왜? 그러니까, 정말, 진심으로. 왜??


결국 황제와 가장 가까운 자리는 내 몫이 되었고 옆자리에 라이가, 그리고 두어자리 떨어진 건너편에 데이키먼이 앉게 되었다.


음식이 목구멍으로 넘어갈 턱이 없었다. 뭔가 또 당한건 아닐까 정신이라도 바짝 차리려 눈에 힘 주고 집중했는데, 어느샌가 그것도 흐물흐물 풀어져 나른해지고 말았다.


어려워 할 이유가 없는 상황이었다. 다들 내 존재에 대해 아무 관심이 없다고 해야 맞았다. 편하게, 그리고 즐겁게 식사해라 한 것이 황제가 건넨 공식적인 말의 전부였고 그 뒤론 저들끼리 이어진 업무의 연장선 같은 만찬이었다.


심지어 사람들 역시 황제와 함께 하는 식사 자리를 별로 어려워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멍청한 얼굴로 점차 분위기에 녹아드는 내게 시선을 내려 깐 라이가 상황을 파악할 한마디를 던져주었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제국부의 전체 회의다. 어차피 소개시킬거 여기가 제일 편할 것 같아 선택한 것이고, 이 자리에선 굳이 널 신경쓸 사람없다."


이 때부턴 나도 약간 긴장이 풀어져 영화감상 모드 같은 걸로 빠져버렸다. 저들의 말투, 표정, 손동작이나 뜻없는 제스쳐. 모든 것이 흥미롭고 심지어는 어느정도까진 재미있기도 했다.


세트장도 훌륭하고 의상도 인상적이긴 하다. 처음엔 그렇게 현실적인 영화의 한장면을 보는 듯한 즐거움에 빠져있기도 했지만, 슬슬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지루해지더니 어느새 정신줄이 훨훨 날아가고 있었다. 이제는 숫제 멍한 눈빛으로 저들의 말과 행동을 감상하고 있는 지경이었다.


"루카.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세요? 다른 것을 내어오라 할까요?"


내 뒤에서 시중을 들던 안헬이 거의 손대지 않은 접시를 걱정스럽게 내려다보며 작게 속삭였다.


전속 시녀란 지위 탓인지 안헬은 노이루티크궁의 하인들에게 민첩하게 지시를 내리는 제법 윗사람 같은 노릇을 하고있었다.


"괜찮아. 그냥 둬. 나 물 좀."


컵 안으로 찰박하게 물이 채워졌다. 조심스레 잔을 들어 뜻없이 한모금 마신 것은 더할 수 없이 시원하고 달콤할 정도였다.


신기해. 어떻게 그냥 맹물에서 이런 상큼한 맛이 나지?


묘한 시선으로 투명한 물컵과 잠깐 눈싸움을 하는 중간이었다. 아까부터 밀당하듯 언급되다 들어갔다 하던 저들의 논쟁거리 하나가 결국 몸집을 키우며 기세를 드러냈다.


"폐하, 더 이상은 마크데시안 영지의 상황을 좌시할 수 없습니다. 보유해둔 물은 이제 일주일도 넘기지 못할 것이란 보고가 계속 올라오고 있고 백성들의 불만도 극에 달해 있습니다."


아까 분명 황제가 그 일은 좀 더 두고보자 했던 것 같은데, 맞은편 자리 가까이에 앉은 재상이 다시 같은 일을 언급해 목소리를 키웠다. 그가 입을 열자 주변 몇몇이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빛냈다. 강하게 동의한다는 듯 의견을 보탤 준비를 마친 기색이었다.


어찌보면 자신의 지시에 대놓고 맞선 것이나 다름없을 텐데도 황제는 그다지 짜증스러워 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정 그렇다면 제대로 논의해보자는 태도로 그가 표정을 바꿨다. 막연히 오만하고 자기중심적일 거라 상상했던 것과는 달리 황제는 인상적일 정도로 꽤 의외인 타입이었다.


사람들의 제언과 논쟁을 끝까지 들어주는 성향인 듯 싶었다. 굳이 먼저 자신의 의견을 말해 아랫사람들이 하려는 말을 막지 않았다.


그렇다고 줏대가 없거나 심약한 것은 아니었으며 그의 입을 통해 나온 말에서는 거부할 수 없는 강한 힘이 느껴졌다. 대부분 인정하는 분위기 속에 황제의 결정은 수용되는 편이었지만 끝까지 이견이 따라붙은 일에는 한번 더 논의해 보자 다음 회의 시간이 약속되기도 했다.


유연하나 유약하지 않고 반듯하지만 딱딱하게 굳어있지는 않았다. 타고난 기질 자체는 크고 호탕한 듯 싶었고 자신이 한번 정리해 세운 논리는 어지간해선 양보하지 않는 고집스런 면도 강한 사람이었다.


여러모로 '오.. 사람 괜찮네..' 하는 느낌이 지배적이었다. 다만 성격은 좀 많이 급해 보인다는 게 오늘 내가 그에게서 느낀 단점? 같은 거였다.


"차라리 그 지역에 물길을 새로 내는 것은 어떤가. 마크데시안 지역으로 인력과 물자를 집중해보면 두어달 안에 해결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지금 그만한 여력은 불가능합니다. 다른 지역에 쓰일 힘을 모두 마크데시안으로 몰아줘 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럼 막아야할 반발과 치러야할 희생이 너무 큽니다."


"얀족과의 협상은, 영 어렵겠나?"


별 수 없겠다는 듯 황제가 고개를 돌려 약간 먼 자리에 앉은 이에게 툭 말을 던졌다. 담담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그는 한숨섞인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요구사항이 너무 터무니 없습니다. 저들의 물건에 대한 무한 교역이라니요. 기껏해야 유목하며 지어낸 양털옷이나 건초더미 따위를 두고 제국의 식량과 물건들을 내어달라는 말 그대로 생떼입니다."


"대공전하, 혹시 전하께서는 정말 방법이 없으시겠습니까?"


맨 처음 말을 꺼냈던 재상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라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슬쩍 그 재상의 빛나는 눈동자에서 뭔가 알 수 없는 의도가 엿보이는 느낌이었다.


영문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좀 수상한 기색이 느껴지는데, 빤히 속을 알만한 이들이 속셈을 모를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닥쳐있는 상황에 다른 도리가 없는 모양이었다. 라이가 무표정한 얼굴로 성의없는 답을 내놓았다.


"물은 길이 있어야 흐르네. 흐르거나 고여있거나. 속성은 그것 뿐이니, 길이 막혀있는 것에 뭘 할 수 있겠나. 설마하니 그 물을 정화라도 해달라는 소리는 아닐테고."


그래봐야 성격 어디 안가는 녀석이었다. 마지막 빈정거림에 한껏 짜증이 묻어 둘러앉은 이들을 움찔하게 했다.


제국의 북쪽 경계와 맞닿은 곳에 위치한 얀 왕국이라 했다. 대체로 유목민들이 부족을 이루어 사는 나라인데 심심찮게 시아멘타를 건드리는 꽤 골치아픈 사연의 주인공인 모양이었다.


몇해 전 언젠가부터 저들이 얀의 영토와 제국의 국경 지대가 닿아있는 지점에 사람들을 꾸준히 모으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인적 규모가 이뤄진 다음 저들은 그 지역 내 제법 큰 폭을 이루는 강 줄기 하나에 남몰래 공을 들여 일을 꾸며 놓았다. 강 옆으로 하나 둘씩 다른 물길을 파내어 마침내 흐르던 하나의 물이 여기저기로 갈라진 서너 갈래의 물길로 변하도록 만든 것이었다.


점점 다른 쪽으로 방향이 잡히게 된 강은 흐르던 물길의 중심을 생각지도 못한 곳으로 결국 완전히 틀어 버리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얀의 영토를 거쳐 시아멘타로 흘러오던 강물의 수량이 어느 샌가 차츰차츰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마침내 만만해진 물살을 앞에 두게 되자 저들은 강 하구에 제방을 쌓아올려 흐르던 물길 전체를 완전히 막아버렸다. 사람이 가진 손의 힘만을 이용해 제국 북쪽의 강물 하나를 깨끗이 말려버린 셈이었다.


광활한 영토를 가진 제국의 사정에 비추어 보면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긴 한 모양이었다. 기껏해야 중급 지류 정도의 강물이었고 마크데시안 영지가 제국 내에서 딱히 큰 비중을 차지하는 위치도 아닌 듯 보였다.


그래도 해결은 시급하다 다들 입을 모았다. 국경지대에 닿아 늘 얀족에게 시달리는 방패막이 노릇을 하는 지역이다 보니 이렇게 문제가 생겼을 때 해결해 주지 않으면 자신들만 소외된다 불만이 일어나는 것도 걱정스러운 점이란 의견들이 강했다.


안타깝게도 마크데시안은 다른 곳에서 들어오는 물길 없이 하필이면 딱 그 강물 하나뿐인 곳이었다. 지역에 물이 돌지 않으니 발생하는 문제가 내가 보기에도 만만치는 않았다.


당장 식수나 생활용수부터 문제였다. 그동안 다른 지역에서 며칠씩 걸려 공급해온 물로 조금씩 아껴가며 생활하고 있었지만, 그마저도 이제는 상황이 원활치 않아 지역민들의 불만이 점점 거세게 번지는 중이라 했다.


이걸 빌미로 얀 국이 제국에 들이민 요구사항은 꽤나 터무니없는 모양이었다. 외교를 담당하는 측에서는 절대 수용불가, 협상불가란 입장에서 한발도 물러서지 않은 채 고집이었다.


결국 공은 군부로 넘어갔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그쪽 영토 일부를 제국에 복속시켜 버리고, 그 다음에 협상이든 뭐든 진행하는 게 낫겠다는 강경한 입장들이 테이블 위를 날았다.


골치아픈 기색이었지만 황제 역시 별 뾰족한 수는 없는 듯 약한 신음을 섞어 끓는 소리를 냈다. 이만한 일에 군대를 일으켜 전쟁을 시작하자니 영 못마땅해 내키지 않는지 표정이 제법 가라앉아 있었다.


"이스, 어떠하냐. 정말 상대를 한다면.. 해볼만 하겠느냐?"


"붙어보자면야, 못할 것은 없습니다. 마크데시안 지역 피해를 최소화 시키는 게 가장 급한 일이니 군부는 폐하께서 명하시는대로 따르겠습니다."


"흐음.."


사실 제국의 군대와 유목국가가 가진 병사들 정도의 싸움이라 막상 전투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황제가 뭘 고민하는지는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어쨌든 전투가 일어나면 국경을 지키는 수비에는 혼선이 일어날 수 밖에 없다. 그 틈을 타 안으로 밀고 들어온 저쪽 병력 일부가 마크데시안 영지에 분탕질을 저지를 것임은 따져볼 필요도 없지 싶었다.


전투로 인한 피해는 오히려 지금보다 더 심각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아무리 제국군이 강력히 지킨다해도 저들이 펼치는 게릴라전 모두를 완벽하게 막아낼 방법은 없는 거였다.


"...버퍼 오버플로우..."


그 즈음 내 영혼 절반은 케트미헨궁 쉼터로 혼자 돌아가 나자빠져 있었고 절반은 이 만찬장 언저리 어딘가를 정처없이 헤메며 떠돌고 있었다.


저들의 논쟁과 입씨름이야 굳이 내가 귀담아 들을만한 것도 아니긴 했고, 뭔가를 먹기엔 이미 위장의 입구가 꽉 막혀 아무것도 안으로 들이지 말라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멍한 눈과 심심한 손길이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한쪽 귀로 파고드는 말소리를 다른 쪽 귀로 흘려 보내며 앞에 놓인 접시 한구석을 포크로 쿡쿡 쑤셔 헤집어 놓고 있었다.


"응? 방금 뭐라 했느냐?"


급작스럽게, 나른했던 상황이 변했다. 황제가 유난스럽게 목소리를 세워 내게 관심을 보이는 바람에 주변 모두의 시선이 순식간에 한데 모여 내쪽으로 와그르르 쏠려버렸다.


어.. 뭐야.. 방금 그거.. 설마 입 밖으로 말한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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