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드의 빌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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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티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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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7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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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9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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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드의 빌런 6

DUMMY

“부상 같은 건 없습니다.”


신해성이 자연스레 손을 빼려 했지만, 잔뜩 흥분한 오성급 에이전트 에반 블레이크는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럼? 왜 선수를 안 하는 겁니까? 이해가 안 되는데. 몸이 안 좋다 해도 숨길 필요 없어요. 맨발로 그런 테크닉이라니! 아까 그 정도만 뛸 수 있으면, 제가 조커 역할을 필요로 하는 구단을 좋은 조건에 소개해줄 수도 있습니다.”

“진짜 부상 없다니까요. 그리고 저 선수 맞아요.”

“감독 아닙니까?”

“감독 겸 선수요.”


신해성의 대답을 들은 에반 블레이크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플레이어 매니저?”

“네. 케니 달글리시, 루드 굴리트, 글렌 호들, 기타 등등 90년대까지만 해도 굉장히 많았죠.”


신해성은 자신이 좋소클럽으로 트래블을 달성하려면 이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필드 안팎으로 해결사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축구는 혼자 하는 게 아니니까.


물론 에반 블레이크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두 마리 토끼 다 잡으려다 자칫 둘 다 놓칠 수 있어요. 현대 축구에서 플레이어 매니저를 보기 힘든 이유는 성과가 안 나오기 때문입니다.”


예, 알아요. 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우승 못하면 뒤질 예정이라······.

신해성은 내심 구시렁거리면서도 골치 아픈 말을 둘러대는 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혹시 또 모르죠. 좋은 에이전트를 만나면 성과를 낼 수 있을지도. 그래도 이렇게 오셨으니, 자리부터 옮기시죠.”


에반 블레이크의 팔을 살포시 만진 신해성이 클럽하우스에 있는 사무실로 그를 안내했다.


이윽고 두 사람이 사무실에 마주 앉자, 에밀리가 따뜻한 커피 두 잔과 마른 수건을 내왔다.


“고마워요. 일찍 퇴근하세요.”

“어머, 진짜요? 앗! 감사합니다!”


오늘 종일 긴장하고 놀라느라 힘들었는지 유난히 기뻐한 에밀리가 사무실을 나갔다.


한편 신해성은 수건으로 대충 물기를 닦고 쇄골까지 풀어헤쳐진 단추를 잠갔다.


그를 신기한 동물 관찰하듯 어린아이 같은 눈빛으로 응시하던 에반 블레이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여기 오는 동안 호그와트에 초청받은 해리 포터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어요. 어떻게 우리 가족, 절친한 친구, 콜센터 밖에 모르는 내 개인 회선을 알고서 메시지를 보낸 건지, 어떻게 내 꿈을 알고 있는 건지. 무슨 MI6(영국비밀정보국)인 줄 알았습니다.”


사실 정보력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문제였다. 이곳이 아닌 다른 현실에서 본인 입으로 이야기한 정보들이니까.


“출처가 어딥니까?”


에반 블레이크가 물었지만, 신해성은 대답해줄 말이 없었다. 이쪽 세상에선 생면부지인데 “너한테 들었어”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영업 기밀입니다. 저랑 같이 일하면 이 무시무시한 정보력에 놀랄 일이 훨씬 더 많을 거예요.”


하나 에반 블레이크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초대장은 마음에 들더군요. 고객의 꿈을 이뤄주다 보니 정작 내 꿈은 뒷전이었는데, 꿈을 이뤄주겠다는 메시지는 훌륭했어요. 제가 고객들한테 늘 하던 말이기도 해서 더 와닿았습니다.”

“진심이 통해서 다행이네요.”

“단, 그런 이야기는 약속을 지킬 자신이 있을 때 해야 하죠. 선수로서 계약이면 환영이지만, 감독 일을 병행하며 다른 팀 선수로 뛸 수도 없는 거고. 감독으로서 자질도 미심쩍은 게 사실이에요. 투 잡을 소화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환경이 불안정한 구단에 선수를 공급할 수는 없습니다.”


그에 신해성이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저희 구단 기사를 보셨나 보군요.”


에반 블레이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거예요.”

“어디서 보셨죠?”


신해성이 그렇게 묻자, 에반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모든 언론사가 그 얘기뿐인데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에이전트가 아니라도 다들 알고 있을 겁니다. 당연히 제가 데리고 있는 선수들도 알고 있을 테고요.”


그때, 신해성의 진지한 표정에 한 줄기 미소가 피어났다.


“그러니까요. 지역신문도 아닌 메이저 언론사들이 전부 우리 피터버러 소식을 헤드라인에 걸었더라고요. 피터버러 소식지인 줄 알았지 뭡니까.”

“······?”


분위기가 이상했다. 선수 수급도 어려울 만큼 궁지에 몰린 마당에 이렇게 당당하다니?

그 순간, 신해성이 물었다.


“3부 리그에 있는 팀이 프리미어리그 소식을 밀어내고 헤드라인에 걸리는 걸 보신 적 있으세요?”

“······!”

“아마 피터버러라는 팀에 주목하는 건 홈팬들뿐이죠. 하지만 이젠 다릅니다. 이번 일로 피터버러라는 팀이 축구팬들 뇌리에 각인된 것만은 사실이에요. 가십거리가 됐으니 한동안은 다들 우리 팀을 예의주시할 겁니다.”

“아!”


에반 블레이크는 탄성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신해성은 이 자리에서 그가 선수를 댈 명분을 만들어낸 것이다.


“저는 이를 가십거리로 끝내지 않고, 해피 엔딩 드라마로 끝낼 자신이 있습니다. 그럼 블레이크 씨 회사의 선수들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겠죠. 모두가 외면할 때 피터버러를 부활시킨 영웅들로.”


어차피 최정상급 선수들을 거래하진 않을 터. 에반 블레이크로서는 리스크가 큰 배팅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선수들의 인생을 두고 계산기나 두드리는 졸장부가 아니었다.


“실패하면?”

“저는 경질되겠죠.”


아마도 그 즉시 신해성의 영혼은 소멸되겠지만, 그는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감독 잘리고 블레이크 씨 회사 소속 선수로서 새로 공 찰 팀을 구하게 될 거예요. 그냥 그렇게 저만 발을 빼면 너무 무책임하니까, 블레이크 씨가 수급해주시는 선수들 계약서에 팀 성적이 안 나올 경우 시즌 종료 후 해지 권한을 주는 조항을 첨부하죠.”


강수도 이런 초강수가 없었다.

얼마나 자신이 있기에?

에반 블레이크는 놀란 나머지 오히려 더 차분해졌다. 잠시 말없이 신해성을 응시하던 그가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과연 구단 측에서 그런 조항을 승인하겠습니까?”

“직접 말씀하셨잖아요? 지금은 어떤 선수도 우리 팀에 오려 하지 않을 거라고.”


신해성이 말을 이었다.


“안 그래도 빈약한 선수단에, 앞으로 팀을 떠나게 될 선수들까지 있어요. 시즌을 치르려면 조건을 떠나 어떻게든 선수를 데려와야 하는 상황입니다. 구단측도 어쩔 수 없죠. 그렇다고 가격을 후려치진 마세요.”


그는 귀여운 협박을 했다.


“그래야 저도 블레이크 씨 회사를 믿고 에이전트 계약을 맺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물론 에반 블레이크는 그 협박이 귀엽게 들리지 않았다.

그처럼 관록과 경륜이 쌓인 인물은 하나를 보면 열을 아는 법.

더군다나 선수들뿐 아니라 감독들도 관리를 하고 있는 그였기에, 신해성과의 대화에서 느낀 바가 있었다.


“좋은 감독이 될 수도 있을 것 같군요. 그렇지만 당신이 우리 회사로 온다고 해서 그만큼 뛰어난 선수들을 소개해줄 수는 없어요. 저는 선수들이 최소한 자신의 현재 몸값만큼은 받을 수 있게 해줄 겁니다. 그게 설령 경험을 쌓기 위한 임대 계약이든, 아니면 이런 특수한 계약이든 간에.”


신해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저희도 몸값이 너무 비싼 선수는 부담되니까요. 그러면 대상은 현재 2, 3부 리그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까?”

“그래요. 정확한 건 회사에 들어가서 좀 더 리스트업을 해봐야 합니다. 제가 직접 담당하는 선수 중에는 2, 3부 리그 선수가 없어서 직원들과 회의를 거쳐야 해요. 그 후 영입 후보 선수들 명단이랑, 제 이름으로 계약서를 보내드리죠. 당신이 우리와 계약할 의사가 확실하다면 말입니다.”


신해성은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애초에 에반 블레이크를 초대한 자체가 구단을 위해서기도 하지만, 개인적인 용무도 있었으니까.

이곳에 오기 전, 선수 생활 내내 가족처럼 믿을 수 있었던 사람이기에 그는 결정을 망설이지 않았다.

다만······.


“좋습니다. 단, 명단이 나오면 충분히 검토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에반 블레이크는 대수롭지 않게 수긍했다.


“그러시죠. 어차피 저도 우리 선수를 안 맞는 지도자 밑에서 뛰게 하고 싶진 않으니. 그럼 이제 일어나봐야겠군요.”


갑자기 서두르는 그를 보며 못내 아쉬운 마음이 든 신해성이 물었다.


“멀리까지 오셨는데 식사라도 하지 않으시고요. 피터버러 구내식당이 맛집으로 유명한데 같이 식사 들고 가시죠.”


손목 시계를 확인한 에반 블레이크가 고개를 저었다.


“다음에, 여유가 있을 때 같이 식사합시다. 아직도 세상에 낭만이 있다는 걸 알게 해줘서 고맙소.”


그가 악수를 청하고 신해성이 손을 맞잡았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내심 에이전트에 관한 능력치를 이것저것 물어봤지만 황금별의 개수가 바뀌질 않았다.

에이전트로서는 모든 부분에서 별 다섯 개라는 뜻이다. 애초에 그러니 오성급 인재겠지만.


“또 봅시다.”


에반 블레이크가 자리를 뜨려는 순간.


똑똑!


누군가 사무실 문을 노크했다.


“또 뵙겠습니다.”


에반 블레이크에게 인사한 신해성이 문밖을 향해 말했다.


“들어와요.”


신해성은 도로 앉아 테이블 위 차갑게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켜다 사례가 들릴 뻔했다.

사무실을 나서는 에단 블레이크 너머로 비 맞은 생쥐 꼴을 한 미꾸라지 세 놈이 서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에단 블레이크와 교대하듯 들어왔다.

이내 미간을 찌푸린 신해성이 물었다.


“무슨 일이지?”


그러자 세 사람 중 가장 큰 키로 좌측에 서 있는 노아 콜드웰이 천천히 뒷짐을 지더니 다리를 벌렸다. 열중쉬어 자세로 고개를 숙이는 것 아닌가?


“죄송합니다.”


나머지 두 선수 역시 같은 자세로 말했다.


“용서해주십시오.”

“저희가 경솔했습니다.”

“······유턴했네.”


신해성이 중얼거리며 뺨을 긁적였다. 그는 이적명단에 이름이 오른 세 사람을 넌지시 바라보며 물었다.


“배신자들인가?”

“아닙니다.”


노아 콜드웰이 여전히 시선을 내리깐 채로 말을 이었다.


“주장과 뜻을 함께한 것은 맞지만 저희 한 명 한 명의 의지였습니다. 그랬기에 각자가 생각을 바꾼 것입니다.”

“이유는?”


신해성이 묻자 노아 콜드웰이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고 답했다.


“똥값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감독님이 얼마나 독한 분인지도 알게 됐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앞으로 누구보다 열심히 구단 생활을 하고, 힘든 시기일수록 힘이 될 방법을 찾겠습니다.”


100점 만점에 100점짜리 발표를 시작으로 메이슨 로이스턴, 재스퍼 랭포드가 잇따라 사죄했다.


“저도 마찬가집니다. 솔직히 감독님에 대한 신뢰가 없었는데······ 공 차시는 걸 보고 달라졌습니다.”

“1군 선수답지 못한 행동을 했습니다. 감봉도, 리저브팀 강등도 군말 없이 받아들이겠습니다. 팀에 남게만 해주십시오.”


공통된 주제로 발표를 한다는 것이 뒤로 갈수록 다 똑같아지고, 임팩트가 떨어지고, 할 말도 없어지기 마련인데 이들은 매우 노련하게 가지각색으로 잘못을 고했다.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그들을 보며 한숨을 내쉰 신해성이 책상에 기대어 서서 입을 열었다.


“정치하지 말고 축구를 해라. 사람이 뭔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가장 확실하게 느낄 때가 언제인 줄 알아?”

“······.”

“그것을 빼앗겼을 때야. 그래서 내가 너희한테서 팀을 빼앗은 거고.”


신해성은 책상에 놓인 서약서 다섯 부 중 눈앞에 있는 세 사람의 것을 골라내더니, 그들이 보는 앞에서 직직 찢어버렸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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