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드의 빌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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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티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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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9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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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드의 빌런 7

DUMMY

“아······!”


선수들이 눈을 부릅떴다.

그러든 말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휴짓조각이 된 서약서를 휴지통에 던져버린 신해성이 다시 말했다.


“그 증거로 자기 자존심이 더 중요한 두 사람은 다시 나를 찾아오지 않았지. 내 팀에 그런 선수는 필요 없다.”

“예.”

“죄송합니다.”


선수들이 더 깊이 고개를 숙였지만 신해성은 멈추지 않았다.


“니들이 뒤에서 나를 중국인이라고 씹어도 상관없어.”


재스퍼 랭포드가 어깨를 흠칫했다.

이 새끼, 그렇게 욕한 적 있구나.

미간을 찌푸린 신해성이 덧붙였다.


“······그건 꽤 모욕적이지만 내가 한국인인지, 몇 살이고 이름이 뭔지 따위는 중요치 않아. 하지만 감독의 권위는 넘보지 마라. 너희가 백만장자가 돼도 마찬가지야. 마라도나, 펠레라도 내 권위에 도전하고 분위기를 흐린다면, 나는 너희를 팀에서 내보낼 거다.”


이는 억만장자 선수들을 밑에 두고 있는 레알 마드리드의 알레한드로 델 카스티요 감독이나, 맨체스터 시티의 리처드 맥클레런 감독의 신념이기도 했다.

본 대로 배운다고, 이러한 명장들 아래서 선수 생활을 했던 신해성이기에 쏙 빼닮은 것이다.

물론 눈앞의 선수들이 레알이나 맨시티에서 뛰는 억만장자 선수들은 아니지만, 사람 성격은 상황에 따라 상대적인 법이라서 이 안에서도 얼마든 반동분자들이 나올 수 있었다.

마치 눈앞에 있는 미꾸라지들처럼.

하지만 미꾸라지는 알고 보면 진흙 속에 있는 해충을 잡아먹고 수질을 정화해주는 놈들이다.

아니나 다를까, 노아 콜드웰이 말했다.


“예. 용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가 앞장서서 감독님 권위에 도전하는 녀석이 없도록 기강을 잡겠습니다.”

“지랄하네.”


신해성이 고개를 저었다.


“니들이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냐? 어린 선수들이 웃겠다. 오버하지 말고 경기나 훈련 때 열심히 뛰고, 선수단에서 불만 있는 녀석이 있거든 그때나 나한테 살짝 귀띔해.”

“예······.”


다소 풀이 죽은 모습들이지만 신해성은 썩 만족했다. 이들이 애쓰지 않아도 어차피 라커룸 분위기를 주도하게 되는 것은 고참 선수들이다. 그들을 휘어잡은 이상, 선수단을 반쯤 손에 넣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


런던 로드 스타디움, 피터버러 유나이티드의 미팅룸에선 고성이 오가고 있었다.


“그 자식은 우리 팀을 말아먹을 거요!”

“당장 전력 강화 위원회를 소집해야 합니다! 취임 날부터 선수단 핵심 선수들을 날려버린 작자예요. 이대로 두면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맞아요. 이건 말도 안 됩니다. 선수단뿐 아니라 이젠 팬들, 그나마 있는 스폰서까지 반발하고 있어요. 그러게, 경력 없는 감독을 들이는 건 너무 위험한 도박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당장이라도 경질을 해야······.”

“경질하면?”


길길이 날뛰는 이사진의 말을 자른 구단주가 덧붙었다.


“다른 대안이 있습니까? 지금 상황이 이 모양인데 누가 우리 팀에 오려고 하겠어요?”

“그건······!”


이사진 모두가 말문이 막혔다. 그들 모두 내심 알고 있는 것이다. 이제 와 감독을 선임해 봐야, 이 상황을 타개할 정도로 뛰어난 인물을 데려오진 못할 거라는 점을.


“애초에 현재로선 답이 안 나와서 도박을 한 것 아니었습니까? 다들 잊으셨나 본데 서포터즈와 스폰서 상대로 자선행사를 열어가면서까지 자금을 긁어모았는데도 적자 폭이 점점 더 커진 나머지 더 이상 자금 수혈이 불가능해지고, 팀 성적은 점점 더 나빠진 데다, 오려는 감독도 없어서 신해성을 선임한 거예요. 게다가 따지고 보면 우리에게 그리 나쁜 상황은 아닙니다.”

“나쁜 상황이 아니라니······.”

“설마 신임 감독의 우승 목표를 믿으시는 겁니까?”


이사진의 물음에 구단주가 고개를 저었다.


“신임 감독이 취임하자마자 이적명단에 올린 선수들은 우리 팀에서 제일 비싼 선수들이죠. 비록 태업까지 감행해가며 감독에 반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긴 했지만 이 리그에서 흔치 않은 선수들이라, 데려가려는 구단이 줄을 서 있습니다. 게다가 어떻게 된 건지 그 선수들에게 ‘조건은 상관없이 이적하겠다’는 서약서까지 받은 상태라 계약금과 주급을 낮추고 대신 이적료를 높이는 식으로 협상을 진행하려 합니다.”

“그게 사실입니까?”

“완전히 생각이 없는 건 아닌가 보군요. 구단 결정에 비협조적인 선수들을 팔아서 팀을 재편하려는 것 같으니······.”

“다행히 팀을 포기한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하지만 좋은 선수들을 데려올 수 있겠습니까?”


구단주는 이 질문에 대해서도 대답이 준비되어 있었다. 신해성이 오늘 전해온 소식 덕분이다.


“신임 감독이 에이전트와 선수 공급 협약을 맺었다고 합니다. 당장 리그 내 A급 선수를 데려오진 못하겠지만, 빈자리는 머지않아 채워질 거예요.”


단, 그는 신해성이 협약을 맺었다고 보고한 에이전트가 에반 블레이크일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래서 구단주는 그들 모두가 지금껏 계속 상상만 해왔던 의견을 입밖으로 꺼냈다.


“그러니까 빈자리가 채워지기 전, 팔릴 선수들이 팔리고 방출될 사람들이 방출되는 시점에 구단을 정리하고 나가야 합니다. 이게 현실이에요.”


사실 구단주뿐 아니라 그를 보좌하는 이사진 모두가 피터버러 유나이티드를 애물단지 취급하고 있었다. 그들은 구단주가 직접 운영하던 보험회사를 매각하고, 그 돈으로 축구 클럽 중에도 하필 피터버러 유나이티드를 인수한 것을 실책으로 보고 있었다.

모두 결과론일 뿐이지만······.


“잘 생각하셨습니다. 아직 시즌 시작 전이기도 하고, 밖에서 봤을 땐 재정상태가 일순 개선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군요.”

“숫자만 보면 그렇겠죠. 숫자만 보고 클럽을 인수할 바보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라도 블랙홀처럼 자본을 빨아먹는 구단을 이대로 방치할 수는 없습니다. 더 이상의 손실을 막기 위해서라도 매각해야 해요.”

“맞습니다. 자본 투입 의사가 있는 구단주가 들어오는 것이 서포터즈들에게도 좋은 일이에요. 그렇게 되면 신임 감독도 바뀔 테니까.”

“일단 피터버러에 사업을 확장할 계획이 있는 자산가들을 알아보겠습니다.”

“꼭 피터버러 유나이티드가 아니라도 영국으로 사업을 확장할 계획이 있는 해외의 재벌들과도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축구에 관심이 있고 피터버러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하는 인물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정말이지 현명하게 결단을 내리신 겁니다.”


적극적인 이사진 반응에 구단주는 쓴웃음을 지었다.


‘애초에 깜냥이 안 됐던 게지.’


그 자신이라면 보험업계에서 성공했던 것처럼, 축구에 대한 애착을 투자 성공으로 이끌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 지금 이 자리에 참석한 이사진을 선임할 때까지만 해도 그랬는데······.

이제 더 이상 피터버러 유나이티드에 수혈할 여력이 없었다. 자신의 전 재산을 쏟아부었지만 실패했고, 이 이상 무리를 했다간 가족들조차 보호할 수 없게 될 터였다.

그는 마치 카지노에서 거액을 탕진하고 나온 사람처럼 텅 빈 동공으로 클럽을 매각할 생각에 부쩍 말이 많아진 이사진을 응시했다.


끝끝내 피터버러 유나이티드를 포기하지 말고 불꽃을 되살려 보자는 놈 하나 없었다. 현재 가치보다 높은 금액을 받고 매각한 뒤 성과금이라도 챙길 목적으로 혈안이었다.


‘······나도 나지만, 이런 놈들을 데리고 이 나락에 떨어진 팀을 재건하겠다는 야망을 품었으니.’


다들 처음부터 이런 생각이었겠는가만은, 자기 자리를 걸고 구단을 뒤집어놓은 신임 감독과 대비되지 않을 수 없었다.


워낙 취임 날부터 미친 짓을 하며 뉴스까지 타버린 바람에 실패하면 지도자 커리어도 끝장일 텐데, 자신이 책임지겠다며 그리 무모한 짓을 벌이다니······.


‘어쩌면, 조금만 더 빨리 그 친구와 함께하며 충분히 자금을 수혈해주었다면, 지금쯤 결과가 달라졌을지도.’


계속 자금을 쏟아부으면서도, 이제껏 누구도 그런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렇게 야금야금 까먹은 것이 이 지경까지 왔다.

어쩌면 파격을 시도할 각오 없이 구단의 드라마틱한 변화를 꿈꿨던 것부터가 실책이었는지도 몰랐다.


*******


신해성은 샤워부스가 설치되기 전까지 선수들이 쓰는 샤워룸에서 몸을 씻고, 사무실에 둔 간이침대에서 잠을 잤다.

타이타닉호나 다름없는 피터버러 유나이티드가 부활하려면 누군가는 수면 아래서 발을 굴러야 하기 때문이다.

신해성에게는 그것이 곧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으니 젖 먹던 힘까지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후우.”


코칭 스태프들과 스카우트 부서, 경기 분석 부서에서 작성한 각종 보고서들에 파묻혀 있던 신해성은 기지개를 켜며 창밖을 바라봤다.

훈련장의 푸른 잔디가 한 눈에 들어왔다.

뿐인가?

그 위를 천장처럼 덮은 밤하늘을 별들이 아름답게 수놓고 있었다.


“멋진 곳이야.”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이곳 피터버러 유나이티드는 타이타닉호가 그러했듯 환경적으로 훌륭한 곳이었다.

다만 여러 차례 암초를 만난 것뿐이다.

선수들이 각자 자신에게 최적화된 포지션과 플레이 스타일로 팀을 받쳐주고, 재정적인 문제만 해결된다면 충분히 승격을 노릴 수 있으리라.


그러려면······.


‘지금 구단주로는 안 돼.’


전재산을 투자할 만큼 축구를 사랑하는 마음이나 피터버러 유나이티드 팬들을 바라보는 애정 어린 시선까지, 인간적으로 괜찮은 사람 같았다.

하지만 그는 피터버러 유나이티드의 불씨를 살릴만한 자금력과 동기부여를 잃은 상태.

예로부터 새술은 새부대에 담으라고 하지 않았던가?

창밖, 사위를 잠식한 어둠 속에서조차 파릇파릇한 훈련장의 잔디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신해성은 컴퓨터 앞에 앉아 축구 운영 부서(Football Operations Department)에서 보내온 이메일을 확인했다.

여러 구단에서 들어온 친선경기 제안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를 죽 훑어본 신해성은 보류 처리 답변을 보낸 뒤 새로운 메일을 작성했다.


타다닥······.


이처럼 축구 운영 부서에서 보낸 리스트에는 없는 구단에 친선경기 제안서를 보낸 그는, ‘전송’ 버튼을 클릭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구단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답신이 온 것이다.


“우리로 치면 2부 리그 하위에서 3부 리그 팀들과 레벨이 비슷하다고 짐작되는 한국 K리그의 오성 블루윙즈와 일주일 후 친선경기를 가지게 됐습니다. 그전까지 팀 정비 및 선수단 면담을 진행해야 해서 회의 참석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괜찮습니다. 지난 행적으로 선수단 불만과 나가게 될 선수들의 대안 모두 대답이 됐으니까요. 그보다, 이사진과 회의 결과 구단 매각을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군요.”

-아니. 그렇군요가 아니라······ 새 구단주가 오게 되면 감독이 교체될 가능성이 큽니다.


하나 신해성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물었다.


“매각 대상은 정해졌습니까?”

-지금 이 마당에 그게 궁금합니까?

“네. 혹시 저를 안 자를 수도 있잖아요?”

-······아직 정해지진 않았지만 그럴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우리 구단에 자금을 수혈해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물들을 대상으로 의사를 타진해보고 있으니까요.

“그 명단을 보내주실 수 있을까요?”

-무슨······ 설마 계속 팀을 맡게 해달라고 부탁이라도 해볼 생각입니까?

“누가 맡게 될지 아직 결정도 안 났는데 부탁은 무슨 부탁요. 저 아직 그 정도로 밑바닥은 아닙니다.”

-그럼?

“협상할 때 써먹으려고요. 아직 명단을 안 봐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들보단 비싼 값에 구단을 인수해줄 인물과 접촉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누구와 무슨 협상을 한단 말입니까? 감독이 직접 구단 매각 협상을 하겠다는 말입니까?

“네. 그래야 제 안위도 보장받죠.”


신해성이 말을 이었다.


“동향 프리미엄이란 게 있으니까, 제 고향에 있는 재벌한테 피터버러 유나이티드를 팔아볼 작정입니다. 성사만 된다면 조건은 마음에 드실 겁니다. 동원할 수 있는 자본력으로 치면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니까요. 애플을 데려오지 않는 이상 경쟁이 되지 않을 거예요.”

-설마 그 기업이······?

“이번 친선 경기를 가지게 된 오성 블루윙즈의 모기업이죠.”


신해성이 덧붙였다.


“오성그룹 막내아들이 축구광이라더라고요. 우리 이사진 분들이 원하시는 가격에 구단을 매각할 수 있도록, 제가 한 번 일선에서 피터버러 유나이티드의 영업사원 노릇을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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