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질하다 에어전시 차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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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령
작품등록일 :
2024.09.12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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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3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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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DUMMY

올림픽 공원 인근 카페.

난 세희 씨에게 양해를 구해 먼저 돌려보내고, 카페에서 누군가를 기다렸다.

평소 기다리는 걸 무척 싫어하는 성격이었지만, 오늘만은 지루하게 기다리는 이 시간조차 즐겁기 짝이 없다.

군대 전역 날에도 이 정도로 가슴이 벅차고 두근거리진 않았던 것 같은데.

그래도 애써 마음을 진정해 보고자 눈을 감은 채 심호흡으로 숨을 다스린다.

그러기를 잠시.

이내 카페 문이 열린다.

동시에 요동치기 시작하는 심장 박동.

쿵쾅쿵쾅!

카페에 들어서는 모녀를 본 순간, 난 얼어붙었다.

두 사람이 내가 앉은 테이블 옆으로 바짝 다가올 때까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모녀.

그제야 난 뒤늦게 몸을 일으켜 두 사람을 맞았다.

“미안합, 헙, 잠시 딴생각을, 아, 이게 아닌데. 생각해보니 두 분 생각을 하느라, 아아.”

이런 등신 새끼.

혜지와 첫 만남에 이런 어벙한 모습이라니.

저 얼음공주가 날 어떻게 생각하겠냐고!

속으로 망했다는 생각이 들던 그때, 예상치 못한 반응이 튀어나왔다.

“푸흡!”

남궁혜지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실소를 흘린다.

곧장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표정을 정리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좀 전의 웃음이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었다.

“얘는, 버릇없이.”

엄마가 그녀를 나무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혜지의 웃음에 심장이 멎을 것처럼 두근거렸다.

이성적인 떨림이나 설렘은 아니었다.


「얼음여제가 단상에 올랐다. 전 국민이 그토록 바라마지않던 올림픽 금메달 시상식. 금메달이 목에 걸린 순간 그녀는 선수 생활 처음으로 비로소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녀의 미소는 금메달을 따낸 기쁨과 무관했다.

‘아, 드디어 은퇴할 수 있겠다.’

은퇴.

모두가 그녀의 금메달을 축복할 때, 그녀는 27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은퇴를 결심하고 있었다.」


작중에서 남궁혜지는 웃음을 잃었다.

어린 마음에 받은 상처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크고 깊어서, 선수 생활 내내 테니스를 관두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오죽했으면 금메달 수상이라는 영광의 순간에마저 은퇴를 꿈꾸고 있었을까.

글을 읽는 내내 그녀의 심정이 이해되어 너무도 안타까웠건만 실제로 만난 혜지는 작중에서와 달리 아직 환한 미소를 잃지 않은 평범한 14살 소녀였다.

그 싱그러운 미소를 눈에 담으며 나는 결심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혜지가 저 밝은 미소를 잃지 않도록 돕겠다고.

“괜찮습니다, 어머니. 처음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변호사 김선입니다.”

난 최대한 정중한 태도로 명함을 건넸다.

긴장한 기색의 엄마와 달리, 혜지는 그 나이 또래의 소녀들과 다를 바 없이 호기심이 만연한 모습이었다.

“남궁혜지 엄마, 남궁수예요.”

혜지의 성은 엄마를 따랐다.

딱히 특별할 건 없었다.

국제 부부 간 이혼의 결말은 대개 엇비슷했으니까.

그리고 마침내 혜지가 자신을 소개했다.

“저도 제 소개해도 되죠? 제 이름은 남궁혜지예요.”

“대회 우승 축하해요, 혜지 선수. 너무 멋있고 대단했어요.”

당연한 말이겠지만, 혜지는 상대에게 단 한 세트도 내주지 않고 압도적으로 우승을 거머쥐었다.

오죽하면 상대 선수가 경기를 마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펑펑 눈물을 쏟아냈을까.

“감사합니다, 잘생긴 짱짱맨 아저씨!”

“짱짱맨?”

“그런 게 있어요. 헤헤.”

웃는 것도 웃는 건데, 남궁혜지가 저런 단어를 썼든가. 작중에선 보지 못한 표현인데.

아무튼 최소한 첫 인상이 서로 나쁘지 않다는 걸 알 만큼 이 테이블의 공기가 탁하지 않다.

“이야기는 들었어요. 저희 애를 위해 나서주셨다고.”

“죄송합니다. 서로 상의된 것도 없는데, 제가 괜한 말을 내뱉고 말았습니다.”

“변호사님께서 죄송할 게 있나요. 오히려 그런 무책임한 말을 서슴없이 하고 다니는 그 여자들 탓이지.”

모녀가 얼굴을 굳힌다.

표정에서 그녀들이 겪고 있는 아픔과 상처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이대로 두면 조만간 한국을 떠나 독일로 돌아갔겠지.

그리고 혜지는 한국을 원망하면서도 돌아가신 엄마가 남긴 유언 때문에 차마 한국 국적을 포기하지 못한 채 활동했을 테고.

역시 혜지는 여러모로 불운한 아이다.

‘나는 성장한다!!’에 등장한 다른 주인공 소년들이 그랬듯이.

그러나 주인공들의 인생은 이제 달라질 거다.

난 아이들이 작중에서처럼 불행에 허덕이는 꼴을 가만히 두고 보지만은 않을 작정이니까.

“혜지 선수.”

“네, 아저씨.”

“안타깝게도 인터넷과 SNS라는 장막 뒤에서 혜지 선수를 아무 이유 없이 욕하고 험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변호사님!”

“엄마 괜찮아. 나 어린 애 아냐. 나도 알 거 다 알아.”

“너!”

경악하는 그녀의 엄마.

그러나 정작 혜지는 덤덤했다.

“사실 얼마 전부터 같이 운동하는 테니스 부 친구들이 내 연락을 씹어. 운동할 때도 나만 쏙 빼고 자기들끼리 랠리하고. 그런데 내가 어떻게 몰라. 게다가 최근 대회에서도 나만 보면 어른들이 쑥덕댔는데.”

“혜지야······.”

대충 짐작은 했다.

작중에서도 남궁혜지는 학교와 운동부에서 지독한 따돌림에 시달렸었다.

엄마바라기인 혜지는 그런 사실을 숨긴 채 어떻게든 한국 생활에 적응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결국 선수 생활 내내 따라다니는 지독한 불면증과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얻게 된 거고.

“혜지 어머니.”

“······네, 변호사님.”

“저는 혜지 선수가 장차 대한민국을 빛낼 위대한 테니스 선수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흔들리는 엄마의 동공.

생각지도 못한 칭찬이었는지 옆에 앉은 혜지조차 뜨악한 얼굴이다.

“하지만 혜지 선수는 아직 어립니다. 보다 보호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렇기에 지금과 같은 소극적인 대응은 오히려 혜지 선수를 더 상처 입게 만들 겁니다.”

“······.”

생각이 많아진 혜지의 엄마.

오늘은 여기까지.

괜히 여기서 결정을 종용하는 건 서로에게 옳지 못하다. 어차피 귀가 얇은 그녀는 분명 내 뜻에 따르게 되어 있다.

이후 서로에 대해 좀 더 알아가는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오가고 마침내 자리를 파해야 하는 시간이 왔다.

“엄마 차 가지고 올게.”

“제가 같이 있겠습니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변호사님.”

혜지 엄마가 주차장으로 향하고, 나는 처음으로 혜지와 단둘이 남았다.

괜히 행복해지는 마음.

어둑한 도심의 밤하늘이 오늘따라 유난히 아름답게만 느껴진다.

왜 여사친들이 아이돌들을 덕질하는지 이제야 알겠는 심정이다.

그러다 문득 여사친들이 가끔 아이돌 팬미팅에 가서 아이돌과 함께 찍은 셀카를 보여주던 것이 떠오른다.

셀카를 보여주며 어찌나 좋아하던지.

그때만 해도 참 한심하게 보였건만 지금은 그 마음을 너무나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도 찍고 싶다, 혜지와 셀카.

‘에라, 모르겠다.’

“혜지 선수.”

“네?”

“제가 혜지 선수 진짜 엄청 팬이라서 그런데, 같이 셀카 한 장만······.”

“푸흡!”

입을 가린 채 고개가 앞으로 젖혀질 만큼 격정적으로 웃는 혜지.

그녀는 이내 멋쩍게 머리를 긁는 내게서 폰을 가져갔다.

“찍어요, 셀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인화해서 집에 영원히 가보로 간직하겠습니다!”

내 대답이 너무 격렬했을까.

그녀가 나와 셀카를 찍으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린다.

“······진짜 이상한 아저씨야.”


***


-말씀하신 대로 그 인간들 싹 다 고소할게요. 그런데 그러다 만약에 혜지에게 불이익이 가면 어쩌죠?

“그 부분까지 더해 조만간 드릴 말씀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제게 며칠만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그럼요. 당연하죠.

이튿날 온 연락.

분명 혜지가 옆에서 입김을 불어넣은 걸 거다.

작중에서 혜지 엄마는 유독 결단력이 부족한 성격으로 묘사되고는 했었으니까.

그래도 잘 된 일이다.

이런 일은 시간이 지체되어봐야 좋을 게 하등 없다.

더구나 이미 대회 현장에서 내가 뱉은 말들이 극성 맘들 사이에서 퍼질 대로 퍼졌을 테니, 제대로 대응할 시간을 주지 않고 빠르게 밀어붙일 생각이었다.

그 전에 꼭 만나야 할 사람들을 만난 다음에.

띠리리.

혜지 엄마에 이어, 또다시 운전 중 걸려온 전화.

중대사를 앞둔 지금은 어떤 전화든 무시하고 싶었지만, 이 전화만은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네, 대표님.”

-그래, 김 변. 오늘 아침에 갑자기 일주일이나 연차 쓰겠다고 통보했다지?

“연차는 직장인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입니다!”

-누가 그걸 모르나. 하지만 그거 아나? 근로기준법에 따라 연차 휴가 일수가 정해져 있다는 거? 아니지. 훌륭한 법조인인 김 변이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지. 더구나 놀랍게도 올해 우리 회사에서 유일하게 연차를 다 받아쓴 장본인인데.

후우, 걸렸나.

하는 수 없다.

이럴 땐 혈연에 호소하는 수밖에.

“외삼촌.”

-이럴 때만 외삼촌이냐?

로펌 대표님은 다름 아닌 우리 윤 여사의 하나뿐인 동생이다. 날 쓸데없이 법조계에 발 담그게 만든 원흉이기도 하다.

외삼촌만 아니었어도 공부 같은 거 안 하고 그냥 집에서 편히 놀고먹었을 텐데.

“제가 정말 급한 일이 있어서요. 한 번만 봐주세요.”

-망할 자식. 너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전혀 아니에요.”

-그래, 그거면 됐다. 너 절대 아프면 안 돼. 네가 아프면 우리 회사 대주주님 대노하신다.

“옛썰!”

이래서 낙하산이 좋다.

내 맘대로 쉴 수도 있고.

‘뭐, 조만간 그만 둘 생각이긴 하지만.’

로펌 생활에 크게 불만은 없다.

하지만 내가 계획하는 일을 하자면, 향후 어쩔 수 없이 로펌에 계속 다닐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자면 앞으로 넘어야 할 산이 어마어마하게 높을 테지만, 어떤 역경에 처하더라도 난 반드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야 말 거다.

‘기다려라, 내 새끼들. 이 아저씨가 간다.’


***


‘나는 성장한다!!’는 총 5부작으로 구성된 일종의 연작소설이다.

동시대에 등장한 스포츠스타라는 공통점은 있으나, 활동하는 스포츠 분야가 전부 다르다는 점에서 옴니버스나 피카레스크 구성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글의 구조가 뭐가 중요하겠어.

중요한 건 내가 그 주인공들의 험난한 일대기에 울고 웃을 만큼 공감했다는 부분이지.

남궁혜지는 그중 5부 ‘테니스 여제’의 주인공이다.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지만, 사실 내 최애 주인공은 혜지가 아니다.

바로 1부 ‘대기만성 중원사령관’의 주인공, 허선이다.

나와 같은 이름.

하지만, 나와는 180도 다른 불운한 인생을 살아간 비운의 축구스타.

4천 편이 넘는 연재 가운데 무려 1,500편을 차지하는 ‘나는 성장한다!!’의 진짜 주인공.

내가 왜 허선에 빠져들었는지는 나 자신도 모르겠다.

어쩌면 동정심일 수도 있겠고, 또 어쩌면 매사에 열정적으로 임하는 그 열혈 성격 때문일 수도 있다.

갑자기 시작된 일방적인 나의 애정.

한 가지 확실한 건 내 인생에 가장 영향을 끼친 인물을 꼽자면, 다름 아닌 허선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런 허선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내가 흥분하지 않고 배기겠냐고.

어떻게 운전대를 잡고 있는지조차 모를 만큼 전남 순천으로 향하는 길 내내 내 마음은 한껏 들떠 있었다.

마침내 도착한 전남 순천의 한 시골 중학교.

전교생이 채 100명밖에 되지 않은 이곳 학교에는 유일한 운동부인 축구부가 있었다.

‘쩝. 내가 너무 일찍 왔나.’

하지만 운동장이 텅 비어있다.

현재 시각, 오전 10시 반.

아직은 학생들이 오전 수업을 진행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이대로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나.

생각지도 못하게 붕 뜬 시간.

그러다 문득 허선의 유일한 보호자인 할머니에 생각이 미쳤다.

‘잠깐만. 혜지와 허선이 1살 차이였지.’

각 주인공들이 또래기는 해도 저마다 나이 차는 있었다.

14살인 혜지를 기준점으로 놓으면, 허선의 나이는 현재 15살.

‘그럼 할머니는 아직 살아계실 거야!’

작중에서 할머니는 허선의 중학교 졸업식 날 교통사고로 돌아가신다.

독자로 하여금 정말이지 치를 떨게 만든 빌어먹을 작가 놈의 인위적인 장치.

그동안 답답한 고구마 전개에도 어떻게든 생존해 있던 충성스러운 독자 200명을 한꺼번에 이탈하게 만든 최악의 스토리였다.

하지만 내가 온 이상 이젠 달라질 거다.

더 이상 유일한 핏줄인 할머니의 죽음으로 좌절하고 방황하는 허선은 없어야 한다.

그러자면 일단 허선에게 접근해야 하는데.

“그 의심병 말기 환자 녀석한테 어떻게 접근한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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