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럭커: 16. 놈 아닌 놈 2
“저는 꼭 이 직장이 필요해요. 다시 부탁할게요. 저를 트레이닝 시켜주세요. 네?”
그녀가 애원조로 아내에게 매달렸다.
아내는 아무 말 없이 서 있기만 했다.
나는 아내가 무얼 생각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
우리는 딸을 키우는 부모의 입장이며 넉넉지 않은 살림에 힘겹게 살아 왔다.
아내는 신문보다 그 안에 들어 있는 쿠폰 북을 항상 제일 먼저 챙긴다. 아내의 핸드백은 쿠폰으로 가득 차 있다.
굳윌이나 살배이션 아미등 중고 점을 수시로 드나든다. 쓸 만한 물건을 고르고 나서도 매니저를 찾아 반드시 가격을 깎아본다.
어린 딸이 엄마의 생일 선물로 사준 물건을 풀어 본 순간을 잊지 못한다.
새 프라이팬이 예쁘게 포장 되어 들어 있었다.
아내는 중고점에서 산 프라이팬을 오래도록 쓰고 있었다. 눌어붙는다고 불평하면서도 버리지 못하고 쓰고 있는 엄마를 본 딸이 생일 선물로 사왔다.
그 날 우리 가족은 새 프라이팬을 흔들며 함박웃음을 터트렸고 아내는 행복해 했다.
아내는 이 프라이팬도 버리지 못하고 10년이 지난 지금도 쓰고 있다. 여전히 불평하면서······.
우리 딸들이 이제 철이 들었음을 느끼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제 우리도 내년이면 둘째가 대학에 간다. 학비가 걱정이다.
아내는 아마도 그녀의 딸 이야기를 듣는 순간 같은 처지의 엄마로서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어떡하지?”
나는 아내를 돌아 봤다.
아내는 잠시 생각했다.
“정말 아무 일 없을 거지?”
“무슨 일이야 있겠어? 아줌마에다 남자같이 행동하는데. 아무 일 없을 거야 걱정 마”
한국말로 주고받았지만 그녀는 대화내용을 눈치로 알아들은 듯 아내에게 말 했다
“약속합니다. 아무 일 없을 것입니다. 부탁합니다.”
아내는 내게 다짐 받듯이 말했다.
“자기 매일 전화해야 돼, 인터넷 되면 화상전화도 꼭 하고”
“알았어. 꼭 그럴게”
세상에 어느 여자가 자기 남편에게 처음 만난 서양 아줌마와 함께 한 트럭에서 먹고 자고 2주 동안 돌아다니기를 허락하겠는가? 한 여자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나 울프가 우여곡절 끝에 여자 초보 운전사를 데리고 태우고 2주간의 장거리 운행을 나가게 되었다.
딸을 둔 엄마로서의 동정심이 아내의 마음을 움직였지만 한편으로 아내가 그만큼 나를 신뢰하고 믿고 있음을 증명해준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일단 약속한 대로 아무 일이 없기를 바랐다.
정말로 아무 일이 없기를···.
여자라서 역시 달랐다. 가방과 보따리가 얼마나 많은지 여기저기 선반에 꽉 채우고도 큰 가방 한개는 들어갈 데가 없어서 바닥에 그냥 두어야 했다. 좁은 트럭이라 움직이는데 불편했지만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이름은 티나 크리스틴 이지만 그냥 티나 라고 불러도 돼요, 그리고 신경 쓰지 말고 남자처럼 똑같이 대해주세요, 저는 상관 안합니다.”
조금 전 울듯 말 듯 한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천연덕스럽고 태연했다.
이제 트럭에 탔고 자기 원하는 바를 달성해서 당당해진 것인지, 좌우지간 여자들의 변덕은 천부적인 모양이다.
“오케이, 티나, 나는 알다시피 헝그리 울프, 그냥 울프라고 불러도 돼요”
“왜, 헝그리 울프에요?”
“배고픈 늑대처럼 아무나 잡아먹으려고···”
“네에?”
“후후후···농담입니다”
괜한 농담을 한 것 같아 내가 더 어색해졌다.
“늑대는 음흉한 남자의 대명사로 자주 인용되지만 그 진실은 정반대라는 사실 알아요?”
티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
늑대는 평생 한 마리의 암컷과 사랑을 한다.
자신의 암컷을 위해 목숨까지 바쳐 싸우는 유일한 포유류다.
자신의 새끼를 위해 목숨까지 바쳐 싸우는 유일한 포유류다.
사냥을 하면 암컷과 새끼에게 먼저 음식을 양보한다.
제일 약한 상대가 아닌 제일 강한 상대를 선택해 사냥한다.
늑대는 독립한 후에도 종종 부모를 찾아와 인사를 한다.
늑대는 인간이 먼저 그들을 괴롭혀도 인간을 먼저 공격하지 않는다.
암컷 늑대는 수컷늑대가 죽게 되면 다른 늑대를 찾아 헤매지만, 수컷 늑대는 죽은 암컷 늑대 곁을 맴돌다 굶어 죽게 된다.
***
“이것이 진정한 늑대의 본성입니다.”
티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늑대의 진짜 본성을 믿지 못 하겠다는 것인지, 나를 못 믿는다는 의미인지 잘 모르겠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울프의 트럭운전 인생에서 전무후무한 2주간의 운행이 시작 됐다.
한국인 트럭운전수와 서양 아줌마가 한 트럭에서 동거하며 2주 동안 북미대륙을 여행하는 이상한 운행.
여자라서 트럭운전을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는 쓸데없는 기우에 불과 했다. 기어변속은 조금 서툴었지만 전체적으로 운전 솜씨는 예상 밖으로 차분하고 훌륭했다. 도로 상황이나 주변 차량들의 흐름 속에서 무난하게 트럭을 컨트롤 했다. 웬만한 다른 초보 트럭운전사보다 훨씬 안정감이 있었다.
한번은 바쁜 하이웨이에서 차선을 바꾸려고 신호를 주었지만, 승용차들이 좀처럼 양보를 하지 않자 그녀는 주저 없이 에어 혼(경적)을 빠앙~ 하고 울리더니 사정없이 밀고 들어갔다. 그녀의 예기치 않은 행동에 나는 상당히 놀랬다.
트럭의 에어 혼은 트럭의 크기만큼 소리가 엄청 크다. 일반차량에게 굉장한 위압갑을 주기 때문에 나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양보할 때까지 기다리다가 갈림길까지 닥치게 되어 급하게 끼어들면 그때는 더 위험한 상황이 될 수 있다.
그녀의 판단이 옳은 것이다. 들어가야 할 때는 밀고서라도 들어가야 한다.
티나가 옷만 거칠게 입은 게 아니라 성격이 직선적이고 용감하고 터프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서로 아무 말없이 운전에 열중하면서 필라델피아로 향하고 있었다.
“마더 트럭커(Mother Trucker) 어때요?”
그녀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마더 트럭커? 엄마 트럭커? 그게 뭔데?”
“나도 헝그리 울프처럼 별명을 하나 갖고 싶어서”
“흠 티나에게 어울리기는 한데 발음이 좀··· 마더x커(mother fxxker)와 비슷해서 좀 그러네.”
“그게 내가 바로 원하는 거예요, 터프해 보이잖아요. 내게 딱 맞고···”
“그렇다면 괜찮지만.”
“마더 트럭커, 마더 트럭커···.”
티나는 마음에 드는지 여러 번 혼자 중얼거렸다.
다행스럽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하루가 저물었다.
트럭스탑 휴게소에서 주유를 마치고 주차를 한 후 그녀에게 물었다.
“첫 날인데 샤워하러 갈래?”
오늘 처음 만난 서양 아줌마에게 말도 안 되는 말을 했다.
Comment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