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하이웨이 5
나흘 동안의 휴식은 순식간에 흘러가고 다시 장거리 트럭운행의 길을 나선다.
2주일의 예정이지만, 2주가 될지, 3주가 될지, 한 달이 될지는 돌아 와봐야 안다.
요즘 들어 이렇게 떠나는 것이 싫어졌다. 정신없이 상차와 하차를 반복할 때는 못 느끼지만 이렇게 집에서 쉬고 나오는 날은 정말 전쟁터에 끌려가는 기분이다.
4일 만에 다시 보는 트럭과 트레일러는 거대한 괴물처럼 훨씬 더 커 보인다.
내가 이렇게 큰 괴물을 9년 동안이나 운전하고 다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자 그래도 첫날이니까 기운을 내자. 열심히 일해야 아내와 딸들이 먹고살지. 자신을 격려하고 속으로 다짐한다.
"자기 조심해서 잘 다녀와."
아내는 그동안 수도 없이 이 같은 이별을 해 왔건만 항상 쉽게 돌아서지 못하고 머뭇거린다.
"그래 잘 갔다 올게."
일부러 힘차게 대답하지만, 마음이 무겁기는 천근만근이다.
트럭을 점검하고 출발하려는데 회사 안전부서에서 부른다.
안전 담당 직원이 나에게 서류종이를 내밀었다.
"뭐냐? 이건."
"울프, 지난번 너와 함께 연수 나갔던 드라이버가 너에 대해서 불평 신고를 해서 어쩔 수 없이 접수했다. 읽어보고 서명해라"
"뭐라고? 내게 불평을 해?"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게 터져 나왔다.
사무실에 있던 다른 직원들이 모두 깜짝 놀라 나를 바라보았다.
"진정해 울프!"
"진정하라니? 말이나 되는 소리냐 그게? 내가 저를 가르쳐 주려고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감히 불만을 품다니···. 어떤 놈이야? 아냐 말 안 해도 어떤 놈이 그랬는지 알아."
나는 정신없이 소리를 높여 고함을 질러 대고 따져 들었다. 나는 책상을 주먹으로 내려칠 기세였다.
사실 트럭운전을 교육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일단 좁은 트럭 안에서 면식이 한 번도 없는 서양 놈과 함께 생활해야 하는 불편함이 따르고 일일이 가르쳐 주어야 하는 경우는 정말 귀찮은 노릇이다.
그의 불평에 따르면 나는 친절하지 않고 자세히 설명해주지 않으며 그가 잘 모른다고 윽박지르며 참을성도 없고 적절한 설명 없이 내 마음대로 행동하며 나 좋아하는 클래식 음악만 듣는 아주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것이다.
트럭운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와서 단지 이틀 만에 불평을 하는 그놈도 그렇지만 그 불평을 그대로 받아준 회사가 더 야속하다.
내가 어찌 화가 안 나겠는가?
내가 너무 큰 소리를 질러서 그랬는지 매니저가 나오더니 자기 사무실로 불렀다.
"울프, 진정하고 어떻게 된 것인지 이야기해 봐."
"진정이고 나발이고 나는 이 서류에 서명 못 해, 내 이야기는 들어 보지 않고 그놈 불평만 받아서 나보고 사인하라고? 그게 말이나 돼? 형평성에 어긋나는 일이다."
"오케이, 일단 이 서류는 보류할게."
"앞으로 당분간 교육을 그만두겠다. 그동안 40여 명을 가르쳤으면 나도 회사에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한다."
"알았다"
생각할수록 화가 솟구친다. 그놈은 내가 무섭다고 했다. 내 평생 처음 들어 보는 말이다. 160㎝ 키에 몸무게는 60㎏도 안 되는 작은 체격이다. 머리칼이 많아 빠져서 이제는 머릿속이 보인다, 웃는 얼굴을 보면 듬성듬성 이가 빠져 있어서 후줄근한 촌놈 영락없는 촌사람같이 생긴 나를 보고 무섭다고 하다니······. 아무리 보아도 무섭기는커녕 도리어 불쌍하고 안쓰럽게 보인다.
더 어처구니없는 일은 내가 클래식 음악만 듣는다고 이기적이라고 말했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가? 물론 내 라디오는 언제나 클래식 채널에 고정되어 있다.
그러나 클래식 음악이 싫다고 말이라도 했으면 내가 다른 음악을 듣기라도 하지 아무 말 안 하고 있다가 불평하는 것은 또 뭔가?
그리고 감히 클래식 음악을 무시하다니 영혼을 울리는 아름다운 음악에 대한 모독이다. 클래식 음악은 인간의 운명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위대한 음악이다.
운행 첫날 아침부터 기분이 잡쳐버렸다.
어쩐지 이번 운행은 좋지 않은 예감이 든다. 회사 정문을 나서는 트럭은 다른 때보다 무겁게 느껴진다. 마치 끌려가지 않으려는 소를 억지로 잡아끌듯 힘이 들었다.
미지의 세상을 찾아 떠나는 기대감과 기대하지 않은 일이 발생하는 두려움이 합쳐져 묘한 설렘을 주는 것이 북미의 장거리 트럭운전이다.
항상 아무 탈 없이 돌아올 수 있기를 기대하였고 지금까지 어렵고 힘들고 고생스러운 우여곡절을 거치긴 했어도 아직까지는 무사히 돌아왔다.
그러나 오늘 출발하는 나는 트럭에 가득 실린 화물보다도 몇 배나 더 무거운 짐이 내 조그만 심장을 짓누르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트럭운전으로 피곤하고 지쳐서 그렇고, 의사를 만나 정신질환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탓도 있지만, 진짜 마음이 천근만근 무거운 이유는 따로 있다.
어제저녁에 아내와 말다툼을 한 것이 가슴 한쪽에 응어리져 꼭꼭 뭉쳐 있어서 좀처럼 풀리지 않고 있다.
그 감당하기 힘든 무거움이 내 인생의 바닥으로 나를 추락시키고 있다.
사람은 참 이상하다.
나는 분명히 아내를 사랑한다. 아내도 나를 사랑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왜 말다툼을 하게 되는 걸까?
아내가 쫑알쫑알 말대꾸하다가 케케묵은 오래전 이야기까지 끄집어내서 속을 뒤집어 놓는 바람에 그만 화가 폭발하였다. 급기야 소리를 버럭 지르고 끝내는 아내를 울리고 말았다.
싸움은 곁에 있던 딸이 눈물을 흘리는 바람에 싸늘한 냉전에 돌입하였다.
어쩌면 부부싸움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고 부부라면 반드시 해야 할 일 중의 하나인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싸우더라도 서로 지켜야 할 선을 넘지 않아야 하는 데 내가 필요 이상으로 화를 낸 것 같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말다툼이 시작됐는지 기억나지 않으니 정말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당신 트럭운전 하더니 변했어!'
아내가 절규하듯 내뱉은 한마디가 귓전에서 떠나지 않고 깊숙이 박혀 있다.
어디서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는지 알 수 없지만 이제 인생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삶의 궤도가 평범함에서 한참 벗어나 있다.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싶을 때가 있었지.
자 지금이 기회다.
멀리 떠나자
모든 상념 뒤로하고
앞으로 달려가자
갈 데까지 가보자
아메리카 대륙을 미친 듯이 돌아다니다가
문득 더 이상 갈 곳이 없을 때
돌아갈 곳을 찾자
그때는
뭔가······.
달라져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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