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건곤정협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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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夜月香
작품등록일 :
2016.05.31 21:37
최근연재일 :
2016.06.01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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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6.01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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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중모계(暗中謀計) 2

DUMMY

근래, 뜬금없는 꿈속을 헤매며 혼란해 하던 유운에게 두 번 다시 생각하기도 싫은 소식이 전해졌다. 숨이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기르던 전서구를 날려 유운에게 단혼검의 정체를 밝히고 자신의 죽음을 알린 조평환의 전언이었다. 그 사실에 치를 떨며 실의에 젖어들던 그 순간, 하오문주에게서 얼마 전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무리 무림인들이 강남의 파양호로 향하고 연이어 무림맹주 무유자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은밀히 소림으로 향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문주 화빙아가 중원무림의 중요한 동향이라며 알려온 정보였다.


“과연 하오문의 정보는 빠르고 정통하구나. 헌데, 이 급박한 시기 맹주의 소림행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 아닌가!”


연화주의 일은 안타깝지만 이미 끝난 상황, 뒷수습할 일만 남았다. 허나 무유자의 행보에 무언가 수상한 낌새를 느낀 유운이 급히 화양별궁(華楊別宮)을 나서 숭산 소림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 시각, 소림이 때 아닌 사안으로 분주했다. 지난번 무림맹의 앞마당에서 경천동지의 결전이 벌어진 그때, 태산북두의 힘으로 무림의 일익을 담당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소림의 제자들을 모두 철수시킨 그 일을 추궁하는 자리가 마련된 때문이었다.


소림사의 방장실 왼쪽에 자리한 영빈원의 상석에 지덕대사가 자리하고 달마동의 혜승대사(惠昇大師)를 비롯한 원로승들 모두 지덕대사의 주변에 둘러앉아 추궁을 했으나 시원하게 대답을 않았다. 그런데 혜승대사는 그런 소림방장 지덕대사를 답답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마치 그 이유를 아는 듯 어쩌면 지덕대사와 서로 눈길을 마주치는 것조차 꺼려했다.


“허허, 철수를 하지 않으면 어떡합니까? 그 노(老) 어른이 구사하는 무공이 본문의 무공인 것을!”

“뭐요? 그 괴공이 본문의 무공이라니 무슨 말이오?”


서문상현의 무공을 말함이다. 그런데 오직 혜승대사만이 고개를 끄덕일 뿐 아무도 그 말의 뜻을 몰라 그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만 보았다. 바로 그 순간,


“빈도, 무유외다. 모두들 잘 계셨소이까.”


걸쭉한 목소리와 함께 언제 소림의 경내에 들어섰는지 맹주 무유자가 영빈원에 모습을 보였다.


“어어, 맹주께서 어인 행보요?”

“크크크크, 지금 말씀들 나누고 계시지 않았소. 빈도가 그 일에 충언을 드리려고 대 소림을 찾았소이다.”

“뭐, 뭐요?”

“방장께서도 그가 전개한 무공이 예사 무공이 아니라 짐작을 하시고는 슬그머니 그 자리를 벗어난 게 아니었소?”


상대는 무림의 맹주다. 말하는 투가 전후사정을 완벽히 파악하고 소림을 손아귀에 들어 올려 마음껏 요리하려는 심산이 분명했다. 하지만, 만약에 무유자가 진정 알고 하는 말이라면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그자가 펼친 무공을 맹주께서도 짐작하셨소이까?”


지덕대사가 슬쩍 변죽을 울려보았다. 그러자 무유자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허헛, 그게. 그게 말이외다. 아무리 보아도 그 무공은 소림이 숨겨온 괴공처럼 보이더외다.”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며 사태의 추이를 주시하던 혜승대사의 입에서 돌연 침통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더 좌시하다가는 소림의 치부가 타인의 입에 의해 밝혀질 것 같아서였다.


“맞아요. 서문상현 그자가 발휘한 무공은 소림의 비기가 분명하외다. 허나 소림의 누구도 그 무공을 익힌 제자는 없었지요.”

“익힌 제자가 없다? 오호, 그런데도 그 사악한 무공이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소이까. 어찌되었거나 그 건 분명히 소림의 무공이란 말이오.”

“그야 그렇다마는···, 우리 소림에서는 그 무공을 어느 누구에게도 전수를 하지 않았지요. 헌데 선대 조사께서 숨겨두었던 게 결국···.”

“후후후···, 뜻밖에 익힌 인물이 서문가의 그들이란 말이지요. 그러나 그들 중 추상냉월이라 불린 서문예는 그 자리에서 죽고 서문상현 역시 무공공력을 제거당한 평범한 노인이 되고 말았지요.”


숨겨진 무공을 제 걸로 만들었다고는 하나 끝내 패배를 자초하고 뜻조차 이루지 못했다며 빈정거린 말이다. 그 말의 이면에 소림의 무공을 그만큼 얕잡아본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어허, 이런. 그 무슨 무엄한 말을!”


아무리 그렇다고는 하나 감히 소림을 모욕한다. 그조차 소림의 기인인 성승 혜승대사가 나서서 사정을 설명하는 이 순간에 말이다. 슬며시 화가 치밀어 나서려는 순간 무유자의 입에서 호방한 웃음이 터졌다.


“하하··· 하하하하. 대사, 너무 노여워 마오. 끝나지 않은 서문가의 야욕을 방지코저 본 맹주에게 귀띔을 해주신 귀한 분이 계시지요. 그분의 말씀을 전하려 괜히 비위를 긁어 보았소이다그려.”

“그분?”

“예, 그분 말이외다. 그분은 무림의 일통을 원하십니다.”


무림의 일통이라. 무유자가 입에 담은 그분이라는 인물도 결국 강호를 자신의 손아귀에 넣겠다는 말이 아닌가? 소림방장 지덕대사의 입가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프흐흐, 맹주. 지엄한 무림의 맹주께서 언제부터 그 어느 분이란 자의 주구가 되셨소?”


무유자의 얼굴에 순간 당황한 표정이 스쳤다. 그러니 얼른 안색을 바꾸고 미소를 머금으며 소리를 낮춰 나직이 속삭였다.


“아니오, 방장. 단순히 무림이 아니오. 그분은 더 큰 꿈을 꾸고 계시오. 무림맹주라는 중책을 맡은 빈도 역시 그분의 큰 꿈에 감복하여 방장을 뵈러 온 거외다.”


은근한 말투, 그렇다면 무유자가 감복했다는 그분의 은밀한 제안을 전하러 왔다는 언급이 아닌가. 어쩌면 지난날 서문인걸에게 소림의 운명을 걸었던 그때와 흡사한 상황의 되풀이다. 소림 최고의 원로인 혜승대사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러자 무유자가 혜승대사를 향해 입을 달싹였다. 전음입밀의 음공(音功)으로 조심스럽게 나누는 밀담이었다. 한동안 꼼짝을 않고 소리를 받아들이던 혜승대사가 역시 자신의 짐작이 맞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나라의 안정을 위해서라. 알았소, 맹주. 본문의 방장이 올바른 판단을 할게요.”


실보다 득이 확실하다는 판단이 선 표정이었다. 그런 혜승대사를 만족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무유자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작별을 고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조정과 무림이 동시에 안정될 거외다. 그리 알고 빈도는 그분께 소림의 의향을 전하리다.”

“예 맹주. 편히 돌아가시오.”


무유자가 그만큼 심각하게 소림을 흔들어놓는 걸 보니 다가올 어떤 일이 너무나 중요한 사안인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그러니 소림의 성승이라 불리는 혜승대사가 무유자가 속삭인 한마디에 반색을 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한순간 소림을 손아귀에 쥐고 흔든 무유자가 숭산을 떠난 후, 혜승대사가 소림승들을 돌아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맹주의 말은 그 옛날 누군가가 우리 소림의 장격각에 침입해 무참히 감원의 목을 날린 그 일과도 관련이 있다고 했소이다.”

“예? 가공할 검술로 본문을 휘저은 그 흑영을 말하는 겁니까? 목을 베고도 핏자국 하나 남기지 않았던···”


강호 무림을 주도할 만큼 고인고수가 수두룩하고, 개미새끼 한 마리 얼씬 못할 만큼 경계가 철저한 소림을 놀라게 만든 검은 그림자였다. 혜승대사의 한마디에 모두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미타불···. 그렇긴 하나 그가 본문에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그런 건 아니라 하오. 또한 소림의 무궁한 권위를 위해 혼신을 다하겠다고도했소이다. 그래서 본문도 맹주의 권유를 받아들였으면 하오.”


무심의 경지를 이루었다고 칭송받는 소림의 성승 혜승대사의 말하는 투가 점점 지난날의 그 욕심과 닮았다. 아무리 욕심을 버렸다고는 하나 사문의 이익 앞에서는 불문의 수양도 그만큼 한낱 헛된 공부에 불과했다.


“사숙, 그렇다면 어떻게 대비를 해야 합니까?”


소림의 현인이라는 지덕대사역시 사문의 영달을 위해서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얼굴가득 기대감을 담고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노납은 달마동에 은거한 몸, 그러니 방장이 각원(覺元), 각해(覺解) 그리고 각응(覺膺)과 각유(覺遺)를 데리고 강호로 나서시오.”


각(覺)자 항렬의 제자라면 그날 흑영의 검(劒)아래 목숨을 부지한 팔대감원중 남은 인물, 혜승대사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맹주 무유자가 들먹인 '그분'이란 인물이 만약 그때 소림뿐만 아니라 각 방파의 서고를 제집 드나들듯 휘젓고 다니는 검은 복면의 괴영이라면, 그리고 자신들로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초절한 검공(劒功)을 지닌 의문의 그 인물이 분명하다면, 그처럼 팔대감원중 네 명의 목숨을 한칼에 거두며 소림을 농락한 그를 단단히 옭아맬 꼬투리를 잡았다는 회심의 미소였다. 그렇기에 혜승대사는 각원대사를 비롯한 살아남은 각자항렬의 감원을 내세우기 위해 동행을 권유했다. 그 이유는, 만약 그자가 감원의 목숨을 뺏은 인물이라면 살아남은 감원을 증인으로 내세워 그 일의 책임을 묻고, 그로인해 향후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하기위한 혜승대사의 깊은 속내였다.


“흠, 본문의 장경각에 침입해 살인을 저지른 의문의 인물이 만약 그분이란 자와 동일인 이라면 책임을 단단히 추궁한다? 무슨 말인지 알았습니다. 곧 감원들을 대동하고 하산을 하지요.”


과연 지덕방장도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가 분명했다. 그의 대답 속에는, 혜승대사가 은근히 자신에게 전하려는 그 어떤 의미를 충분히 헤아렸다는 표현이 충만했다. 그렇게 두 고승이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으며 소림의 바쁜 하루가 저물었다.


* * * * * * * * * * * * * * * * * *


“예부터 소림은 이러려니 짐작은 했다. 헌데 저 무유자까지 맹주란 신분을 이용해 사욕을 채우려 하는구나!”


하오문주 화빙아의 전언을 듣고 급히 소림을 찾았으나 무유자의 의뭉스러운 행동이 마음에 걸려 나서지는 않았다. 해서 영빈원의 천정에 몸을 숨기고 그들의 대화를 엿듣던 유운이 아연실색했다. 무유자와 혜승대사가 주고받는 말은 결코 가벼운 말이 아니었다. 해서 굳이 소림을 방문했다는 내색도 않고 소림의 산문을 나서는 무유자의 뒤를 쫓아 발길을 되돌렸다.


“그래, 악양이다. 강호의 모든 소문이 집약되는 그곳 악양. 그곳에 가면 무림의 정세가 좀더 확연해 보일 게다.”


숭산을 떠난 유운은 향한 곳을 스스로 묻고 답하며, 꽃바람이 옷깃을 스치는 그 악록산 산길을 터벅터벅 걸었다. 가파른 언덕을 넘어 오솔길로 접어든 유운의 눈앞에 우거진 숲속을 흐르는 맑은 개울이 보였다. 그러지 않아도 목이 마르던 참에 얼른 개울물 한 모금으로 입술을 축이며 고개를 드니 산 아래 저 멀리 성도의 관문이 보였다.


“흐음, 저곳이 강호의 협객들이 모두 찾아든다는 악양이로구나.”


천하절경이라는 동정호를 찾는 길목인 그 악양, 중원의 내로라하는 무림인들도 폭풍전야 같은 강호의 정적에 두려움을 느껴 행여나 무슨 소문이라도 접할까 하나같이 악양로 모여들었다.


“조대인의 마지막 말에 사영대도 들먹였다. 지난날 그 악명 높던 황궁의 밀부 사영대가 다시 활동을 시작했단 말인가?”


온통 의문투성이다. 유운은 그곳 악양에 모여드는 소문으로 무슨 실마리라도 찾을까 서둘러 발길을 재촉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하얀옷의 그림자 하나가 산길을 저 건너편 넓은 호수의 상공을 가로지르는 모습을 발견했다.


“이건 또 뭐야?”


하나가 아니었다. 그 뒤로 소맷자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뒤를 따르는 세 명의 여인, 그녀들은 분명 앞선 흑영을 쫓는 모습이었다. 아니 쫒는 게 아니라 마치 호위를 하는 모습이었다. 가벼운 몸놀림으로 거침없이 허공을 나는 네 개의 인영, 그들은 마치 새가 허공을 날듯 힘들이지도 않고 비행을 했다.


“대단한 경공이다. 듣던 대로 이곳은 괴이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로구나.”


유운역시 신속히 신형을 날려 그들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는 나지막하고 숲이 우거진 봉우리에 내려앉는 그들을 살피던 유운이 잠시 긴장을 했다. 그곳에서 또 다른 인기척을 감지한 탓이다.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분명 미미하게 움직이는 공기의 흐름이 있었다.


‘뭔가?’


언덕의 뒤쪽, 유독 그곳만 수림(樹林)이 울창해 무심코 지나는 행객의 눈에는 도저히 뜨이지 않지만 언뜻 보이는 석굴의 입구다. 누군가가 은밀하게 꾸며놓은 듯한 장소임이 분명했다. 뜻밖의 장소를 발견한 유운이 무심코 한발 다가서려던 유운이 돌연 걸음을 멈추었다. 그 순간 젊은 여인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흘러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무작정 들어갈 일은 아니지. 잠시 살펴본 후에···’


살며시 다가간 유운의 눈에 드러난 석굴은 생각보다 넓고 깊으며 그 안은 불문 수행에 필요한 암자로 꾸며져 있었다. 헌데,


‘헛, 저들은?’


몸을 숨기고 그 석굴 암자의 안을 살피던 유운이 화들짝 놀랐다.

하늘을 날아 호수를 건너던 예의 그 일행들이 분명했다. 그 들중 먼저 비행을 하던 백의인이 한발 앞에 자리하고 뒤를 따르던 세 여인은 품(品)자의 형태로 앞의 여인을 호위했다. 그런데 흰옷의 여인은 면구로 얼굴을 가리고 표정하나 변함없는 예의 그 중원일미다. 하지만 유운이 놀란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니고 중원일미와 마주한 여승때문이었다.


“네가 어떻게?”

“이런 곳에 몸을 숨기고 계신다면 찾아내질 못할 거라 여겼어요?”

“어서 돌아가거라.”

“아니에요. 아버님의 못 다한 꿈을 이루려다 할아버지도 무공까지 잃고 돌아가신 게 분명한 지금, 남은 사람은 고모할머니뿐입니다. 그러니 소손을 도와주셔야지요.”

“그렇다. 그 욕심 때문에 결국 네 아비뿐 아니라 할애비도 잃었다. 그러니 미련을 버리거라.”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은밀히 이루어 놓은 문파를 소손에게 남겨두었습니다. 그러니 이젠 그 문파의 수장의 자격으로 중원을 도모해야지요.”

“욕심, 과한 욕심이니라!”


소손(小孫)?

고모할머니?

중원을 도모한다?


유운은 그렇게 주고받는 대화에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놀랐다. 그 여승은 분명, 대 결전이 일어난 지난 그날, 서문상현과 유운자신의 사이를 막아서며 스스로의 몸으로 양쪽의 장력을 모두 받아낸 탓에 모두가 죽었다고 여긴 그녀, 유운의 의붓할머니 추상냉월 서문예가 분명했다. 그때 경각에 달린 목숨을 혼신을 다해 살려낸 유운이 아닌가. 그런데도 다시 볼 면목이 없다며 한사코 유운의 손길을 뿌리치고 자취를 감추어, 모두가 죽었을 것이라고 확신한 그녀가 뜻밖에도 이곳에서 중원일미와 마주해 있다. 그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추상냉월과 마주한 중원일미가 그녀를 고모할머니라 부르며 스스로 소손이라 칭했다.


‘그렇다면 저 여인은 화령아가씨?’


서문화령말고는 추상냉월 서문예를 고모할머니라 부를 사람은 없다. 또한 그녀의 할아버지 서문상현이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마지막 결전장에서까지도 그녀를 불러내지 않고 마지막까지 정체를 보호한 서문화령이다. 중원일미라 신분을 숨기고 중원제일루 깊은 곳에 몸담아, 끝내 중원천지를 넘볼 기회를 만들어주려는 배려, 과연 서문상현의 치밀한 계산이 아닌가, 놀라고 당황했으나 마냥 넋 놓고 있을 수는 없는 일,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며 두 사람의 다음 행동을 주시했다. 바로 그 순간 무슨 낌새라도 느꼈는지 갑자기 고개를 돌린 중원일미의 눈이 유운과 마주쳤다. 도리 없이 그들의 앞에 몸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처지다.


“소생 유운이외다. 중원일미를 여기서 만나다니 세상 참 좁구려!”


천천히 앞으로 나서자 중원일미를 호의하던 세 여인이 막아섰다. 허나 그보다, 깜짝 놀란 여인의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뭐라, 운이라 했느냐? 네가 어찌 여기에···”


여승차림의 여인이 깜작 놀라 주름진 얼굴에 경련까지 일으키며 나서자 중원일미와 세 명의 호위여인도 무슨 일인가 하여 한발 뒤로 물러섰다.


추상냉월에게 유운은 어찌되었든 어릴 때 업어 키운 손자다. 또한 결전의 그날 유운은, 서문상현의 장을 대신 맞아 금방 꺼져가는 자신의 목숨을 암암리 내력을 보내 살려내지 않았던가. 해서 그길로 자취를 감추고 스스로 여승이 이곳 석굴 암자에 기거하며 속죄의 삶을 살았다. 그런데 화령뿐 아니라 뜻밖에 유운까지 이곳을 찾은 것이다. 눈가가 뿌옇게 젖지 않을 수 없었다. 허나 중원일미로 신분을 감추었던 화령은 유운의 출현이 달갑지 않았다.


“이런, 또 네 녀석이냐?”


그녀의 행동을 보아하니 어쩐지 진즉부터 유운을 알고 있었다는 표정이다. 그런 중원일미에게 유운이 넌즈시 변죽을 울렸다.


“화령아가씨, 소생의 할머니에게 고모할머니라 부를 사람은 화령아가씨 외에는 없을 거요. 그러니 이제 그 면구를 벗고 당당히 정체를 드러내시오.”

“푸훗, 이제야 눈치를 챘느냐? 난, 지금은 네놈에게 볼일이 없다. 고모할머니, 그럼 다음에 다시 뵙겠습니다.”


오래 대면하면 득이 될 일이 없다 파악한 서문화령은 추상냉월 서문예에게 얼른 작별의 인사를 던지며 자리를 피하려했다. 하지만 진정 오랜만에 화령을 마주한 추상냉월이었다.


“자, 잠깐만. 얘야!”


저간의 사정이 궁금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니 그냥 서로 헤어질만한 자리가 아니라 생각한 추상냉월이 급히 화령을 불러 세웠다. 허나 화령은 달랐다. 이 자리에 남아 길게 말을 나누다 보면 오히려 자신의 입지만 곤란해질 것이 뻔하다 거라 여긴 화령은 입 한번 삐죽하더니 고모할며니의 손길도 뿌리치고 산 아래로 몸을 날렸다.


“어어, 화령아가씨. 게 잠깐만 서시오.”


유운의 역시 다급해졌다. 급히 몸을 날려 화령을 따르려하자 그 순간 그런 유운의 앞을 의붓할머니 추상냉월이 가로막았다.


“잠시 멈추어라. 지애비의 유훈을 따르려 혈안이 된 아이다. 뒤를 쫓아도 소용이 없을게다.”

“그래도 지금 막지 않으면 서문어르신의 전철을 밟게 됩니다. 어쩌면 목숨까지 위태로울 지도 모르고요.”

“안다. 허나 그 일도 그저 마음뿐일 게다. 이 할미가 머리를 깎고 불문에 귀의할 그때의 심정으로 저 아이를 막아보마.”


말로는 화령의 행위가 헛된 야망이라 질타를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의 힘으로 화령을 회유하겠다며 은근히 유운의 추격을 방해했다. 그녀는 역시 유운의 의붓할머니이기 이전에 서문가의 피가 흐르는 가문의 일원임이 분명했다.


“알겠습니다. 할머니의 말씀이 진심이기를 빌지요. 그럼 저는 이만···”


작별의 인사다.

자신의 보호를 마다하고 불문에 귀의한 의붓할머니가 아닌가. 이곳 조용한 암자에서 추상냉월의 여생을 보내기에는 더없이 좋은 곳이라는 생각과 함께 어쩌면 깊은 불심으로 서문화령을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지는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 또한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었다. 하지만 발길을 돌리는 유운의 목소리는 싸늘했다.


“휴우···, 선연이던 악연이던 연(緣)이 닿아있다. 결국 한바탕 피바람은 피할 수 없겠구나.”


그렇게 산 아래로 내려가는 유운을 한동안 지켜보던 추상냉월의 얼굴에 암울(暗鬱)한 표정이 흘렀다. 그녀가 뿜어내는 긴 한숨처럼 먹구름 낀 중원의 하루는 살같이 빨라, 녹음 가득한 산은 어느덧 단풍이 화려한 가을이다. 헌데 그 가을이 마치 폭풍전야의 정적처럼 고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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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 각양심계(各樣心計) 3 +3 16.06.01 6,609 21 9쪽
139 각양심계(各樣心計) 2 16.06.01 3,846 23 5쪽
138 第 29 章 각양심계(各樣心計) 1 16.06.01 4,206 22 8쪽
137 기묘염녀(奇妙艶女) 3 16.06.01 4,239 22 11쪽
136 기묘염녀(奇妙艶女) 2 16.06.01 4,005 19 12쪽
135 第 28 章 기묘염녀(奇妙艶女) 1 16.06.01 4,498 22 13쪽
134 암중모계(暗中謀計) 4 16.06.01 3,915 22 16쪽
133 암중모계(暗中謀計) 3 16.06.01 4,017 25 11쪽
» 암중모계(暗中謀計) 2 16.06.01 4,150 24 19쪽
131 第 27 章 암중모계(暗中謀計) 1 16.06.01 4,206 23 9쪽
130 요망유희(妖妄遊戱) 8 16.06.01 4,297 20 26쪽
129 요망유희(妖妄遊戱) 7 16.06.01 3,963 28 16쪽
128 요망유희(妖妄遊戱) 6 16.06.01 4,199 21 16쪽
127 요망유희(妖妄遊戱) 5 16.06.01 4,172 21 16쪽
126 요망유희(妖妄遊戱) 4 16.06.01 4,182 23 16쪽
125 요망유희(妖妄遊戱) 3 16.06.01 4,200 20 15쪽
124 요망유희(妖妄遊戱) 2 16.06.01 4,136 22 16쪽
123 第 26 章 요망유희(妖妄遊戱) 1 16.06.01 4,311 27 15쪽
122 의아형국(疑訝形局) 6 16.06.01 3,729 23 16쪽
121 의아형국(疑訝形局) 5 16.06.01 4,003 24 16쪽
120 의아형국(疑訝形局) 4 16.06.01 4,313 23 16쪽
119 의아형국(疑訝形局) 3 16.06.01 4,045 21 16쪽
118 의아형국(疑訝形局) 2 16.06.01 4,262 21 16쪽
117 第 25 章 의아형국(疑訝形局) 1 16.06.01 4,191 23 16쪽
116 육화명경심(肉火明鏡心) 6 16.06.01 4,137 26 16쪽
115 육화명경심(肉火明鏡心) 5 16.06.01 4,028 21 16쪽
114 육화명경심(肉火明鏡心) 4 16.06.01 4,256 21 15쪽
113 육화명경심(肉火明鏡心) 3 16.06.01 4,144 24 15쪽
112 육화명경심(肉火明鏡心) 2 16.06.01 4,598 27 15쪽
111 第 24 章 육화명경심(肉火明鏡心) 1 16.06.01 4,818 23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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