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혼환령검(鬼魂幻靈劍) II - 심천패왕(深川覇王) <07>
매요비는 생글거리는 얼굴을 잠시 감추고는 정중히 말하였다.
“저희가 적벽관 출신인 것은 맞사오나 이미 허물어져 버린 누각일진데 어찌 그렇게 면박을 주시는지요?”
“사실이 아니냐! 적월교에 원한을 가지고 있는 적벽관을 모르는 사람도 있다더냐?”
“그야 적월교 측의 생각이지요. 저희는 이제 적월교에 아무런 원한이 없사옵니다.”
“그래? 그렇다면 지금 이 상황은 무엇이냐! 어째서 나와 적풍단을 끌어들인 게야!”
“끌어들이다니요? 저는 그저 무림공적인 위현룡의 출현을 알렸을 따름입니다. 군(軍)을 움직이신 것은 천대협 아니신지요?”
“허나 너는 정상적인 경로로 나에게 알린 것이 아니었다! 그 위조된 적월교의 인장이 찍힌 서신 말이다!”
“저희는 이미 적월교를 나왔으니 정상적으로 알릴 수 없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지요?”
천보군은 그녀의 말장난에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지금 나를 조롱하는 것이냐!!”
매요비는 정색을 하였다.
“어째서 조롱이라 보십니까? 만일 천대협께서 무림공적을 잡았다면 새외에서 그처럼 대단한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건 그랬다. 위현룡을 굴복시키고 아울러 적벽관까지 사로잡는다면 적월교내에서 가장 골칫거리였던 두 가지 문제를 일시에 해결하는 것이고 큰 공을 세우는 일일 것이다.
그가 멈칫하자 매요비는 넌지시 말하였다.
“지금에 와서 이 일을 명명백백하게 밝히고자 하는 건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옵니다.”
“아니라고?”
“네. 지금은 천대협과 위대협의 문제부터 푸셔야지요.”
“내가 지금 위급한 상태라 보는 것이냐!”
매요비는 반짝이는 눈으로 주위에 잔뜩 포진하고 있는 적풍단 무사들을 둘러보았다. 그녀는 알고 있는 것이다. 이 상황이 천보군 한명을 굴복시킨다고 해결되는 것이 절대 아님을 말이다.
“사실 저희는 이곳을 빠져나갈 여력이 없지요. 하여 소녀가 천대협께 한 가지 청을 넣고 싶습니다.”
매요비는 천보군이 위현룡에게 패한 것을 언급하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목숨이 천보군에게 달려 있음을 은근히 부각시켰다.
“청이라니?”
“일단 마차에 오르시지요.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녀의 갑작스런 요구에 천보군은 약간 망설였다. 궁지에 몰린 적벽단이 어떤 수작을 할지 모르는데다가 무림공적 위현룡까지 있지 않은가.
“천하의 천대협께서 소녀를 두려워하시는 것입니까?”
천보군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너털웃음을 쳤다.
“매관검대협께서 네 자랑을 내게 참으로 많이 하셨었지. 헌데 직접 당하고 보니 과연 여장부로구나. 하하하”
그는 호탕하게 마차로 올랐다. 그리고 마차문은 굳게 닫혔다.
안내받은 자리로 천보군이 앉자마자 매요비는 손수 작은 목함을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
“어렵게 구한 약초이옵니다. 폐관수련으로 인해 상한 몸을 회복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건강에 상당히 이로울 것입니다.”
“오냐. 고맙구나.”
아무런 의심도 없이 천보군은 그것을 받았다.
“그래 청이 무엇이냐?”
“아버님께서 오래 전에 제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위급한 일이 닥쳤을 때 천대협을 찾게 되면 반드시 약조한 청을 들어주실 것이라고 말입니다.”
천보군의 안색이 살짝 변하였다.
“청이라니 혹시....”
천보군이 적월교에 처음 들어오게 된 것은 그의 뛰어난 무학을 알아본 매관검의 추천에 의해서였다. 하지만 당시 성격이 괄괄했던 천보군은 시시때때로 적월교 인사들과 대립을 해야만 했다. 그 이유는 천보군이 새외가 아닌 변방출신이기 때문이었다. 적월교 사람들은 잘난 무학만 믿고 날뛰는 천보군을 그리 신용하지 않았고, 천보군은 그 나름대로 자신이 출신 때문에 항상 멸시를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격렬한 언쟁 속에서 분을 못 참은 천보군이 적월교 인사 한 명을 칼로 찔러 죽이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 인사는 적월교 수뇌 중 한 명이었고 천보군은 제대로 된 기반도 없는 말단직에 불과한지라 상당히 불리한 상황으로 치달았다.
이에 천보군은 목숨의 위협을 느껴 도피를 시도했고 적월교는 그를 처단하기 위해 칭처(적월교내에 배반자 등을 뒤쫓아 처단하는 일을 맡은 단체)를 보내게 이르렀다.
그러던 중 그의 능력을 아깝게 여긴 매관검은 그를 중도에 빼돌려 목숨을 구하고는 작전을 세워 그가 죽인 인사의 비리와 권력남용을 파헤치고 과장되게 부풀려 천보군이 그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당위성을 만들어 냈다. 그런 작전에 능했던 매관검의 재능이 그를 살려낸 것이었다. 이에 천보군은 매관검에게 감사의 눈물을 흘렸고 훗날 목숨이 끊어지는 위험이 생기더라도 이 은혜를 반드시 갚겠다고 맹세를 하였다.
매요비는 과거를 회상하고 있는 천보군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아버님께서는 돌아가셨습니다만 소녀는 천대협께서 제 청을 뿌리치지 않으실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런 분이셨다면 아버님께서 그토록 모험을 무릅쓰고 천대협을 구하시지 않으셨을 테니까요.”
천보군은 그녀가 말한 뜻을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즉 매관검에게 입은 은혜를 자신에게 대신 갚으라는 말이었다. 어찌 보면 당돌하기 그지없는 요구였으나 천보군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오냐. 내 매관검대협에게 목숨을 빚지고도 보은하지 못하였으니 그 분의 여식인 네 청을 수락하여 그것을 대신하겠다.”
“정말로 감사드리옵니다.”
“그래 어떤 청이더냐? 죽는 한이 있더라도 들어주마.”
매요비는 창문에 있는 휘장을 살짝 걷어 밖을 내다보았다.
“저희가 이곳을 무사히 벗어날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그 말에 천보군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비록 적풍단이 포위를 하고 있긴 하지만 무림공적 위현룡에게 기세를 빼앗긴 마당에 발악하면 못 빠져나갈 것도 없었다.
“단지 그 부탁뿐이더냐?”
의아스런 눈초리로 천보군이 묻고 있었다.
“다른 한 가지가 더 있사옵니다.”
천보군은 그제야 긴장을 하고는 이번 청이야 말로 그녀가 간절히 원하는 것임을 직감하였다.
“천대협께서 위현룡의 출현을 대막천궁에 알려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뭐...뭐라?”
천보군은 더욱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내심 얼마나 버거운 청일까 걱정하고 있었는데 고작 한다는 청이 대막천궁에서 위현룡을 잡으라고 알려 달라는 것이다. 이건 무슨 청이라고 할 것도 없이 얼른 감사히 수락해야 할 판이었다.
“정말로 대막천궁 무사단이 개입한다면 너희들은 더욱 악화된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래도 좋단 말이냐?”
“괜찮사옵니다.”
“이해가 안 되는구나... 저 무림공적을 살리기 위함이 아니란 말이더냐?”
매요비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무림공적에 불과할 뿐 저희와는 사실상 아무런 연관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굳이 저 사람 때문에 적벽관이 불구덩이 속에 뛰어들 필요가 있을는지요?”
“그래? 그럼 이렇게 해서 적벽관이 얻는 이익이 무엇이냐?”
“없습니다.”
“없어? 이상하구나. 나를 이곳에 오게 하여 위험한 상황을 만든 건 너였다. 근데 화를 자초해 놓고 놓아 달라는 청과 더불어 대막천궁 무사들을 불러들인단 말이냐? 적벽관이 그렇게 허술할 리는 없을 터, 분명 다른 노림수가 있으렷다?”
천보군은 날카로운 눈빛을 내면서 매요비의 속뜻을 떠보려 하였다. 허나 매요비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담담하게 말하였다.
“굳이 말씀드린다면, 대막천궁에서 위현룡을 잡아들이게 하여 적벽관과 적월교 사이에 쌓인 앙금을 조금이나마 해소하겠다는 것이겠지요. 또한 천대협께서 아버님께 지고 있는 짐을 아래로 놓게 해 드리려는 마음도 가지고 있습니다.”
뭔가 그럴듯하면서도 찜찜한 대답이었다. 천보군은 몇 번이나 생각해보았다. 도대체 매요비가 왜 이런 청을 넣는지를 말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떠오르지가 않았다.
(의외로 단순할 수도 있겠군.)
문득 천보군은 적벽관이 적월교와 화해를 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적벽관이 신출귀몰하다 하더라도 적월교의 끈질긴 추적을 온전히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었다.
“근래에 듣자 하니 칭처에게 발각되었었다고? 운 좋게 고비를 넘기긴 했으나 한번 드러난 흔적은 쉽게 또 드러나게 마련이지...”
“저희 적벽관도 적월교를 피해 평생토록 숨어 지내는 것은 쉽지 않다고 인정하고 있사옵니다.”
그의 말에 매요비는 부인하지 않았다. 누가 뭐래도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알겠다! 네 청대로 대막천궁에 이 일을 알려 위현룡을 쫓게 만드마. 허나 명심 하거라. 다음에 또 만나게 된다면 그때는 이런 자비를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니라.”
“감사하옵니다. 그럼 저희들은 이만 물러가도 되겠습니까?”
“오냐. 그렇게 하여라.”
매요비와 천보군이 마차 안에서 은밀한 독대를 하는 동안 밖에는 적풍단이 위현룡을 포위한 채 일촉즉발의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헌데 동생은 적벽관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인가?”
채겸이 갑자기 위현룡에게 이렇게 묻고 있었다.
“그렇게 친밀한 관계는 아닙니다. 다만 예전에 제가 적벽관에 도움을 한번 준 적이 있었습니다만...”
“그런가? 하지만 적벽관이라는 단체가 워낙 은밀하고 속을 알 수가 없는 집단이라서 말이지. 그러니까 자네와의 관계를 한순간에 뒤집을 수도 있다는 뜻일세.”
채겸의 말에 홍후인도 동의했다.
[그의 말에 일리가 있다. 적벽관은 엄연히 새외에 뿌리를 내린 단체이니만큼 그들 간에 밀월이 그렇게 쉽게 깨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적월교에 등을 돌렸다 하여 쉽게 믿어서는 안 된다.]
그때 마차 문이 열리면서 매요비와 천보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천보군은 위현룡에게 저벅저벅 걸어오더니 입을 열었다.
“듣던 대로 참 대단한 무학을 지니고 있소. 만일 당신이 적월교에 투신해 준다면 교주께서도 상당히 호의를 베풀 것이오 만...”
“저는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단호한 위현룡의 음성에 천보군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너털웃음을 쳤다.
“허허허, 알겠소. 허나 명심하시오. 살아가는 데 있어서 이 세상 넓은 하늘은 혼자서 덮기에 너무 크다는 것을 말이오.”
“천대협 같은 분들도 계신데 제가 뭐라고 세상을 호령할 꿈을 키우겠습니까? 그저 다른 이들에게 힘든 고난을 안기고 싶지 않을 따름입니다.”
위현룡의 솔직한 대답에 천보군은 자신도 모르게 뜨거운 피가 끓어오름을 느꼈다.
“비록 무림공적이오만 간만에 사나이를 만난 것 같소. 잘 가시오. 인연이 있다면 다음에 또 보게 될 것이오.”
이 말을 끝으로 천보군이 손을 쳐들어 신호를 보내자 서슬 퍼렇던 적풍단 무사들은 일제히 뒤로 물러나며 길을 터 주었다.
[어라..이게 무슨 조화더냐!]
홍후인은 갑작스럽게 변한 현재의 상황을 놀랜 눈으로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매낭자와 천대협간에 모종의 협약이 오고간 것 같습니다.”
위현룡의 나직한 말에 홍후인은 생글거리고 있는 매요비를 보면서 경계하듯 말했다.
[단순히 여인이라 치부할 일이 아니로구나. 세치 혀로 상황을 이토록 뒤 바꿀 수 있다는 것은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아까까지만 해도 천보군을 잔인하게 처단해야 한다고 네게 주문을 하지 않았더냐? 근데 지금은 예상했던 것과 완전히 달라져 있다. 아직은 저 여인의 표리(表裏)(겉으로 드러내는 말과 행동)를 알 수 없으니 각별 조심하여라.]
확실히 적벽관 사람들은 지내면 지낼수록 더욱 불신만 커지는 것 같았다. 더군다나 그들은 절대로 자신들이 계획하는 일을 알려주지 않았으므로 마치 그들의 꼭두각시가 되어 뒤에서 조종 받는 느낌까지 들었다.
매요비는 가만히 사태를 주시하고 있는 위현룡에게 다가와 말했다.
“일이 일단락되었으니 속히 안으로 드시지요. 속히 이곳을 벗어나야 합니다. 천대협께서 언제 마음이 바뀌실지 모르니까요.”
농담반 진담반으로 하는 소리에 위현룡은 딱딱한 음성으로 물었다.
“무엇을 걸고 협상을 하신 것입니까?”
“호호호, 설마 위대협을 걸었을까 봐서요? 만일 저희가 위대협을 해할 목적이었으면 이곳을 같이 벗어나려 하지 않겠죠?”
그녀의 말에 틀림이 없기에 위현룡은 달리 반박할 의지가 없었다.
그때 채겸이 위현룡의 한쪽 팔을 잡아당겼다.
“일단은 여기를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일세. 뒷일은 나중에 생각하지.”
위현룡 일행이 떠난다고 해도 천보군의 안색은 여유롭기만 했다. 채겸은 그것이 불길했다. 도망쳐 봐야 언제든 다시 잡을 수 있다는 그런 태연자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서 떠나자 구나. 그리고 여기를 벗어나게 되면 적벽관의 손아귀에서도 벗어나야 할 것이다.]
마차가 쏜살같이 떠 난 뒤, 천보군은 따로 수하들을 불러 명했다.
“너희들은 은밀히 저들을 따라가 종착지가 어디인지 내게 알리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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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지를 벗어난 마차는 전속력으로 달렸다.
하지만 위현룡과 채겸 그리고 홍후인은 마차가 어디로 향하는지 모른다. 그래서 내심 불안하다.
“저희와 같이 가시지 않는다면 두 분께서는 금방 풍전등화의 상황에 놓이실 것입니다.”
마치 마음속을 훤히 들여다본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채겸이 차갑게 대꾸하였다.
“새외는 넓은 곳이나 내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오. 낯선 곳이 아닌 이상 몸을 숨기는 데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오. 적벽관이 방해만 하지 않는다면 말이오.”
“호호호,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요.. 허나 정작 어디로 가실 것인지요? 새외를 제대로 벗어나려면 추격을 피해 달포는 고생해야 할 것입니다. 그 시일동안 과연 버티실 수 있을까요? 소녀가 보기엔 두 분은 천보군대협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하실 것입니다. 새외에서 정체가 드러난 이상 적월교의 정보망을 간과해서는 안 되지요.”
“그럼 적벽관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오?”
“저희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지만 저희에게는 안배가 되어 있지요.”
“무슨 소리요?”
“저희에게는 안전한 도피처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새롭게 시작할 것입니다.”
“그 안전한 도피처라는 곳이 꼭 적월교가 절대 침탈하지 못할 곳으로 들리는구려.”
냉소적인 채겸의 말에 매요비는 물러서지 않고 대꾸하였다.
“어차피 채대협께서는 새외를 벗어나실 수 없으실 것입니다.”
“어째서 그렇게 단정 짓는 것이오?”
“왜냐하면 팔황문을 되찾아야 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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