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룡지로 122장 선봉
구룡지로
122장 선봉
제갈지가 대회전을 준비하면서 염두에 두었던 것들이 어디 한 둘이었겠냐 마는, 특히 그녀를 괴롭혔던 것은 바로 이천 가까이나 차이 나는 머릿수의 절대적인 열세였다. 일반적인 공력의 질로는 오히려 적게나마 우세라고나 하나, 이와 같이 만에 가까운 대병력이 얽혀 치르는 대회전의 특성상 병력의 세의 우열이야말로 결국 승패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 아니할 수가 없었기에 그 차이를 좁히고자 막강한 선봉을 투입하여 초반에 승기를 잡는 것이 불가분의 선택일 수밖에 없었으나, 문제는 그런 제갈지의 의도를 혈공명 또한 불을 보듯이 짐작하고 남으리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고심 끝에 제갈지가 혈공명이 취할 대응책을 일거에 무산 시킬 수 있는 특단의 조치로 취한 것은 바로 고육지계와 다름없는 멸화대의 벽력철폭혼원망진이었다.
앞서 정마련의 산동지단과의 격돌에서 초현된 바 있는 삼방삽십육폭망진이 거둔 고무적인 결과를 잊지 않은 제갈지가 다수의 인원들을 상대할 때 그 전투력을 급감시키며 분쇄하기에 더 없이 효과적인 병진으로 금혜란의 사문인 축융방의 절대암기이자 화기인 벽력구와 철폭구를 동시에 혼용할 수 있는 벽력철폭혼원망진을 창안하기에 이르렀던 것이었는데, 이것이 바로 그 날의 격돌 이후로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벽력철폭혼원망진의 숙련을 거르지 않았던 멸화대를 화기가 떨어진 후의 멸절에 대한 위험을 무릅쓰고 과감히 선봉에 투입하여 일거에 절대적인 비세를 동수로 변환코자 하는 제갈지의 고육지책이었다.
또한 그에 앞선 정지작업으로 철궁대를 투입하여 예민한 화기의 특성상 손으로 투척해야 하는 멸화대의 약점을 보완함과 동시에 철궁대의 속사에 힘입어 단숨에 거리를 좁힌 멸화대가 벽력철폭혼원망진을 펼치기 위해 필요한 촌각의 시간을 벌어주고 또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암혼대 역시 최선봉의 역할을 떠맡기에 이르렀던 것이었다. 이미 사전에 주지 받았던 대로 박휘의 해청시가 흑백쌍곤의 이름을 명부에 올리는 순간, 삼연사로 펼쳐진 철궁대의 시위를 떠난 삼백여의 철시들이 일반적인 화살들과는 달리 거의 직사로 이백여 장의 거리를 영으로 만들며 정마련이 자랑하는 삼전의 고수들에게 일제히 쏟아지는데, 그와 동시에 암혼대가 땅을 차고 오르며 삼전의 대오를 향해 빛살처럼 쇄도한다. 그 뒤를 이어 어느새 삼방으로 나뉜 백 여덟의 멸화대의 인원들이 양 손에 각각 벽력구와 철폭구를 나눠 쥐고, 대량살상의 흉험한 전조를 뿜어내며 치달린다.
한편, 교묘하게 박휘의 그것과 시간차를 두고 쏘아진 다른 두 해청시의 주인공은 바로 팽소용이었다. 흑백쌍곤이 소신공양을 하듯 간신히 몸으로 혈공명의 앞을 가로막고 쓰러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뒤이어 날아들어 을지휘의 인중과 명치를 매섭게 노리는 해청시들로 이미 그전에 박휘의 상상을 초월한 궁술에 새파랗게 질려버린 을지휘가 다시금 화들짝 놀라며 이형환위의 수법으로 몸을 회전하며 비틀어 간신히 피해내지만 스쳐 지나갔다고 생각한 화살에 담긴 경력이 끝내 왼 쪽 귓불 전부와 왼 쪽 옆구리의 살을 한 웅큼이나 뜯어내 버리고 만다. 소스라치게 놀란 을지휘가 상처에서 터져 나오는 핏줄기와 불에 지진 듯 하는 고통에도 아랑곳없이 급히 정마련의 진형으로 신형을 날리며 화살의 주인공에게 시선을 던지는데, 뜻밖에도 박휘가 아닌 못내 분한 표정의 팽소용이 아닌가? 비록 무공을 뛰어넘는 지략으로 인해 혈공명으로 불리기는 하지만 엄연히 을지휘는 자타가 공인하는 극마의 절정고수, 백여 장 밖에서 날린 화살이 그런 초고수의 호신강기를 뚫고 상처를 입히고 피를 보게 하다니, 누가 그녀를 과연 앳된 열일곱의 소녀라 하겠는가? 일신우일신이라고는 하나, 불과 달포전만 해도 철모르는 애송이계집에 불과했던 팽소용의 놀라운 변모가 마치 끝없는 구룡회의 저력을 대변하는 듯싶어 물러서는 을지휘의 안색이 침중하게 가라앉는다.
잠시의 방심으로 명부에 한 걸음을 들여 놓았던 혈공명 을지휘가 간신히 정마련의 진영으로 몸을 뺀 그 순간, 마침 철궁대가 삼연사로 쏘아 낸 삼백여의 철시들이 정마련의 삼전의 인물들에게 쏟아져 내린다. 원래부터 신력이 남다른 이들로만 추린 철궁대였기에 자연히 그 특성을 최대화하기 위해 철시들을 선택했고, 게다가 그 크기마저 기존의 그것들과는 아예 괘를 달리할 만치 거대한지라 이건 차라리 시가 아니라 단창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무지막지한 위세를 내뿜으며 덮쳐 오는 철시들을 맞는 백전노장의 삼전의 인물들에게도 약간의 긴장감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달리 고수라 불리며 달리 정마련의 핵심전력이라 불리겠는가? 앞선 산서지단과의 조우에서 초현 된 철궁대의 신위가 너무도 무색하게 검, 도, 창, 장, 권, 지 등으로 위협적인 검은 철시들의 공세를 어렵지 않게 막아낸 삼전의 고수들이 그 사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오는 암혼대와 멸화대를 맞아 반격을 꾀하려는 찰나, 기다렸다는 듯이 또 하나의 흑운이 그들을 뒤덮는다.
삼연사를 끝낸 철궁대가 다시금 촌각의 시간을 두고 오연사로 쏘아 보낸 철시들이 바로 그것일진대, 앞서의 그것과는 일견하기에도 한결 묵직하고 강한 위세가 느껴지는지라 감히 경시하지 못한 삼전의 인물들이 급히 공력을 배가하여 철시들을 쳐내지만 거의 배 가까이 늘어난 수 탓인지 결국 십여 명의 사상자가 생겨나고야 만다. 비록 철궁대의 위명을 결코 간과한 것은 아니지만 절정고수들로 이루어진 삼전의 인물들이 한낱 화살공격에 쓰러지다니, 비록 삼전의 전력의 반 푼에도 미치지 못하는 손실이지만 왠지 모를 불길함에 안색을 굳히던 을지휘의 시야에 그사이 또 거리를 좁히며 선불 맞은 멧돼지인양 쇄도해 오는 암혼대와 멸화대의 모습이 들어온다. 그때 아차 싶게 뇌리를 스치는 아찔함에 서둘러 총공세를 지시하려는 을지휘의 눈에 다시 한 번 거대하고 흉험한 흑운이 가득차고, 갖고 있던 이 대의 화살들의 대부분을 소진하며 무려 칠연사로 쏘아진 철궁대의 철시들이 잠시나마 만무평의 하늘을 온통 뒤덮는 듯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앞선 사상자의 발생에 경각심을 배가한 덕분일까? 칠백에 이르는 철시들의 무지막지한 공세에도 불구하고, 아낌없이 공력을 끌어올려 방비한 삼전의 인물들의 또 다른 희생자는 겨우 서넛에 불과할 뿐이었다. 허나 감히 맞설 용기도 없이 단지 병기의 이로움으로 득하려한 하수들의 만행에 분노한 삼전의 인물들이 막 신형을 날리며 반격을 꾀하려할 때, 그들의 귓전에 을지휘의 비명과도 같은 화급한 퇴각의 명이 꽂혀 내린다. 영문을 몰라 멈칫하는 그 짧은 순간, 어느새 삼십여 장 앞까지 짓쳐들어온 멸화대가 벽력철폭혼원망진의 진세를 구축하는 촌각의 시간을 벌기 위한 암혼대의 무모한 공세가 삼전의 고수들을 향해 쏟아진다.
당가려의 지도아래 당문의 십대금용암기를 제외한 당문비전의 암기들인 철질려, 단혼사, 쇄혼정 등이 소나기처럼 쏘아지며 일순 발목을 잡힌 삼전의 고수들이 아직 다가올 겁화를 예견치 못하고 본때를 보이자는 심정으로 암혼대와 혼전에 빠져드는데, 멀리서 이를 지켜보며 연신 퇴각을 종용하는 을지휘의 안색이 암울하게 흙빛으로 물든다. 이윽고 진세를 갖춘 멸화대가 양 손에 나눠진 벽력구와 철폭구를 높이 치켜들며 “산”을 외치자 그 짧은 사이 삼전의 고수들에게 도륙을 당하다시피 하던 암혼대의 인물들이 동시에 몸을 빼며 퇴각한다. 수삼년 이상을 동고동락하던 사십 여의 주검을 뒤로한 채 이를 악물며 암혼대가 물러섬과 동시에 드디어 멸겁화라고도 불리게 되는 벽력철폭혼원망진이 강호에 그 전율할 위력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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