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룡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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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연소옥
작품등록일 :
2012.08.29 12:33
최근연재일 :
2012.08.29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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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3.08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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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지로 105장 산산

DUMMY

구룡지로



105장 산산



하늘은 왜 이리 맑은 걸까? 헝클어진 마음속의 어둠을 더욱 무겁게 짓누르는 봄날의 파릇함이 너무도 싫다. 좋은 이들과 함께 한 시간은 왜 이리도 짧은 건지? 내게도 설레는 꿈이 분명 있었건만 이제 남은 건 차가운 배신에 어울리는 난폭한 업보일 뿐... 지금 와서 그 누구를 원망하리? 결국 스스로 받아들였던 선택이거늘, 다만 상처받을 그이가 걱정스럽지만 어차피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라면 차라리 이런 배덕의 모습이 오히려 잊히기 쉬우리라... 처음 보았을 때의 그 설렘으로 이미 이런 결과를 예견하고 있었음을, 사랑을 어찌 외면하고 마음 편하리? 하지만 그때의 그 순간이 다시 온다고 해도 잠시의 주저함 없이 또 다시 같은 선택을 하리라. 이렇게 아픈 후회라지만 그이와 함께 했으므로 이토록 사랑하고 행복했음에야...


종남산을 떠나 온지 이틀째, 하남의 소림을 코앞에 둔 야트막한 야산에서 숙영의 준비를 서두르는 구룡회의 무리들 중에서 슬그머니 빠져나와 후미진 산중턱에 올라 비록 풍상에 지쳤어도 꿋꿋이 하늘을 이고 우뚝 선 노송에 기대어 멍하니 서글픈 눈망울에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담고 있는 언산산의 곁에 슬며시 제갈지가 다가와 앉는다. 잠시 고개를 돌린 언산산이 말없이 몸을 움직여 기댈 자리를 만들어 주고는 다시금 창천을 바라보는데, 그 화용월태의 아름다운 눈망울에 담긴 공허함이 너무나 시리도록 슬퍼 보이는지라 잠시 머뭇거리던 제갈지 역시 묵묵히 노송에 기대어 오후를 지나는 봄날의 하늘에 눈을 맡긴다. 얼마나 지났을까? 자그마니 솟아나던 뭉게구름이 산바람에 밀려 따사로운 태양을 반쯤 가렸을 때, 대수롭지 않은 듯이 지나가는 말투로 언산산이 입을 연다.


“ 제갈언니, 고마워요! 지금껏 기다려줘서... 덕분에 그나마 흉한 꼴은 안보였네요. 어떤 방법이던지 제갈언니의 뜻에 따를게요! 사정없이 일벌백계로 징치 하셔도 좋아요! 다만 제 오라버니는 이 일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것만 알아주세요! ”


언산산의 말에 흠칫한 제갈지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말을 받는다.


“ 산매! 이미 알고 있었어? 정녕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네. 왜지? 아니, 알겠어! 가주의 명이겠지! 북권 언노대협의 성정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언소협도 모르는 일이라면 아버지인 언가주의 독단에 의한 일이겠지! 하지만 그래도 아니 하겠다고 하면 그만인 것을, 언가 전체의 의사에 반하면서까지 아버지의 뜻을 좇을 필요가 있었을까? ”


말투에 담긴 제갈지의 안타까움이 전해져서일까? 무심하던 언산산의 눈가가 처음으로 파르르 떨리더니 조금은 애잔해진 목소리로 언산산이 말을 잇는다.


“ 본디 계속 속일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직접 겪어본 제갈언니의 지모를 염두에 둔다면 한두 번이면 모를까? 연이은 습격을 겪고도 의심을 면할 것을 바란다면 너무 순진한 거겠죠? 아! 왜 굳이 아버지의 명을 따랐냐고요? 우리 아버지, 알고 보면 참 불쌍하신 분이에요. 아시다시피 오대세가에도 끼지 못하는 진주언가이지만 나름의 뿌리는 깊기도 하거니와, 가문의 구성원들의 자부심은 그 어느 명문세가에 못지않죠. 그런 진주언가에서 차지하는 아버지의 위치와 영향력은 명색이 현가주이면서도 그저 미미하기 그지없죠. 모두 다 뛰어나신 할아버님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해서죠. 당신께선 지금껏 열과 성을 다해 부단히 노력해 오셨건만, 가문의 원로들은 여전히 건재하신 할아버님의 의중만 살필 뿐, 당신의 의사는 번번이 무시되기 일쑤였죠. 그 와중에 정마련의 발호에 대노하신 할아버님의 행동에 가문의 존망이 걸렸다는 위기감과 평소의 소외감이 결국 정마련의 그늘을 스스로 찾아드시게끔 만들었죠. 그런 아버지의 초조함을 이용한 혈공명의 조건이 강호삼대미인이라는 허울 좋은 제 허명의 미인계이었고요.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덥석 그 제의를 수락한 아비에게 딸인 제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이겠어요? 저마저 외면한다면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질게 분명한 아비의 믿음을 저버릴 수는 없지 않겠어요? 뭐라고 하셔도 강호의 대의나 도의 보다는 제겐 아비의 초라한 절망을 면하게 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우선하니까요! ”


길고도 긴 언산산의 넋두리 같은 고백이 끝나고, 끝내 눈 꼬리에 매달린 언산산의 눈물을 본 제갈지가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금 착잡함을 숨기지 못하며 입을 연다.


“ 그러면 끝까지 명을 이행할 것이지 왜 지금 와서 포기하려는 거지? 지금 손을 뗀다면 외려 혈공명의 분노를 살지도 모를 일 아닐까? ”


“ 풋! 은근히 언니도 잔인하신 면이 있네요. 설마 모르고 물으시는 건 아니죠? 이미 많이 늦었지만 아버지만큼이나 지키고픈 사람이 생겼기 때문이죠. 어차피 더 이상 기회가 있을 것 같지도 않거니와 이미 구룡회의 세력이 커질 만큼 커진 이 시점에서 그들이 제게 원하는 건 간자의 그것보다는 마종가의 가주이자 절세고수인 운가가의 심중을 어지럽히는 일이 아닐까요? 바로 제가 죽어도 하고 싶지 않은 일이고요! 이미 가가의 사랑을 받았으니 더 이상 원하는 게 없어요! 제 존재가 그이에게 짐이나 화가 되기 전에 여기서 끝내고 싶어요! 내 희망도... 내 삶도... 내 사랑도... ”


이젠 빗줄기처럼 흘러내리는 언산산의 눈물에 저도 몰래 저릿저릿해지는 가슴을 감싸며 제갈지가 위로의 말을 던지려는 순간, 느닷없이 언산산의 왼편에서 나타난 혁련운이 한 쪽 무릎을 꿇고 언산산의 뺨을 감싸며 눈물을 닦아낸다. 흠칫 놀란 언산산이 혁련운의 등장을 알아차리고는 울먹거리기 시작하더니 끝내 가녀린 주먹으로 혁련운의 가슴을 팡팡 내치다가 허물어지듯 혁련운의 품을 파고든다. 얼마나 울었을까? 이윽고 언산산의 들먹거림이 잦아들자 그때까지 언산산을 감싸 안으며 등 어림을 토닥이던 혁련운이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을 빛내며 제갈지에게 말을 건넨다.


“ 제갈군사! 산매의 일은 모두 내가 책임지겠소! 그간의 고초가 작지 않음은 아나, 내자의 허물은 원래 지아비의 몫이 아니겠소? 아니, 따지고 보면 산매 역시 아비의 명을 좇은 것일진대, 어찌 그녀만 탓 하리오? 빙장의 허물 또한 이 사위가 흔쾌히 짊어질 것인즉, 앞으로의 험난한 궂은일을 다 이 몸에게 맡기는 걸로 그 과를 상쇄시켜 주기를 간곡히 청하는 바이오! 내 연차가 적음으로 모든 걸 다 짐작하지는 못하나, 이것만은 분명히 깨닫고 있소이다. 내 간난고초를 한시도 빠짐없이 산매가 함께 해왔다는 것을... 그들의 입장에서도 습격하는 적들에게 산매의 존재를 미리 노출 시킬 리도 만무하거니와, 칼에 눈이 달린 것도 아닌데 생과 사를 오가는 전장에 함께 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그 진정을 믿소이다. 아니, 그게 설령 아니라 하더라도 이미 내 사람이외다. 내 마음의 주인이외다. 이대로 치죄하거나 떠나보낼 수는 없는 일이니 부디 청컨대 선처를 부탁하외다! ”


비장함으로 말을 마친 혁련운이 일어나며 허리를 깊숙이 굽히고 포권을 하는 반례로 선처를 청하자, 일순 당황한 제갈지가 황급히 일어나며 모로 몸을 돌려 세워 반례를 피하고 맞서 포권을 하며 고개를 내젖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나머지 구룡들과 팽소용만을 이끌고 모습을 드러낸 이무흔이 역시 포권을 취하며 제갈지에게 언산산의 선처를 부탁하는 취지의 말을 건넨다.


“ 군사! 혁련가주의 체면을 좀 세워주시게나! 비록 위험을 초래했다고는 하나, 사실 결과만 따진다면 그럭저럭 큰 피해 없이 잘 헤쳐 나오지 않았지 않소! 피치 못할 사정이란 항상 존재하기도 하는 법, 일벌백계도 중요하지만 때론 관용도 하나의 좋은 예가 될 듯도 싶소이만? ”


심각한 안색으로 존대를 써가면서까지 청을 하는 이무흔의 모습에 잠시 기가 막힌 제갈지가 나머지 구룡들의 안색을 살펴보니 모두가 한결같은 마음이 내비치는지라 짐짓 새초롬한 표정으로 퉁명스럽게 대꾸한다!


“ 흥! 회주께서 말씀이 지나치시네요! 제가 언제 일벌백계 운운 했던가요? 어차피 산매 스스로 고변한 이상, 오히려 제가 여러분들에게 이해를 구하려고 했답니다! 도대체 사람을 어떻게 보시는 거죠? 책사는 모두가 차가운 마음만이 어울린다고 생각하시나요? 난 도저히 저 두 연인을 찢어놓을 자신도 없거니와 혁련가주께서 책임진다고 공언한 이상,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마구 부려먹는 걸로 만족이랍니다. 나머지는 잘 나시고 너그러우신 회주님 뜻대로 하시와요! 흥! ”


짐짓 화난 듯이 과장된 모습과 목소리로 제갈지가 너스레를 떨며 말을 맺자 비련의 연인들을 둘러싼 구룡들의 입가에 흐뭇한 웃음이 번지는데, 그에 찬물을 끼얹듯 팽소용이 소리친다.


“ 흥! 난 그렇게 못해! 이렇게 그냥 어물어물 넘어가려고? 절대 난 용서 못해! ”


서슬 퍼런 기세로 팽소용이 언산산을 향해 걸음을 옮기자 다른 구룡들의 반응에 안심해 하던 혁련운이 표정을 굳히며 앞으로 나서는데, 벌써 퉁퉁 부은 눈을 어렵사리 깜빡이며 언산산이 혁련운을 제치고 나서 팽소용을 맞는다. 씩씩거리며 언산산의 앞에 이른 팽소용이 처연한 눈빛으로 용서를 구하는 언산산을 향해 손을 번쩍 쳐들지만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차마 내치지 못하다가 결국 앙하는 소리와 함께 언산산을 부둥켜안고 애써 참아왔던 울음을 꺼이꺼이 토해내고야 만다. 돌이켜보면 팽소용 역시 정마련의 발호로 인해 자신의 아비를 잃은 전력이 있지 않은가? 누구보다도 언산산의 심정을 잘 이해하기에 그동안 겪었을 심정의 고초에 저도 모르게 치솟은 분기가 결국 동병상련의 서러움으로 분출된 것인데... 그 모습을 안타까이 바라보는 구룡들, 특히 박휘와 혁련운의 가슴에 혈공명 을지휘를 향한 개인적인 분노가 깊게 새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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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 구룡지로 133장 휴전 (1부 완결) +21 12.08.29 6,061 59 12쪽
132 구룡지로 132장 활인 +4 12.08.24 4,199 51 7쪽
131 구룡지로 131장 분노 +5 12.08.21 3,887 48 9쪽
130 구룡지로 130장 무위 +6 12.08.16 4,066 51 10쪽
129 구룡지로 129장 재견 +4 12.08.14 3,835 48 9쪽
128 구룡지로 128장 혈투 +8 12.08.10 3,901 52 12쪽
127 구룡지로 127장 전환 +6 12.08.07 4,057 51 11쪽
126 구룡지로 126장 마웅 +3 12.07.20 4,110 54 10쪽
125 구룡지로 125장 혼전 +6 12.07.18 3,924 51 9쪽
124 구룡지로 124장 봉공 +5 12.06.29 4,043 52 8쪽
123 구룡지로 123장 멸화 +6 12.06.21 4,089 58 8쪽
122 구룡지로 122장 선봉 +5 12.06.13 4,045 51 8쪽
121 구룡지로 121장 개전 +7 12.05.29 4,243 56 13쪽
120 구룡지로 120장 전야 +5 12.05.16 4,293 56 10쪽
119 구룡지로 119장 배첩 +6 12.05.02 4,255 56 8쪽
118 구룡지로 118장 연환 +3 12.04.30 4,309 58 9쪽
117 구룡지로 117장 비도 +5 12.04.23 4,412 55 10쪽
116 구룡지로 116장 무한 +4 12.04.16 4,453 55 9쪽
115 구룡지로 115장 형주 +5 12.04.13 4,744 58 10쪽
114 구룡지로 114장 석패 +4 12.04.08 4,626 54 11쪽
113 구룡지로 113장 금강 +5 12.04.05 4,732 58 9쪽
112 구룡지로 112장 홍엽 +5 12.03.30 4,805 58 11쪽
111 구룡지로 111장 구궁 +5 12.03.26 4,805 52 12쪽
110 구룡지로 110장 천왕 +3 12.03.22 4,896 56 9쪽
109 구룡지로 109장 정방 +3 12.03.20 4,851 59 12쪽
108 구룡지로 108장 친견 +4 12.03.15 4,872 57 10쪽
107 구룡지로 107장 비무 +3 12.03.12 4,894 58 7쪽
106 구룡지로 106장 소림 +5 12.03.11 4,949 62 10쪽
» 구룡지로 105장 산산 +6 12.03.08 4,958 61 10쪽
104 구룡지로 104장 편제 +5 12.03.01 5,387 57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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