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뜨랑제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요삼
작품등록일 :
2010.10.29 14:55
최근연재일 :
2009.04.21 15:44
연재수 :
150 회
조회수 :
6,424,410
추천수 :
2,927
글자수 :
369,187

작성
08.02.10 16:40
조회
58,081
추천
73
글자
26쪽

에뜨랑제 (25)- 탈출 -9

DUMMY

9. 탈출 -9


지금은 하늘도 땅도 붉게 물들고 있는 석양 무렵이다.

붉은 빛은 이곳 절박한 공간에도 매달려 있었다. 절벽 안쪽의 전투 광장에는 바짝 마른 잎에 붙은 불이 이곳저곳으로 퍼지며 매캐한 연기가 피어 오르고 있다. 불은 묘한 궤적을 그리며 광장전체로 빠르게 번지고 있는 중이다.


그 연기를 뚫고 괴수들이 먼저 움직이고 있다.


낮게 비행을 할 수 있는 갑충류와 극독을 지닌 도마뱀류와 발 빠르고 덩치가 작은 놈이 총알처럼 앞으로 튀어 나오고, 큰 놈들은 좌우로 벌리며 V 자 형태로 쾌속하게 들어오고 있다. 장거리 독침을 가진 놈들이 그 뒤를 따른다.


작은 광장에 무려 200두가 넘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괴수들이 빽빽하게 대오를 맞춰 터지듯 밀려오는 광경은 장엄하면서도 섬찟하다. 괴수들은 마치 누구에게 지휘를 받는 것처럼 그 움직임이 일사불란하고 정교하다.


지금,

이 살기(殺氣)가 작열하는 곳으로 두 사람이 뛰어 들어가고 있다. 어차피 그들로서는 뚫고 가야 할 길이다. 또한 부숴버리고 가야 할 길이다. 자유를 향해, 생존을 향해, 스스로의 자존(自尊)과 선택할 수 있는 삶을 위한 장엄한 투쟁이다. 아니, 진정한 의미에서 전쟁이다.


그들은 스스로의 주권(主權)을 위한 전쟁 계획을 세웠고, 이제 그 작전은 군(軍)에 의해 수행되고 있다. 군은 스스로에게 명령을 내렸다. 상대가 인간이든, 괴물이든, 악마든 혹은 신이든 그 무엇이든 그들을 막는다면 반드시 뚫어야 할 것이었다.


“기특한 덩어리들! 암 그래야지. 자! 이제 이 게임의 끝을 보자고!”


산은 오른쪽으로, 비연이 왼쪽으로 치고 들어간다.


이런 전투를 한두 번 해본 것은 아니지만, 이번에는 정말 볼만할 것이다. 이때까지 순수하게 육신의 힘으로 넘어왔던 전투와는 그 차원이 다를 것이다. 온몸을 치고 달리는 가속, 그것도 3차 가속이라는 환상의 경지에서 치르는 사실상의 첫 번째 사냥이다.


그들 역시 보고 싶다. 진정으로 알고 싶다. 자신들이 가진 전투력의 실체와 그 끝을. 그래서 그들 스스로의 합의로 이 최후의 게임을 비정규전보다는 정규전으로 택했다. 지금은 그들의 의지에 걸 맞는 ‘최초의 전쟁’으로 시작되려 하고 있다.


지금 그들의 상대는 이 게임사상 역대 최강이다. 여태까지 상대했던 괴수 중 가장 강력한 것들이며, 가장 많은 숫자이며, 이것들을 제압할 수 있는 동급의 소환자가 13쌍이나 포함되어 편성된 최강의 팀이다. 이놈들은 오로지 이 두 사람의 목숨을 취하기 위해 동원된 것들이다. 더 이상의 인정은 없을 것이다. 육해공을 가리지 않는다. 독, 화학전, 중장거리 무기 등등 수단방법도 가리지도 않을 것이다.


‘팟-‘

‘쉿-‘


산이 사자처럼 허공으로 도약했다.

비연이 제비처럼 경쾌하게 선회하며 옆으로 차고 돌았다.


‘퍼석-‘


맨 앞쪽 열의 알곤의 정수리가 순식간에 함몰된 채 밑으로 무너지고 있다. 주변에서 얼쩡거리던 알핀의 뾰족한 대가리들이 산채로 뜯겨진 채 허공으로 마구 비산하고 있다. 산은 허공에 도약한 상태로 짐승의 머리와 몸통을 밟으며 거침없이 전진한다. 그의 발걸음 하나하나마다 밟히는 모든 짐승의 머리가 폭죽처럼 터져간다. 머리는 터지고, 척추는 부러지고, 몸통은 무너져간다. 옆에서 튀어 들어오는 것들은 개머리판으로 뭉개고, 걸리적거리는 것들은 칼로 다져버린다. 한 사람이 수평으로 베면 다른 사람이 수직으로 가른다.


‘쉿-쉿-쉿- 쉬-‘

‘키아아아아아악---‘

‘캐애애애-‘


천지 사방에 온갖 괴수들의 비명이 울리고 있다. 시뻘건 육편이 산산이 부서지고 찢겨지며 한꺼번에 사방으로 튀고 있다. 마른 땅에는 자주색 핏물이 흐른다. 핏물이 흘러흘러 내를 이루어 대지를 적시고, 마른 잎 위로 고인다. 불길은 그 옆을 핥듯이 지난다. 두 사람이 노도처럼 쓸고 지나는 자리에는 폭격을 맞은 듯 터져나간 파편들이 널려가며 쌓이고 있다. 불과 30분이 되기도 전에 절반 이상의 괴수들이 광장 바닥에 파편만을 남긴 채 무너져가고 있었다.


산과 비연은 끊임없이 달려간다. 숨이 턱에 차오르도록 달린다. 좌에서 우로, 다시 우에서 좌로 교차 종횡하며 질주한다. 보이는 대로 죽인다. 아니 여러 번 죽었다 살아온 것들이니 이제 완전히 해체한다. 대가리부터 산산이, 그리고 알뜰하게 분해한다. 가짜 생명들, 살아 숨쉬는 듯 보이는 이 가짜 생명들, 죽여도 죽여도 다시 살아나는 이 저주받은 것들은 이제 없어져야 한다. 그래서 이 게임의 끝을 본다. 날 잡았다. 그날이 바로 오늘이다.


광장 어디에서나 불이 타오르고 그 옆으로는 질척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 피에는 생명수이자 판타지 세계에서나 나오는 전설의 재생약(rejuvenation)이라는 넥타가 섞여있다. 그러나 넥타는 서로의 피를 빨고, 서로의 피가 되어 생명을 흉내 내게 하는 아주 몹쓸 것이다. 동족이, 같은 동족의 파편을 탐하고, 서로의 피를 마시고, 서로의 고기를 먹어 치우게 하는 비감(悲感)한 흡혈귀의 마약이다.


지금 그 모든 것이 두 사람에 의해 마르고 불타오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오늘 넥타는 두 사람의 작전의 재료로서 완전히 다른 용도로 쓰여지게 될 것이었다.


괴수들을 폭발시키듯 해체하며 그 살과 뼈와 피로 길을 내며 전진하던 산이 마지막 괴물의 등을 박차고 다시 도약했다. 그 속도는 무거운 군장이 무색할 정도로 기겁할 만큼 빨랐다. 전진하던 산이 길 위에 우뚝 섰다.


바로 앞에 높이 5미터, 길이 20미터가 넘는 온몸에 털이 난 지네 모양의 거대한 갑각 괴수가 독기를 머금은 대가리를 세운 채 막아 서고 있다. 다리는 길고 몸은 생각 밖으로 유연하다. 30미터의 공간을 점유하며 현란하게 움직이는 수 백개의 날카로운 다리와 채찍처럼 기다란 촉수들이 더 이상의 전진을 거부하고 있다.


산의 날카로운 눈길은 좌우를 둘러본다. 좌우는 이미 마지막 남은 괴수들이 몰려들고 있었고, 우회할 길은 없다. 연기 속에서 비연이 솟아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산의 눈길이 반짝 빛났다. 그가 잠깐 멈춘 순간을 틈타 사방에서 독침이 난무한다. 강산(强酸)과 신경가스에 피부와 눈이 따끔하다. 매캐한 연기로 사방은 구별하기조차 힘들다.


‘쿵-‘

‘쉿- 쌔-액-‘


산은 서 있던 상태에서 땅을 박찼다. 몸이 그대로 5미터를 수직으로 솟아올랐다. 괴수와 눈이 마주쳤다. 산은 허공에서 두 팔을 활짝 벌린 채 씩 웃어준다. 칼은 벌써 좌에서 우로 수평으로 그어져 있다. 직경 2미터가 넘는 괴수의 대가리가 맥없이 잘려진 채 옆으로 굴렀다.


산은 공중에서 떨어지며 칼을 괴수의 배쪽 몸통에 박아 넣었다. 떨어지는 반동으로 배가 양쪽으로 쩌억 갈라진다. 거의 동시에 놈은 앞으로 무너지고 있다. 산은 오른손에 쥔 칼을 뱃속에 집어 넣고, 왼손으로는 총구를 아래로 내린 채 괴수의 무게를 받치며 그대로 앞으로 달려나갔다. 괴수의 두꺼운 껍질이 배쪽으로부터 좌우 양쪽으로 갈라지며 내장과 핏물이 비오듯 사내의 몸으로 쏟아져 내렸다.


‘퍽-‘


괴수의 피와 체액으로 범벅이 된 산이 괴물의 뒤쪽 등 껍질을 뚫고 45도 방향으로 총알처럼 튀어 나왔다. 이제 괴수들의 방어선을 모조리 격파하며 나왔다. 그러나 예정 된 탈출구로 가려면 아직 거리가 남아있다. 탈출구 앞에는 이미 26명의 ‘소환자’들이 긴장한 채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놈들은 그들의 전투를 엄숙하게 쳐다보고 있다. 차라리 경건하기까지 한 표정이다. 그러나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보아 스스로 먼저 움직일 생각은 없는 것 같다.


산은 허리를 굽힌 채 거친 호흡을 고르며 서 있었다. 그러면서도 살점이 더덕더덕 붙어있는 모자를 툭툭 털며 주위를 신중하게 둘러보고 있다. 남은 괴물들은 따라오던 비연이 모조리 마무리했다. 이 거친 광장에 움직이는 것들은 이제 없다. 이 ‘전쟁’을 시작한지 한 시간 만에 200두가 넘는 모든 괴수들을 전멸시킨 셈이다. 20초에 한 놈 꼴이다. 물론 전무후무한 신기록이다.


“후와- 괜찮은데?” 산이 씩 웃으며 말했다.

“후욱- 후욱- 생각보다 훨씬 좋은데요.” 역시 피로 범벅이 된 채 가쁜 호흡을 고르고 있던 비연이 땀으로 범벅이 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환하게 대꾸한다.


“이제 대충 된 것 같다. 얼추 시간이 온 것 같지?”


산이 눈을 가늘게 뜨고 주변을 살피며 말했다. 이미 해는 떨어져 사방은 어둡다. 그러나 건기에도 불구하고 먹구름이 가득 끼며 곧 비가 내릴 분위기다. 이렇게 사위는 어둑해져 있었지만, 공간은 활활 타오르는 불길로 인해 대낮 같이 밝았다.


그들의 눈은 매캐한 연기와 함께 여기저기 시뻘겋게 타오르는 불길을 향하고 있다. 불길은 이제 광장의 바닥으로부터 거대 대나무 숲과 마른 덩굴을 타고 거대 수림 쪽으로 번져가고 있는 중이다.


“저 정도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이제 마무리 하시죠.”



* * *


‘뭔가 이상해…’


닐이 목소리가 불안하게 떨렸다. 손톱을 깨물며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스터가 승인을 했지만... 또한 이 우발사고는 아직은 통제 범위 안에 있지만, 이건 정말 아니다. 뭔가 다르다. 저 어마어마한 전투력, 뭔가 지나칠 정도로 조직적인 움직임, 미리 준비해 놓은 기묘한 장치들, 그리고 묘한 여유…


확실한 것은 저 모든 것들이 하루 이틀 준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들은 두 눈뜨고 쳐다보면서도 저들의 행동을 몰랐고, 저들은 자신들을 보지도 못했지만 자신들을 충분히 알고 있다.


‘너도 그렇게 느끼나? 이건 빨라도 너무 빨라. 세상에 저 정도 전투력이라면 아직 미완성인 저 13쌍 가지고는 막기조차 힘들어. 다시 증원요청을 해야 돼. 적어도 현자(賢者)를 직접 보내야 잡을 수 있다고.’


널 역시 질렸다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 이 초보 경기장에서는 있을 수 없는 사건이다. 이미 그들이 개입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버렸다. 게다가 전투는 그들 담당이 아니다. 저 정도라면 자신들도 장담하기 어렵다.


‘대체 뭐냐고… 아무래도… 현자의 지원을 요청해야겠지? 응?’


입을 꼭 깨물며 말하던 닐은 눈을 다시 크게 떴다. 그녀의 시선에서는 불붙은 광장을 가로질러 자신의 거처 방향으로 달려가는 두 사람이 보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취사와 목욕을 위해 설치 해 놓은 간이 우물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다. 흐르는 물과 연결하여 한길이 넘게 깊게 파고 대나무를 잘라 파이프처럼 이어가며 비트 근처로 수로를 내면서 충분한 물이 고여있는 곳이다.


‘물? 불? ‘


닐과 널이 서로를 쳐다보고 있다. 뇌리에는 점점 불길한 감(感)이 증폭되고 있다. 이건 제법 위험하다. 뭔가 제대로 계산해야 한다. 그들의 시야에는 바닥에 지천으로 깔린 괴수들의 피들이 불길에 말라가는 모습이 잡혀있다. 바닥에 깔린 마른 잎 곳곳에 에너지 함량이 크고 반응성이 아주 뛰어난 넥타가 분말로 석출되며 불길에 닿을 때마다 옹이처럼 톡톡 튀고 있다.


그리고… 키가 비교적 작은 30미터 가량의 나무들에 불이 붙으며 뭔가가 툭툭 터졌다. 터진 것들은 하늘에서 눈송이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닐의 세밀하게 살피는 시야에는 광장에서 눈여겨보지 않았던 것들이 새삼스럽게 들어왔다. 그 중에는 비트 방어를 위해 파놓은 참호와 여기저기 목책처럼 세워진 대나무 다발들도 있었다. 지금 그 다발에도 불이 옮겨 붙고 있었다.


‘화염, 넥타분말… 설탕가루? 대나무? 이런 맙소사!!!!’


닐과 널은 동시에 입을 벌린 채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표정에는 이제 처음으로 공포라는 감정이 실려있었다.



* * *


산과 비연은 물속에 몸을 던졌다. 거대 대나무로 깎아 만든 수조다. 반경 3미터 짜리를 깎았기 때문에 공간이 충분하고, 충격에도 강할 것이다.


“찝찝했는데, 이제 좀 낫군…”

산이 물속에서 옷에 붙어있는 피와 체액, 살들을 씻어내며 담담하게 말했다.


“저 선택 받은 친구들에게 한마디 정도는 해주셔야 하지 않을까요?” 비연 역시 물에 몸을 씻어내며 산에게 말했다.


“그래야겠지. 적어도 저 놈들은 피해자라고 할 수 있으니…”


산이 물통에서 일어섰다. 허리 정도 물에 잠긴 상태다.


불길 건너편에는 아직도 누군가의 명령을 기다리며 자신들을 경계하고 있는 13쌍의 사람들이 서 있다. 자신들의 전투력을 본 이상 게이머도 굳이 저들을 싸움 붙여서 훼손 시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 또한 아마도 밤에 개척한 탈출로로 빠져나간다고 해도 충분히 막을 자신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자신감은 산과 비연도 이해가 가는 것이었다. 자신들도 어제 ‘게임의 경계’에 도착하고서야 이곳을 돌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렸으니...


그곳에는 폭이 무려 100m 가 넘는 해자(垓子)가 구축되어 있었다.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넓은 해자 앞에는 한 호흡만 마셔도 질식사에 이르는 청산(KCN)가스지대가 펼쳐져 있었고, 그 뒤에 이어지는 해자는 염산으로 추정되는 지독한 강산(强酸)이 고여 있었다. 그 뒤로는 완전히 불모로 보이는 황량한 화산지대로 연결되고 있었다. 확실히 밖으로 이어지는 모든 가능성은 차단되어 있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바로 그것 때문에 산과 비연은 진정한 희망을 보았다. 그것은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종류의 좌절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그 벽의 바깥은? 아마 좌절을 넘어선 무엇이 있을 것이다. 그것 역시 또한 그들이 이해 가능한 것일 가능성이 컸다.


“제군들… !”


산이 광장을 향해 소리쳤다. 소환자들의 눈길이 그에게 집중되고 있다. 그는 마치 유격대 교관처럼 오연하게 서있었다. 총구를 하늘로 하고 왼쪽 허리에 붙여 경계총 자세를 갖춘 후, 오른손으로는 젖은 모자를 벗었다. 갑작스런 행동에 모두가 눈을 멀뚱하게 뜨고 사내를 바라보고 있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 많았다. 오늘은 이곳의 마지막 날이며, 여러분이 ‘완전하게’ 죽는 날이다. 우리도 아마 죽을 가능성이 높겠지. 여러분들께 마지막으로 보여줄 쇼는 보다시피 ‘불쇼’다. 준비하느라 매우 고생했으니 아마 게임의 엔딩(Ending)으로써 심심하게 하지는 않을 거야. “


산이 잠시 말을 멈췄다. 그의 목울대가 잠시 출렁였다. 약간 쉰듯한 산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아마도, 귀관들은… 매우 희미하겠지만 아직도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은 남아있을 것이라 믿는다. 부디 바라건대, 사람의 자격으로, 사람의 기억으로 죽어주기를 바란다. 이것이 우리가 그대들에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다. “


산은 모자를 고쳐 썼다. 아직도 물이 뚝뚝 떨어지는 모자의 챙 깊숙한 뒤쪽에서 산의 눈가는 약간 젖은 채 반짝이고 있었다. 비연이 담담한 표정으로 총을 들었다. 산 역시 총을 천천히 들고 있다. 그 모습을 보고 소환자들은 신속하게 엄폐물을 찾아 숨고 있다.


‘탕-‘


비연의 총구에서 먼저 총성이 울렸다. 총알은 좌측의 대나무 목책 어딘가에 명중했다. 산이 지구에서 가져온 10개의 훈련용 고폭탄(뇌관) 중에 하나일 것이다.


‘쾅-‘


아래에서 폭발음이 일어나며 목책에서 불붙고 있던 첫 번째 대나무 폭탄이 하늘로 치솟았다. 이어 연결된 대나무들이 연쇄적으로 터지며 폭죽처럼 하늘로 치솟고 있다. 불붙어 맹렬히 타는 마른 대나무가 하늘 높은 곳까지 올라가 거대 나무들과 덩굴에 그대로 박혔다. 곧 이어 대나무 안에 충진한 가연성 분말에 불이 붙으면 사방으로 터져가며 모든 대수림에 불이 번질 것이다.


‘탕-탕-탕-탕-‘

산의 정교한 표적사격이 이어지고 있다.


“콰-콰-콰-콰-콰-콰-콰- “


이제 광장의 모든 공간에서 모든 방향으로 이미 설치한 폭죽들이 터지고 있다. 적에게는 더욱 나쁘게도, 광장에 가득한 피가 열기에 증발하며 뻑뻑하게 마르고 있다. 이제 화염은 가연성 설탕과 잘 버무려진 넥타 분말에 불이 옮겨 붙게 될 것이다. 이 조합의 분말은 빗속에서도 결코 꺼지지 않는 화염의 지옥을 선사하게 될 것이다.


* * *


‘이런 미친!!! 이런 무모함이라니!’


닐이 새된 비명을 질렀다. 광장이 뒤집어지고 있었다. 여기저기에서 터지는 작은 폭발이 다시 거대한 연쇄 폭발을 일으키며 지반마저 흔들고 있다. 땅은 물론 대수림의 꼭대기까지 불길이 번지고 있다. 대나무 숲은 이미 화염의 바다로 변하고 있었다.


더욱 곤란하게도, 이제 자신들이 펼쳐놓은 공간왜곡의 결계마저 깨지게 될 것이다. 지금도 사방에서 미친 듯이 날아드는 대나무 폭죽이 그들이 있는 위치까지 두들기고 있었다.


‘기후조건을 지급(至急)으로 조절해! 비는 아직 멀었나? 이런!’

‘거의 시간이 되간다고. 지금은 건기(乾期)라서 쉽지 않잖아!’

‘아니 그런데, 저 엄청난 폭탄들은 대체 어디서 난 거야? 가져온 건 다 쓰지 않았었나?”


“병신 새끼들…”

“??”


산의 낮은 목소리가 닐과 널의 통제공간에 울렸다.


“그토록 반응성이 뛰어난 약물을 우리에게 주는 것을 보면서 네놈들 수준을 애저녁에 알았다. 게다가 고맙게도 가연성 설탕까지 주더군. 우리를 이리 끌고 오면서도 우리 출신과 특기는 관심이 없었나? 화기(火器)와 폭파전문가에게 그런 좋은 폭탄 재료를 공급해 주면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니… 내참. 듣다 보니 도저히 쪽 팔려서 한마디 거들었다. 신(神) 행세한다고 니네가 신 인줄 아냐? 아! 신이구나. 등신새끼들!!”


‘이런….’


“아직도 궁금하냐? 더 가르쳐주랴? 매일마다 서로 식사당번 하면서 넥타로 할 수 있는 것은 다 실험해봤다. 그 동안 때려잡은 모든 동물의 피와 조직, 식물의 즙 하나하나까지 죄다 넣고 끓이고 삶아봤지. 총알이 떨어져도 화약만 만들 수 있으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은 셀수도 없이 많았지. 게다가 직사(直射)가 가능한 단단한 대나무까지 있으니 못할게 뭐가 있을까? 그러니까…”


‘…’

“다시는 불쌍한 사람들 불러들여 이런 짓 하지 말라고… 오늘은 우리 모두 다 죽는거야. 이 씨발넘들아!“


‘무슨 속셈이냐? 자폭하려는 거냐?’ 널이 소리를 질렀다.


“…”


‘소용없어. 통신을 끊었어. 이거… 빨리 놈들을 잡아야 돼. 가장 중요한 표본일지도 몰라. 어라? 저건 현자(賢者)들인데?’


닐이 화면을 응시하며 소리쳤다. 화면에는 날렵하게 생긴 두 명의 남녀가 불길을 가르며 놈들이 사라진 쪽으로 신속하게 이동하고 있었다.


‘올바른 판단이다. 네놈들도 빨리 튀어나가 저놈들을 잡아! 네 말대로 가장 중요한 표본이다. 이것... 이곳은 형편없이 못쓰게 되었군. 생태가 복원될 때까지 이곳은 잠정 폐기한다.’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닐과 널이 고개를 홱 돌렸다.


그들의 뒤에는 ‘마스터’의 전령이 서 있었다.


* * *


이제 어두운 밤하늘을 가르며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광장의 불을 잡기에는 너무 늦었고, 비의 양도 작았다. 몇 번의 폭발로 뒤집어진 광장의 바닥에는 고성능 화염병처럼 빗물 속에서도 맹렬하게 이글거리며 넥타와 설탕이 타오르고 있었다.


이 꺼지지 않는 불길은 마지막 고기덩어리 하나, 마지막 풀 하나까지 모조리 가루로 만들고 있었다. 광장에는 재가 섞인 회색 빛 비가 내리고 있다. 수림 가득히 번진 불과 대나무 숲에서 연신 터지는 폭발음, 그리고 고기 단백질 타는 냄새로 광장은 하나의 지옥도를 방불케 하고 있었다.


산과 비연은 화염이 무섭게 타오르는 대나무 숲을 뚫으며 달려가고 있다. 숲 속은 화염의 열기로 후끈하다. 두 사람은 매캐한 연기와 불길을 정면으로 뚫으며 전진하는 중이다. 눈은 안경과 렌즈로 보호하고, 입은 젖은 마스크로 가렸다. 머리에는 낙하산용 항공헬멧을 쓴 상태다. 온몸은 물로 적셨고, 점퍼 안에는 방열과 내열성 있는 동물 가죽 재료로 감싸고 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타오르는 대나무 속에 낸 통로를 통해 200미터를 거침없이 통과한 후, 곧 이어 통과해야 할 30미터 절벽은 밧줄에 의존하지 않고 그대로 뛰어 내렸다. 아마 닐과 널이 계산한 속도보다 세배는 빠를 것이다. 절벽 밑은 불빛이 비치지 않아 매우 어둡다. 비가 오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그들의 전진은 거침이 없었다. 실제로 그들은 매우 서두르고 있었다.


“누군가 급속하게 따라오는데?”

산이 중얼거렸다. 약간 긴장된 얼굴이다.


“기운이 매우 강한 자 둘이군요. 아주 강한 자 같습니다. 닐과 널인가?”

비연 역시 호흡을 고르며 말했다. 헬멧을 고쳐 매는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어 있고, 온몸은 더위와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는 상태다. 그들 위로 뭔가 쉭 하고 지나갔다.


“에구… 벌써 앞에 왔는데요?”


비연이 혀를 약간 내밀며 앞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앞에는 남녀 두 명의 청년이 이미 좌측 길목을 막고 서 있었다. 밑으로 이어지는 단 하나의 길이다. 우측은 1,000 m가 넘는 까마득한 낭떠러지에 바닥에는 유독한 연기와 화산 용암이 항상 끓으면서 흐르는 지옥이 펼쳐져 있다.


산이 고개를 꺾으며 물었다.

“너희가 닐과 널이냐? 아니면 마스터라는 개새끼가 보낸 ‘현자’라는 놈들이냐?”


“말본새가 아주 싸가지가 없구나. 어린 인간.”

마치 그리스시대처럼 키톤을 입고 그 위에 망토를 두른 금발 청년이 빙긋 웃으며 오른손을 흔들었다.


“?”


산은 황급하게 허리를 왼쪽으로 비틀었다. 본능적으로 눈을 돌려 몸을 살폈다. 오른쪽 어깨 쪽 점퍼가 뭔가에 예리하게 잘려나갔다.


“호-오- 이거 이거… 대단한데? 확장된 공간지각까지 나갔다는 건가?”

옆의 여자가 호기심에 찬 눈으로 둘을 살폈다.


산이 비연을 돌아보았다. 비연과 산의 눈이 마주쳤다.

순간적으로 많은 대화가 오가고 있다.


비연은 어깨에 맨 총을 오른쪽으로 위치를 바꾸며, 왼손으로는 항공 점퍼의 지퍼를 내렸다. 산은 왼손을 품속으로 넣으며 오른손으로는 비연의 왼손을 잡았다.


“뭘 하려는지 모르겠는데, 별로 쓸모는 없을 거야. 허튼 짓 하지 말고 같이 가지? 아무래도 너희 들은 좀더 다른 대접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은데? 1년만에 3단계 가속의 ‘각성자’라… 허참. 직접 보고도 믿겨지지 않으니… ”


“개새끼들아 개소리는 개집에서나 하시고…”


‘현자’들의 눈이 부릅떠졌다. 산과 비연이 뒤로 도약하고 있다. 방향은 오른쪽 절벽 낭떠러지다. 놈들은 지금 절벽으로 뛰어 내리려하고 있다.


‘자살을? 그러면 곤란하지…’

현자들은 음속에 육박하는 속도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이거나 쳐 먹어라! 씨벌 년놈들아!”


‘탕-탕-‘

‘투-투-투-투-‘


허공에서 위쪽을 보고 눕듯 절벽에서 떨어지는 산의 왼손에는 권총이, 비연의 오른손에는 K1소총이 그들을 향해 불을 뿜고 있었다.


“헛-“

“흑-”


현자들은 멈칫하며 다가오는 총알을 튕겼지만, 너무 근접거리라서 몇 발을 맞았다. 그들은 상처를 감싸쥔 채 망연한 눈으로 두 사람이 떨어진 절벽 아래를 쳐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꼭 잡은 채 큰 대자로 누워 하늘을 쳐다보며 아득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


현자들의 눈이 더욱 크게 떠졌다.


시야가 갑자기 밝아지고 있다. 뭔가 하얀 것이 여자의 배쪽에서 빠져 나오며 밤하늘에 펼쳐지고 있었다. 이윽고 꽃잎처럼 둥글게 펼쳐지고 있다. 드디어 속칭 하늘의 백장미라고 불리는 그 예비 낙하산이 완전히 펼쳐졌다.


이 이계의 하늘에서 다시 펼쳐진 그들의 낙하산은 진정으로 아름다웠다. 하얀 낙하산은 거센 상승기류를 타고 좁은 계곡을 따라 빠르게 윗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생명과 소망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같이 실은 채 밤바람을 타고 멀리 멀리 까마득한 곳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 * *


“기가 막히군…


정말 대단해. 그래서 일부러 싸움을 크게 걸었고… 비행체까지 모조리 끌어내 잡아버렸어. 이로써...공중에서 추격할 수 있는 수단 자체를 미리 없애버렸을 것이고... 게다가 밤에 탈출 방향을 잡기 위해 불을 크게 질렀을 테지. 끈질기게 밤까지 기다려 상승기류를 타고 흘러 나간 것이군. 그 동안의 탈출 시도는 모두 위장된 정찰 활동이었겠지…

쩝... 졌다. 우리의 완패다.”


마스터의 말씀이었다.


- End of 탈출 -






-----------

드뎌 탈출 했습니다.

원래 초인의 글을 써야 하는데, 분위기상 이글의 진행이 조금 빨라야 할 것 같아서 초인이 양보했다고 합니다.


이제 에피소드 2로 넘어갑니다.

천우 월드로 넘어온 이들은 어떤 행동을 하면서 살아갈까요? 본문에 나왔습니다만, 현자와 사탄의 마수에서 탈출에 성공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이계에서의 생활을 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지요. 아직 현자 진영이 포기하지도 않을 것이고요.


그리하여...

다음 편부터는 게임소설에서 전형적인 이계깽판물로 갑니다.(응?)

필자는 있을 법한 사건과 엮이면서 각성과정을 밟아가는 주인공을 졸졸 따라갑니다. 너무 간섭하지 않으면서 그들의 사랑, 그들의 지혜, 그들의 각성, 그리고 세계를 쳐다보는 따뜻한 시선을 느껴 볼 생각입니다.


이 에뜨랑제는 그런 글입니다. 가고 싶을 때 가고, 쉬고 싶을 때 쉬고, 다투고 싶을 때는 다투고 울고 싶을 때는 우는... 에피소드가 얼마나 쌓일지 모르지만 독자분들 반응이 따뜻하다고 느끼는 한 이야기는 이어질 겁니다.


근데,

쉬면서 쓰는 글인데... 오늘은 조금 무리했답니다.

댓글 신공으로 격려를 부탁드립니다. 출판할 계획이 없는 글이기 때문에 매회마다 댓글 입장료 받겠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464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에뜨랑제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40 에뜨랑제 (39)- 주유 -14 +205 08.03.23 51,251 13 18쪽
39 에뜨랑제 (38)- 출판 삭제 +131 08.03.22 49,416 5 1쪽
38 에뜨랑제 (37)- 출판 삭제 +187 08.03.19 50,000 4 1쪽
37 에뜨랑제 (36)- 출판 삭제 +245 08.03.16 50,167 4 1쪽
36 에뜨랑제 (35)- 출판 삭제 +263 08.03.12 50,921 4 1쪽
35 에뜨랑제 (34)- 출판 삭제 +220 08.03.11 50,570 3 1쪽
34 에뜨랑제 (33)- 출판 삭제 +145 08.03.09 49,931 4 1쪽
33 에뜨랑제 (32)- 출판 삭제 +189 08.03.07 50,947 4 1쪽
32 에뜨랑제 (31)- 출판 삭제 +271 08.03.01 53,236 11 1쪽
31 에뜨랑제 (30) -출판 삭제 +213 08.02.28 56,130 19 1쪽
30 에뜨랑제 (29)- 주유- 4 +302 08.02.24 57,341 56 15쪽
29 에뜨랑제 (28)- 주유 -3 +78 08.02.24 54,810 69 10쪽
28 에뜨랑제 (27)- 주유 -2 +111 08.02.21 56,220 62 10쪽
27 에뜨랑제 (26)- Episode 2 - 주유(周遊) -1 +286 08.02.20 58,825 62 13쪽
» 에뜨랑제 (25)- 탈출 -9 +464 08.02.10 58,082 73 26쪽
25 에뜨랑제 (24)- 탈출 -8 +99 08.02.08 52,326 63 16쪽
24 에뜨랑제 (23)- 탈출 -7 +89 08.02.06 51,755 63 10쪽
23 에뜨랑제 (22)- 탈출 -6 +72 08.02.03 52,677 59 18쪽
22 에뜨랑제 (21)- 탈출 -5 +88 08.01.26 52,998 68 13쪽
21 에뜨랑제 (20)- 탈출 -4 +108 08.01.15 54,003 65 15쪽
20 에뜨랑제 (19)- 탈출 -3 +143 08.01.10 55,784 55 17쪽
19 에뜨랑제 (18)- 탈출 -2 +60 08.01.03 56,511 60 13쪽
18 에뜨랑제 (17)- 탈출 -1 +57 08.01.02 58,519 57 10쪽
17 에뜨랑제 (16)- 탈각 -10 +50 07.12.20 57,184 45 10쪽
16 에뜨랑제 (15)- 탈각 -9 +64 07.12.04 56,560 60 8쪽
15 에뜨랑제 (14)- 탈각 -8 +53 07.11.27 57,695 52 10쪽
14 에뜨랑제 (13)- 탈각 -7 +54 07.11.06 58,736 52 8쪽
13 에뜨랑제 (12)- 탈각 -6 +56 07.10.30 61,246 58 15쪽
12 에뜨랑제 (11)- 탈각 -5 +65 07.10.28 64,948 56 10쪽
11 에뜨랑제 (10)- 탈각 -4 +84 07.10.22 71,065 59 9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