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우제
“왜 불을 질렀지?”
야수바야는 방화범을 심문했다. 그는 멍한 표정으로 아무렇게나 지껄였다.
“배가 고파서 음식을 훔치려고요. 불이 나면 사람들이 불을 끄려고 달려갈 테니까 그 틈에 곡식을 훔치려고 했습니다.”
“네가 처음 불을 지른 곳이 곡물 가게야. 곡물 가게에 불을 지르면 사람들이 달려올 텐데, 곡물을 훔치려고 했다고? 말이 되는 핑계를 대라.”
야수바야의 말에 범인은 당황했지만, 자신은 가난한 부랑자이고, 배가 고파서 음식을 훔치려고 했다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그가 아슈르 시에서 온 떠돌이 부랑자라는 것 말고는 알아낸 것이 없었다.
사람들은 불을 지른 사람보다도, 비가 오지 않는데도 기우제를 지내지 않는 왕과 신관에게 분노를 터뜨렸다. 레아 덕분에 불을 일찍 발견해서 조기에 진압할 수 있었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고마워하지 않았다. 갈증으로 허덕이는 사람들에게는 그럴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테프누트는 더 이상 사태를 진정시킬 수 없는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깨닫고 결심했다.
“사람들의 동요하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기우제를 올려야 할 것 같습니다.”
레아와 테프누트는 이미 매일같이 신전에서 이슈타르 여신에게 비를 내려달라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기우제를 지낸다는 것은 그것을 공개적으로 하는 의미밖에 없었다. 그녀는 과연 그것이 여신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기우제를 크게 올리면 비가 올까요?”
아쉬쿠르도 그를 만류했다.
“기우제를 올려도 비가 오지 않으면 사람들이 더욱 실망할 텐데.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려 봐.”
그러나, 테프누트는 단호했다.
“기우제를 지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폐하까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제가 날씨를 바꿀 수는 없지만, 천재지변이 닥쳐올 때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이 저의 책무입니다. 그러니, 제가 맡은 바 책무를 다하지 않고 있다는 사람들의 말도 맞습니다.”
그도 막연히 생각 없이 기우제를 지내려고 하는 것은 아니었다.
“기우제를 지내기 위해서는 10일간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고 제사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7일간 기우제를 지내죠. 그러면 기우제를 마칠 때까지 17일이 지나가는데, 과거 기록상 비가 오지 않았던 최고 기록이 58일입니다. 지금까지 40일간 비가 오지 않았으니, 기우제가 끝나기 전에는 비가 올 확률이 높습니다.”
지금까지 비가 오지 않은 것이 40일이고, 기우제를 준비하고 마치려면 17일이 걸리니, 총 57일이 걸리는 셈이었다. 그러니 그 안에는 어쨌든 비가 올 확률이 높다는 생각에서 기우제를 지내려는 것이었다. 기우제를 지낸다고 하면 당장 비가 오지 않더라도, 불안해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다독일 수는 있을 것이었다.
레아는 여전히 마음이 불안했다. 조금이라도 대기가 움직이는 기미가 보이면 덜 불안할 텐데 그렇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만에 하나라도 기우제가 다 끝났는데도 비가 안온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너무나 두려웠다.
“사람들 말대로 신녀인 제가 이슈타르 여신을 제대로 모시지 못해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게 아닐까 싶어요.”
여러 날 동안 입맛이 없어서 먹지도 못한 레아는 기운이 없이 축 쳐져서 있었다. 아쉬쿠르는 펄쩍 뛰며 그녀를 위로했다.
“무슨 소리야. 다른 사람들 말에 너무 신경쓸 것 없어. 전쟁 때는 레아에게 신령한 힘이 있다고 찾아와서 축복을 내려달라고 하고서,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다니 뻔뻔하잖아.”
테프누트는 기우제를 지내겠다고 발표했다. 사람들은 그의 말에 희망을 가지고 한결 소요사태가 진정되었다.
“기우제가 끝날 때까지 비가 올 거라고 보십니까?”
같이 정원을 걷던 남타르는 샴시 일루에게 물었다.
“비가 오던 안 오던 우리는 이익볼 것도 손해볼 것도 없습니다.”
정원의 나무들도 이미 바싹 말라서 하얗게 죽어가고 있었다.
“대신 비가 안 온다면 왕과 테프누트가 큰 손해를 보도록 만들어야죠.”
“어떻게요?”
샴시 일루는 말라버린 연못에 멈춰 섰다. 물이 없어서 물고기들이 배를 내놓고 죽어있었다.
“상대방이 많이 걸도록 판을 키워야지요.”
그는 남타르의 귀에 계략을 속삭였다.
제단에는 꽃을 올려야 했지만, 가뭄이 극심해서 꽃을 구하기 어려웠다. 사람들이 먹을 물마저도 말라가고 있는 형편이었다.
레아는 꽃 대신 풀이 올려진 제단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내일이면 비가 오지 않은 지 50일이 되는 날이었다. 내일부터 테프누트가 7일간 기우제를 지낼 예정이었다. 그 이후에도 비가 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테프누트는 서서히 공기장벽이 사라지는 것이 느껴진다고 했다. 레아도 미세하게 공기가 흐르기 시작한 것을 느끼긴 했지만, 바람이 분다고 해서 바로 비가 오는 것은 아니었다. 희미하게 흐르는 바람에는 여전히 습기라곤 없었다.
“테프누트 신관은 영험하니까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올 거야.”
“그렇겠지? 7일이나 신관이 단식을 하며 기도를 하는데도 비가 안온다면 여신께서 단단히 화가 나신거지.”
사람들은 기대에 부풀어서 비가 오기를 고대했다.
“기우제가 끝나기 전에 비가 올 수도 있어. 전에도 기우제를 시작하니까 바로 비가 온 적도 있었잖아.”
“그래. 긴 고생도 이제 끝이겠지.”
사람들의 기대감이 높을수록 레아는 초조했다. 아직은 비가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천천히 공기장벽이 흩어지며 바람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지만, 이 속도라면 기우제가 끝난 이후에나 완전히 해체가 될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비가 오기까지는 또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알지 못했지만, 샴시 일루와 남타르는 부하들을 시켜서, 사람들의 기대감을 조장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매수한 신전에서 일하는 하인에게 돈을 건네며 지시했다.
“신전에 기도하러 오는 사람들에게 신관이 기우제를 지내면 당연히 비가 올 거라고 소문을 퍼뜨리게. 기우제를 지내도 비가 오지 않으면 뭔가 크게 잘못된 거라고 말이야.”
비가 오지 않으면 사람들의 분노가 테프누트에게 집중될 것이었다. 그 분노를 이용해서 그를 제거하려는 속셈이었다.
기우제가 시작되기 전에 왕은 테프누트와 레아를 불렀다.
“조짐이 좋지 않아. 기우제가 끝나도 비가 오지 않으면 사람들이 가만있지 않을 기세야. 날짜가 좋지 않다고 핑계를 대서, 기우제를 미루는 게 어때?”
테프누트는 신중하게 대답했다.
“조금씩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3일 후면 공기장벽은 사라질 겁니다.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비도 곧 따라올 겁니다.”
“하지만 반드시 7일 안에 비가 온다고 볼 수는 없어요.”
레아도 걱정스럽게 말했다.
“기우제를 지낸다고 하니까 약탈과 폭동이 멎었습니다. 그런데 기우제를 미룬다면 다시 범죄와 내란이 일어날 겁니다. 지금 와서 멈출 수는 없습니다.”
왕은 고민스러웠다. 테프누트의 말대로 각 도시의 영주들은 지금 백성들의 불만을 업고 반란이라도 일으킬 기세였다. 무작정 기우제를 연기할 수도 없었다.
기우제가 시작되었다. 신관은 7일간 하루3번 물만 마시며 기도를 했다. 신녀들은 하루종일 번갈아가며 춤을 추었다. 제단에는 7일동안 매일 다른 제물이 바쳐졌다. 물고기, 닭, 염소, 양, 돼지, 말, 소까지 여신의 노여움이 풀리기를 바라며 제단에 피가 뿌려졌다.
레아는 매일 불어오는 바람을 관찰하며 비가 오기를 고대했다. 그러나,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면서 날씨는 그녀의 바램과는 멀어지고 있었다. 공기장벽이 거의 사라졌지만, 여전히 습기를 머금은 바람은 불어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기대에 차서 하늘을 바라보았지만, 여전히 구름은 없고 햇빛만 쨍쨍할 뿐이었다. 닷새째가 지나가자 또다시 사람들의 불안감이 스며나오기 시작했다.
“기우제도 소용이 없어. 이슈타르 여신께서 크게 노하셨어. 더 큰 속죄와 희생이 필요해.”
야수바야와 아쉬쿠르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더 이상 사람들의 좌절감을 폭발하지 않도록 관리하기는 어려웠다. 이제는 먼 티그리스 강으로부터 하루 종일 걸려서 물을 길어오지 않으면 마실 물조차 말라버린 상황이었다. 병사들이 한 사람에게 1병씩만 길어온 물을 배급했다.
“방화를 한 자의 배후를 밝히면 사람들의 분노를 돌릴 수 있지 않을까요?”
불을 지른 부랑자는 누군가가 돈을 주고 불을 지르도록 시켰다고 자백했지만, 자신도 처음 만난 사람이라서 어디 사는 누구인지 모른다고 했다. 그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난 장소가 아슈르 시의 광장 앞 술집이라고 했다. 그를 그곳으로 데려가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보며 사주를 한 자를 찾아내라고 했지만, 그 많은 사람 중에서 찾아내기란 볏짚 속에서 바늘 찾기였다.
“사람들은 방화보다고 비가 오지 않는 것에 분노하고 있어. 찾아낸다 해도 효과는 미미할 거야.”
왕은 마지막 날까지도 비가 오지 않을 경우에 대비해서 대책 마련을 서둘렀다. 각지의 반란에 대비해서 경비를 강화했다. 기우제 이후에 또 다른 대대적인 제사를 지낼 계획도 세웠다.
레아는 초조하기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비가 오지 않지?’
공기장벽은 예상보다는 늦었지만, 완전히 사라졌고, 이제 하늘에는 조금씩 구름이 떠다니고 있었다. 그런데도 흰구름은 비를 내리지 않고 천천히 지나가버렸고, 비구름은 오지 않았다. 아마도 지금 몰려오는 공기도 오랫동안 건조한 채 공기 장막 안에 있던 구름이라서 습기를 머금지 않고 있어서 그런 듯 했다. 점점 대기중의 습기가 짙어지고 있어서 조금만 더 기다리면 습기를 머금은 공기가 몰려올 거라는 희망은 보였다. 하지만, 그것이 며칠이 더 걸릴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마침내 7일간의 기우제가 끝났다. 하늘은 단 한 방울의 비도 내려주지 않았다. 샴시 일루는 즉시 각 도시의 영주들과 함께 왕에게 테프누트를 처벌할 것을 간했다.
“신관 테프누트는 신의 뜻을 살피는 것을 소홀히 해서 가뭄 발생에 책임이 있습니다. 기우제를 지내는 책임도 소홀히 했습니다. 기우제가 끝나면 비가 올 거라고 예측했지만 그것도 빗나갔습니다. 그러니 테프누트의 신관 자격을 박탈하고 처벌해야 합니다.”
“맞습니다. 아시리아는 신의 저주를 받았으니 아시리아를 버리고 다른 나라로 떠나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테프누트는 그들에게 변명을 하지 않았다. 7일간의 단식기도로 신경이 예민해진 그가 날이 선 목소리로 대답했다.
“좋습니다. 신관의 자리에서 물러나겠습니다.”
왕은 좌중을 진정시키고 새로운 제안을 했다.
“기우제로도 효과가 없으니 더욱 대대적으로 여신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것이 좋겠소.”
남타르가 나서서 말했다.
“여신께서 이렇게 노하셨는데 어지간한 제사가지고 되겠습니까. 제물을 바치는 제사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말이오?”
왕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그를 쏘아보았다. 남타르는 테프누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신께서 사람에게 노하셨으니 사람을 제물로 바쳐야 마음이 풀리실 겁니다.”
그것은 이 사태의 가장 큰 책임자로 몰리고 있는 테프누트를 처형하라는 뜻이었다.
남타르의 말에 영주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시했다. 테프누트가 그동안 아시리아를 위해서 한 일들을 생각하면 그들의 처사는 파렴치한 행위였다.
테프누트는 분노한 표정으로 아무 말이 없이 앉아 있었다. 레아는 너무나 화가 나서 머리가 핑 돌 지경이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그를 희생양으로 비난하는 것도 모자라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죽이려고 드는 것이었다. 게다가 신의 뜻을 들먹이다니 신성모독이었다.
그녀는 가만히 있으라는 테프누트의 말도 잊고,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서 무서운 표정으로 남타르에게 말했다.
“신관께서 신의 뜻을 살피는 것을 소홀히 해서 가뭄이 발생됐다고 말씀하셨는데, 신께서 어째서 화가 나셨는지는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인간으로서 감히 신의 뜻을 함부로 예단하지 마십시오.”
영주들은 레아가 매섭게 남타르를 꾸짖자,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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