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람 왕국의 멸망
불화살이 내뿜는 자욱한 연기 사이로 아시리아 군이 나타났다. 성 안에 있던 다마스쿠스 병사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성벽만 믿고 있었는데 성 안에 적이 나타나자 공황상태에 빠졌다.
한 명이 무기를 버리고 달아나자, 나머지도 줄줄이 거리의 골목 사이로 도망쳤다.
아시리아 병사들이 두터운 성문의 빗장을 열었다. 둔중한 소리와 함께 쏟아지는 먼지. 문이 양쪽으로 열렸다.
필레세르3세가 성 안으로 들어왔다. 왕은 르신의 행방을 쫒았다.
“르신은 어디 있지?”
모두 도망쳐서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마스쿠스 주민들은 이미 집안에 꼭꼭 숨어 있어서 겉으로 보면 아무도 살지 않는 유령도시 같았다. 아시리아가 아람 왕국을 멸망시키고 주민들을 노예로 잡아갈 거라는 소문이 돈 모양이었다.
“왕궁으로 도망쳤습니다.”
르신은 왕궁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저항했지만, 전세는 이미 기울었다. 그 안의 아람 신하들도 이제는 어떻게 각자 살아남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필레세르3세는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
“아람과 아시리아는 오랫동안 화친했소. 르신이 아시리아를 배신하고 유다를 공격해서 다마스쿠스를 점령했지만, 그의 잘못이지 다마스쿠스 사람들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소. 르신을 전범으로 법정에 세우고 새로운 지도자를 선출하면, 더 이상 지난 잘못을 묻지 않을 것이오.”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사실상 아람 왕국을 아시리아의 속국으로 만들겠다는 뜻이었다. 아람이 아시리아를 배신한 이상, 용서할 생각은 없었다. 다른 나라의 왕들에게 경고하는 의미도 있었다.
“어째서 왕궁을 바로 공격을 하지 않으십니까?”
야수바야의 물음에 왕이 대답했다.
“왕을 죽이면 아람 사람들의 반발이 클 테니까. 아람 사람들이 스스로 처리하게 해야지.”
르신은 죽이고 나라는 병합하지만, 아람의 신하들이 스스로 그렇게 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백성과 신하들이 아시리아에 반감을 가지지 않도록 하려는 의도였다.
왕은 아람에서의 승리를 생각하기보다는 이스라엘 전쟁을 염두에 둔 승리를 하려고 했다. 아람 사람들의 반감을 잠재우고, 그들이 이스라엘을 공격해도 뒤통수를 치지 않도록, 아람을 조용히 안정시키고자 했다.
이스라엘 북부와 다마스쿠스는 산 하나만 넘으면 연결되어 있었다. 아시리아군이 이스라엘을 공격해 들어갈 때 뒤에서 공격받지 않으려면, 다마스쿠스를 완벽하게 아시리아의 편으로 만들어 놓아야 했다.
“시간을 끌면 오히려 르신에 대한 동정 여론이 일어나는 게 아닐까요?”
“그런 걱정은 안해도 돼. 르신은 그럴 위인이 못 돼. 상대가 베가라면 시간을 주지 말고 바로 공격해서 죽이는 게 맞지. 그런데 르신은 내버려두면 스스로 자멸할 거야.”
말로는 르신만 처벌하겠다고 했지만, 아람의 반 아시리아파 신하들도 제거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일을 자신이 직접 하는 것은 반발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들 스스로 정화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어차피 저 안에 식량은 며칠이면 떨어질 테니 좀 기다려 보자고.”
어차피 서서히 말라죽을 르신의 세력을 잡으려고 굳이 왕궁을 부수고 들어갈 필요가 없었다.
왕궁에 고립된 귀족과 신하들은 노골적으로 르신을 잡아서 필레세르3세에게 바치자는 말을 하지는 못했다. 몇몇 르신에게 충성하는 신하도 있었고, 종교와 문화가 다른 아시리아에 반감을 가지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다를 공격하고 아시리아를 적대해서 아람을 전쟁의 화마에 던져 넣은 르신에 대한 불만이 팽배했다.
르신은 자신을 붙잡아서 처벌하면 다마스쿠스 사람들을 용서해주겠다고 한 필레세르3세의 말을 듣자, 주변 신하들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 그는 공포심에 휩싸여서 주위 사람들을 멀리하고 의심했다.
“네가 감히 나를 아시리아에 팔아넘기려고 해?”
르신이 이를 갈며 신하에게 소리쳤다.
“당장 저 놈의 목을 쳐라!”
“저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습니다.”
억울하다고 호소하는 신하에게 르신이 눈을 부라렸다.
“이스라엘과 유다가 싸우던 말 던 내버려 둘 것을 괜히 끼어들었다고 말했다며? 그게 나를 비난하는 말이 아니면 뭔가?”
“그렇지 않습니다. 전쟁은 우리 모두 결정한 것인데, 저 자신의 어리석음을 후회하는 말이었습니다.”
“변명은 필요 없다!”
르신은 최후의 발악을 하며 신하들을 자기 손으로 죽였다. 그것이 그의 명줄을 재촉했다.
아시리아와 화친을 주장했던 신하들은 르신의 손에 자신들도 곧 죽게 될 거라고 예상했다.
“이제 곧 우리 차례요. 이대로 있지 말고 먼저 손을 씁시다.”
“옳소. 식량도 떨어져 가는데, 며칠 후면 항복하는 수밖에 없소.”
그들은 반란을 계획했다. 르신의 편이었던 신하도 차츰 돌아섰다. 어차피 항복은 시간문제였다.
그들은 필레세르3세에게 비밀리에 연락을 취해왔다. 왕은 그들에게 제안했다.
“그대들을 전폭적으로 지원할 테니, 아시리아의 반대파를 배제하고 정권을 완벽하게 장악하시오.”
그들은 왕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르신 몰래 스스로 반 아시리아파를 배제한 새로운 내각을 꾸렸다. 대부분의 신하들은 그들의 의견에 따랐다. 말이 농성이지 며칠 후면 손들고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르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고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람 신하들은 왕궁 문을 열고 아시리아군을 받아들였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필레세르3세는 기다리고 있던 친 아시리아파 신하의 안내로 르신이 있는 방으로 올라갔다.
복도를 지나서 몇 개의 방을 지나가자, 왕의 집무실이 나왔다.
그 앞을 지키는 호위병사들은 갑작스러운 아시리아군의 등장에 얼어붙어서 소리도 지르지 못했다. 아람 왕국의 대신들이 필레세르3세를 왕처럼 모시며 안내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도무지 파악이 안 되었다.
“어서 문을 열게.”
아람 대신의 말에 그들은 얼떨결에 창을 거두고 문을 열었다. 그들은 꼼짝도 하지 못하고 필레세르3세가 아시리아군이 지나가도록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
르신은 자신의 신하가 아시리아군을 이끌고 방으로 들어오자 분노해서 소리쳤다.
“네 이 놈! 나를 배신하다니!”
필레세르3세가 말했다.
“배신은 당신이 먼저 했지. 아시리아의 뒤통수를 쳤지 않소?”
아람의 대신들은 르신을 체포해서 감옥에 가두고 법정에 세웠다.
르신은 실익도 없이 유다왕국을 공격하고 전쟁을 일으켜서 나라를 혼란에 빠뜨린 죄로 사형이 언도되었다.
재판정에서 르신은 필레세르3세와 아하스에게 사정했다.
“베가는 자기가 세계를 다스리는 왕이 될 거라고 했소. 나는 그 꼬임에 넘어간 것뿐이오. 내가 어리석었소.”
아하스는 화가 나서 소리쳤다.
“유다를 침공하고 나를 죽이려고 했으면서 꼬임에 넘어갔을 뿐이라고? 당신 때문에 모두가 이 무슨 고생이란 말이오? 나는 아직도 내 왕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소.”
필레세르3세도 차갑게 대꾸했다.
“이스라엘이 아시리아를 이길거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단 말이오? 그대처럼 어리석은 자가 왕인 것이 아람의 불운이오. 죽음으로서 아람 백성들에게 속죄할 길이 열린 것을 감사하시오.”
아람의 친 아시리아파는 새로운 지도자를 선출하고 아시리아에 충성을 서약했다.
아람의 신하들은 친 아시리아 파로 대거 물갈이가 되었다.
아람 왕국은 명맥은 유지했지만, 총독이 주둔하고 아시리아의 속국이 되었다.
필레세르3세는 다마스쿠스에서 며칠 머물며 다음 계획을 짰다.
다마스쿠스는 함락되었지만, 아람 왕국의 다른 지역들은 아직 완전히 장악이 되지 않았다. 수메르 지역과 언어와 종교와 문화가 다른 아람 지역을 아시리아의 속국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시일이 걸릴 것이었다.
왕은 다마스쿠스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아람의 동쪽과 서쪽의 성읍들을 거쳐 지나가려 했다. 그렇지 않으면 다마스쿠스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지방의 백성들이 알 리가 없었다. 아시리아군의 위용을 아람 전역에 곳곳에 과시하고 지나가면서 아시리아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지방에도 있는지 확인하려했다.
그러는 사이에 이스라엘과 가까운 티레 항구로 각지에서 도착한 군수물자와 추가병력이 도착할 것이다. 그들을 편성하고 정비해서 내년에 이스라엘을 공격할 할 생각이었다.
왕은 다마스쿠스에 총독과 군사 일부를 남겨놓고 아람 왕국의 남부로 향했다. 동쪽의 사막지대로는 야수바야를 보내고, 자신은 서쪽의 갈릴리 호수 쪽으로 향했다.
아람은 사막 옆에 위치해서인지 부족단위로 독립적으로 생활하는 아랍과 비슷한 면이 있었다.
그들은 아시리아군이 지나가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구경했다. 다마스쿠스의 왕이 바뀌어도 딱히 관심이 없었다.
한 마을에 도착해서 잠시 쉬면서 물을 보급했다. 땡볕에 목이 마르던 차에 마시는 시원한 물은 꿀맛이었다.
그 마을의 부족장이 다가와서 그들에게 물었다.
“못 보던 사람들인데 어느 나라 군대요?”
필레세르3세가 대답했다.
“아시리아요.”
“아시리아군이 여기는 왜 온 거요?”
“아람은 이제 아시리아 땅이 되었소.”
“아람 왕국은 이제 없는 거요?”
“그렇소. 이 곳은 지금부터 아시리아 왕이 다스릴 거요.”
부족장은 왕이 부드럽게 대답을 해주자 우쭐해서 말했다.
“이 마을을 다스리는 건 나요. 왕들이 누가 되건 이런 작은 마을은 마찬가지요. 르신이 왕이었을 때도 그 전에 다른 왕이었을 때도 이 마을에 신경 쓰는 건 나뿐이었소.”
필레세르3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부족을 다스리면서 어려운 점은 없소?”
“딱히 어려운 건 없지만, 아쉬운 건 있소.”
부족장은 한숨을 쉬었다.
“글을 가르칠 선생님이 있으면 좋겠는데 마을이 작다보니 선생님이 부족하오.”
“아시리아 왕이 마을에 선생님을 보내줄 거요.”
“아시리아 왕은 제국을 다스린다고 들었는데 이 작은 마을을 어떻게 알고 보내준단 말이오?”
왕은 물통에 물을 채우고 말에 올라탔다.
“다 알고 있다오.”
부족장은 멀리 사라지는 아시리아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며칠 후에 글을 가르칠 선생님이 마을에 왔다. 그는 부족장에게 말했다.
“아시리아 왕의 명령으로 이곳에서 글을 가르치기 위해서 왔습니다.”
“아시리아 왕이요?”
부족장은 이 곳을 지나간 아시리아 장군이 왕에게 대신 청을 해 준 것인가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의 이름이라도 물어볼 것을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 폐하께서 물 맛이 좋더라고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부족장은 그제야 전에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람이 아시리아의 왕 필레세르3세라는 것을 깨닫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왕이 누가 되던 자신의 마을과는 상관없다고 말한 것이 부끄러워 식은땀이 흘렀다.
아람 왕국의 남쪽의 성읍들을 돌며 아시리아에 반대하는 세력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필레세르3세는 봄이 오면 이스라엘을 정벌하기 위해서 티레 항구로 갔다.
티레에는 아쉬쿠르가 보급품을 가지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오랜만에 레아를 보고 반가워했다.
“잘 다녀왔어?”
“잘 지내셨어요? 니무르드에는 별 일 없어요?”
그녀도 기뻐하며 그를 반겼다. 그녀가 니무르드를 떠나온 지도 반년 가까이 되었다. 가족들 소식도 궁금하고, 니무르드 소식도 듣고 싶었다. 그는 그녀에게 뭔가를 내밀었다.
“동생이 찾아왔었어. 누나한테 이걸 전해달라고.”
그녀는 아쉬쿠르가 내민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녀가 집에 갔을 때 심었던 사탕수수 줄기였다. 그것이 싹을 틔우고 크게 자라난 것이었다.
“메루하에서 가져온 씨앗을 심은 건데 벌써 이렇게 컸네요.”
아시리아에서도 맛있는 사탕수수를 먹을 수 있게 되어서 기뻤다.
튼실하게 자란 사탕수수 줄기를 이빨로 깨물자 달콤한 물이 계속 흘러나왔다. 메루하에서 먹었던 것과 같은 맛이었다.
그녀는 사탕수수 줄기를 씹으며 메루하의 추억에 잠기고, 가족들에 대한 향수를 달랬다. 물을 많이 먹는 사탕수수가 이렇게 잘 자라다니 동생들이 그녀 생각을 하면서 매일 물을 주고 잘 돌보았던 것이 틀림없었다.
그녀는 전쟁이 어서 끝나서 고향에 가서 동생들과 잘 자란 사탕수수를 직접 눈으로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 다른 병사들도 모두 같은 바람일 것이다.
그들은 겨울을 티레에서 보내며 봄에 있을 이스라엘 전쟁을 준비했다.
전국의 병사들과 용병들도 티레로 속속 도착했다. 파르수 기병도 삼백 명이 참전했고, 자비베 여왕도 직접 기병대를 이끌고 왔다.
필레세르3세가 이렇게 대규모로 병력을 모으는 것은 이스라엘을 공격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만에 하나 이집트가 참전할 경우에 대비해서였다. 이집트가 참전한다면 그들의 병력은 아시리아군의 몇 배의 규모가 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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