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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가문이 망해도 고용된 사람들은 남아서 삶을 이어가죠. 그리고, 그 사람들은 귀족들처럼 멀리 떠나지 못해요.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살다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죽기 마련이죠. 설령 떠나는 일이 생겨도 어느새 고향에 돌아와서 생을 마감하려고 하죠. 팔라이올로구스 가문이 이렇게 되고 세월이 흘렀지만, 그때 가문을 위해서 일하던 사람들 중에 목숨을 부지한 사람들이 틀림없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사람들은 의외로 멀리 가지 않고 주변 마을에서 살고 있는 경우가 많을 거에요. 우선 거기서부터 탐문과 조사를 시작해 보도록 하죠. 그때 거기서 일했던 사람들을 찾고, 찾은 사람들을 통해서 건너건너 가문의 전황을 깊숙히 알고 있거나, 당시 사건을 자세히 아는 사람들을 수소문해보면 틀림없이 단서가 나올 겁니다.”
나의 말에 세명의 남자들의 눈에 감탄의 눈빛이 흘렀다. 그리고 그걸 어떻게 아냐는 표정이었다. 젠장할··· 내가 사실 공녀가 아니라 하녀라서 그렇다, 왜! 내가 설명한대로 가문이 망해도 귀족들처럼 어디 도망갈 곳도 없어서, 지옥 같은 곳에서도 눌러앉아 살아야 하는 하녀라서 아는 거라고. 본업이 수색에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에 기뻐하기 보다는, 괜히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튼 그런 나의 의견대로 우리는 인근 마을들을 각자 흩어져서 탐색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몇가지 사실들을 알아낼 수 있었다.
“확실히 공녀의 말처럼 인근 마을에 그 당시에 팔라이올로구스 가문에서 고용했거나 일을 했던 사람들은 상당수 존재하더군요. 그래서, 그 당시에 그곳에 아버지를 기억하는 사람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안나 황녀가 이곳으로 은거하던 당시 아버지와 같이 그녀를 호위했던 황제 폐하로 짐작되는 어느 껄렁한 남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도 있었구요. 아마도, 그 당시에 황제께서 여기 오셨던 것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저는 마을 관공서에 기록된 과거 사건들을 찾아보았어요. 팔라이올로구스 가문이 용병대에 기습당해 사라진 사건을 좀더 상세하게 알아보려구요. 하지만, 기록이 많이 불투명하더라구요. 당시 내전이라서 기록 보존이 잘 안되었고, 깊은 밤중에 갑자기 난입한 용병대의 기습에 하루 만에 성이 함락되었고, 그들은 모든 재물과 사람들을 데리고 곧바로 이탈해 버렸더군요. 마을 사람들은 그 한밤 중에 소동에 나올 엄두도 못내고 벌벌 떨며 집에서 숨을 죽이고 숨어 있어서, 당시의 상황을 목격한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쿠타이의 말처럼 그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을 찾기가 쉽지가 않더라구요. 그리고 팔라이올로구스 가문의 내부 사정에 대해서도 아는 사람이 별로 없구요. 그 용병대의 기습에 황가의 내부 사정을 알만한 사람들은 대부분 죽거나 끌려가 버리는 바람에 마을 사람들은 그저 팔라이올로구스 가문이 거기 있었다는 사실 정도는 알아도 그들이 그날 어떻게 되었는지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세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이것들아··· 내가 팔라이올로구스 가문 숨겨놨냐? 없는 것이 내 탓도 아니고.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한편으로 나는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제국이 안정을 되찾고 내전에 개입한 명가들이 복권되는 상황인데, 어지간하면 언급될만도 한 최후의 황제의 최후의 일족이 소리소문도 없이 사라지다니. 대체 그날 무슨 일이 벌어졌길래.
그리고 한편으로는 의아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지간해서는 난리 중에도 한두명 정도는 화를 피해 자기 목숨을 보존하는 약삭빠른 사람은 항상 존재하기 마련인데, 가문의 내부에 사정을 아는 사람들이 정도로 깔끔하게 사라질 수가 있다고? 사람을 잡아가는 목적은 그 사람의 몸값을 받아내기 위해서인데, 그런 몸값을 받을 사람들이 남김없이 사라졌다는 점에서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대체? 뭐지? 뭔가 우리가 모르는 음모 같은 것이 있었던 걸까?
처음에 내키지 않았던 본심과는 달리, 왠지 의문스러운 상황에 대한 궁금증 같은 것이 생기기 시작했다. 좋아, 그럼 그 내막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일단 사건의 단서를 찾아보는 수 밖에 없겠지? 나는 수색에서 큰 성과를 내지 못한 세명의 남자들에게 말했다.
“확실히 비밀의 후계자와 관련된 정보에 단서라고 할 만한 것은 없네요. 하지만, 그럴 수 밖에 없다는 생각도 들고요. 마을을 수소문하신 건 수고하셨지만, 의외로 핵심적인 정보들이 가장 많이 오가는 곳은 뒤져보지 못하셨네요.”
“네? 핵심적인 정보들이 많이 오가는 곳이요? 우리가 수색을 하면서 그런 곳을 놓쳤을리가 없는데요. 대체 거기가 어딘데요?”
나는 바실의 말에 무리도 아니었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마 못찾으시는 것도 무리는 아니시라는 생각이 들어요. 의외로 그런 귀족가의 은밀한 소문들이 도는 곳은 따로 있죠. 그건, 바로 여자들만의 커뮤니티. 특히, 귀족가를 모시는 고용인들, 즉 하녀들 사이에서 그런 이야기가 가장 많이 돌아다니죠. 그래서, 태자님과 근위대장께서 직접적인 단서를 찾아내지 못하신 거에요. 남자들이 쉽게 들어갈 수 없는 영역이니깐요. 팔라이올로구스 가문의 단서를 찾기 위해서는 먼저 그런 하녀들의 내부를 조사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의 말에 남자들의 표정에 감탄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동시에 당혹스러움도. 근위대장이 말했다.
“그런가요? 일리가 있는 이야기로군요. 하, 하지만··· 그런 여자들을 속사정을 어떻게 조사하나요? 여러 집안을 돌아다니며 여자들을 붙잡고 캐물을 수도 없고···”
“조금 번화한 마을을 가보면 마을 중심에 대개 침방이라는 형태로 하층 계급 여자들이 모이는 공간이 있어요. 거기서, 여자들의 직업을 소개받거나 일거리를 받기도 하고 서로 정보를 교환하거나 하기도 하죠. 귀족가에서 하녀들을 모집할 때 집사들도 대부분 그런 침방을 통해서 사람들을 모집하곤 하죠. 한마디로 말하면, 하녀들의 길드 같은 곳이죠. 거기를 캐보면 아마 오래된 일에 대한 정보도 틀림없이 기억하는 사람이 있으리라 생각해요. 제가 한번 가보도록 하죠.”
“아아···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근데, 공녀님 괜찮으시겠어요?”
“네? 뭐가 문제라도?”
“아뇨, 거기 하녀들의 길드라면서요. 그러니깐 거기서 정보를 찾으신다면, 정황상 공녀님 신분이 아니라 하녀로 변장하고 가야 할 것 같은데. 공녀님이 그런 하녀 역활을 잘 하실 수가 있으실지요?”
바실의 말에 나는 어이없음을 느꼈다. 아마도 잘할 수 있을 거에요. 원래 공녀는 부업이고, 하녀가 본업이거든요. 나는, 뭔가 하녀인 내가 공녀로 대역을 왔다가, 다시 하녀로 변장하고 가야 한다는 사실에 아이러니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아흑, 그러고 보면 정말이지 나 멀리 와도 너무 멀리 와버린 기분이 든다. 정체성 흔들리게시리. 아무튼, 그런 넋두리는 집어치우고 나는 불안해하는 바실을 안심시키기 위해 직접 메이드복에 제대로 된 하녀 차림으로 옷을 갈아입고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런데···
“누나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아무리 봐도 하녀가 아니라 공녀로 밖에 안보이는데? 괜찮을까 몰라. 바실 형은 변장하니깐 누가 봐도 황제가 아니라 그냥 하인 같아 보이는데··· 누나는 변장은 좀 아닌 듯.”
“그치? 쿠타이 네가 봐도 그렇지? 난 누가 봐도 그냥 평범한 동네 청년 같아 보이는데, 공녀님은 내 선입견이 있어서 그런가? 아무리 봐도 그냥 하녀로는 안보이는데··· 뭔가 되게 범상치 않은 분처럼 보이는데요. 들키지 않으시려나 몰라요. 그나저나 메이드복이 안어울리기는 해도 뭔가 느낌은 색다르시네요. 와우.”
정말 환장하겠네. 하녀가 공녀로 보이는 것도 문제지만, 황제가 하인으로 밖에 안보이는 것이 더 큰 문제 아니냐? 이 놈의 제국은 대체 정상인 것이 하나도 없어. 그리고 마지막에 와우는 뭔 놈의 와우야? 아무튼 나는 그런 우려를 보이는 바실과 쿠타이에게 선입견 탓이라고 말한 다음 곧바로 두라초 인근에 침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가는 길에 바실이 말했다.
“뭐, 좀 걱정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큰 문제는 없겠죠. 우리가 같이 들어가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봤자 여자들의 길드라면 공녀님 신변을 걱정할 그런 험한 일은 벌어지지 않을테니깐요. 뭐, 그러니 큰 걱정은 하지 않고 기다려도 될 것 같네요. 그러고 보니 좀 궁금하기도 하네요. 남자들이 모이는 곳이야, 항상 쩌든 술냄새와 텃세와 주먹다짐이 오가는데··· 여자들이 모이는 곳은 어떤 느낌일까요? 뭔가, 훈훈하고 포근한 느낌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그러게요. 뭔가 독한 술 대신에 향긋한 차가 나오고, 주먹다짐 대신에 하하호호 하는 수다가 오갈 것 같은 기분이 드네요. 에이, 뭐 누나라면 그런 말랑말랑한 곳에서 필요한 정보를 캐오는 것 정도는 순식간이지 싶은데요?”
나는 그렇게 해맑게 이야기하는 두 남자들에게 냉정하게 말해주었다.
“남자들이랑 똑같아요.”
“네, 남자들이랑 똑 같은··· 네? 뭐라고요?”
따로 당황하는 바실에게 해명을 하지는 않았다. 직접 보고 깨는 것이 낫겠지. 그리고, 남자들이 더 당황하게 된 것은 그 침방에 다다른 다음이었다. 바실이 어이없다는 투로 말했다.
“이··· 이게 뭐에요? 이건 아무리 봐도 그냥 남자들이 모이는 동네 선술집이랑 별로 다르지 않아 보이는데요?”
아무렴, 사회 하층민들인 하녀들이나 품팔아서 연명하는 여자들이 모이는 곳이, 무슨 귀족가 아가씨들이 모이는 살롱 같으려고? 그것도 그냥 하층민도 아니라, 내전 시기에 산전수전 다 겪은 언니들이 모인 곳일텐데. 나는 당황하는 바실을 뒤로 하고, 왠지 본업으로 돌아와서 오히려 익숙한 냄새가 나는 나는 그 공간으로 여닫이 문을 열고 걸어 들어갔다. 그러자, 대낮인데도 어둠컴컴한 침방의 안에서는 들어서는 나를 향해 시선이 모아졌다.
나는 잠시 멈춰섰고, 그리고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내부의 모습은 생각했던 그대로였다. 여기저기서 한 인상 하시는 여자들이 도박을 벌이고 있거나, 술에 꼴아 있거나, 뭔가를 씹으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은 일제히 나를 향했다. 익숙한 사회 밑바닥의 우중충한 분위기. 그리고 낯선 존재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 나는 그것을 무시하고, 입구에 구석에서 나를 보고 의아해하는 쪼그라든 할멈을 지나쳐서 바를 겸한 접수대로 향했고, 그런 나를 보면서 슬슬 여기저기서 이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킥킥킥, 저 애송이는 뭐야? 처음 보는 얼굴인데?”
“손에 굳은 살을 보니 경력이 오래된 편은 아니구만. 이봐, 여긴 새끼 하녀들이 맘대로 들어와도 되는 곳이 아니라고.”
나는 여기저기서 빈정대는 소리를 무시하고 바의 앞에 섰다. 그리고, 이곳 침방 사무원 겸 바텐더를 겸한 것으로 보이는 직원이 나를 보면서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뭐 필요한 것 있나? 여기서는 엄마 젖은 안파는데 말이야.”
“레모네이드. 얼음을 곁들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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