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3
콘스탄틴노플 의회, 의원 회관.
여러 의원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발언을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뒷짐을 지고 황도의 야경을 바라보는 요하네스의 뒷모습에 모여 있었다.
결국, 그 침묵을 깨고 요하네스에게 화두를 던진 것은, 그의 절친한 후배인 패티우스였다.
“전해진 소식에 따르면, 본국으로 귀국한 공녀가 이래저래 현장의 의견 조율에 어려움을 겪는 것 같다는 소문이 있더군요.
확실히, 현장에서의 상황이 그리 녹록한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공녀가 그곳에서 난항을 겪고 있다니 말입니다. 역시, 천하의 공녀라도 고향에서는 좀 마음이 약해지는 걸까요?”
그의 말에 요하네스는 한손으로 턱을 매만지며, 잠시 뜸을 들인 후 대답했다.
“뭐, 확실히 제 아무리 공녀라도 이번 인사는 파격적이고 만만치 않은 일임에는 틀림없어.
황제는 호기롭게 내수용으로 유용하게 사용하던 퀸을 신성동맹의 문 앞까지 전진시킨 상황이지. 동시에 퀸에게 독자적인 의사결정권과 재량권까지 줘서 말이야.
그녀가 황제의 손에 있었을 때는 어느 정도 다음 수를 예상할 수 있었지.
하지만, 이제 그 통제를 벗어난 순간, 다음 수는 전적으로 그녀의 의지에 달렸어.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예측을 벗어난 것이 될 수 밖에 없지.
그것을 두려우면서도 흥미로운 상황이야. 그리고, 동시에 그녀에게도 부담스러운 상황이지.
이제 그녀는 오롯이 자신의 의사로 보드 위에 체스피스들의 기보를 결정해야 해. 자기 자신의 수까지 포함해서 말이야.
그 과정에서 상당한 마찰과 충돌이 벌어지겠지. 그건 예상 범주 안이야.
하지만 나는 그러한 상황이 그리 오래 이어지리라 생각치 않아. 내기를 해도 좋아. 그녀는 그리 오래지 않아, 자신의 판을 주도하려 할거야.
우리는 느긋하게, 그녀가 현재의 위기와 마찰에 대응하는 다음 수를 주목하도록 하세.”
“호오. 다른 사람도 아닌 선배가 그 정도로 판단하는 걸 보니, 확실히 이번 인사가 공녀에게도 결코 쉽지 않은 일임에는 틀림없어 보이는 군요.
뭐, 무리도 아니죠. 수백년을 유목민들의 부족정에서 겨우 봉건제로 전환한 헝가리니깐요.
그들에게 제국과 같은 수준의 상비군을 재편하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닐 겁니다. 그건 군을 경험한 제가 장담할 수 있습니다.
체제의 개편과 기존 세력들의 저항. 그리고 인종과 국가, 종교가 다른 이들의 조화.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죠.
우리도 카르브나 황조의 군사 개혁이 아니었다면 무리였을 체계입니다.
아마도, 공녀는 이번만큼은 만만치 않은 호된 경험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공녀의 팬이신 선배는 그걸 어찌 보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정정해주지. 팬이 아니야. 극성팬이라고. 그리고, 극성팬으로서 해야 할 것이야 뻔하지 않은가?
지금의 위기를 어떤 식으로 멋지게 해결해서, 정치적 주도권을 다시 잡을지 기대하는 것이지. 조금 시간은 걸리지만, 그리 오래지 않아 결과가 도착할 거야.
헝가리와 로마. 양쪽의 어정쩡한 입장이 확실히 만만한 상황은 아니지. 아니, 까놓고 말해 일반인이라면 결코 해낼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야.
그리고 그건, 천하의 공녀라고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야. 명확한 적이라면 또 몰라도, 애매모호한 아군이라는 입장이 원래 더 짜증나는 존재들이지.
더군다나 그곳은 공녀의 고향이고, 그들은 공녀의 동포야. 그녀는 의리와 실리 사이에서 고민할 수 밖에 없지.
그래서, 시간이 다소 걸리는 것은 감수해야 하겠지. 이번 일은 그 정도로 공녀에게도 호락호락하지 않은 일이니깐.
하지만, 그녀가 누군가? 공녀다. 우리 의회를 로마 역사상 가장 많이 농락한 황제의 챔피언이야.
그녀는 반드시 우리가 생각도 못할 방법으로, 이 난관을 헤쳐내고 보란듯이 자신의 의도를 온 세상에 널리 알릴 것이야. 우린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되네.”
그렇게 말한 요하네스는 몸을 돌려 옆에 테이블에 놓인 와인잔을 들고 음미하듯 마셨다.
그런 요하네스를 본 패티우스가 ‘어련하시겠습니까’ 라는 투로 어께를 으쓱이고 다른 의원들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며 긍정했다.
그런데 그때, 방으로 사람이 들어왔다. 그리고, 조용히 패티우스에게 서류 한장을 전달하고 나갔다.
서류를 전달받은 패티우스는 가만히 그 서류를 읽더니, 의외라는 듯한 반응으로 말했다.
“방금 전 제국의회 군사위원회에 공지된 소식입니다. 공녀에 대한 것이군요. 이번 헝가리군 사령부 소재지가 결정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위치가··· 흐음, 그녀가 아직까지는 현지에서 조금 상황 수습에 어려움을 겪는 모양이군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예상 밖의 깡촌에 사령부를 설치하였다고 합니다. 뭔가, 정치적으로 현지에 이런저런 압박이 있었던 모양일까요?”
그런 패티우스의 말에 요하네스는 흥미롭다는 듯 와인을 더 마시며 말했다.
“뭐, 아직은 그럴 수 있지. 간지 얼마나 되었다고. 좀더 기다려 보자고. 근데, 자네가 보기에도 영 아니라는 그 사령부 위치가 어딘가?”
“아, 네. 좀 생소한 이름이군요. 템즈 북쪽에 위치한 세게드라고 하네요.”
“크헉!!! 쿨럭쿨럭!!!”
“서, 선배? 갑자기 왜 와인을 드시다가 뿜어내시는?”
패티우스는 순간 와인 사래에 들려 쿨럭거리는 요하네스를 보고 당황했다.
그러나, 사래들린 것을 수습하고 고개를 든 요하네스를 보고 더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요하네스의 표정이 경악에 차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으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그러면 그렇지. 그녀가 결코 그렇게 자숙이나 할 사람이 아니지.
가자마자 범인들이라면 가히 상상도 못할 과감한 수를 두다니. 우리가 그녀를 얕봐도 너무 얕봤군.”
“네? 아니, 선배. 그게 무슨 말이십니까?”
패티우스의 영문을 모르겠다는 말에 요하네스는 질린 눈빛으로 소리쳤다.
“세게드야. 세게드라고!!! 과거 우리 로마가 파르티스쿰(Partiscum)이라고 불렀던 그 도시야. 다들 벌써 잊어버린 건가?
그곳이 어떤 곳인지를? 2천년 로마 역사를 통틀어 비길 자가 없을 정도로 제국에 공포로 여겨졌던 그 사람, 세게드는 바로 그 사람의 거점이었어.”
순간, 패티우스를 비롯한 다른 의원들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들의 입에서 일제히 비명이 울려퍼졌다.
“히이이이이익!!!!!! 신의 채찍, 훈족의 아틸라(Attila the Hun)?”
의원들의 눈빛에서 그 이름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공포가 퍼져나갔다. 무리도 아니었다.
로마 역사를 통틀어 공식적으로 가장 두려운 적으로 꼽힐 공포의 마왕, 그것이 아틸라였고 로마의 후예들은 모두 그것을 기억 속에 각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패닉에 빠진 의원들 사이에서 패티우스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 그렇군요. 이제 거의 천년이 넘게 시간이 흘러서 잊고 있었지만, 그곳은 바로 아틸라가 통치하던 훈제국의 중심지였죠.
맙소사. 어떻게 그것을 잊어버릴 수 있었지? 선대가 영원히 잊지 말라고 후세들에게 경고하던 그 이름을?
아니, 잠시만요. 그러고 보니 공식적인 헝가리 왕국의 기원은 초대 아르파드 대공이지만, 그들이 자신의 시조라고 생각하던 자가 아마···? 히이이익!!!”
“그래, 맞아. 그들 마자르인들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자신들은 바로 아틸라의 후예라고 말이야.
세월의 흐름 덕에 다수가 망각하기는 하였지만, 역사 속에서 신의 채찍의 공포를 아는 자들은 등골이 서늘해질 상황이지 않나?
아틸라의 후예들로 군을 편성할 장소가 바로 훈제국의 수도라니 말이야.”
요하네스의 말에 의원들의 얼굴에서 점점 더 공포가 확산되는 것이 선명해졌다.
그들에게 아틸라는 단순히 천년도 전에 과거의 이름으로 치부하기에 너무나도 무시무시한 존재였던 것이다.
콘스탄틴노플을 포위해서 거의 함락시키기 직전까지 가고, 호노리아와의 통혼을 통해 서로마의 절반을 날로 먹으려고 하였고
갈리아를 로마의 속주에서 사실상 이탈시켰다. 그리고 이탈리아에서도 수많은 도시를 함락시켜서 결국 교황 레오1세가 나서서 강화를 제안하고서야 물러갔다.
아마도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패하지 않았다면 정말로 그는 서로마를 전부 자신의 손아귀에 넣었을지도 모른다.
피루스, 한니발, 미트라다테스, 아르미누스, 알라리크 등등··· 로마를 위협했던 적은 많았다.
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로마인들에게 잊지 못할 치욕과 공포를 안겨준 이로, 아틸라에 비할 자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의원들에게 그 소식은 마치 그 공포가 다시 돌아온다는 것과 같은 의미로 들렸다.
그래서, 하얗게 질린 자신의 동료를 본 요하네스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키득거리며 소리쳤다.
“킥킥킥!!! 크하하하하!!! 역시 공녀야. 우리는 그녀에게 또 한방 먹어버리고 말았어. 뭐? 현지에서 의리와 실리 사이에서 고민해?
아아아··· 멍청한 내 자신을 조롱하고 싶어지는군. 그녀가 그런 한심한 짓을 할리가 없잖아?
보라고. 바로 가자마자 보란듯이 던지는 그녀의 정치적 메시지를 말이야. 언급은 단 한문장도 없지만 이보다 더 선명하고 가공할 메시지가 더 있을까?
그녀는 지금 제국과 헝가리 양측에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거야.
우리 제국에게는, ‘로마인들이여. 우리는 너희의 노예가 아니다. 아틸라의 전사들이 친구가 될지, 적이 될지는 너희 하기에 달릴 것이다.’ 라고 말이야.
헝가리에는, ‘마자르의 아이들아. 너희들은 위대한 아틸라의 후손이다. 선조의 땅에서 다시 한번 우리의 제국을 세우자. 내가 이끄리라.’ 라는 말이고.
멋지지 않나? 가진 건 아무것도 없는 패전한 종속국의 공녀가, 지금 당당하게 우리에게 대등한 동맹으로서 경각심을 가질 것을 경고하고 있어.
그리고 자국에는 위대한 제국의 영광을 상기시키며 다시 일어설 것을 선언하고 있지.
그것도 단 한수의 정치적 행보만으로 말이야. 이미, 그녀는 모든 계획을 마쳤어. 이제 남은 것은 그녀의 포석대로 세상이 흘러가는 것 뿐이지.
그런, 그녀에게 고국에서의 부임 초기 난항을 걱정하다니. 그녀가 우리를 보았으면 얼마나 비웃었을까?
시작하기도 전부터 우린 이미 한방 먹고 시작하는군.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이 지독하게 두려우면서도, 더할 나위 없이 환희를 느낀다네.”
그의 말처럼, 공포와 환희에 가득찬 기이한 얼굴로 광소하는 요하네스를 보며 의원들은 질린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이제 제국의 품을 떠나서 스스로의 의지로 행보를 결정한 그녀의 첫수에 두려움을 느꼈다.
그런 동료 의원들을 보며, 실로 유쾌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는 요하네스는 방금 전 뿜어낸 와인잔에 와인을 새로 따르며 말했다.
“자아, 건배하세. 수천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난 레이디 아틸라를 축배로 맞이해야지.
돌아온 신의 채찍을 위하여. 돌아온 마자르인들의 새로운 영도자를 위하여 건배!!!”
광활한 대지가 펼쳐져 있었다.
뭔가, 대서사시에 서두에 나오면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뛸 것 같은 저 첫문장이 지금은 사람을 돌아버리게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내 속에 염장을 지르듯이 내 옆에 있던 웬수가 지껄였다.
“야! 너 전에 대사관에서 곤경에 처한 거 아니고, 마고랑 붙어먹으려던 거 맞지?
그년이 그렇게 테크닉이 죽이던? 아주, 뿅가서 이런 말도 안되는 개거지 같은 땅을 사령부 부지란답시고 받아오고?”
“이 미친 년아!!! 나도 지금 환장하겠으니 말같지도 않은 소리로 기름 붓지마!!!”
“내가 지금 안그러게 생겼어? 이게 어딜 봐야 사령부 부지야? 전형적인 부동산 사기잖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후 마마한테 인정받았다는 년이 저딴 아무것도 없는 맨땅을 받아오는 것이 말이 돼?
뭘 받아 처먹었다는 쪽이 그럴싸하지.”
“아오, 씨바. 그래, 네년 발등에 키스하는 것보다는 훨씬 끝내주더라!!! 됐냐? 말로 까지말고 그냥 붙어!!!”
난투극은 제국을 넘어 고향인 헝가리에서도 이어졌다. 이 지긋지긋한 놈의 악연은 왜 떨어지질 않아?
그렇게 뭔가, 부동산 사기 당한 상황으로 밖에 안보이는 세게드의 광야에서 우리는 흙먼지를 날리며 주먹다짐을 벌였다.
그리고, 저 너머에서 어느 모지리는 그러거나 말거나 해맑게 웃으며 소리쳤다.
“와, 저기 호밀밭이 있어요. 카르브나 살던 시절 추억이 막 떠올라요.
어라? 그리고 저기 개울에는 거위도 많이 돌아다니네. 오늘 저녁은 거위 구이로 결정!!! 와하하!!! 잡으러 가자!!! 낚시도 해야지!”
한심함과 망연자실, 그리고 난투극의 주먹 다짐 속에 나는 서글픔이 밀려왔다.
왜 나는 고향에 돌아와도 행복해 질 수가 없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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